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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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성혼(成渾)
'''본관'''
창녕 성씨
'''출생'''
1535년 6월 25일 조선 한성부 순화방
'''사망'''
1598년 6월 6일 조선 경기도 파주목 파산서실
'''국적'''
조선
'''자'''
호원(浩原)
'''호'''
우계(牛溪), 묵암(默庵)
'''시호'''
문간(文簡)
1. 개요
2. 생애


1. 개요


조선의 대표적인 문신. 자는 호원(浩原), 호는 우계(牛溪) 또는 묵암(默庵),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보통은 우계로 잘 알려져 있다.

2. 생애


아버지 성수침은 조광조에게 학문을 배웠고, 기묘사화 이후 후학 양성에 전념했다. 성혼은 이런 아버지 밑에서 학문을 배우다가 역시 조광조의 제자인 백인걸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으며 이 때 이이를 만나게 되어 평생의 친구로 지내게 된다.
친구 이이의 추천으로 벼슬길에 나갔으며, 이이가 죽자 낙향했다. 하지만 정여립의 난으로 인해 기축 옥사가 일어나고 이후 서인이 집권하자 이조 판서로 복귀했고 서인의 영수로서 정철과 함께 정계를 이끌었다. 하지만 1590년 곧바로 은퇴했으며, 1591년 ≪율곡집 栗谷集≫을 저술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정계에 복귀하였으나 동인 강경파로부터 끊임 없이 공격당했다. 1594년 은퇴하고, 1598년 병으로 사망한다.
1602년 기축옥사에 연루되었던 연유로 북인들에 의해 삭탈 관직 되었다. 그러다가 1623년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집권한 후 1633년 복권되었다. 경신환국 이후 이이와 함께 문묘에 배향되었으나 남인이 집권한 기사환국 때 출향당했고, 서인이 재집권한 갑술환국 때 다시 문묘에 배향되었다.
이처럼 이이의 절친한 친구였고 서인의 대표적인 정치인이었으나, 정작 이이와 학문적인 면에서는 다른 면을 보였다. 특히 이이와 1572년부터 6년간 사칠이기설(四七理氣說)을 논한 왕복서신에서 이황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지지하였고, 이이의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비판하였다.
향후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질 때, 소론에 속하는 사대부들은 대부분 성혼의 이론을 지지했다. 따라서 '''소론의 시조''' 격으로 본다. 그럴것이 그의 사위 윤황은 윤선거의 아버지이고 소론의 중추인 윤증이 성혼의 외증손이다
묘소는 경기도 파주시 파주읍 향양리에 있으며, 2011년엔 가까운 거리에 기념관도 생겼다. 또 인근 도로의 이름도 우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