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세당

 

1. 개요
2. 생애
2.1. 이경석 신도비명 사건
3. 사상


1. 개요


반남 박씨로써 1629(인조 7)∼1703(숙종 29). 조선 후기의 학자이자 문신. 호는 잠수(潛叟)·서계초수(西溪樵叟)·서계(西溪). 우참찬 이덕수(李德壽), 함경감사 이탄(李坦), 좌의정 조태억(趙泰億) 등 수십 명의 제자를 키웠다. 차남인 박태보[1]윤증의 제자가 되었는데 이로 인해 박세당은 윤선거 집안과의 교분을 이어갔다.[2]

2. 생애


1660년 문과에 장원급제해 관직 생활을 시작했으나 송시열의 편협함을 싫어해 노론과는 대립 관계였다.[3] 결국 당쟁에 혐오를 느끼고 낙향해 경기도 양주 석천동으로 물러나 농사를 지으면서 학문 연구와 제자 양성에 몰두했다. 1702년 이경석의 신도비명을 지은 일에서 송시열을 격하한 것 때문에 노론의 공격을 받고 전라도 옥과로 귀양을 가게 되었으나 판윤 이인엽이 박세당의 아들인 박태보의 절개를 생각할 것과 고령의 박세당에게 유배를 보내는 것은 죽는 것과 같다는 상소를 올려 유배는 면할 수 있었고 1703년 세상을 떠났다. 학문과 행적에 대한 변론은 계속되어 박세당이 죽은지 약 20년이 지난 1722년(경종 2)에야 문절(文節)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2.1. 이경석 신도비명 사건


1702년 박세당은 이경석의 후손에게 신도비명 찬술(撰述)을 부탁받고 자신의 마지막 글을 지었다. 생전에 송시열과 대립했던 관계인 박세당은 송시열이 이경석을 수이강 사건으로 조롱한 것을 비판하며 신도비명의 마지막을 이렇게 썼다.

올빼미는 봉황과 성질이 판이한지라(梟鳳殊性)

성내기도 하고 꾸짖기도 하였네 (載怒載嗔)

착하지 않은 자는 미워할 뿐 (不善者惡)

군자가 어찌 이를 상관하랴(君子何病)

나의 명문을 빗돌에 새기노니 (我銘載石)

사람들이여 와서 공경할지어다(人其來敬)

노론과 송시열의 당여들은 이 글을 보고 뒤집어졌고 박세당을 사문난적으로 여겨 숙종에게 비문과 저서인 『사변록』을 불태우고 머나먼 벽지로 유배보내라고 숙종에게 상소를 올렸다. 숙종은 노론의 요구를 받아들여 비문과 『사변록』을 불살라버리고 박세당을 유배보냈다.[4]

3. 사상


박세당의 근본 사상에 대해서는 유학의 근본 정신을 추구했다는 견해가 있고, 주자학은 물론 유학 자체에 회의해 학(老莊學)으로 흐른 경향이 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박세당이 당시 조선의 통치 이념인 주자학을 비판하고 중국 중심적 학문 태도에 회의적이었다고 보는데는 이론(異論)이 없다.
박세당은 당시의 학자들이 꺼려한 도가 사상(道家思想)에 깊은 관심을 보여 스스로 노장서(老莊書)에 탐닉하면 되돌아올 줄 모르고 심취하게 된다고 고백할 정도였다.
이러한 학문 경향을 지니게 된 배경에는 젊었을 때 지녔던 정치와 사회에 대한 개혁적 사고 때문이었고 백성의 생활 안정과 국가 보위에 있어서 차별을 본질로 하는 유가 사상(儒家思想)에 회의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도가 사상을 연구했다는 이유로 당시 유교를 국교로 하던 조선에서 많은 비난을 당했다.

[1] 인현왕후가 폐서인되었을 때 부당함을 주장해 장살당한다.[2] 박세당의 문집인 『서계집』에는 윤증과 박세당이 서로에게 보낸 서신이 각각 22편, 26편이 수록되어 친분을 확인할 수가 있다.[3] 박세당은 양명학과 노장 사상의 영향을 받아 주자의 학설을 비판해 『사변록』을 지었는데 주자 골수론자인 송시열의 분노를 샀고 그 결과 송시열은 윤휴와 함께 박세당을 사문난적으로 규정하였다.[4] 이경석 신도비는 50년이 지난 1754년 이광사글씨를 받아 겨우 건립되었는데 노론에 의해 글자가 깎여나가고 땅에 파묻혔다. 이후 1979년 이경석의 후손들은 비석을 재건하고 옆에 새로 글씨를 새긴 신도비를 함께 세워 오늘날 이경석의 묘에는 2개의 신도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