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문왕
1. 개요
葛文王. 신라 때 국왕과 일정한 관계하에 있는 신라 최고 성씨집단의 씨족장, 혹은 가계(家系)의 장에게 준 칭호. 삼국사기뿐 아니라 울진 봉평리 신라비 등의 당대 금석문에서도 보이는 명칭이다. 다만 삼국사기 편찬자는 이를 기록하며 "신라 사람들은 추존왕들을 갈문왕이라고 부르던데 이게 뭔 뜻인지는 모르겠음."이라고 기록해놓았다.
15년(서기 148), 박아도(朴阿道)를 갈문왕에 봉했다.【신라에서는 죽은 뒤에 봉하는 왕을 모두 갈문왕이라고 부르는데, 그 뜻은 상세하지 않다.】
十五年封朴阿道爲葛文王.【新羅追封王皆稱葛文王, 其義未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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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상세
라고 두산백과는 서술하였다. 하지만 왕의 생부나 장인이 모두 갈문왕 작위를 받지는 않았으며, 왕의 숙부나 왕제 등에게도 갈문왕의 작위가 내려지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 따르면 박씨왕 시대에는 주로 왕비의 아버지, 석씨왕 시대에는 주로 왕의 생부나 외조부, 부자 상속이 확립된 마립간 시대 이후 왕의 동생이 받은 것으로 설명하고 있으므로 두산백과의 견해는 박씨와 석씨 왕 시대에서만 유효한 설명이 된다.《삼국사기》에 보이는 갈문왕은 왕의 생부의 경우, 골정(骨正:助賁王의 부) ·세신(世神:沾解王의 부) ·습보(習寶:智證王의 부) ·입종(立宗:眞興王의 부) ·국반(國飯:진덕여왕의 부) 등이 추봉되었고, 왕의 장인의 경우, 일지(日知) ·허루(許婁) ·마제(摩帝) ·지소례(支所禮) ·내음(奈音) ·이칠(伊柒) ·복승(福勝) 등이 추봉되었다.
울주 천전리 각석에 따르면 갈문왕의 부인은 '''왕비'''라고 불렀는데, 같은 명문 안에서도 일반 귀족의 부인은 처(妻), 또는 부(婦)로 호칭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금석문에서 우리가 아는 '''신라국왕'''은 "대왕", "태왕", "매금왕" 등으로 미칭을 추가해 불렀기에 구분이 되었다.
신라 역사는 조선 역사만큼 대중적으로 읽히는 역사가 아닌데다가 관련 기록이 조선보다 적어 명확히 알려지지 않은 것이 많은지라, 조선의 대원군과는 달리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단어였지만 대왕의 꿈에서 진덕여왕의 아버지인 국반 갈문왕이 등장해 지상파를 타면서 널리 알려진 적이 있다. 갈문왕이 작위가 아니라 시호인 줄 알았다는 사람들도 많은 모양.
사실 대원군과 비슷한 직위였을 가능성이 높은 것뿐, 구체적으로 뭘 위한 직위였는지는 알 수 없는 상태다. 이에 대해선 더 연구가 필요한 상황. 학자에 따라 갈문왕은 대왕(代王)·군장(君長)을 뜻할 것이라는 등 이설(異說)도 있다. '대왕' 즉 '대신하는 왕'이라고 해석하는 쪽에서는, '서로 번갈아들며 교차되다.'는 뜻의 갈마들다라는 순우리말이 있음을 근거로 삼는 듯하나, 해당 단어는 19세기부터 문헌상 확인되는 어형으로 확실하지는 않다. 해당 설이 사실이라면 '갊은 왕 → 갈문왕'의 음차라는 해석인 셈이다[1] . 혹은 중세 한국어 어형 ᄀᆞᇕ다(나란히 놓다)와 상관이 있을 수도 있겠는데[2][3] , 만약 갈문왕이 위 동사의 활용형을 쓴 'ᄀᆞᆯᄫᆞᆫ王'의 고형이었다고 가정한다면, 해당 어휘는 '공동국왕' 내지는 '왕에 버금가는 왕' 정도의 뜻이었을 수도 있으나, 뒷받침하는 기록이 없어 추측에 머무를 뿐이다.
503년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영일 냉수리비"에서는 "지도로 갈문왕"이란 명칭이 나오는데, 이 명칭의 주인으로 추정되는 자는 지증왕이다. 하지만 503~4년은 삼국사기에 따르면 지증왕이 즉위한 지 4년이나 지난 다음이기 때문에, '대신하는 왕'의 뜻으로 갈문왕이라는 단어를 풀이한다면 어째서 "국왕"이 "갈문왕" 작위를 쓰고 있는지 알 수 없어진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갈문왕 출신으로 즉위하면 왕위에 오르고도 몇 년 동안 그냥 갈문왕을 사용했다는 주장을 하기도 하지만, 이 역시 배경이 깔끔해지지는 않기 때문에 문제.
갈문왕이 부왕#s-3(副王)으로서 존재하였다는 견해도 존재한다. 구체적으로 신라 6부 중 김씨 왕족의 근거 부족은 탁(喙)부와 사탁(沙喙)부였다. 그 중 실제 왕은 탁부에서 대대로 배출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사탁부는 김씨 왕족의 제2부족으로서 탁부 출신의 왕을 지지하는 부족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갈문왕은 바로 이 사탁부의 수장으로서 왕의 강력한 지지세력이자 버금가는 위치였다는 추론이다. 그러나 이러한 추론에서도 포항 냉수리 신라비(503년)에서 이미 즉위하였던 지증왕(500년에 즉위)이 사탁부의 지도로 갈문왕으로 등장한 것이 설명되지 않는다.
최근에 나온 학설로는 탁부 매금왕이었던 소지 마립간의 후계로 사촌이며 사탁부의 수장인 지증왕이 신라의 전체 통치권을 계승하고, 지증의 장남인 법흥왕이 탁부의 수장직을, 차남인 입종이 사탁부의 수장직을 이어받았으며, 지증왕은 탁부 출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즉위 초기에는 사탁부 갈문왕을 칭하다가 탁부 쪽의 불만세력을 숙청하고 왕권이 공고화된 후에야 6부를 초월한 '신라 왕'을 칭했다는 학설이 있다. 이에 따르면 지증왕이 최초로 마립간 대신 왕(王)을 칭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도 여기 연관시키기도 한다.
갈문왕 제도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중대 이후로는 오랫동안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신라국왕이 전제왕권을 가지게 되면서 사용이 중단된 듯하다. 허나 신라 하기로 갈수록 왕권이 약화 되면서 충공 갈문왕이 다시 등장하게 된다. 삼국사기 기록상 마지막 갈문왕이다.
3. 역대 갈문왕
신라/왕사 참조.
4. 대중매체에서 보인 모습
- 위서논란이 있는 화랑세기 필사본에서도 갈문왕이 여러 명이 더 보이지만 검증되지 않았으므로 제외. 사용목적은 현재의 신라왕이 자신 시조의 사당이나 묫자리에서 이전에 죽은 사람을 더 높은 직위로 추존하여 왕권 강화를 위해 사용한 것으로 보여진다.
- 드라마 대왕의 꿈에서 국반 갈문왕이 등장한다.
[1] 일부는 해당 어형을 현대어 '''갈무리'''의 어원으로 보기도 하나, 해당 단어는 《두시언해》에서 확인되는 중세 한국어 단어 '갊다(감추다, 저장하다)'의 파생형(갊- + -오리)으로 '갈마들다'와는 별개의 어원이다.[2] 예를 들어, 《훈민정음 언해본》에서는 병서(竝書)를 뜻하는 말로 'ᄀᆞᆯᄫᅡ쓰다'라는 동사가 확인된다.[3] 중세 한국어의 어형이 상당수 남아 있는 제주어에서도 쌍둥이에 해당하는 'ᄀᆞᆯ오기'라는 단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