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만 암살 사건

 



1. 개요
2. 사건 경위
3. 박용만은 변절했는가?
3.1. 박용만에 대한 독립운동가들의 견해
3.2. 박용만의 의심스러운 행적
3.3. 박용만의 행적 재구성
4. 암살자 이해명의 실체


1. 개요


1928년 10월 17일 독립운동가 박용만중국 베이징에서 의열단원으로 알려진 이해명(李海鳴)에게 암살된 사건.

2. 사건 경위


박용만의 최측근인 김응팔(金應八)과 중국인 아내 웅씨 등의 진술에 따른 사건의 전개 과정은 다음과 같다. 박용만이 사업에 열중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옛 동료 지청천 또는 베이징의 독립운동단체가 이해명 등에게 "지금 몹시 궁색하니 돈 좀 얻어오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에 이해명과 동료 1명이 자발적으로 군자금을 요청하기 위해 박용만을 찾아갔다. 두 사람은 오늘 온 목적은 군자금 대양은(大洋銀) 1천원을 빌리자는 것과 긴급하게 써야 된다는 취지의 이야기를 했고, 박용만의 측근인 김응팔이 이를 듣고 있었다.
하지만 박용만은 그만한 돈을 하루 이틀에 준비할 수 있을 정도로 자금의 여유가 없었다. 그는 적당히 점심이라도 대접하고 돌려보내려 했다. 그런데 말이 오가던 중 이해명이 박용만을 모욕했다. 그러자 박용만이 분연히 지리를 차고 일어나 나가려 했다. 이에 이해명은 권총을 빼들고 위협했고, 박용만은 격노해 권총을 빼앗으려다 손을 다쳤다.
그후 박용만이 이해명의 머리채를 붙들었고, 이해명은 순간적으로, 또는 엉겁결에 권총을 발사했다. 박용만은 총탄 세발을 맞고도 이해명의 머리채를 움켜쥐고 놓지 않았다. 이때 이해명의 동료로 따라온 '백씨'는 홀로 도망가버렸다.
반면 이해명은 박용만이 변절하여 일제에게 빌붙어 주구 노릇을 하므로 분연히 나서서 응징했다고 주장했다. 중국인들 역시 박용만을 일제에 협력한 자로 인식했고, 박용만을 암살한 이해명의 법정진술에 갈채를 보냈다. 결국 중국 법정은 이해명을 애국자라 하여 정치범으로서 징역 4년형을 선고했다.
유족은 이에 불복해 항소했지만, 곧 남편이 통적(通敵) 행위가 없었다는 것만 선포하여주면 이해명의 형기에는 상관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내비친 뒤 항소을 취하했다. 박용만에 대한 적의와 불신이 가득했던 당시 분위기를 의식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3. 박용만은 변절했는가?



3.1. 박용만에 대한 독립운동가들의 견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비롯한 박용만 반대파들은 박용만이 변절한 게 분명하다고 봤다. 1928년 11월 20일, 김구는 이승만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이번에 북경에서 이해명이 박용만을 처형한 것을 암살이라고 하고 장편설(長篇說)을 기재한 것은 우리 독립운동자는 물론 모모주의자들도 삼일신보 에 침을 뱉을 것입니다. 우리가 박용만이 적 총독부에 투항하고 목등(木藤)놈과 동행하여 비밀입국하야 철도여관에서 묵으면서 기밀비를 받아가지고 나온 일이 발각되었습니다.

청년들이 총살하려고 함을 알고, 박은 비밀히 하와이에 가서 노동동지들을 꾀어 자금을 긁어모아 가지고 북경에 몰래 와서 중국여자를 첩으로 두고 농간을 부리므로, 이해명이 총살하고 즉석에서 피포 되어 중국법정에서 조사한 결과 정치범으로 5년 역을 선고받은지라. 박의 첩이 박용만이 평시에 운동하던 문적을 제출하고 이러한 역사가 있는 사람을 정탐이라 하느냐 항고하는 것을 안 북경의 우리 각 단체들이 연합증명을 하고, (임시)정부에서 중국정부에 박용만의 죄상이 사실임을 통보하였습니다.

다른 독립운동계열 인사들 역시 박용만을 부정적으로 바라봤다. 1928년 10월 21일 중국신문 <세계일보>는 박용만의 피살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사를 실었다.

이달 17일에 숭외상 2조에 살던 박용만 피살사건이 발생한 후 각방에서의 보도가 옳지 못한 점들이 있어 지금 취재하여 얻은 실정을 다음에 게재한다. (중략) 서력1919년 구라파전쟁이 끝난 후 한인들도 독립을 선포하게 되고 임시정부를 상해에 설립하게 되었는데, 박도 경력관계로 외무부장에 추천되어 중국에 건너와 독립당의 환영을 받은 바 있었다.

그런데 중국에 온 후 독립당에 충성스럽지 못한 행동이 하나둘이 아니었기에 크게 당의 신용을 잃었고 후에 박은 음밀히 북평주재 일본정보원 모와 연락하여 조선총독부에 항복하여 남몰래 두 차례나 조선에 들어가 타합한 바 있다. 이것이 폭로된 후 한당의 간부는 곧 사형선고를 내렸다.

박은 한인사회에 용납되지 못할 것을 알고 또 미영토 호놀룰루에 도망가서 재미한국인 노농단체들을 속여 수만금을 빼앗고 북평에 돌아와 소위 대륙농간공사를 조직하고 편안한 생활을 도모하고 있었다. 이번 피살사건이 일어나자 많은 한인들이 잘했다고 하였다. 범인 이 아무개가 돈을 꾸려다 못 꾸어 죽였다는 이야기는 마땅히 사실을 엄폐하려는 낭설일 것이다.

1929년 4월 30일 한국독립당 난징족성회는 '중국동포에게 삼가 알리는 글'을 중국 법정에 제출했다. 이 글은 박용만에 적대적이었던 독립운동가들의 인식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한국독립당 하북(河北) 교우부(交友部)가 보내온 편지에서 저희 나라 사람 이해명군이 박용만을 총살한 사건이 해당 지역 법정(法庭)의 일심과 재심 심판처를 거치면서 5년 2개월의 도형(徒刑)에 처해졌으나 북평(北平;北京) 고등법원 검찰관 석병주(石秉鑄)군이 승복하지 않고 장차 수도(首都) 대리원(大理院)의 제3심 최고법정에 항소를 제기할 것이라는 내용을 접했습니다.

이런 자는 십수년간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혁명은 하지 않고 반혁명을 하는 데 이르렀고, 적국에 붙어 적국의 주구[犬]가 되었습니다. 이 말이나 소나 노예와 다름없는 자의 남은 여생에 대해서는 장차 죽여버린다 해도 애석할 것이 없습니다. 근근히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조국 인민들의 반 가닥도 안 되는 삶의 희망을 일방적으로 내던진 것은 마치 살무사나 도마뱀 같은 마음으로 승냥이나 여우같은 행동을 한 것과 같습니다.

무릇 혈기 있는 자라면 누구나 그 살코기를 먹고 쉬려고 할 것인데, 하물며 조선사람이고, 더군다나 조선혁명당 사람임에랴 더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이해명 군은 2천 4백만 민중의 뜻을 대표하여, 전 인류 공동의 적을 토벌한 것이니, 그 기개와 행동은 찬양할 만하고 한편 애도할 만하며,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고 사당에도 모서 뜻을 기릴 만합니다.

김원봉을 위시로 한 의열단 계열 역시 박용만을 적대시하긴 마찬가지였다. 소설가 박태원이 1947년에 김원봉의 구술을 받아서 지은 '약산과 의열단'에는 박용만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되었다.

박용만은 상해임시정부의 초대 외무부장과 다음에 군무부장을 차례로 지냈고 북경에서 군사통일회를 소집한 일도 있어 소위 독립운동의 열렬한 지사로 당시 명성이 가히 혁혁한 바가 있던 사람이다. 그러나 그의 뜻은 굳지 못하였다. 그의 절개는 결코 송죽에다 비길 것이 아니었다. 어느 틈엔가 그가 왜적들과 비밀히 왕래가 있다는 정보를 받고, 이래, 의열단은 은근히 그의 동정을 감시하여왔다.

그리고 마침내, 그와 북경 외무성 촉탁 기후지(木藤)란 자와 사이에 은밀한 교섭이 있음을 적확히 알았다. 얼마 있다 이 변절한 자는 국내로 들어가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도(齊藤實)와 만났다. 우리는 그들 사이에 있은 밀담의 내용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전일의 소위 애국지사가 오늘날에는 강도 일본의 주구가 되어 옛 동지들을 왜적에게팔려는 의논이었음은 다시 의심할 여지가 없는 일이다.

사이토와 밀담을 마친 그는 곧 서울을 떠나 잠깐 해삼위를 들러서 북경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개척사업을 하겠노라 하여 대륙농간공사라는 것을 만들어 놓았다. 의열단은 이 추악한 변절자를 그대로 두어 둘 수 없었다. 그들은 이 자에게 마침내 사형을 선고하기에 이르렀다.

이렇듯 박용만은 대다수 독립운동가들로부터 변절자로 간주되었고, 미국의 박용만 지지자들을 제외한 어느 누구도 그의 죽음을 애도하지 않았다.

3.2. 박용만의 의심스러운 행적


그가 이토록 혹독한 평가를 받게 된 것은 1922년 이후 의문스러운 행적에서 비롯되었다. 박용만은 1921년 베이징에서 군사통일회 결성을 주도하여 무장투쟁 노선의 지도자로 활약했다. 그러나 자금 문제로 실패한 뒤, 그는 사업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일제 정보기록에 따르면, 박용만은 1922년 초봄 훈하유역에 땅을 빌려 벼농사를 지으면서 한국고대사와 퉁구스어학에 관련된 책을 수집하는 데 힘썼다고 한다. 또한 그는 1923년 4월 흥국실업은행을 설립해 어느 정도의 자금을 모았지만 예상 액수보다 크게 모자랐다. 1923년 6월에는 하와이의 동포로부터 400원의 송금을 받았으나, 이 액수도 기대치에 모자랐다.
이무렵 임시정부를 부정하는 창조파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결성한 '한국정부(韓國政府)'가 재정난으로 곤경에 처하자, 그들은 박만에게 블라디보스토크로 와서 자신들을 도와줄 것을 청했다. 박용만은 이를 수락했으나 곧바로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지 않고 베이징에서 상하이, 나가사키, 경성을 경유하여 하얼빈에 도착한 뒤 1924년 1월 15일에 열차편으로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했다.
하얼빈 총영사가 작성한 비밀문건 '박용만의 행동에 관한 건 보고'(1924.2.23)에 따르면, 박용만은 하얼빈총영사 등 일본 당국의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아마도 그는 블라디보스토크에 가는 방법을 상의하면서 일본 영사관 쪽과 은밀한 거래를 했던 것 같다. 다수의 독립운동가들은 그가 일본에 정보를 제공하는 대가로 자신의 신변안정과 일정한 정도의 금전적인 지원을 약속 받았을 것이라고 의심했다.
박용만이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것은 1924년 1월 중순이었다. 그는 국민위원회 제1회 회의에 참석해 한국독립당 조직에 가담했다. 그러나 국민위원회의 결정은 실행에 옮겨지지 않았다. 한국독립당의 결성은 기존의 공산주의 단체를 무시하고 코민테른의 인정을 받는 별도의 한인공산주의 단체를 또 하나 만들자는 것이었다. 국민위원회의 결정은 당장 말썽이 되었다.
다른 공산주의 당파가 이를 그냥 두고 보지 않았다. 원동 고려공산당 선전위원 이동휘 등 고려공산당 상해파는 러시아 정부에 압력을 넣어 이들을 러시아로부터 추방시켰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쫓겨난 창조파는 북경을 거쳐 상해로 돌아와서 1924년 6월 7일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결정한 한국독립당 조직안을 공포했다.
박용만은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난 뒤 2월 18일 오후 7시에 하얼빈에 도착했다. 1924년 2월 23일자로 작성된 하얼빈 총영사의 '박용만의 행동에 관한 건 보고'에 따르면, 그의 블라디보스토크행은 ‘其○’라는 인물의 사전 양해 하에 이뤄졌다고 한다. 이 ‘其○’라는 임물은 북경영사관의 촉탁 통역관으로 근무하고 있던 기후지(木藤)일 가능성이 있다.
또한 하얼빈 총영사의 보고에 따르면, 박용만은 <국민위원회에 대하여>, <블라디보스톡 재주 선인에 대하여>, <일본공산당원에 대하여>, <그로데고우 지방 공산당에 대하여> 등의 내용을 보고했다고 한다. 또한 하얼빈총영사관에 <연경야화>라는 제목의 글을 제출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연경야화(1)

1. 하얼빈에서 블라디보스톡까지

1월 12일 하얼빈에 도착하여 익일 블라디보스톡에 타전하여 국민위원회 제군에게 내가 블라디보스톡으로 향할 것이라는 뜻을 통고하였다. 그 익일 反電이 있었다. 나에게 뽀그라니치나야에 이르러 공산당대표 기세르리요노프와 회견하라고 알려왔다. 1월 15일 하얼빈을 출발하여 뽀그라니치나야로 향했다. (…)

2. 국민위원회에서 경험한 사실

3. 위원회 폐막 후의 내외의 관계

연경야화(2)

1. 赤禍에 대한 泛論

2. 적화방지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3. 적화방지의 방책

나의 愚見으로서는 일본은 차라리 조선인민을 지휘하여 출동하여 러시아를 정벌할 임무를 져서 시베리아의 동부를 숙청하는 것이 제일의 양책으로 고찰된다.

4. 연해주의 실황과 問罪의 시기

5. 赤露의 병력과 작전계획의 일절

연경야화(1)는 박용만 본인의 행적과 국민위원회의 정보를 담고 있으며, 연경야화(2)는 러시아에 대한 정보를 담고 있다. 특히 주목되는 점은 박용만이 러시아의 공산화를 우려하면서 중요한 정보를 일본에게 제공한다는 것이다. 아마도 그는 소련 정부가 한인 독립운동가들을 국외로 추방한 것에 큰 배신감을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서 독립운동가들의 정보까지 곁들어 제공해버렸다.
그는 왜 이런 행위를 저질렀을까? 블라디보스토크를 방문했을 무렵 박용만은 경제적으로 매우 곤궁한 상황이었다. 약속한 대로 투자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박용만은 임차한 토지에 대한 임대료마저 제대로 지불하지 못해 중국인 지주로부터 고소를 당했고, 은행대출의 길도 막히는 등 신용이 크게 떨어졌다.
설상가상으로 일정한 수입이 없어 가족의 양육비마저 부족하여 생활난이 절정에 달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는 새로운 돌파구 마련이 필요했는데, 바로 그러할 무렵에 블라디보스토크로 간 창조파들이 그에게 국민위원회 참석을 요청한 것이다.
이에 그는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해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려 했지만, 사전에 일제의 훼방을 받을 것이 염려되어 일제의 양해를 받아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소련이 블라디보스토크의 창조파를 모조리 추방해버리자, 그는 일을 망친 소련과 중간에서 훼방놓은 상해파 공산주의자들에게 반감을 품어 일제에게 정보를 넘긴 것으로 보인다.
박용만이 일본 당국의 도움을 얻어 일본과 조선을 경유하여 블라디보스토크에 간 것, 그곳에서 개최된 국민위원회의 상황과 소비에트러시아의 아시아 적화정책에 대한 대응 방안을 일본 당국에 건의한 사실은 분명 독립운동가들로부터 변절자라는 의심을 받을 만한 행동이었다. 박용만은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하와이에서부터 무력투쟁을 주장했던 인물이었고, 베이징에서도 무장단체들의 통합을 추구했다. 그런 인물이 일본 정보관리자와 비밀리에 만났으니, 이 사실을 알게 된 독립운동가들의 충격은 실로 컸을 것이다.
창조파는 상하이로 돌아온 뒤 하얼빈에서 박용만의 행적에 대한 보고를 접하고 4개월 후인 1924년 6월 15일 국민위원회 집행위원 명의로 다음과 같은 내용의 결정서를 발표했다.

국민위원 박용만이 적의 양해 하에 국내에 출입한 사실은 본인의 口供에 의해 명백하므로 독립운동의 총책임을 負荷한 국민위원 또는 비서장의 중직을 띈 신분으로 차등 불철저한 脫軌的 행동을 감행하였음은 개인의 일시적 수단으로 이용하려는 계획에서 나온 데에 벗어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도저히 이를 용허할 것이 아니다. 그러면 먼저 비서의 책임을 면하고 국민위원회에서 제명하기로 결정한다

이 결정서에 따르면 박용만의 국내 입국이 일본의 양해 하에 이루어졌으며, 박용만 자신이 이 사실을 직접 이야기했다고 한다. 이때 박용만의 제명을 결정한 국민위원회 집행위원은 김규식, 신숙, 지청천, 김응섭, 윤해, 강구우, 한형권, 오창환, 김세준 등이었다.
박용만과 함께 활동했던 미주 교포인 김현구와 정두옥은 박용만이 자신의 가족을 국외로 탈출시키기 위해 조국을 방문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일본의 비밀문서에 따르면 박용만은 1921년 9월 21일에 북경에서 중국인 여성 웅씨와 재혼했다고 한다. 이 문서에 따르면 박용만에게는 70살의 노모와 42살의 본처가 있지만 현재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다고 한다.
1923년 6월 8일자로 기후지가 작성한 보고서에 “일정한 수입도 없이 처첩 및 기타 권속을 부양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라고 박용만의 가족상황을 기록한 것으로 보아서 부인도 북경에 함께 체류한 것처럼 기술되어 있다. 그러나 박용만이 살해 당시에 중국부인 웅씨와 함께 살고 있었고, 그녀는 법정에 나와서 진술까지 했으나, 본처의 행적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이 없다.
박용만은 제명 직후인 1925년 봄 장가구 부근에서 안창호문창범을 만났다. 그는 이 자리에서 여러 해동안 무장투쟁을 전개하려 했지만 효과를 얻지 못했으므로, 경제적인 안정을 꾀하기 위해 영주토착지를 마련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3인 공동투자의 저축회사를 설립할 것을 제안했다. 이에 두 사람도 동의했고, 안창호가 10만 엔, 박용만이 20만 엔, 문창범이 30만 엔을 마련하기로 했다.
박용만은 저축회사 설립을 위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1925년 7월 8일에 호놀룰루에서 열리는 범태평양청년대회에 참석한다는 명목으로 하와이를 방문했다. 그는 호놀룰루와 하와이의 여러 섬을 순회강연하면서 독립자금을 모았다. 이렇게 해서 모은 돈이 만여 원이었다고 한다.
이후 1926년 6월 26일 베이징에 돌아온 박용만은 독립군 기지 개척을 위해 베이징 근방의 땅을 구매하여 대륙농간공사를 설립하고 영정하(永定河) 부근에서 수전(水田)을 경영하였다. 그리고 소규모 정미소를 설립하여 부근 수전에서 나오는 벼를 사들여 수만석을 정미하기도 했으나 성공하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기후지는 이에 대해 본국에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연래 북경에 재주하는 배일선인(排日鮮人)의 영수 박용만이 작년 하와이에 가서 동지를 규합하여 얻은 자금 만여원을 가지고 귀래하여 영정하 부근에서 수전 경영을 기도하는 한편 숭무문(崇武門) 밖에서 소규모 정미소를 창설하고 북경 부근의 수전에서 벼를 사들여 수만석의 정미를 만들었으나 중국인측 미상(米商)과의 연락이 원만하지 않아 그 판로에 궁하여 어찌할 바 모르는 상태라고 한다. 정미업은 일시적인 것으로 오래 계속할 전망이 없는 것 같다.

이후 일제 정보 당국에 박용만에 대해 파악할 정보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이 보고서에는 박용만을 '배일선인(排日鮮人)의 영수'로 기재했으며, 박용만이 중국에서 사업을 시작한 자본은 향간의 주장과는 달리 일제가 제공한 것이 아니라 하와이를 방문했을 때 동포들이 성금으로 제공한 것이었다. 그러나 대다수 독립운동가들은 박용만이 일제로부터 돈을 받아낸 뒤 베이징에서 사업을 벌이는 등 사욕을 채우는 것만 신경쓴다고 간주했고, 이로 인해 박용만은 변절자이자 배신자로 낙인찍혔다.

3.3. 박용만의 행적 재구성


현재까지 확실히 밝혀진 그의 행적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1. 박용만은 1924년 1월 블라디보스토크에 '한국정부'를 수립한 창조파 인사들로부터 자신들을 도와달라는 청탁을 받자, 이를 수락하고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했다. 그러나 그는 곧바로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지 않고 일제의 양해를 구해 조선을 경유하는 길을 택했다.

2. 박용만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창조파가 주도한 한국독립당 결성식에 참여했으나, 소련 정부가 창조파 인사들을 강제로 추방하는 바람에 그 역시 쫓겨났다. 이후 하얼빈으로 가서 일제 정보 당국자에게 소련과 소련에 있는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정보를 제공했다.

3. 박용만은 상하이로 돌아온 뒤 창조파가 결성한 국민위원회 징계위원부에게 자신이 일제 당국의 양해를 받고 조선을 경유해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했음을 인정했고, 징계위원부는 이에 따라 그를 제명 처리했다.

4. 1926년 6월 26일 베이징 근교에 땅을 마련하고 정미소 사업을 실시했으나 잘 되지 않았다. 이때 그가 들인 사업 자금은 하와이에서 교포들의 성금으로 받아낸 것이었다.

5. 일제 당국은 최소한 박용만이 암살되기 1년 전까지 그를 '배일선인의 영수'로 간주했다.

이러한 사실을 종합해 볼 때, 박용만이 변절하여 일제의 밀정 노릇을 했다는 당대 독립운동가들의 비난은 사실과 거리가 먼 것으로 여겨진다. 일제는 그를 명백한 '불령선인'으로 여기며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다만 박용만의 행적이 밀정이라는 의심을 받을 만큼 문제가 있다는 것 역시 분명해 보인다. 그는 블라디보스토크로 바로 가지 않고 일제 당국의 양해를 얻어 조선을 경유하여 들어갔으며, 소련 정부에게 추방된 뒤 소련과 소련에 있는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정보를 일제 정보 당국자에게 넘겨버렸다.
사실 박용만은 사망 몇년 전 입이 좀 헤픈 경향이 있었다. 그는 하와이에 가서 자신이 어떻게 처자를 데리고 나오고, 어떻게 진해군항을 정탐했는지 등 자랑을 많이 했다. 그러다가 한인 청년에게 총에 맞아 죽고 암살자가 변절자를 정당하게 처단한 것이라고 선언했으니, 한인들이 그를 밀정이라고 단정지을 만 했다.
게다가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부정하고 새 정부를 수립해야 한다는 입장을 오랫동안 표명했으니,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 인사들에게는 실로 눈엣가시였다. 그리고 좌익 계열 역시 그에게 그리 호의적이지 않았으며, 의열단 계열은 그를 암살한 이가 의열단원으로 자처한 이상 그의 죽음은 정당하다고 간주했다. 이렇듯 그는 적을 너무 많이 두었고, 그 결과 오랜 세월 변절자, 밀정으로 낙인찍히고 말았다.

4. 암살자 이해명의 실체


박용만을 암살한 이해명(李海鳴)은 자신을 의열단원으로 칭했고, 자신의 행위는 일제에게 빌붙은 변절자에 대한 정당한 응징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최근 그의 행적이 위조된 부분이 많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논란이 일어나고 있다.
국가보훈처가 발간한 '독립운동가 공훈록'에 따르면, 이해명은 1919년 3.1 운동 발발 후 중국으로 건너가 1927년 11월 황푸군관학교를 제6기로 졸업했다고 한다. 그러나 '황푸군관학교동학록'에 기재된 6기로 졸업한 조선인은 9명인데, 그의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1927년 2월에 개교한 황푸군관학교 무한분교에는 200여 명의 한인 학생들이 입교 중이었고, 이들은 5기생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6기 입오생이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황포군관학교처럼 정확한 신원이 밝혀져 있는 인물은 극히 일부 뿐이다.
1927년 유악한국혁명청년회에서 중국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 제출용으로 작성한 문서에 따르면, 정치과 14명, 포병과 10명 합해서 모두 24명의 명단이 적혀 있다. 이들은 모두 유악한국혁명청년회 회원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광주무장봉기의 주력부대로 참가하여 희생되었다. 하지만 여기에 적힌 명단에도 이해명의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1947년에 발간된 소설가 박태원의 '약산과 의열단'은 이해명이 형기를 마치고 출옥한 뒤 황푸군관학교에 입학했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윤봉길훙커우 공원 의거 이후 조선인의 황푸군관학교 입교가 더욱 증가하긴 했으나, 그의 이름은 그 어디에도 확인되지 않았다. 결국 황푸군관학교 6기 졸업생이라는 그의 약력은 위조된 것이다.
이해명의 약력에 대해서 가장 정확한 정보를 제공해 주는 자료는 1944년 3월에 한국독립당 간부로 임시정부 주석 김구의 판공처 주임 역할을 했던 민석린이 작성한 임정 의정원 각 당파 명단 이라는 자료이다. 이 자료에 따르면, 당시 이해명은 49세(1896년생)로, 그의 학력은 '중앙군교특훈반 졸업'이라고 적혀 있다. 비슷한 시기에 조선민족혁명당에서 작성한 주요 간부명단에도 앞의 자료와 동일한 약력이 적혀 있다.
중앙군교특훈반은 1937년 12월 1일 김원봉을 따르는 민족혁명당의 청년 83명이 입교한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 특별훈련반 6기를 일컫는다. 이해명은 당시 33세로 전체 입교생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았다. 성자분교는 원래 강서성의 중국 홍군을 토벌하기 위해 장개석이 현지 적응 실전 훈련용으로 세운 것이지만 중일전쟁 발발 후에 항일전쟁 수행을 위한 훈련소로 활용되었다.
이해명은 특별훈련반을 졸업한 뒤 1938년 10월에 김원봉을 대장으로 하는 조선의용대에 입대하여 대본부 총무조 서무주임으로 활동하다가, 1941년 조선의용대 주력이 팔로군 지역으로 북상할 때 국민당지구에 잔류하여 김원봉과 함께 조선민족혁명당원으로서 임시정부에 참여했다. 그는 1942년 10월에 임시의정원의원에 당선되었고, 임시정부 선전부 발행과 과원이었다가 총무과장이 되었다. 해방 후 국내에 입국한 뒤 민족혁명당 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했다.
그렇다면 그는 의열단원이었는가? 1925년경, 의열단은 암살파괴운동을 최우선으로 하는 기존 노선을 포기하고 대중운동을 우선으로 한 조직적 활동을 추구하겠다고 선언한 김원봉의 뜻을 따라 활동을 중단했다. 그래서 의열단의 의열투쟁은 1920년 3월 밀양폭탄반입사건 이후로 1925년까지 진행되었지만 1925년 이후에는 단 한 건도 없었다. 또, 김원봉의 의열단은 상항이에서 줄곧 활동하다가 박용만이 살해된 뒤인 1929년 봄에야 베이징으로 옮겼다. 따라서 의열단이 1928년 베이징에 있는 박용만을 암살하라고 이해명에게 지시했을 가능성은 없다.
그리고 재판 기록에 따르면, 이해명은 자신의 신분을 베이징의 숭실중학교에 재학중인 학생이라고 밝혔다. 그가 의열단원이라고 칭한 것은 김원봉과 함께 조선혁명당원으로 활동한 뒤의 일이며, 김원봉은 1947년 박태원에게 구술할 때 이해명을 의열단원이라고 말했다. 이 때문에 이해명의 독립유공자공훈록에 “의열단의 명령”으로 박용만을 사살했다고 기록된 것이다.
이해명은 재판정에서 자신의 소속단체는 '독립당'이며, 그 단체의 수령은 '이와 조'라고 진술했다. 여기서 '이'는 '이청천(지청천)'이고, '조'는 조성환일 가능성이 있다. 이원규의 '김산평전'에 따르면, 1929년 3월 초 김산김원봉을 만났을 때 김원봉에게 이런 부탁을 받았다고 한다.

“독립당 북경촉성회 대표를 증인으로 부르는데 그 대표는 조성환이지. 그런데 그 사람은 그만뒀단 말이야. 그러니 자네가 대신 독립당 북경대표를 맡고 증인으로 재판소에 나가줘.”

이에 따라 김산은 유금한(劉錦漢)이라는 가명으로 재판정에 나가 증언했다고 한다. 한편, 이해명은 1929년 2월 고등법원 심리에서 당의 수령 지청천의 명령을 받들어 박용만을 살해했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지청천은 당시 만주 일대에서 3부통일회의에 정의부대표로 활동하여 참여하고 있었고, 일본과의 무장투쟁에 온 힘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런 그가 베이징에 있는 박용만을 신경쓸 여유가 있을 리 없다. 게다가 이해명이 지청천과 같은 조직에서 활동했음을 입증하는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해명은 만주 독립군을 대표하는 지도자로 널리 알려진 그의 명성을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해명은 자신이 박용만을 변절자로 보고 독립단의 명령을 받들어 그를 처형했다고 진술했다. 만약 그가 암살할 목적이었다면,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저녁이나 한밤중에 찾아가서 일을 감행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낮에 찾아갔으며, 박용만으로부터 점심으로 호떡을 얻어먹기까지 했다. 암살이 목적이었다면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다.
게다가 이해명은 암살 당시의 상황을 진술할 때도 여러 차례 내용을 번복하고 거짓 진술을 했다. 그는 암살 당시 6발의 총알이 든 총을 사용했다. 현장에서는 4발의 탄피가 발견되었는데, 그는 한발을 쏘았다고 했다가 다시 두번 쏘았다고 진술했다. 이에 검찰관이 왜 거짓말을 하느냐고 추궁하자, 그는 박용만의 권총에서 나온 탄피일 수도 있다고 둘러댔다.
검찰관이 다시 박용만이 권총을 가졌다면 맞아죽지 않았을 것인데, 왜 법정에서 거짓말을 하느냐고 나무라자, 그는 오로지 한 발만 발사했다고 답변했다. 그러나 그는 고등법원 재판 때는 다시 박용만에게 세발, 고용인에게 한 발, 총 4발을 쐈다며 사실을 인정했다.
또한 그는 처음 신문에서는 독립단의 명을 받고 죽이러 왔다고 했다고, 이후의 신문에서는 박용만이 자신의 죄를 뉘우치면 용서할 것도 고려했다고 진술했다. 그런데 이해명의 주장대로 이미 자신이 소속된 단에서 공개처형하기로 결정하고 그 명령을 집행하기 위해 자신이 현장에 왔다면, "박용만이 잘못을 뉘우치면 용서할 것이었다"는 진술은 모순이다.
이에 대해 이해명은 자신이 법원 진술에서 이랬다 저랬다 한 것은 법원기록인이 잘못 기록한 것이라고 변명했다. 박용만의 중국인 부인 웅씨는 살해가 목적이었으면 어찌하여 만나자마자 죽이지 않고 점심 대접까지 받고 난 뒤에 죽였으며, 이해명과 함께 동행했던 또 한 명은 어찌하여 도망갈 때 금시계를 훔쳐갔느냐고 따져 물었다.
박용만의 처와 고용인 김응팔(金應八)은 이해명이 박용만에게 돈을 빌리려다가 박용만이 거절하자 살해했다고 진술했다. 그가 돈을 빌리려 한 것은 독립운동자금을 받아내기 위한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그것이 독립운동단체의 공식명령이었는지, 이해명의 개인 행동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분명한 사실은, 이해명은 의열단원이 아니었으며, 변절자로 낙인찍힌 박용만에 대한 공개 처형을 집행한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박용만에게 자금을 받아내기 위해 낮에 찾아가서 점심을 얻어먹었으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게 되자 홧김에 총을 빼들어 위협했다. 그러자 박용만이 분노하여 그와 실랑이를 벌였고, 이 와중에 그가 엉겁결에 총을 4발 쏴서 박용만을 죽여버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