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상
1. 소개
'''《삼국사기》 제45권 열전 제5 박제상'''
신라의 관료이자 충신(忠臣). 영해 박씨의 시조. 《삼국사기》 열전에서는 박혁거세의 후손이자 파사 이사금의 5세손이라고 한다. 박아도의 손자이자 파진찬 물품(勿品)의 아들로 이름을 모말(毛末)이라고도 한다.[3] 삼국사기 초기 기년만으로 보면 박아도나 물품의 수명이 비정상적으로 길어지는데 당연히 그럴리 없다. 오늘날 역사학계에선 삼국사기의 계보 관련 기사들은 대체로 취신할만하지만 초기 기년은 곧이곧대로 믿을 수 없다고 보기에, 굳이 말하자면 박아도나 물품은 삼국사기 기록보다는 후대 인물이라고 본다.
《삼국유사》에는 김제상, 즉 김씨로 기록되어 있다.[4]
《일본서기》에는 박제상의 이름을 모마리질지(毛麻利叱智)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이는 《삼국사기》에 나온 이름 모말+존칭어미 또는 관직명 질지인 것으로 보인다. 일본서기에서는 모마리질지가 일본에 볼모로 온 신라 왕자 미질기지 파진간기[5] 을 신라로 빼돌리고 붙잡혀 화형을 당했으며 일본군이 보복으로 모마리질지가 다스리던 초라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약탈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박제상 관련 설화에서 빠지지 않는 박제상의 부인 치술부인은 삼국유사 왕력 제18대 실성마립간조에 의하면 실성의 딸이다. 즉 박제상은 눌지와 마찬가지로 실성 마립간의 부마였던 것이다.
박제상의 가문 행록에는 그의 아들이 백결선생으로 되어 있으나 《삼국사기》 등의 기록에는 나와있지 않다. 《삼국유사》에는 딸만 셋이라고 기록돼 있다. 한편 미사흔은 자신을 살려낸 박제상의 차녀와 결혼하는데, 박제상의 아내 치술신모가 왕의 장모를 뜻하는 국대부인으로 추존된 점을 고려하면 장녀는 눌지 마립간의 2처가 된 것으로 보인다.
2. 생애
삽량주(歃良州)[6] 의 간(干) 벼슬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간은 거서간, 마립간 할 때의 그 간과 같은 글자다. 선대의 거주지는 경주였으나 양산 일대를 중심으로 세력을 구축한 세력가였던 것으로 본다.
신라 제17대 내물 마립간에게는 김눌지, 미사흔, 복호 3형제가 있었다. 내물 마립간이 죽으면 김눌지가 왕위를 잇는게 맞았겠지만 399년 광개토대왕이 신라 대신 백제, 가야, 왜 연합군을 물리쳐준 대가로 신라는 50여 년간 고구려의 간섭을 받게 된다. 402년 내물 마립간이 죽자 고구려는 고구려에서 오랫동안 지냈던 친고구려파 인물 김실성을 왕위에 오르게 만드는데 제18대 실성 마립간이다.
실성 마립간 때 각각 고구려와 왜에 눌지 마립간의 두 동생들이 인질로 갔다. 사실 인질을 보내는 이유는 '너희에게 거슬리는 짓은 하지 않겠다'라는 뜻이고 만약 어긋나면 인질은 죽을 것이다. 그런데 실성 마립간 입장에서 복호와 미사흔은 정적이므로 고구려나 왜에서 죽어도 별로 손해가 아니다. 고구려나 일본에 선심쓰는 척도 하고 전왕의 아들들을 신라 밖으로 보내서 세력을 약화시키고 숙청시키려는 목적이었던 듯하다.[7]
원년(402) 3월에 왜국(倭國)과 우호 관계를 맺고 내물왕의 아들 미사흔(未斯欣)을 볼모로 삼았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실성 마립간 원년
제17대 나밀왕(那密王)[8]
36년 경인(390년)에 왜왕이 사신을 보내 와서 이르기를“우리 임금이 대왕께서 신성하다는 말을 듣고 신 등을 시켜 백제가 지은 죄를 대왕에게 아뢰게 하는 것이오니, 원하옵건대 대왕께서는 왕자 한 분을 보내어 우리 임금에게 성심을 나타내시기 바랍니다.”
라 하였다. 이에 왕은 셋째 아들 미해(美海)【미토희(未吐喜)라고도 한다.】를 왜국에 보냈는데 이때 미해의 나이가 열 살이었다. 말과 행동이 아직 익숙지 않았으므로 내신(內臣) 박사람(朴娑覽)[9]
을 부사로 삼아 왜국에 보냈다. 왜왕이 이들을 억류하여 30년 동안이나 보내지 아니하였다.
삼국유사 김제상
나중에 눌지 마립간이 실성 마립간에게 복수하고 즉위했는데 눌지 마립간은 친동생들을 신라로 다시 데려오고 싶었다. 협상을 잘하는 사람을 신라 전국에서 찾았는데 가장 추천을 많이 받은 이가 박제상이었다.이에 신라왕 파사매금(波沙寐錦)[10]
은 미질기지파진간기(微叱己知波珍干岐)를 볼모로 하여 금(金)‧은(銀)‧채색(彩色)‧능(綾)‧라(羅)‧縑견(絹)을 배 80척에 싣고 관군(官軍)을 따르게 했다.
《일본서기》 진구 황후기.
2.1. 복호를 구하기 위해 고구려로
박제상은 눌지 마립간 2년(418년)에 고구려로 가서 눌지 마립간의 아우인 복호를 신라로 데려오는데 성공하고 돌아왔다. 빼 오는 방법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다른데 《삼국사기》에서는 장수왕을 찾아가 유려한 문장으로 설득해서 데려왔고 《삼국유사》에서는 고구려 추격군의 죽을 고비를 넘겨가며 몰래 빼 왔다. 사실 강원도 고성 항구에서 추격군에 따라잡혔는데 복호가 고구려에 있을 때 주변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었기 때문에 추격군들은 복호를 불쌍히 여기어 모두들 화살촉을 뽑고 쏘았다고 한다.
2.2. 미사흔을 구하기 위해 일본으로
이후 눌지 마립간은 “마치 몸 하나에 팔 하나만 있고 얼굴 하나에 눈 하나만 있는 것 같다"고 하여 다른 동생 미사흔도 데려와달라고 박제상에게 부탁했다.
박제상은 죽을 각오를 하고 집에도 들르지 않고 곧장 율포(栗浦)의 해변에 이르렀다. 박제상의 아내는 소식을 듣고 말을 달려 율포까지 쫓아왔지만 남편은 벌써 배에 올라 타 있었다. 아내가 간절하게 불렀지만 박제상은 손만 흔들어 보일뿐 배를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 박제상은 왜 왕조와 접촉하여 신라를 배신하고 왜인(倭人)으로 귀화하러 왔다고 왜왕(倭王)을 속이면서[11] 왜왕의 명으로 신라를 공격하는 군대의 선봉이 되었다.“신이 비록 재주가 노둔하오나 이미 나라에 몸을 바쳤으니 끝까지 명을 욕되게 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고구려는 큰 나라이고 그 왕 또한 어진 임금이었기 때문에 신이 한 마디 말로써 그를 깨닫게 할 수 있었사오나, 왜인 같은 경우는 말로써 깨우칠 수 없으니 속임수를 써야 왕자를 돌아오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이 저 곳에 가거든 신이 나라를 배반하였다는 이야기를 퍼뜨려서 저들이 그 소문을 듣게 하소서.”
진군하는 길에 바다 위에 있는 산도(山島)에 이르러서 박제상은 미사흔에게 몰래 혼자서 본국으로 돌아가도록 해놓고 자신은 "어제 배를 타서 몸이 노곤해 못 일어나겠다"는 핑계로 일부러 늦잠을 자면서 미사흔이 도망칠 시간을 벌었다. 이렇게 눌지 마립간의 아우 미사흔을 신라로 도망시키는데는 성공하였지만 이 사실이 왜왕에게 알려지면서 결국 왜왕을 속이고 죄인을 방도하게 한 장본인으로 체포되어 고문을 받았다. 이 때 《삼국유사》의 내용에 따르면 왜왕은 '왜국의 신하가 된다면 상을 내리고 계림의 신하로 남는다면 온갖 형벌을 가할 것'이라고 회유협박했지만[12] 박제상은 '차라리 계림(신라)의 개돼지가 될지언정 왜국의 신하는 될 수 없다'며 거절했다.
이에 목도(木島)로 유배를 보냈다가 박제상을 발바닥 가죽을 벗기고 뾰족하게 베어놓은 갈대 풀밭 위를 걷게 하고 벌겋게 달군 쇠 위를 걷게 하는 등의 끔찍한 고문 끝에 화형에 처하게 되면서 419년 왜에서 사망하였다. 신라의 눌지 마립간은 박제상의 충정에 보답하고자 박제상의 차녀를 미사흔의 아내로 맞아들였으며 대아찬 관품을 추증하고 포상을 내렸다. 이후 미사흔과 차녀 사이에 난 딸이 461년에 제20대 자비 마립간과 혼인하여 제21대 소지 마립간을 낳으니 비록 본인은 타지에서 생을 마쳤지만 외손이 임금에 오르게 된 것이다.
《일본서기》에 기록된 일화는 조금 다르다. 모마리질지(毛麻利叱智)(박제상)가 오례사벌(汙禮斯伐), 부라모지(富羅母智)와 함께 일본으로 향했다고 나와 있다. 이들은 일본에 도착한 후[13] 미사흔에게 뭔가 꾀를 귀띔해주었다. 그리고 미사흔이 진구 황후에게 "내가 일본에 오래 머물러 있어서 왕이 의심을 해 가족을 모두 노비로 만들어버렸다. 그러니 잠시 본토로 돌아가 그 일을 해결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부탁하고 진구 황후가 그 말을 듣고 카츠라기노 소츠히코(葛城襲津彦)를 딸려 보내준다. 미사흔 일행이 대마도에 도착했을 때 박제상이 뱃사공과 짜고 미사흔만 신라로 돌려보내는데 성공한 후 잡초를 이용해 사람 모양의 인형을 만들고 카츠라기노 소츠히코에게 "미사흔이 아파 죽으려고 한다."라며 간호를 부탁한다. 이에 카츠라기노 소츠히코가 사람을 붙여주었는데 알고 보니 그게 인형이었고 세 사람 모두를 화형에 처했다.
3. 박제상과 관련된 유적지
전국 이곳저곳에 박제상과 관련된 설화가 전해지는 유적지가 많이 존재한다.
3.1. 경주 장사 벌지지
경상북도 경주시 배반동 망덕사지 남쪽의 남천 제방 위에 있다. 박제상이 고구려에서 복호를 구출한 후 집에 들르지도 않고 바로 미사흔을 구하기 위해왜국으로 떠날 때 치술부인이 남편의 뒤를 쫓다 만나지 못하자 주저앉아 울부짖던 곳이라고 한다. 현재 비석이 세워져 있다.
3.2. 치술령
경주시 외동읍과 울산광역시 울주군 두동면 경계에 있는 산으로, 산꼭대기에는 박제상의 부인이 동해를 바라보며 남편을 기다리다 바위가 되었다는 망부석과 치술부인을 기리는 사당, 기우단 등이 있다.
3.3. 은을암
울산 울주군 범서읍 소재. 치술부인이 남편을 기다리다 죽어 몸은 망부석이 되고 영혼은 새가 되어 바위 속으로 숨어 그 바위가 은을암으로 전해진다. 은을암 바위 앞에 은을암이라는 사찰을 세웠다.
3.4. 치산서원
울산 울주군 두동면 소재. 박제상과 부인 및 두 딸의 충혼을 기리기 위해 조선시대에 세운 서원이다.
3.5. 효충사
경상남도 양산시 상북면 소토리 소재. 박제상의 생가로 전해지고 있으며 사당 안에 박제상과 백결선생을 모시고 있다. 조선 숙종과 정조가 직접 지은 시가 걸려 있으며 매년 음력 3월 5일에 제를 지낸다.
3.6. 경양사
강원도 강릉시 저동 293번지 소재. 강릉 박씨 경포 문중에서 박제상을 제사지내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3.7. 박제상 순국비
일본 쓰시마의 가미아가타초의 사고 마을에 있다. 신숙주는 해동제국기에서 이 곳이 왕자 미사흔을 구해내고 박제상이 죽은 곳이라 기록했는데, 신숙주 본인이 일본에 자주 사행하면서 지도를 비롯한 여러 정보를 채록한 만큼 조선시대 당시에 일본 현지에서 이러한 전승이 전해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박제상을 기리는 순국비가 세워졌다.
4. 기타
- 박제상의 아내도 매우 유명한데 그녀가 딸들을 데리고 왜가 보이는 바닷가로 가서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가 돌이 되어 죽었다는 망부석(望夫石) 일화의 주인공이 박제상의 부인이다. 박제상이 출발할 때 그녀는 이를 듣고 쫓아갔으나 남편을 만나지 못했고 망덕사 정문의 남쪽 모래벌에서 아무렇게나 누워서 오래 울었다. 그래서 모래벌을 '장사(長沙)'라고 이름지었다고 하며 친척 두 사람이 부인을 부축하고 돌아오려고 했지만 어지간히 상심했는지 부인의 다리가 풀려서 앉은 채 일어나지 못했다고 한다. 그 땅을 '벌지지(伐知旨)'라고 이름붙였다고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다. 박제상의 아내가 남편을 기다렸다는 곳은 경상북도 경주시와 울산광역시의 경계에 있는 고개인 '치술령'(14번 국도)이라는 고개라고 전해진다. 오늘날에도 이곳에는 박제상 사당이 있으며 박제상의 처는 죽어서 '치술신모'라는 이름의 치술령 산신으로 모셔졌다고 한다. 오늘날에도 치술령 정상에는 치술신모를 모신 '신모사'라는 사당이 있었다는 표시가 있으며 치술령 아래에 살던 사람들은 비가 오지 않으면 치술신모에게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조선 시대에는 치산 서원으로 확대됐고 없어졌다가 1993년 다시 복원됐다.
[1] 간은 삼국사기 기록, 태수는 삼국유사 기록이다. 태수는 후대의 [2] 모두 삼국유사 기록.[3] 이로 보아 '提上'의 훈독이 '모말'인 것으로 보인다. 제(堤)는 토(吐)로 읽고 모(毛)는 량(梁)으로도 쓴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량은 도(道)로 읽을 수 있다.[4]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의 성씨 기록은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예로 들면 이사부가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박-석-김 3성으로 칭해지지만 실제로는 박씨가 초월적인 위치이고 석-김은 본관의 역할이 컸다는 점을 감안하면 모순되는 서술은 아니다.[5] 미사흔 파진찬.(미시코치 하토리칸키(당시 가나 음가: '''미시코티 파토리칸키'''): ミシコチハトリカンキ)[6] 지금의 경상남도 양산시.[7] 본인도 앞서 내물왕에 의해 고구려에 인질로 보내졌던 적이 있으니 그에 대한 복수심도 있었고.[8] 내물왕이다.[9] 이름이 '사람'이다.[10] 파사 이사금. 눌지 이사금과는 까마득히 연대 차이가 있는데 여기서 등장하는 이유는 일본서기에 진구 황후의 신라 정벌 당시의 신라왕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신라 정벌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던 사건이었으니 그냥 끼워맞추기 역사왜곡.[11] 삼국사기에는 왜왕이 박제상의 말을 쉽게 믿을 수 있었던 이유로 1) 앞서 왜에 들어와 있던 백제인으로부터 "'''신라가 고구려와 함께 왜를 침공하려 하고 있다'''"고 참소해서 왜왕이 병력을 보내 신라 국경 바깥에서 순찰하게 하였는데 이들이 때마침 어떤 이유로 쳐들어온 고구려군에 의해 피살당했고, 2) 박제상이 왜로 떠나면서 미리 자신이 역모를 꾀하다 발각되어 도망친 것처럼 소문을 퍼뜨리라고 눌지왕에게 일러두고 갔었는데 왜왕이 신라에 보낸 첩자가 마침 돌아와서 "신라가 미사흔과 박제상의 가족들을 모두 역모죄로 잡아 가두었다"고 보고했기 때문이라고 되어 있다.[12] 물론 삼국사기에 따르면 왜국도 신라를 치는데 미사흔과 박제상을 선봉으로 삼으면서 "'''신라를 멸망시키고 나면 미사흔과 박제상의 가족들을 전부 왜로 잡아오자'''"고 했었다.[13] 접촉한 날짜가 《일본서기》 진구 황후기에 나오는데 진구 황후 5년(201년) 3월 계묘(癸卯) 초하루 기유일(己酉日), 그러니까 삼국사기에 묘사된 연도와 무려 200여 년이 넘게 차이가 난다. 단 마냥 구라는 아닌데 삼국사기 초기 기록에 오류가 있기도 하고 교차검증과 이주갑인상 등을 통해서 어느 정도 시기를 맞출 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