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아도

 


朴阿道 (? ~ ?). 신라 초기의 왕족. 박아도 본인의 행적에 대해서는 알려진 게 없고, 오늘날 남아있는 그에 관한 기록은 딱 두 줄이다.

十五年, 封'''朴阿道'''爲葛文王.新羅追封王皆稱葛文王, 其義未詳

15년 '''박아도(朴阿道)'''를 갈문왕(葛文王)으로 삼았다.신라에서는 후대에 추봉(追封)한 왕을 모두 갈문왕이라 칭했는데 그 의미는 알 수 없다.

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 제1 일성 이사금 조

朴堤上或云毛末, 始祖赫居世之後, 婆娑尼師今五丗孫. 祖'''阿道葛文王''', 父勿品波珍湌. 堤上仕爲歃良州干.

박제상(朴堤上)혹은 모말(毛末)이라고 한다.은 시조(始祖) 혁거세(赫居世)의 후손이고 파사 이사금(婆娑尼師今)의 5세손이다. 할아버지는 '''아도(阿道) 갈문왕(葛文王)'''이고, 아버지는 파진찬(波珍湌) 물품(勿品)이다. [박]제상은 삽량주간(歃良州干)으로 임금을 섬겼다.

삼국사기 권45 열전 제5 박제상 조

기록을 신뢰한다면 '파사 - 지마 - 아도 - 물품 - 제상'이 될 것이다.
갈문왕으로 추봉된 이유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파사 이사금의 손자이자 후사가 없는 지마 이사금의 아들로서 지마 이사금을 이을 유력한 이사금 후보였지만 일성 이사금의 귀국으로 인해 이사금이 되지 못하자 이에 대한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갈문왕으로 임명한 것으로 보인다.
박제상은 4세기에 활동했던 인물이기에 시대 차가 너무 많이 나며, 이런 점들은 삼국사기 초기 기록의 연대가 부정확하다는 사례로 언급되기도 한다. 박아도가 조금 장수했다고 보면 말이 안 되는 정도는 아닐 수도 있지만, 비슷한 시기 고구려 태조왕은 백몇십 살을 살았다는 등 더 심하다. 문제는 이걸로 끝나지 않는다. 일성 이사금 문서에서 볼 수 있듯이 일성은 삼국사기 기록으로는 유리 이사금의 장남이나 유리 이사금의 차남인 파사 이사금보다 늦게 왕이 되는 등 이상한 점이 많은 인물이기 때문이다.
이 기록이 맞다면 최소로 계산하더라도 8~90세까지 장수한 것이 되기 때문에, 유리 이사금의 아들이 박아도고 박아도의 아들이 일성 이사금이고, 왕을 못 한 박아도를 아들 일성이 갈문왕으로 봉한 것이 아니냐는 설이 있다.[출처] 이렇게 왕을 못 한 아버지를 갈문왕으로 올린 사례가 신라 제12대 첨해 이사금과 제13대 미추 이사금 때도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설은 관련 기록 대부분을 억지로 부정해 문제가 있다. 일성 이사금과 파사 이사금 둘 다 유리 이사금이 아닌 다른 사람의 아들이라는 설이 있다는 기록이 있는데, 여기서 박아도는 거론되지 않는다. 게다가 박아도가 갈문왕이 된 것은 박일성이 이사금위에 오른 지 15년째 되는 해라서 아버지로 추정하기엔 여러모로 문제가 있다.
한편 이름으로 쓰인 아도(阿道)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와 신라본기에서 공통적으로 승려로 등장하는 인물이라, 지마 이사금 사후 왕위를 물려받지 않은 것이 그가 출가했기 때문이 아닌가 추정되기도 한다.

[출처] 이기백, 「신라시대의 갈문왕」, 《신라정치사회사연구》, 일조각, 1974,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