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마 이사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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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라의 제6대 국왕. 칭호는 이사금. 파사 이사금의 아들이다. 왕비는 마제(摩帝) 갈문왕의 딸 애례부인(愛禮夫人) 김씨이다.
2. 즉위 이전
신라 초기는 아직 장자 계승이 확정되지도 않아 왕위 순서가 복잡한데 박지마는 아버지 박파사의 태자로서 비교적 순조롭게 성장할 수 있었다.
지마가 애례부인을 얻은 일화가 고대의 왕치고는 비교적 자세하게 남아 있다. 그가 아직 태자이던 시절 아버지 파사 이사금과 호숫가에서 사냥을 즐기고 돌아오는 길에 한기부에 들렀는데 허루(許婁)라는 사람이 잔치를 열어 대접했다. 술기운이 오르자 허루는 어린 딸에게 나와서 춤을 추게 했는데 파사 이사금과 태자에게 잘 보이기 위한 목적이었을 것이다. 김씨 성을 가진 마제(摩帝)라는 사람도 딸을 춤추게 했는데 태자 박지마는 오히려 마제의 딸을 마음에 들어했고 반면 허루의 딸에게는 별로 관심이 없어했다. 아랫사람의 딸이 오히려 태자의 관심을 받자 허루는 기분이 좋지 않았는데 이걸 뒤에서 보던 파사 이사금이 마제의 딸은 태자의 비로 삼고 마제의 상급자인 허루는 멋진 연회를 열어준 공으로 대신 더 높은 관직을 줘서 위로했다는 것이다.
3. 재위
재위 기간 동안에는 즉위하자마자 일단 백제에는 사신을 보내 동맹을 맺고 주로 덤비는 가야를 공격했다. 먼저 115년 2월 가야가 남쪽 변방에 쳐들어와 노략질하자 그 보복으로 115년 7월 친히 병력을 이끌고 황산하[1] 를 건너 가야를 공격했지만 숲에서 가야군 복병을 만나 몇 겹으로 포위당해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1년 뒤 116년 8월에는 부대를 둘로 나눠 1만명 이상을 동원해 다시 친정했지만 이번에는 가야가 성문을 닫고 우주방어를 하는 통에 장마까지 와서 별 소득 없이 군사를 되돌리기도 했다.
동해를 건너오는 일본 군세의 침략에는 주로 당하는 편이었다. 121년 4월에 왜가 동쪽 변경을 침략하였고 122년 4월에는 왜가 쳐들어온다고 하는 소문에 서라벌 사람들이 모두 산골짜기로 튀어버려서 왕이 일일이 사람을 보내 헛소문이라고 내려오라고 하는 해프닝이 있기도 했다. 123년 3월에 결국 일본과 화친해 이 때부터는 거의 80년 가까이 일본군이 신라에 쳐들어오는 기록이 없어진다. 일본에서 히미코가 여왕에 올랐을 때 신라는 다다음 왕인 아달라 이사금이었으니 중국 측 기록인 삼국지 위지동이전을 참고하면 지마 이사금 때가 대강 히미코가 등장하기 전에 있었다는 일본의 혼란기였기 때문에 내부 사정이 복잡해 대한해협 건너편까지 신경 쓸 상황이 아니게 됐을 수도 있다.
일본과 화해한 후에는 그동안 별 말이 없던 북방의 말갈족이 자주 쳐들어오기 시작한다. 다만 이 말갈은 훗날 여진족, 만주족으로 이어지는 퉁구스계 부족이 아니라, 실제로는 지금의 강원도 지역에 분포하던 동예 계통 집단으로 추정되고 있다. 위말갈 문서 참조. 아무튼 이들은 125년 1월과 7월에 두 번 쳐들어와 약탈을 하자 백제에게 지원군을 요청해 이들을 물리치기도 했다. 이렇게 백제와는 사이가 좋았던 편이다.
134년 8월에 죽었는데 자식으로는 딸인 아달라 이사금의 왕비 내례부인(內禮夫人)만 있었다. 그래서 지마 이사금의 큰아버지인 일성 이사금이 다음 왕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역사학계에서는 일성 이사금이 지마 이사금의 큰아버지가 아닐 가능성이 높다[2] 고 보고 있어 이 부분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3]
그 이름 말고는 특이한 점은 없고 천재지변이 좀 있었다. 황충이라든가 서리라든가 우박이라든가 홍수라든가 가뭄이라든가 전염병이라든가 화재라든가 지진이라든가 하나씩 골고루 발생했다. 그 외에 일식과 혜성의 기록도 몇 차례 있다. 참고로 지금이야 단순한 천문 현상인 것을 다들 알지만 전근대 시대에는 동양과 서양을 막론하고 일식과 혜성이 별로 좋지 않은 징조로 여겨졌다. 서양에서 이런 미신이 깨진 것도 16세기나 되어서였다. 에드먼드 핼리 문서 참조.
참고 자료: 위키백과, #, 삼국사기
4. 그 외
문서 최상단에도 있지만 성이 박씨이므로 본명은 '''박지마'''.[4] 신라의 제8대 국왕 아달라 이사금 '''박아달라'''와 함께 이름의 묘한 어감이 주목받기도 한다. 거기에 더해 왕까지는 못 오르고 갈문왕까지만 올라 인지도는 낮지만 아들인 '''박아도'''[5] 도 있다.
5. 삼국사기 기록
'''《삼국사기》 지마 이사금 본기'''
一年冬十月 지마 이사금이 즉위하다
二年春二月 시조묘에 제사지내다
二年春三月 백제가 사신을 보내오다
三年春三月 우박이 보리를 상하게 하다
三年夏四月 큰 비가 내린 뒤 사면을 단행하다
四年春二月 가야가 남쪽 변경을 침범하다
四年秋七月 가야를 친히 정벌하다가 황산하에서 퇴각하다
五年秋八月 가야를 치다가 큰 비 때문에 중단하다
九年春二月 큰 별이 월성 서쪽에 떨어지다
九年春三月 서울에 전염병이 돌다
十年春一月 이찬·파진찬·아찬을 임명하다
十年春二月 대증산성을 쌓다
十年夏四月 왜인이 침입하다
十一年夏四月 왜군의 침공 소문으로 도망하는 사람들이 많다
十一年秋七月 메뚜기 피해로 기근이 들다
十二年春三月 왜국과 강화를 맺다
十二年夏四月 서리가 내리고 금성 동쪽의 백성들 가옥이 연못으로 변하다
十三年秋九月 일식이 일어나다
十四年春一月 말갈이 북쪽 변경을 침입하다
十四年秋七月 말갈의 침입을 백제의 도움으로 물리치다
十六年秋七月一日 일식이 일어나다
十七年秋八月 꼬리가 긴 살별이 하늘에 뻗치다
十七年冬十月 지진이 일어나다
十七年冬十一月 천둥이 치다
十八年 파진찬 옥권을 이찬으로 삼다
二十年夏五月 홍수로 가옥이 떠내려가다
二十一年春二月 궁궐의 남문이 불타다
二十三年夏六月 봄과 여름에 가물다
二十三年秋八月 왕이 죽다
[1] 지금의 낙동강 하류, 경상남도 양산시 물금으로 추정.[2] 일성 이사금 문서에서 자세히 설명되어 있지만 나이 차이 문제로 삼촌이 아니라 실은 중간에 한 사람이 빠졌을 가능성이 높다고 학자들은 본다.[3] 족보에는 지마 이사금에게 아들과 손자가 있다고 나오는데 여기서 손자라고 나오는 박아도는 그와 관계된 설들이 복잡한지라(그 중 하나가 일성 이사금의 아버지라는 것) 좀 문제가 있다. 어쨌든 역사학계에서는 지마 이사금에게 아들이 없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4] 祗은 기로 읽혔으므로 박기마, 박기미. 신라의 옛 촌장 지타는(祗陀) 只他로도 쓰는데 只는 예전에 기로 읽혔다.[5] 경상도 사투리 반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