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유

 

朴褕
생몰년도 미상
1. 개요
2. 생애
3. 창작물
4. 기타


1. 개요


고려 충렬왕 때의 인물.
첩을 둘 수 있도록 하자고 건의했다가 고려 여인들에게 손가락질을 당한 인물로 유명하다.[1] 조선대의 여권 추락과 대비되기도 하고 웬 할매한테 딱 걸려서 조롱 당한 게 워낙 임팩트가 있어서(...) 각종 한국사 관련 시험에서 해당 일화가 간간이 출제된다.

2. 생애


대부경을 지내면서 고려의 여인들이 원나라공녀로 보내지는 문제로 인해 오행을 내세워 동방은 나무에 속해서 생수[2]가 되는 것은 8[3]이며, 홀수는 양이고 짝수는 음인지라 우리 나라에서는 남자가 적고 여자가 많은 것이라 했다.[4]

지금 고려는 남자가 적고 여자가 많으나 존귀를 막론하고 한 아내만 둘 수 있어[5]

아들이 없는 자도 축첩을 할 수 없습니다. 거기에 외국인이 와서 여자를 제한없이 취해가니 인구가 북쪽으로 흘러갈까 두렵습니다. 청하건데 대소신료는 품계에 따라 서첩을 두고 서인들도 일처일첩을 할 수 있게 하며 서자들도 적자에 준하는 출세 기회를 얻게 하소서. 짝 없는 이의 원망도 줄고 인구도 늘어나고 좋습니다. 부녀자들이 그걸 듣고 모두 원망했으니, 연등회 저녁 박유가 왕을 보필하고 나오자 어떤 노파가 그를 가리키며''' "저자가 축첩을 청한 요망한 늙은이다"라고 말했다. 들은 자들도 잇따라 그를 손가락질했고 재상 중에 아내를 두려워하는 자가 있어 결국 실행되지 못했다.'''

고려사 열전 19권 제신 박유편 전체 내용이다. 한자 원문은 두산백과국사편찬위원회 등에서 볼 수 있다.
당시 고려는 전쟁으로 인해 남성들이 죽어서 여초 사회가 되었고 원나라가 공녀를 요구하는 빌미중 여초라는 것이 있었다. 원나라는 후궁궁녀를 충당할 여성만을 끌어간 게 아니고, 병사들을 장가보내야 한다면서 그들의 신부감을 요구하기도 했다.
여초 일처일부제 사회에서 남편을 구하지 못한 여성들이 원나라 남성의 처나 첩이 되러 가면서 인구가 유출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거기다 상소문에도 나오듯 원나라 남성들이 고려 여자 데리러 결혼 원정을 오거나 보란듯 축첩을 하기도 했다. 여기에 고려 남성들의 상대적 박탈감이 심했다. 박유의 주장은 여성들과 그들이 낳을 아이들이 유출되게 보고만 있지 말고 축첩제를 시행해 고려 남성의 첩으로 묶어두는게 낫지 않겠느냐는 말이다.
여성들이 분노하는 사태가 벌어져 백일몽으로 끝난 것이 고려시대 여성의 지위가 후대인 조선시대에 비해 오히려 높았다는 것에 대한 근거로서 자주 인용된다.

3. 창작물


스포츠 경향에서는 엽기인물 한국사라는 것을 연재해 대화 형식으로 나오는데, 19 ~21편인 부국강경을 위해선 첩을 두어야 합니다에서 쌩뚱맞게 튀어나온 박유의 오행설, 남자부족 원인설은 조정 대신들이 박유가 좀 튀어보려고 나선 거라 생각했지만 박유가 만만찮은 인간이라 하면서 박유가 국가적으로 남자를 많이 출생시킬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으로 나온다.

4. 기타


근래에 체첸에서도 여초를 해결한다면서[6] 일부다처제 논의가 있었으나 여성들, 러시아 정부의 반발에 망했어요
동아프리카의 에리트리아에서도 내전으로 많은 남성들이 몰살당해 극심한 여초 현상이 문제를 빚자 정부에서 일부 이처 이상을 강요하려다가 부인 하나에 아이들 먹여살리기도 벅찬데 무슨 재주로 여러 가정을 먹여살리냐는 남성들의 반발로 불발에 그쳤다.

[1] 우연의 일치로, 가운데 손가락만 내미는 손가락 욕은 서양만 그런게 아니라 옛날부터 한국에서도 욕으로 통했다. '꼴뚜기질'이라고 한다.[2] 주역의 하도에 기초해 오행은 각각의 수를 가지고 있으며, 암흑과 혼돈의 우주 공간에서 창조되는 기운의 순서를 말하는 것으로 1은 물, 2는 불, 3은 나무, 4는 금속, 5는 흙 등 고유한 수를 가져 이를 생수(生數)라 한다.[3] 생수와 5를 합쳐서 그 수를 이루는 것을 성수(成數)라 하고 물, 불, 나무, 금속, 흙으로 만든 생명체는 각각 6, 7, 8, 9, 10의 수로 이루어지며, 성수를 만들 때 각각 오행의 수에 5를 더하는 것은 흙의 기운이 포함되어야 하나의 물체가 형성되기 때문이다.[4] 홀수는 양은 남자, 짝수는 음은 여자를 뜻하는데, 박유의 주장에는 홀수인 생수에 해당하는 3보다 짝수인 성수에 해당하는 8이 더 크다고 한 것이다.[5] 다만 국왕만은 예외여서 정실 왕후만 여럿에 후궁은 별도로 들였다. 이후 조선시대에는 국왕조차도 후궁은 여럿 둘지언정 정실 왕후는 한 명만 두었다.[6] 북카프카스 지역의 이슬람 배경도 감안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