경신환국
庚申換局
1. 개요
숙종 6년이던 1680년 '''남인 일파가 정치적으로 대거 실각'''한 일. 숙종 대 최초로 일어난 환국으로, 서인의 입장에서는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이라고도 한다.
2. 배경
숙종은 아버지인 현종이 예송논쟁에 휩싸여 신권에 끌려다니는 것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 14살에 등극하자마자 어머니 명성왕후 김씨나 증조할머니 장렬왕후 조씨의 수렴청정 없이 곧바로 친정을 하였다.
아래 꾸준히 언급되는 삼복(복창군, 복선군, 복평군)이 남인과 가깝게 지냈으며, 복선군은 현종 경신대기근 시기 청나라에 가서 강희제에게 대량의 구휼품을 얻어왔다. 군약신강이란 표현이 나온 바로 그 사행이다. 이 사행은 서인인 현종비 명성왕후와 명성왕후의 친정아버지 김우명, 김좌명[1] 등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이 무렵 북벌론을 강경하게 주장했던 윤휴 등은 "청나라가 삼번의 난으로 혼란스러운 국제 정세를 틈타 요동을 정벌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무과를 실시해 무려 18,000명을 선발, 대흥산성에 모아 전쟁을 대비하고 있었다. 이것이 안 그래도 앞선 갑인예송에서 대판 깨지고 절치부심하고 있던 서인들의 남인 공격 빌미가 된다.
3. 전개
3.1. 홍수의 변
紅袖之變
숙종 1년, 서인이며 숙종의 외할아버지인 청풍부원군 김우명이, "왕의 당숙[2] 복창군과 복평군이 궁녀와 간음하여 자식을 낳았다"고 무고한 사건이다. 붉은 옷소매(홍수)는 곧 궁녀들이 입는 옷의 소매가 붉은 것을 일컫는 것이다.
문제는 이 고변이 아무런 근거를 찾지 못해서, 무고로 결론이 나왔다는 것. 남인 강경파 청남의 대표격인 윤휴와 허목은 대놓고 김우명을 탄핵했다. 종친을 무고한 김우명을 반좌율로 처리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반좌율이란, 무고임이 밝혀지면 무고를 한 사람에게 상대방에 있다고 주장했던 죄를 주는 것이다. 이 사건의 경우는 선왕과 동침한 궁녀와 관계를 맺었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강상죄'''에 해당한다.허적(許積)·오정위(吳挺緯)가 청대(請對)하였다. 임금이 청풍부원군(淸風府院君) 김우명(金佑明)의 차자(箚子)를 허적에게 보였는데, 그 차자에 이르기를,
(중략)
또 복평군(福平君) 이연(李㮒)의 형제가 효종께 친아들과 같은 은혜를 받고, 선조(先朝)에서도 동기와 같은 은혜를 입은 것을 어찌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은총이 융숭하면 공경하고 삼가는 것이 점점 게을러지고, 금중(禁中)에 출입하면 추악한 소문이 밖에 들리는데, 이것이 곧 선왕께서 깊이 근심하신 것이고, 자성께서 처치하기 어려워하신 것이 성명(聖明)께서 교훈(敎訓)을 받은 것이며, 미신(微臣)이 전석(前席)에서 일찍이 선처하시기를 청한 것이었습니다. 집으로부터 조정(朝廷)에까지 관계되는 것이 지극히 중대하므로, 금일제(金日磾)의 절의(節義)는 후세에서 칭찬하고, 사문(沙門)이 계율을 범하는 것은 중들도 부끄러워하는데, 각전(各殿)의 홍수(紅袖)로 하여금 자식이 있는 사람이 되게까지 하였음에도 금지하지 못하였으니, 전하의 가법(家法)을 손상한 것이 어떠하며, 또 어떻게 나라를 다스리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성명(聖明)께서는 은혜를 미루어 법을 베푸시고, 일찍 결단하여 적당히 처치하셔서 마음을 경동(驚動)하여 욕심을 참고 행실을 고쳐서 스스로 새로와지게 하시면, 금중이 맑아지고 국가가 다행하겠습니다."
숙종 1년 3월 12일 경오
여기에 개입한 것이 대비인 명성왕후. 자신의 친정이 역적죄에 준하는 강상죄로 박살날 사건이 벌어지자, 소복을 입고 대전으로 처들어가서 울면서 협박을 한 것이다.
대비가 자살을 빌미로 협박해 사건을 뒤집은 것이다. 김우명이 처벌을 받거나, 아니면 복창군과 복평군이 처벌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후자가 유배를 가는 선에서 끝났다. 하지만 김우명은 무고한 것이 들통나 비판을 받아서 사직, 홧병이 들었으나, 치료를 대놓고 거부하다가 그 해를 넘기지 못하고 죽었다. 그리고 유배를 간 복창군, 복평군 등은, 겨울 한파가 심했던 것을 핑계로 그 해가 가기 전에 방면된다.김우명(金佑明)을 패초(牌招) 하였으나, 오지 않았다. 임금이 명하여 대신(大臣)과 비국(備局)의 재신(宰臣)들을 인견(引見)하였는데, 허적(許積)·권대운(權大運)과 판의금(判義禁) 장선징(張善瀓)·지사(知事) 유혁연(柳赫然)·병조 참판(兵曹參判) 신여철(申汝哲)·대사헌(大司憲) 김휘(金徽)·대사간(大司諫) 윤심(尹深)·부응교(副應敎) 이하진(李夏鎭)이 모두 와서 모였으나, 오정위(吳挺緯)·오시수(吳始壽)·김석주(金錫胄)는 병(病)을 핑계대고 오지 않았다. 승지(承旨) 정중휘(鄭重徽)가 제신(諸臣)을 인도하여 야대청(夜對廳)에 들어갔다. 야대청은 3년 동안 인접(引接)하는 곳으로 써 왔는데, 방이 한 간이고 마루가 세 간이다. 여느 때에는 인견하면 문짝을 치우고 임금이 방 안에 남쪽을 향하여 자리하였는데, 이날에는 임금이 문을 사이에 두고 마루 밖에 동쪽을 향하여 앉고, 두 환시(宦侍) 조금 아래에 서쪽을 향하여 대신의 자리를 두고, 마루 아래 벽돌 위에 동쪽을 향하여 재신들의 자리를 두었으며, 때가 이미 어두웠으므로 전상(殿上)에는 촛불이 밝게 비쳤다. 대신 이하가 들어가 자리에 가서 부복(俯伏)하니, 문짝 안에서 부인(婦人)의 울음소리가 나므로 비로소 자전(慈殿)이 나와 있는 것을 알았다. 허적이 말하기를,
"이는 무슨 까닭입니까? 신(臣)들은 황공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는 내간(內間)의 일을 모르므로, 자전께서 복평(福平) 형제의 일을 말하려고 여기에 나오셨다."
(중략)
"미망인이 세상에서 살 뜻이 없어 늘 죽지 못한 것을 한탄하는데, 이제 망측한 일이 있어 선조(先朝)에 관계되니, 대신에게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선왕께서 복창(福昌) 형제를 두텁게 사랑한 것을 외신(外臣)들이 아는 바인데, 궁중에서 예모(禮貌)가 지극히 엄하여 나도 선왕의 지극하신 뜻을 몸받아 차이 없이 대우하였다. 이제 이들이 범한 것은 내가 잘 아는 바이나, 드러나게 되면 죽을 처지에 나아가게 될까 염려되므로, 내가 편의한 대로 처치하려 하였는데, 주상(主上)은 어려서 곡절을 모르신다. 내가 무함한다고 하는 것은 관여할 것도 못되나, 선왕께서 이들을 사랑으로 대우하신 뜻이 장차 헛된 데로 돌아갈 것이므로, 그 판부(判付)의 말을 보고는 곧 선왕의 능 옆에서 죽고 싶었으나, 선왕께서 의지하고 존중한 사람이 영상(領相)임을 돌이켜 생각하였다. 대점(大漸) 때에 세자가 어려서 나라의 일을 맡기는 것을 근심하셨는데, 영상이 왔다는 말을 듣고는 기뻐서 나에게 말씀하시기를 ‘수족(手足)이 왔으니, 나는 앓더라도 근심이 없다.’ 한 이 말씀이 지금도 귀에 있다. 이 목숨은 돌볼 것도 못되나, 선왕께서 이들을 친애하여 덮어 주려 하신 것이 도리어 무함으로 돌아가니, 드러내어 밝히지 않고 죽으면 지하에서 선왕을 뵐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우선 죽는 것을 참고 대신에게 말하려는 것이다.
주상께서 춘궁(春宮) 에 있을 때에는 학문에 부지런하였을 뿐이고 다른 일에 간여하지 않으셨으니, 어찌 내간(內間)의 일을 아시겠는가? 나인 김상업(金常業)은 인물이 본래 변변치 못하다. 인선 대비(仁宣大妃)의 초상(初喪)에 두 왕자(王子)와 복창 형제가 들어와 상사(喪事)를 돌보았느데, 그때에 복창과 상업이 망측한 일이 있었으나, 나는 병이 위중하였으므로 미처 잘 알지 못하였다. 인선 대비께서 사장(私藏)하시던 기물(器物)을 선왕께서 망극하신 중에 공주(公主)들과 함께 친히 구처(區處)하실 때에 복창도 입시하였는데, 상업의 기색이 수상한 것을 보고 선왕께서 깨닫고 나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보는 곳에서 이들이 뚜렷하게 불안한 기색이 있는데, 뭇사람의 눈이 보는 데에서 드러나게 되면 반드시 복창의 화(禍)가 될 것이니, 이제부터 서로 가까이 하지 못하게 해야 하겠다.’ 하셨으므로, 내가 이 말은 번거롭게 말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늙은 상궁(尙宮)을 불러 분부하기를, ‘상업은 해괴한 거동이 있으니, 네가 잘 살펴야 한다.’ 하였다. 그 뒤에 자꾸 들어와 애써 찾는 기색이 있으므로, 선왕께서 ‘남녀의 욕정은 남이 제지하기 어려운 것인데, 이제 복창의 기색을 보면 큰 근심을 일으킬 것이다.’ 하셨다. 칠석(七夕)의 다례(茶禮)를 대내(大內)에서 설행(設行)하여 친림(親臨)하실 때에, 두 왕자와 복창 형제가 집사(執事)가 되고 나인이 제물(祭物)을 받들어 바쳤는데, 상업이 복창을 보고는 실색(失色)하고 복창은 상업을 주시(注視)하느라 제 머리가 돌아가는 것을 스스로 깨닫지 못하였다. 선왕께서 지극히 놀라서 처치 때문에 근심하시므로, 내가 다른 일로 내치기를 여러번 청하였으나, 인선 대비께서 신임하시던 바이므로 차마 문득 내치지 못하였다. 여느 때에 나인은 일 때문에 밖에 나가려면 어필(御筆)로 철패(鐵牌)에 출(出)자를 써 준 후에야 비로소 나갈 수 있는데, 어느날 상업이 병을 핑계대어 욕초(浴椒)를 청하니, 선왕께서 무심코 출 자를 써 주셨다. 그 뒤에 나인이 밖에 나간 것을 치부(置簿)한 것을 보고 물으시기를, ‘나인 김씨가 누구냐?’고 하니, 상궁이 상업이라고 대답하므로, 선왕께서 크게 놀라서 말씀하시기를 ‘이것이 무슨 말이냐? 그 집에 이미 나갔으니, 더불어 상종하여 자식을 낳게 되면 덮어 주기 어려울 것이다. 빨리 불러들이라.’ 하셨다. 안에서 여러 번 불렀으나 핑계대고 오지 않으므로, 선왕께서 별감(別監)을 보내어 무슨 까닭으로 나갔는지 물었더니, 혼전 상궁(魂殿尙宮)이 나가게 하였다 하므로, 선왕께서 상궁을 불러 물으셨으나, 상궁은 모른다고 대답하였다.
선왕께서, ‘버려두고 묻지 않으면 징계되어 두려워하게 할 수 없고, 힐문(詰問)하게 되면 복창을 해치게 될까 염려된다.’고 생각하셨으므로, 우선 대령(待令)하게 하셨으나, 늘 일의 자취가 드러날까 염려하여 나에게 말씀하시기를 ‘대간(臺諫)이 알면 반드시 논계(論啓)할 것이고, 대계(臺啓)가 있으면 나도 구제할 수 없을 것이다.’ 하고, 선처하려고 생각하여 미루어 나가고 결단하지 아니하시다가 문득 승하하시게 되었다. 승하하신 뒤에 상업이 비로소 스스로 들어왔는데, 패란(悖亂)한 말이 궁중을 진동하므로, 내가 망극한 중에 그 분한 것을 금하지 못하였다. 또 복창 형제가 또한 습렴(襲斂)의 집사(執事)로 바야흐로 내간(內間)에 있으므로, 다시 전일과 같은 변이 있을까 염려하여, 주상께 파직하여 내치도록 말하였으나, 주상은 어릴때부터 저들 형제가 출입하여 함께 놀아서 애정이 도타운데, 그것이 손상될까 염려하여 내 말을 듣지 않더니, 이제는 이런 판부를 내리셨다. 선왕께서 이 일을 보고 덮어주려고 힘쓰셨기 때문에, 이제 와서 도리어 알 수 없는 일로 구함(構陷)한 것으로 돌아가니, 내 마음의 아픔을 어떻게 이르겠는가? 내가 선왕의 뜻을 몸받아 그 죄를 덮어 주려 하는 것도 될 수 없으므로, 안에서 상업에게 힐문하기를, ‘내가 본 일을 네가 감히 속이고 숨겨서 선왕께서 함해(陷害)하신 것으로 돌리느냐? 네가 정직하게 말하지 않으면 형장(刑杖)을 써야 할 것이고, 네 부모도 보전하지 못할 것이다.’ 하였더니, 상업이 낱낱이 정직하게 공초(供招)하였다. 그 말은 이러이러한데 말하기 더럽다. 인선 대비의 초상에 염습(斂襲)할 때에 복창이 의대(衣襨)를 펴고, 저도 옆에 있었는데, 손이 제 편으로 오면 문득 서로 잡게 되었고, 또 나인과 왕자 등 뭇사람이 모인 가운데에서는 뒤에서 치맛자락을 잡으므로 제가 놀라서 피하였는데, 그 뒤에 복창이 저에게 말하기를, ‘나는 연련한 정이 있는데 너는 어찌하여 돌아보지도 않고 나를 피하느냐?’ 하여 서로 저항하였으나 마침내 핍박당하였다 한다. 또 서찰을 왕래한 일을 물었더니, 윤여(輪輿)를 배설(排設)할 때에 복창이 쪽지를 떨어뜨렸는데, 글 가운데에는 상사(相思)의 정을 극진히 말하였다 한다. 선왕께서 친족을 친근히 하시는 의리 때문에 덮어 주려 한 것이 이제 드러나게 되었으니, 내가 죽어서 모르고 싶다."
하고, 이어서 또 울면서 말하기를,
"모진 목숨이 이제까지 죽지 않고 이런 망극한 변을 당하였다. 그들은 이미 선조(先朝)에서 드러났는데, 지금에 와서 숨기어 마치 선왕께서 함해하신 것인 듯이 하니, 어찌 마음 아프지 않겠는가? 귀례(貴禮)의 일은 눈으로 보지는 못하였으나, 더러운 말이 많이 있다. 지난해 봄 내가 병이 위중하여 거의 죽어 갈 때에 선왕께서 바야흐로 망극하신 중에 계시어, 복창 형제를 시켜 병후(病候)를 알아보게 하셨으므로 밤낮으로 안에 있었는데, 복평이 늘 차[茶]를 요구하여 마시고 나서는 종지를 남겨두었다가 귀례가 찾으러 가면 복평이 말하기를, ‘번번이 차를 찾으면 어찌하여 친히 가져오지 않느냐?’ 하고는 손을 잡아 희롱하자, 귀례가 '아주 가까운 곳이라 시녀(侍女)가 많이 있다'고 거절하고는 여러 번 회상전(會祥殿)의 월랑(月廊)에 가서 만났는데, 억지로 핍박하여 따르게 되었다 한다. 이것은 선왕께서 친히 들으신 것이고 내가 잘 아는 것인데, 이제는 함해하는 것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선왕께서 영상을 대우하신 것으로 말하면 내가 아는 바이거니와, 믿고 존중하는 뜻을 늘 말씀하시고, 그 이름까지 부르며 말씀하시기를, ‘허적이 있으니 나에게는 근심이 없다.’ 하셨으니, 지금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합하여 어린 임금을 돕고 신료(臣僚)를 살펴서 내가 바라는 바에 어그러지는 일이 없게 하는 것은 오직 영상에게 달려 있다. 그 밖의 입시한 신하들도 누구인들 선왕께서 맡겨 부리시고 선왕의 녹(祿)을 먹은 자가 아니겠는가? 정신이 어지러워 나라의 일에 생각이 미칠 겨를이 없어도 모진 목숨이 이제까지 구차하게 남아 있는 것은 신하들이 어린 임금을 도와서 세상을 태평하게 하는 것을 보고서 선왕께 가서 고하려는 것이었다. 그래서 여러 번 죽으려 하였으나, 참고 죽지 않은 것이다. 대신과 삼사(三司)·비국(備局)의 신하들은 다 내 말을 들었으니, 소견을 죄다 말해야 한다. 이 일이 과연 무함이며 내 이 거동이 지나침을 면하지 못하겠는가? 하늘이 무너지는 아픔을 당하고부터 남을 대할 낯이 없어 시녀가 앞에 있더라도 낯을 들고 싶지 않았으나, 이제 이 일을 당하여 선왕의 누가 될까 염려되므로, 한 몸의 시비(是非)를 헤아리지 않고 신하들에게 한 번 드러내어 밝히고 나서 죽는 것이 쾌할 따름이다."
(중략)
"그들의 죄상이 이처럼 명백한데, 사사로운 뜻에 끌려서 다만 주상께서 파직하여 내치게 하시고, 그 나인을 죄주어 궁중에 출입하지 못하도록 하게 하셨다. 대왕 대비 전에서도 이 뜻을 아셨는데, 주상께서 어려서 내간의 일을 모르므로, 내 말을 듣지 않으셨다. 내가 생각하건대, 이 일이 이미 드러난 뒤에도 그대로 둔 채 묻지 않으면 궁중이 어지러워지는 근심을 방지할 수 없을 듯하였다. 이 때문에 부친 【청풍(淸風)을 가리킨다.】 에게 알렸으니, 이제 그 차자에 아뢴 것은 대개 여기에 말미암은 것인데, 주상은 남의 말을 믿고 사람을 망측하게 함해한다고 말씀하셨다. 내가 잘 아는 것임에도 주상이 이처럼 의심하시는데, 오늘 대신들이 앞에 있으니, 이때에 말하지 않고 다시 어느 때를 기다리겠는가? 선왕께서 선처(善處)하지 못하시어 오늘의 일이 있게 되었으니, 다시 무슨 말을 하겠는가? 오직 대신에게 어린 임금을 보도하여 나라의 일을 잘 다스리기를 바랄 뿐이다. 그러면 내가 죽어도 한이 없겠다.
여기서 끝났다면, 남인들의 전술적 패배, 전략적 승리로 끝날 수도 있었으나,
허목 등 남인 강경파가 왕대비인 명성왕후를 비판하는 장계를 올리는 대형 사고를 쳤다. 특히 윤휴는 대놓고 "왕대비 좀 단속[3] 하라"는 장계까지 올렸다. 숙종 입장에서도 명성왕후와 외척이 문제이기는 했으나, 자기 모친인 명성왕후의 처벌까지 주장하는 청남도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3.2. 경신환국
시기는 숙종 6년이다.
숙종은 남인 온건파인 영의정 허적과 좌의정 민의에게 궤장을 내리고 새해를 맞아 조정의 분열과 붕당을 없애도록 당부한다. 당시 남인이 도체찰사부를 장악하고 북벌을 준비한다고 군대를 모으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남인이 군권을 지나치게 장악한 상황이라서, 숙종은 서인이자 외척인 김석주를 부체찰사직으로 올린다. 이에 남인 강경파의 반발이 있었으나, 영의정으로서 도체찰사를 겸직하던 허적이 온건파였고, 김석주와 인척이라는 점 때문에 무마되었다.[4] 이로 보아 숙종은 남인이 주도하면서 서인이 견제하는 정도를 원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어지는 3월 숙종은 허적의 조부인 허잠에게 시호를 내린다.
그리고 허적에게도 궤장이 수여된다.신학(申㶅)·이인빈(李寅賓)을 장령(掌令)으로 삼고, 참찬(參贊) 윤승길(尹承吉)에게 숙간(肅簡)이란 시호(諡號)를, 지사(知事) 허잠(許潛)에게 충정(忠貞)이란 시호를, 고(故) 상신(相臣) 정태화(鄭泰和)에게 익헌(翼憲)이란 시호를, 고(故) 상신(相臣) 이성구(李聖求)에게 정숙(貞肅)이란 시호를 내려 주었다.
숙종 6년 3월 18일 정미 1번째 기사
영의정(領議政) 허적(許積)에게 안석과 지팡이를 내려 주라고 명하고, 또 1등의 음악을 내려 주었다.
숙종 6년 3월 19일
문제는 갑자기 이 다음 기사의 분위기가 변한다는 것이다.대신과 비변사 당상관을 인견(引見)하였다. 이조 판서(吏曹判書) 이원정(李元禎)이 허적에게 안석과 지팡이를 하사할 때에 미곡과 포목을 넉넉하게 주어서 잔치의 소용에 돕게 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숙종 6년 3월 23일
불과 1주일 남짓 사이에 분위기가 급변해 있다. 심지어 3월 23일 기사에서는
라는 사관의 글까지 존재한다.안석과 지팡이 주기를 미처 시행하지 못하였는데, 조정이 바꿔져서 허적이 한강(漢江) 밖으로 쫓겨나갔기 때문에 행할 수가 없었다.
3월 28일 남인 중심이었던 군부 주요 인물들이 서인 중심으로 바뀌게 된다. 훈련도감, 총융청, 수어청의 지도자가 모두 남인에서 서인으로 교체되었다. 어영청은 김석주가 이전부터 차지하고 있었으니, 중앙군의 대부분이 서인에게 넘어간 것이다.
3월 29일, 철원에 귀양가 있던 전 정승 김수항을 용서하고, 이조 판서 이원정의 관직을 삭탈하다. 김수항은 서인의 영수이고, 이원정은 남인의 거두였다.전지하기를,
"공조 판서(工曹判書) 유혁연(柳赫然)·광성 부원군(光城府院君) 김만기(金萬基)·포도 대장(捕盜大將) 신여철(申汝哲)을 모두 곧 명하여 부르라."
하였다. 세 신하가 부르는 패(牌)를 받아 빈청(賓廳)에 나아가니, 비망기(備忘記)를 내려서 말하기를,
"아! 재앙과 변이(變異)가 거듭 이르고, 불안한 의심이 여러 가지가 있고, 거짓말이 떠들썩하니, 서울에 있는 친위병(親衞兵)을 거느릴 장수의 임명은 국가와 지극히 친하고, 직위가 높은 사람으로 하지 않을 수가 없겠다. 광성부원군 김만기를 훈련 대장(訓鍊大將)으로 삼으니 곧 이날에 병부를 받아서 임무를 살피라. 유혁연은 삼조(三朝)에 걸친 오래 된 장수이므로 내가 매우 의지하고 중히 여기지마는, 20년이나 오랫동안 이 임무에 있었고 지금은 근력이 이미 쇠했으니 우선 해임시키고, 총융사(摠戎使)는 신여철에게 제수하니 또한 당일에 병부를 받아서 공무를 집행하라."
하였다.
3월 30일, 이원정은 시범 케이스였다는 것을 숙종이 명확하게 하기 시작한다.
결국 남인 온건파의 수장 허적이 사임한다.하교하기를,
"아! 관원을 전형하여 선발함에 있어서 사정(私情)을 따르는 것은 다만 한 사람의 이원정이 단시일(短時日)에 지은 죄가 아닌데도 지금은 가벼운 벌을 주었다. 나라에는 삼공(三公)이 있는데도 삼가고 협력하기를 힘쓰지 않고, 맡은 일을 게을리 하여 날만 보내서 관망하듯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는 어찌 충성하여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이겠는가? 나는 실로 한심하게 여긴다. 승정원에서 자세히 알고 있으라."
하였다.
영의정(領議政) 허적(許積)이 상소하기를,
"한쪽에 치우치게 매이지 아니하려고 하는 까닭으로써 이쪽과 저쪽에 미움을 받아서 쓸쓸하게 고립(孤立)되었는데, 마침내 평생에 하지 아니한 바를 가지고 어진 마음으로 사랑하시는 하늘에게 견책(譴責)을 입었으니, 장차 무슨 얼굴로 돌아가서 선왕(先王)을 뵙겠습니까? 쓸쓸한 강(江), 싸늘한 집에서 밤을 새우며 제 잘못을 스스로 꾸짖으니, 첫째도 신의 죄이며 둘째도 신의 죄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일찍이 즉위[嗣服]한 처음에 있어서는 서로 공격하고 협력하지 아니하려고 한 것이 아닌데, 논의(論議)가 준격(峻激)한 뒤에 미쳐서는 조정[調劑]하지 못하여 마침내 뜬 의논에 흔들림을 면하지 못하였으니, 내가 진실로 괴이하게 여기며 개탄(慨嘆)한다. 본직(本職)에 힘써 부응(副應)하라."
하였다.
숙종 6년 4월 1일
허적이 영의정 직을 사임하자마자 철원에 유배를 가 있던 서인 김수항을 영의정으로 복귀시켰다. 이후 보름에 걸쳐서 남인들이 완전히 밀려나기 시작하고, 서인들이 관직을 차지하는 상황이 이어진다.전 영의정(領議政) 허적(許積)이 상소하여 도체부(都體府)와 내국 제조(內局提調)의 임무를 사임하기를 청하니, 모두 허락하였다.
숙종 6년 4월 2일
이런 갑작스런 숙종의 돌변에 대해서 많은 이들이 납득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여기서부터는 연려실기술에 쓰여진 야사이다. 배경은 허잠에게 시호를, 허적에게는 궤장을 내린 것이다. 원래 시호를 받으면, 그 집안에서는 잔치를 벌여서 기쁨과 감사를 드러내야 한다. 이 잔치를 연시연이라고 부른다. 이 때 숙종이 궁중 창고에서 용봉차일(龍鳳遮日)을 보내려고 했다는 민담도 있고, 궁중 창고에 있던 유막[5] 을 보내려고 했다는 민담도 있으나, 이미 허적의 집안에서 가져갔다는 보고를 받고 크게 분노하여, 위와 같은 돌변이 일어났다고 전한다. 다만 온건파였던 허적의 성향상, 과연 저런 짓을 했을까 하는 지적은 존재한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은 이를 김석주가 오래도록 치밀하게 준비해온 드라마라고 표현하고 있으나,[6] 한국사능력검정시험에서도 유막설을 정설로 채택해 환국 관련 문제를 내고 있다.
3.3. 삼복의 옥
이미 경신환국이 한참 진행중이던 상황에서 정원로[7] 의 고변이 나온다.
이 역모를 걸고 나온 인물은 정원로 였지만, 이를 사주한 자는 김석주를 포함한 서인이었다.정원로(鄭元老)·강만철(姜萬鐵)이 상변(上變) 한 글에 이르기를,
"신(臣) 정원로는 허견(許堅)과 더불어 병진년부터 비로소 서로 사귀어 정의가 자못 두터웠는데, 작년 정월에 허견이 이태서(李台瑞)와 더불어 신(臣) 강만철의 집에 모여서 복선군(福善君)을 접견할 일을 더불어 의논하였고, 뒤에 이태서가 갑자기 신(臣) 정원로를 초청하기에 신이 나아가니 자리에 한 사람이 있었는데 의젓한 귀인(貴人)이었습니다. 더불어 서로 이야기해 보니 바로 그가 복선군이었습니다. 다만 한담만 하다가 헤어졌는데, 이태서가 신의 사람됨을 과장하여 일컬었습니다. 뒤에 복선군이 신 정원로의 집에 이르렀고 허견이 또 이르렀으며, 지난 여름에 허견이 글을 보내어 복선군의 집에 오게 하고, 또 청지기[廳直] 점동(點同)이라고 이름하는 자로 하여금 그 집을 가리켜 주게 하며 신의 종[奴]으로 하여금 편지를 바치게 하였는데, 대개 그 글이 바로 신의 집에 모이기를 기약한 것입니다. 복선군의 답서를 허견에게 전해 보내고 신의 집에 모였는데, 허견이 말하기를, ‘주상의 춘추(春秋)가 젊으신데 몸이 자주 편찮으시고 또 세자[儲位]가 없으니, 만약 불행한 일이 있으면 대감(大監)이 임금자리를 면하려도 될 수가 없을 것입니다.’고 하니, 복선군이 대답이 없었습니다. 허견이 말하기를, ‘이제 나라가 장차 망하려는데 반드시 잘 하여야 할 것이며, 당론(黨論)을 마땅히 타파하여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는데, 신이 듣고는 송연(悚然)하여 곧 와서 고하려고 하였으나, 주상께서 영상(領相)을 신임하고 존중하시므로 무고(誣告)했다는 죄를 입을 것을 두려워하여, 이제까지 주저하다가 이제 감히 숨길 수 없어서 감히 이를 자세히 아룁니다. 그때 왕래한 서찰(書札)로 허견의 편지 두통, 이태서의 편지 한 통, 복선군의 간갑(簡匣) 하나를 아울러 봉하여 올립니다. 신 강만철은 허견과 처형제 자매부(妻兄弟姉妹夫) 사이가 되는데, 신의 누이 동생이 죽은 것은 임인년에 있었습니다. 허견이 신을 대접하기를 자못 후하게 하고 신이 조금 의술(醫術)을 아는 까닭으로써 영상(領相)의 풍병(風病)을 신에게 전임하여 치료하게 하였는데, 허견의 하는 짓을 처음에는 알지 못했으나, 작년 정월에 신이 강원도에 내려갔다가 아들의 병이 있음을 듣고 급급히 달려 돌아오니, 그 때 허견이 복선군과 더불어 처음 서로 보았고, 여름에 두 번째 보았다는 말은 정원로의 말을 인하여 들었기 때문에, 침묵할 수 없어서 감히 정원로와 더불어 동시에 와서 아룁니다."
하였다. 글이 알려지니, 대신(大臣)·금부 당상(禁府堂上) 양사 장관(兩司長官)을 모두 곧 명초(命招) 하기를 명하고 또 양국 대장(兩局大將)을 패초(牌招) 하기를 명하였다.
숙종 6년 4월 5일
허견은 허적의 서자로 평소 행실이 굉장히 안좋았기 때문에, 이전에도 꾸준히 처벌과 석방을 반복했던 문제 인물이었다.
이 사건은 점점 확대되어서, 역모에 엮여 있었던 허견, 복창군, 복선군, 복평군 등은 물론이고, 허적, 윤휴, 이원정 등 남인의 수장들과, 심지어 역모의 고변자인 정원로마저 원래 음모에 가담했었다는 이유로 처형당한다.[8]
4. 배경에 대한 추론
물론 기름 천막 유용 같은 민담에 나온 사건이 배경일 가능성은 낮다. 애초에 그런 일이 있었다면 숙종실록에 반드시 기록이 남는다. 이 때문에 배경으로 언급되는 것은 주로 3가지이다.
우선 숙종은 조선 시대 국왕 재위 기록만 고려하면 역대 2번째로 길게 재위한 인물이다[9] . 그리고 강력한 철혈 군주 이미지 때문에 착각하기 쉬운데, 상당히 몸이 약했던 인물이다. 명성왕후가 정사에 적극적으로 개입한 배경 중 하나이기도 한데, 어리고 병약한 숙종이 왕위에서 밀려날 것을 우려한 것이다. 실제로 숙종은 예송논쟁을 마무리하지만, 여기에는 남인만이 아니라, 삼복을 포함한 종친, 남인 아니냐는 소리까지 들었고, 실제로 갑인예송은 대놓고 남인의 1년설을 지지한 청풍 김씨 외척 세력이 가세한 결과였다.
홍수의 변에도 언급되었지만, 명성왕후의 최대 걱정은 갑인예송에서 승리한 남인이 실적이 있던 복선군과 손을 잡고 복선군을 왕으로 추대하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후환을 없애려고 과잉 충성을 한 것이 바로 홍수의 변이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왕실을 뒷받침하는 종친, 남인, 외척의 한 축이 심각한 타격을 입은 것과 동시에, 남인 강경파가 대두했다는 것이었다. 즉, 세력 균형이 무너진 것이다.
그리고 결정적 계기가, 남인이 모든 군사권을 도체찰사부에 집중시키려고 노력한 것이다. 도체찰사부는 현종 때에 필요성이 없다하여 폐지되었다가, 윤휴와 허적의 건의로 다시 설치되었으며, 허적은 훈련도감과 어영청을 이 기관에 통폐합시켜 군권을 일원화하려고 하였다. 이에 숙종은 부제찰사에 김석주를 넣어서 남인을 견제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혹시 남인들이 도체찰사부를 근거로 해서 반란을 일으키지 않을까 하는 것이 숙종으로서는 걱정거리이다. 실제로 경신환국의 사전 조치는 바로 군권 장악이다. 이후 숙종은 외척에게 힘을 실어준 것이고, 남인과 대립하는 상황이 된 숙종의 외가 청풍 김씨가 손을 내밀 수 밖에 없었던 것이 서인이다.
5. 결말
관련된 왕족들과 역모 주동자로 지목된 허견을 비롯해 허적, 허목, 윤휴 등의 남인은 대대적인 숙청을 당했다.[10]
나름대로 이론 싸움으로 예의를 갖추며 싸우던 예송논쟁과 달리 한 편이 완전히 갈려나가는 대대적인 숙청은 관료들에게 큰 충격을 가져왔고, 이에 상호공존의 붕당 정치는 붕괴하기 시작한다. 또한 서인의 분파도 가져왔는데, 남인 처벌에 있어 강경한 입장인 송시열의 노론과 비교적 온건한 입장인 윤증의 소론이 그것이다. 이는 곧이어 1681년 회니시비이라는 사문의 시비문제로 표면화 되었다.
숙종은 자신의 친위 세력을 한 곳으로 결집시켰는데, 그것이 바로 외척, 더 정확하게는 더 만만한 처가이다. 숙종 시기에 여인천하가 열리는 것은 이 때문으로, 숙종은 보다 부담없이 갈아치울 수 있는 상대인 처가에 권력을 몰아주고, 그 처가와 손잡은 당파가 권력을 쥐는 것이다. 이 때문에 중인의 딸이라는 평이 도는 장희빈이 중전에 오른다거나, 숙종의 첫 정비 인경왕후가 죽은 다음에 국상 중인 상황에서 명성왕후가 반억지로 민유중의 딸(인현왕후)을 새 왕비로 택해 국혼을 진행시켜 버린다거나[11] 하는 괴랄한 사건들이 이어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