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거세 거서간

 


'''신라 초대 국왕
始祖 赫居世 居西干
시조 혁거세 거서간
'''
국학원 역사문화 공원 내에 있는 박혁거세 상
'''시호'''
'''혁거세 거서간(赫居世 居西干)'''
'''별호'''
알지 거서간(閼智 居西干)
불구내왕(弗矩內王)
거슬한(居瑟邯)
'''출생
(음력)
'''
기원전 69년
경상북도 경주시 탑동 나정
'''사망
(음력)
'''
기원후 4년 4~5월[1](72세?)
사로국 서라벌
'''능묘'''
사릉(蛇陵)
'''재위
(음력)
'''
기원전 57년 6월 5일[2][3] ~ 기원후 4년 4~5월
(59년 11개월)
'''성씨'''
박(朴)
''''''
혁거세(赫居世) / 알지(閼智)(?)
'''부모'''
부친 흰 말
양부 소벌도리 / 모친 선도성모
'''왕후'''
알영부인
'''자녀'''
왕태자 박남해(朴南解)
왕녀 아로공주
1. 개요
2. 호칭
3. 생애
4. 기타
5. 삼국사기 기록
6. 관련 문서
7. 관련서적
8. 대중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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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다른 사람의 재앙을 기뻐하는 것은, 인(仁)이 아니로다.'''

幸人之災, 不仁也.

삼국사기 제1권 신라본기 제1. 시조 혁거세 거서간 39년조 #

신라[4]의 시조. 신라 천년 사직의 초대 군주로 칭호는 거서간 혹은 거세간 또는 거슬한. 한국이나 기타 재외동포 모든 박씨[5]들의 시조이기도 하다.
현재 전하는 박혁거세라는 이름은 朴赫巨世라는 한자 표기를 현대 한국어로 음만 따서 읽은 것이나 과거 신라에서 한자를 읽고 쓰던 방법은 지금과 조금 달라 마치 지금의 일본어와 같이 음독과 훈독을 섞어 썼다.[6] 혁거세 중 한자 赫(붉을 혁)과 世(누리 세)는 각각 뜻으로 읽기 때문에 원래 발음은 불거누리, 불그누리, 불그뉘 등에 가까웠을 것으로 추정된다.[7]삼국사기》에는 "이명으로 불구내(弗矩內)라고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순우리말인 붉은 애 혹은 붉은 누리를 한자로 음사하여 표시한 것으로 추정되며 불구내와 혁거세는 같은 단어를 서로 다르게 쓴 것으로 보인다. 赫居世, 弗矩內는 실제로 '발그놀, 불그놀'라고 불렸으리라 추정할 수 있다. 赫(붉을/밝을 혁)은 '밝/붉'을 표기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世(누리/세상 세)는 '놀/눌'을 표기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內(안 내)의 옛 한자음은 '노'에 가까웠다. 한편 이름의 뜻이 누리의 붉은 햇님인 이진아시왕과의 연계가 지적되기도 한다.

왕위를 거슬한(居瑟邯)이라고 하였다.【거서간(居西干)이라고도 한다. 처음 입을 열었을 때에 ‘알지(閼智) 거서간(居西干)이 한 번 일어났다.’라고 하였기 때문에 그 말에 따라 이렇게 부른 것이다. 이후로 왕의 존칭이 되었다.】

《삼국유사》

삼국유사》 기이편에 의하면 스스로를 '알지 거서간(閼智居西干)'[8]이라 일컬었다. 후대의 김알지가 연상되는 이름이지만 부여고구려의 시조 신화에서 해모수동명왕이라는 이름이 공통으로 등장하듯이 고대의 시조 신화에서 이런 식의 어휘 공유는 놀랄 일은 아니다. 훗날 신라에서 '태조'로 불린 인물이 김알지의 아들 김성한으로 유력시되는데 이와 연관지어 알지가 임금을 가리키는 일반 명사 중 하나였다는 주장도 있다.
《삼국유사》의 선도성모수희불사에 의하면 알영부인과는 남매 관계로 묘사된다. 하지만 《삼국유사》의 경우 김부식중국에서 듣고 기이한 이야기라고 부정한 이야기에 상상력을 더해 전설로 적은 것이라 《삼국사기》에 부인으로 나오는 게 더 유력시된다. 이 역시도 신화에서 남매가 부부를 겸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특이한 일은 아닐 것이다. 또한 위의 '알지'라는 이름과 연결시킨다면 알영부인과의 연관성이 더욱 강화된다.

2. 호칭



居西干
신라 고유의 군주의 칭호.
고유어를 음차한 것으로, 거슬한(居瑟邯)이라고도 한다.

시조의 성은 박씨, 이름은 혁거세(赫居世)이다. 전한(前漢) 효선제(孝宣帝) 오봉(五鳳) 원년 갑자(기원전 57) 4월 병진일에 왕위에 올랐다. 왕호는 거서간(居西干)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제1권 신라본기 제1(卷第一 新羅本紀 第一)》


왕위를 거슬한(居瑟邯)이라고 하였다.

《삼국유사(三國遺事) 제1권 기이 제1(卷第一 紀異 第一)》

삼국사기에서는 혁거세 거서간 전용으로 쓰이며 삼국유사에서는 박혁거세뿐만 아니라 2대 남해 차차웅도 남해 거서간이라고도 한다. 초기에 잠깐 쓰였고 이후 중국의 영향을 받아 (王) 칭호를 쓰기 전까지 이사금, 마립간이라는 새로운 왕호를 사용하게 된다.
의미는 진한 말로 임금, 혹은 존귀한 사람을 칭하는 말이라고 한다. '간(干)' 자는 우두머리를 뜻하는 중앙아시아 유목민족의 호칭 가한과 관련이 있다고 보기도 한다.
  • 1대 혁거세 거서간
  • 2대 남해 거서간 - 삼국유사 한정. 일반적으로 현대에는 거의 남해 차차웅으로만 쓴다.



3. 생애


처럼 생긴 에서 태어났다는 전설이 있으며 성을 박씨로 정한 것도 그 이유다.

'''조선(朝鮮)의 유민들이 산곡 사이에 나뉘어 살아 6촌을 이루었다.'''[9]

첫째는 알천(閼川) 양산촌(楊山村) 둘째는 돌산(突山) 고허촌(高墟村) 셋째는 취산(觜山) 진지촌(珍支村, 간진촌(干珍村)이라고도 한다) 넷째는 무산(茂山) 대수촌(大樹村) 다섯째는 금산(金山) 가리촌(加利村), 여섯째는 명활산(明活山) 고야촌(高耶村)이라 하였으니, 이것이 진한(辰韓) '''6부(六部)'''가 되었다. 어느 날 고허촌장 소벌공(혹은 소벌도리)이 양산 기슭을 바라보니 나정 곁의 숲 사이에 '''[10] 한 마리가 무릎을 꿇고 울고 있었다'''. 그래서 가 보니 갑자기 말은 보이지 않고, 큰 이 한 개 있어 깨뜨려 보니 한 아이가 나왔다. 소벌공은 그 아이를 데리고 와서 잘 길렀는데, 10여 세가 되자 유달리 숙성하였다. 6부 사람들은 그 아이의 출생이 신기했으므로 '''모두 우러러 받들어 왕으로 모셨다. 진한 사람들은 표주박을 박(朴)이라고 하였는데, 혁거세가 난 커다란 알의 모양이 표주박 같이 생겨서 성을 박으로 하였다.'''

삼국사기

에서 태어났다는 난생설화세계적으로 많이 찾아볼 수 있는데 일반 인간과 다른 특별한 탄생이라는 장치로 신비감을 높이기 위해서이다.[11]
삼국사기뿐 아니라 삼국유사에서도 위와 비슷하게 천상에서 내려온 백마가 나정에 싣고 온 자색 알에서 혁거세가 태어났고 천자라 불렀다고 서술하고 있다. 양대 사서에서는 혁거세 이전 경주에 옛 고조선이 망하고 남하한 유민으로 구성된 6촌이 있었고 신비하게 등장한 혁거세가 성장하자 6촌 촌장들의 추대로 왕에 올랐다고 쓰고 있다.
삼국사기에 쓰인 위의 설화에 의하면 성씨의 박은 여기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후대의 문헌 기록인 삼국사기뿐 아니라 법흥왕 때의 당대 기록인 울주 천전리 각석에도 가운데에서 약간 오른쪽에 혁거세 난생 설화를 묘사한 것으로 보이는 그림이 있는데 여기에는 박이라는 성씨에 관한 정보가 등장하지 않기에 혁거세가 당시에 박이라는 성씨를 가지지 않았고 후손들이 소급해 올린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으나 학계에서 제대로 연구되어 있지는 않다. 박혁거세가 태어났다는 경주의 나정은 이후 신라 왕실의 성지가 되었고 그 자리에 신궁 등을 만들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다른 기록으로 선도성모가 박혁거세를 낳았다는 기록도 있다. 혁거세와 알영은 삼국유사에 의하면 경주 서남쪽 훗날의 창림사[12] 자리에 궁실을 짓고 길렀다고 하는데 현재 나정과 직선 거리로 1㎞도 떨어지지 않은 가까운 위치다. 그러다 기원전 57년 경주 일대의 6촌 촌장[13]들의 추대로 13세에 왕으로 즉위해 재위 5년에는 비슷하게 설화적인 탄생으로 태어나 2명의 성인(二聖)으로 꼽히던 알영부인과 결혼하였다고 한다. 알영 탄생 설화에 대해서는 알영부인 문서 참조.
단군신화도 그렇듯 설화를 현실적인 역사로 해석하려는 시도가 있었는데 해석 방법은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혁거세로 대표되는 '''북방 기마 세력'''[14]

이 청동기 문화에 머물러있던 경주 분지로 들어와, 기마술과 '''철기'''[15]를 바탕으로 토착 6부족의 지지를 얻어 나라를 세웠다.

는 식으로 해석하고 있다.
기원전 69년 출생, 기원전 57년 즉위라는 건국 년도에 대해서는 현재 연구 중에 있다. 이와 관련된 내용은 사로국 문서 참조.
혁거세 시대의 사로국은 한반도에서는 살만한 동네였던 모양으로 당시 한반도 남서부를 지배하던 마한이나 낙랑군 등이 공격했지만 실패하였고 바다 건너 에서 왔다던 호공도 있다.[16] 왜에서 왔다는 대표적인 사람이 호공. 한편 알영부인이 계룡에게서 태어났다든가, 농잠을 권유했다는 이야기를 보면 알영부인은 외부의 선진 문명을 이식한 이주민 세력일 가능성도 크다.
기원전 50년(즉위 8년), 왜구들이 쳐들어온다. 그러나 혁거세의 인덕을 듣고서 싸우지 않고 되돌아갔다고 되어있다. 시조인 만큼 설화적으로 각색된 내용으로 보인다.
기원전 41년(즉위 17년), 초기 왕답게 전국 6부를 돌며 민정을 살폈고 농업누에치기를 장려한다. 그런데 당시는 전국이라고 해도 작아서 신라 영토는 경주 지역 정도였다. 한국 고대사에는 우산국처럼 4세기~5세기까지도 일개 도시가 나라를 칭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기원전 39년(즉위 19년), 《삼국사기》에 따르면 변한이 나라를 들어 항복해 왔다는데 백제온조왕 때 마한을 흡수했다는 기록과 더불어 믿기 힘든 초기 기록으로 꼽히고 있다. 변한은 이후 가야로 변화하는데 신라가 가야를 병합한 것은 수백 년이나 뒤인 6세기다. 대체로 삼한이 이런저런 소국들을 정리하고 완전히 백제, 신라, 고구려의 삼국으로 대체된 것은 뒤의 일로 추정된다. 무엇보다도 변한은 지금의 경상남도 일대에 거의 다 걸쳐져 있었다. 이런 큰 세력이 조그만 국가에 스스로 항복한다는 게 말이 되는가? 게다가 설령 항복을 했더라도 그 자리에 멀쩡히 가야가 들어선 것 자체가 이상하다. 하지만 가야도 수많은 국가를 통칭해 가리키는 것이고 이후 포상팔국의 난 같은 예를 보면 그렇게 이상한 것도 아니다. 당대 국가들은 고구려, 백제, 신라와 같은 삼국이 아닌 도시국가 규모의 수많은 국가들이 많이 있었다. 마한 54개, 진한 12개, 변한 12개라고 하는데 실상은 훨씬 많았을 것이다. 워낙 소국들이 많고 여기저기 뒤섞여 있는 게 한사군 남부 한반도의 당대 현실이었다. 여기서 변한이라고 한 건 사로국 주변에 위치한 변한 쪽 군소 세력을 병합한 것으로 해석하면 맞아 떨어진다.
기원전 37년(즉위 21년), 수도금성 도성을 지었으며 기원전 32년에 금성에 왕궁 건물을 지었다.
기원전 28년(즉위 30년), 낙랑이 쳐들어왔지만 성 밖에 쌓여있는 노적가리를 보고 '이곳 사람들은 서로 도둑질을 하지 않으니 가히 도의가 있는 나라'라는 평을 내리고 스스로 물러갔다는 기록이 있다. 앞서 왜인들이 변경에 쳐들어왔다가 혁거세가 덕이 있다는 말을 듣고 돌아가 버렸다는 기록과 비슷한 일화인데 일단 낙랑은 계림에서 매우 먼 곳이니 아는 것도 별로 없었을 것이고 기껏 굽이굽이 백두대간을 넘어 왔는데 성이 버티고 있으며 쌓인 노적가리를 보니 식량도 제법 축적되어 있다는 결론을 냈을 것이다. 그런데다가 내부 단속도 잘 되는 것 같으니 패배할 것이라고 지레짐작하고 공격을 포기한 것으로 보인다. 공성전에 들일 비용을 생각하면 이겨도 남는 장사라는 보장이 없고 못 이기면 돌아갈 길이 또 막막하니까 말이다.
기원전 26년(즉위 32년), 마한 왕과 신라 호공의 말 다툼이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서 여러 사실을 유추할 수 있다.

마한 왕: 신라는 마한에 조공을 보내오던 국가인데 근년은 공물을 보내지 아니하니 이게 큰 나라를 섬기는 예인가?

호공: 우리나라는 두 성인(박혁거세·알영부인)이 나라를 세운 후, 인재가 넘치고 천시가 고르며, 창고가 가득 찼고, 백성이 어지니 진한의 유민으로부터 변한, 낙랑, 왜인들까지 우리를 두려워하는데 우리 임금은 겸손하여 신하를 보내 이렇게 인사를 하니 이는 예에 지나친다고 할 수 없거늘, 도리어 대왕이 협박하시니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이에 마한 왕이 참하려 하자, 곁에 있던 신하들이 말려서 호공은 살아서 신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신라가 새로이 부상함과 더불어 삼한 전체의 수장 노릇을 하던 마한도 더 이상 신라를 마음대로 할 수 없었으리라 추정할 수 있다.
기원전 19년(즉위 39년), 마한 왕이 죽었다. 신라에서는 어떤 사람이 혁거세에게 마한 왕이 지난번에 우리 사신을 욕보였으니 지금 마한을 치자고 했지만 혁거세는 다른 사람의 불행을 이용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며 따르지 않고 사신을 보내 조문까지 했다고 한다.
기원전 5년(즉위 53년), 북쪽 옥저에서 남쪽에서 성인이 태어났다는 소문을 들었다면서 사신을 보내 좋은 말 20필을 선물로 바쳤다고 한다.
이렇듯 60년 넘게 신라를 통치하다가 기원후 4년 73세로 승하했다고 한다. 1년 전이었던 기원후 3년 경주에 2마리가 나타났다는 이야기가 있고 죽을 때도 기이한 이야기가 있다.

박혁거세가 나라를 다스린 지 61년. 어느 날 하늘로 올라갔는데, 8일 후에 몸뚱이가 땅에 흩어져 떨어졌다. 그리고 왕후 역시 왕을 따라 세상을 하직한다. 나라 사람들이 이들을 합장하여 장사 지내려 했으나, 큰 이 나타나 방해하므로 머리와 사지를 제각기 장사지내 오릉을 만들고 능의 이름을 사릉(蛇陵)이라고 하였다. 혹은 뱀이 무덤을 지키기에 사릉이라고 한다.

'''《삼국유사》 신라시조 혁거세왕'''

61년 봄 3월에 거서간이 세상을 떠나셨다. 사릉(蛇陵)에 장사지냈는데, 담암사(曇巖寺)의 북쪽에 있다.

'''《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 혁거세 거서간'''

그냥 죽은 것도 아니고 토막난데다 그걸 수습하는 것도 어려울 정도였다고 하니 위의 설화를 유추해 관련 학계에서 무수히 현실적인 역사적 사건으로 해석해보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너무 기이한 기록이라 정설은 없으며 반란군에 의해 시해를 당했다고 추정되기도 한다. 이 외에도 이렇게 추정할 수 있는 요소들이 몇 개 있는데 자세한 것은 남해 차차웅 문서 참고.
한편 신화적으로 해석하면 박혁거세의 농경 신화를 뜻한다고 한다. 건국의 신화적 인물은 승천하거나 신으로 모시는 것이 보통인데 이 이를 막고 시체가 5조각이 나서 땅에 묻힌다. 신화적으로 시체가 묻히는 것, 무언가를 조각내는 것은 새로운 탄생을 의미하며 뱀은 신화적으로 남근을 상징해 다산과 생산 등을 상징한다. 시체가 다섯 토막인 것은 어머니가 얻은 오곡과 연관되는데 죽은 뒤에는 농경신으로 모셔졌지만 차마 건국 신화에 곡물과 관련된 이야기를 넣을 수 없었던 것으로 본다는 것이다.
바로 다음 남해 차차웅 본기 처음에서는 혁거세 사망 직후의 국상 기간을 노리고 낙랑이 또다시 쳐들어와 금성을 몇 겹으로 둘러쌌다고 하는데 혁거세의 승하 기록과 관련이 있을 수도 있다. 박혁거세와 얽힌 전설로 금척 이야기가 있다.

4. 기타


초기의 신라 땅은 기록상 자연 재해가 꽤 많은 편인데, 이 시기에는 기록상 자연 재해도 딱히 없다. 바로 다음 대인 남해 차차웅 때만 해도 자연재해 기록이 제법 많다. 사로국이 위치한 경주 평야는 현재도 영남지방의 전체 생산량 중 7% 가까이를 차지할 만큼 넓고 비옥한 곳이며, 영남권에서 경주 평야보다 더 넓고 비옥하다 볼 수 있는 김해시, 부산 강서구, 울산광역시 등은 아직 바다였기 때문에 이렇다 할 경쟁자도 없던 시절이었다. 이렇게 독보적으로 풍부한 물산은 사로국이 패권을 쥐는 데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한편 그의 둘째 아들 박특(朴忒)은 청평군(淸平君)에 봉해졌고 신라 개국 공신으로 책봉되었다. 박혁거세의 둘째 아들인 박특이 정말로 공이 있어서 공신에 책봉되었다면, 그는 개국 시점에 최소 10대 초반에서 20대는 되어 있었어야 한다. 개국 시점에 나름 장성한 아들을 두어야 하는 박혁거세 역시 기원전 69년생이라면 본인이 10대 초반에 지나지 않으므로 실제 출생연도는 적어도 10년 이상 앞당겨져야 하며, 그렇게 되면 박혁거세보다도 16살 적은 것으로 기록되는 알영부인은 그의 생모가 아닐 가능성이 높다.
다만 개국 시점에 정말 공을 세웠기 때문이 아니라, 개국 즈음 해서 단지 출생만 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렇게 되면 박혁거세는 진짜 공이 있는 사람들을 개국 공신으로 책봉하면서 자신의 어린 두 아들 역시 덤으로 개국공신에 책봉했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아마 왕권 강화책의 일환이었을지도 모르지만 확실한 건 아니다.
심지어 '''인정 때문에''' 마한 왕이 죽었음에도 병합하지 않고 조문을 보냈고, 그 이후 쇠퇴한 마한은 온조가 병합했다는 구절도 있다. 이전에 자기가 보낸 사신을 죽이겠다고 협박하기까지 했는데도 말이다. 하지만 마한이라는 국가가 하나가 아닌 수많은 국가임을 생각해보면 마한의 한 소국의 왕이 죽었고, 박혁거세는 진한 주변의 마한 소국에 조문을 보낸 것이다.
자녀로는 장남 남해 차차웅, 신라 시조 묘의 제사를 총괄한 신라의 첫 여성 제사장인 대신녀 아로공주 등 1남 1녀가 존재한다.

5. 삼국사기 기록


'''《삼국사기》 시조 혁거세 거서간 본기'''
一年夏四月十五日 혁거세가 거서간에 오르다
四年夏四月一日 일식이 일어나다
五年春一月 알영이 왕비가 되다
八年 왜인이 침범하려다 물러가다
九年春三月 살별이 왕량에 나타나다
十四年夏四月 살별이 삼에 나타나다
十七年 혁거세와 왕비 알영이 농사를 권하다
十九年春一月 변한이 항복하다
二十一年 금성을 쌓다
二十四年夏六月 일식이 일어나다
二十六年春一月 궁실을 조성하다
三十年夏四月三十日 낙랑 사람들이 침입했다가 돌아가다
三十二年秋八月 일식이 일어나다
三十八年春二月 호공이 마한에 사신으로 다녀오다
三十九年 왕이 마한 왕의 죽음에 조문하다
四十年 백제의 온조가 즉위하다
四十三年春二月 일식이 일어나다
五十三年 동옥저가 말을 바치다
五十四年春二月 살별이 견우성에 나타나다
五十六年春一月一日 일식이 일어나다
五十九年秋九月 일식이 일어나다
六十年秋九月 용이 금성 우물에 나타나다
六十一年春三月 거서간이 세상을 떠나다
온조왕과 마찬가지로 상대로 끌어올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기록들이 나타나는데 대체적으로 법흥왕 시기의 것으로 보인다.

6. 관련 문서



7. 관련서적



8. 대중매체


[1] 음력으로 원시(元始) 4년 3월. 이 달은 그레고리력 4년 4월 7일부터 5월 6일까지였다.[2] 나무위키의 규정에 따라 그레고리력으로 환산한 값이며, 율리우스력으로는 6월 8일, 당시의 달력으로는 오봉(五鳳) 원년 4월 28일(병진일)이었다. 삼국사기는 "4월 병진일"이 아니라 "정월 15일"이라는 이설도 소개하고 있는데, 이날은 율리우스력 기원전 57년 2월 27일, 그레고리력 2월 24일이다.[3] 삼국 중 가장 발전이 느렸던 신라가 기록상 건국 연도는 가장 빠르고, 즉위한 기원전 57년은 갑자년이라 신라의 건국을 고구려, 백제보다 빠른 갑자년으로 조작했다는 설이 제기된다. 다만 고구려나 백제와 달리 신라의 경우 고조선 멸망 이후 고조선 유민이 유입되어 이들이 건국의 한 축이 되었다고 기록에서 명시돼 있으므로, 이미 한반도 남부나 부여보다 먼저 선진문화를 경험한 고조선 유민의 영향으로 빨리 건국했을 수도 있다는 주장도 존재하며 박혁거세로 대표되는 박씨 집단이 이런 외래 이주 집단이었다는 설도 있다. 또한 고구려부여에서 분리 독립을 했기 때문에 부여의 건국 연도를 추정하면 신라보다 훨씬 빠른 시기에 국가를 세운 것으로 볼 수 있다.[4] 당시에는 사로국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것으로 추정.[5] 반남 박씨, 밀양 박씨, 고령 박씨, 순천 박씨, 함양 박씨, 충주 박씨, 영해 박씨[6] 향가 같은 신라의 문화에서도 이와 같이 나타난다.[7] 물론, 정확히 어떻게 불렀는지는 역사적 자료가 부족하여 아무도 모른다.[8] 《삼국유사》의 본문에 있는 저자 일연의 주석.[9] 현재 경상북도 경주시 일대. 참고로 이 유민은 위만조선의 국상이었던 역계경이 고조선에서 탈출하여 진한으로 망명했을 때 따라나와 정착한 듯 하다.[10] 그 말이 장시상천이라는 이야기도 있다.[11] 드물게 양수 주머니채로 태어난 아기가 존재하므로 이를 알에서 태어났다고 표현했다면 허구가 아닐 가능성도 있다.#[12] 삼국유사에서는 주석으로 '지금의 창림사 자리다'라고 소개했다. '지금'이란 삼국유사를 쓴 일연이 살던 고려시대를 말한다. 현대에는 창림사도 사라지고 창림사지 삼층 석탑(보물 제1867호)만 남아있다.[13] 이 6촌이 훗날 최씨, 이씨, 정씨, 손씨, 배씨, 설씨로 각각 이어졌다고 한다.[14] 경주 일대의 통칭 가운데 '''계림'''(鷄林)이 있는데, 설화에는 닭이 아닌 '''말'''이 등장하고 있다. 김알지 탄생 설화에는 멀쩡하게(?) 닭이 나왔음을 떠올려보자.[15] 혁거세의 건국 시기와 일치하는 구정동·조양동 등 경주의 여러 고분에서는 철제품과 철제 무기가 다량으로 출토됐다. 그 중 주목할 것이 철제 마구(말재갈)인데, '''청동제 마구는 경주에서 나온 적이 없다'''. 이는 기마 세력이 철기도 함께 챙겨들고 왔다는 뜻이다.[16] 《삼국사기》의 연도를 일단 믿는다면 박혁거세 동시대의 중국은 전한 말기로 점차 막장으로 치닫는 중이었으니 객관적으로 봐도 살기 좋은 시대는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