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녀

 

1. 貢女
2. 公女
3. 工女


1. 貢女


나라와 나라 사이에 바쳐지던 여성들. 주로 강대국의 간섭을 받는 약소국이 강대국의 요구에 따라 자국의 젊은 미혼 여성들을 모아 보냈다.
강대국인 황제국이나 상국이 제후국에 공녀를 요구한 일차적 목적은 궁녀를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공녀가 고관의 이 되거나 유곽에 투입되는 경우도 있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예외였다. 대부분의 공녀는 황제국에 가서 궁녀가 되었다. 사실 황제국이 제후국에서 궁녀를 충원한 것은 궁녀를 모으기가 그만큼 힘들었기 때문이다. 황제국이든 제후국이든, 궁녀를 모으는 것은 어느 나라에서나 다 힘든 일이었다.
사극이나 동화에서는 궁녀가 꽤 괜찮은 자리였던 것처럼 묘사되는 경우가 많지만, 실제론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대부분의 평민 여성들은 노예나 다름없는 궁녀 자리를 기피했다. 의식주는 보장되지만 사실상 노예나 다름없는 신분에다, 독신으로 살면서 중노동을 해야 했다. 그래서 대부분의 여성들은 궁녀가 되지 않으려고 안달이었고, 대부분 노예 신분이거나, 노예가 아니라도 정말 집에서 입 하나라도 줄이지 않으면 굶어죽는 판이라 딸을 궁녀로 취직시키는 게 대부분이었다. 물론 개중에는 왕비가 되는 경우도 있었지만, 이런 일은 몇 백 년에 한번 있을까 말까 했다. 상당수의 궁녀는 평생토록 의 근처에 가지도 못했고, 어쩌다 왕의 관심을 끈다 해도 왕비나 후궁에 의해 폭행당하거나 목숨을 잃기 쉬웠다.[1] 유럽권에서는 궁궐에서 일하는 여자들은 일자리+신부수업의 개념이었지만, 아시아권에서는 '궁궐에 있는 여자=왕의 여자'로 취급되었고, 당연히 이성교제나 결혼은 불가능한 인생이 되었다. 지나가던 왕이 건드리기라도 하면 모를까, 대부분은 평생 궁궐 막노동만 해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황제국은 자국민들의 저항을 피할 목적으로 이런 일을 제후국에 떠넘긴 것이다. 한편 제후국은 자기 나라 궁궐에 들일 궁녀뿐만 아니라 황제국 궁궐에 들일 궁녀까지 뽑아야 했으니, 고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공녀 선발은 충렬왕 초부터 공민왕 초까지 약 80년 동안 정사에 기록된 것만도 50여 차례이며, 이곡의 공녀 폐지 상소를 보면 그 수효가 많을 때는 40∼50명에 이른다 하니 끌려간 공녀들의 수는 2천 명을 넘었을 것으로 본다.[2] 그나마 이것은 공식적으로 기록된 것이고, 이 외 원의 사신이나 귀족·관리들이 사사로이 데려간 것까지 합치면 실제 숫자는 이보다 훨씬 많다고 한다.[3] 한 번에 500여명의 공녀를 끌고 가는 경우도 있었다.[4]
인신매매·인질·포로 등과는 약간 다른 개념이기는 하나, 공녀로 선발된 여성들의 입장에서는 평생 부모 형제와 헤어져 이역만리에서 궂은 일을 하며 일생을 보내는 것은 마찬가지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게다가 궁궐에서 중노동을 하고 결혼·이성교제가 금지되는 것에 더해, 언어 및 문화적 고충까지 덤으로 짊어져야 했다. 아무튼 공녀 차출을 피하기 위해 딸을 조혼시키거나(기혼 여성은 대상에서 제외되었으므로) 숨기는 일은 예삿일이었으며, 차출된 여성이 신세를 비관하다 자살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이 정도로 기피되는 일이었으면 힘이 없는 하층민 여성들만 공녀가 되었을 것 같지만, 공녀들 중에 이른바 좋은 출신의 여성을 포함해 보내도록 요구받았기 때문에 상류층 여성들도 공녀로 끌려가곤 했다. 심지어 출세를 위해 자발적으로 딸이나 여동생을 원나라 고위층에 공녀로 바치던 부원세력들도 있었다. 일례로, 강종의 서녀인 수령궁주가 딸을 공녀로 간 충격으로 병사한 내용이 수령궁주의 묘비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상류층 출신의 여성들 경우 그에 맞게 혼인도 상류층 집안으로 가게 되어 부귀영화를 누린 소수의 사례이며, 대다수 공녀들은 평민 집안에서 징발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공녀로 끌려간 여성들은 대부분 같은 계층에 속하는 원나라 사람들과 결혼했고, 평생 고향에 돌아오지 못한 건 물론 공녀에서 풀려나지 못해 원나라에서 대부분 궁중 시녀나 노비로 일생을 보낸 사람들도 많았다. 이에 대부분의 고려인들은 딸을 낳으면 비밀에 부쳐 이웃 사람도 볼 수 없게 하고, 딸의 머리를 깎는 등 공녀 선발을 면해 보려 노력하였다.[5]
원나라를 대신해서 중국 대륙과 만주를 차지한 명나라에서도 공녀를 요구해왔다. 그나마 원나라처럼 심하지는 않았지만, 조선 초기에만 명나라에서 모두 12차례에 걸쳐 공녀를 요구하였다. 이 가운데 명나라 황제의 사망 등으로 5차례는 중지되고 실제로 처녀가 보내진 것은 7차례였다. 태종 8년(1408)에 처음으로 공녀를 보냈고, 1408년에서 1417년까지 3차례에 걸쳐 40명의 공녀가 명나라로 갔다. 그리고 세종(1427~1433) 때 4차례에 걸쳐 공녀 74명을 보냈다. 명나라에서는 원나라와 다르게 뽑힌 처녀와 처녀를 모실 여종들 역시 함께 갔다. 기록에 따르면 뽑힌 처녀는 모두 16명이었지만, 그에 따른 여종들은 48명으로, 이 밖에도 집찹녀 42명과 기무녀 8명을 합하면 모두 114명을 바친 것이다.
일단 공녀를 보내라는 요청이 오면 조선 조정은 임시로 진헌색(進獻色)이라는 기관을 설치하고 나이 어린 양가 처녀들을 선발하였다. 하지만 자진해서 머나 먼 이국땅으로 고이 기른 딸을 보낼 사람은 없었다. 하여 나라에서 내린 금혼령을 피해 황급히 딸들을 결혼시키는가 하면, 몹쓸 병이 들었다고 거짓 고하기도 하고 몰래 숨겨놓기도 하였다. 공녀를 원한 명나라 황제들 중 유명한 사람은 영락제였다. 조선의 여자들이 상냥하고 아름답다는 소문에, 사신(황엄)을 여러 차례 보내 공녀(貢女)를 차출하게 하였다. 영락제가 살아있는 동안 공녀 차출은 총 세 번 있었다(1408년, 1409년~10년, 1417년). 그 중, 첫 번째 공녀에 속하여 그 중 첫째라고 하는 권씨는 영락제의 본처인 인효서황후(仁孝徐皇后)가 1407년 죽은 후 명나라에 공녀로 바쳐졌는데, 전하는 말에 따르면 영락제는 권씨를 총애하여 현인비(顯仁妃)에 봉했다. 그래서인지 《명사 후비전》에 기록된 유일한 조선 여인이기도 하다. 영락제 사후에는 선덕제가 딱 한 번 공녀를 요구하였고, 그 후 조선에서 공녀 차출은 더 이상 없었다. 물론 정덕제가 조선에 공녀를 요구하려고 하였으나 급사하는 바람에 사신이 요동에서 발길을 돌렸다.(관련글)
공녀라고 보긴 어렵지만 청나라아이신기오로 도르곤이 조선의 공주를 부인으로 들이고자 요구한 적이 있다. 이때 보내진 인물이 의순공주. 결혼 후 1년만에 도르곤이 사망하고 반역죄로 철퇴를 맞자 의순공주는 그의 조카에게 보내졌으나 그마저 사망하여 의순공주는 6년 후에야 조선으로 돌아왔다.
충선왕이 1차 재위기간 이후 원나라에 끌려갔을 때에 어떤 궁녀와 얽힌 이야기가 전설로 전해져오는데, 어느 공녀 출신 궁녀가 가야금을 타면서 피를 흘리는 모습을 본 꿈을 꿨는데 하도 이상해서 그 궁녀를 찾았더니 고려에서 살았던 소녀로 봉선화 물을 들이면서 고국으로 돌아올 꿈을 품고 있었다. 그런 다음 궁녀는 가야금 음악으로 그의 마음을 달래주었다. 그는 그 궁녀를 생각하면서 조국으로 돌아오려는 간절한 꿈을 키운 결과, 무종이 왕위에 오를 때 크게 공을 세운 덕분에 다시 조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 다음 궁녀에게 은혜를 갚으려고 불러오려고 했으나 이미 그 궁녀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왕은 궁녀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궁에 봉선화를 많이 심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2. 公女


공녀(公女)라는 한잣말은 본래 제후의 딸을 가리킨다. 중국의 고전문헌에서는 제후의 딸을 가리켜 공녀(公女), 여공자(女公子)라고 했다. 혹은 성별을 가리지 않고 모두 자식이란 뜻으로 그냥 공자(公子)란 말로 퉁치거나.[6]
현대의 웹소설 등에서는 Princess 등 서양식 작위의 번역어나, 신분이 높은 젊은 여자를 수식하는 말로도 사용한다. 웹소설에서는 공작의 여식이라는 의미에서 공작녀라고도 했는데 발음하기 불편한지 어느 사이엔가 공녀라고도 많이 쓴다. 공국 군주의 딸은 공작의 딸이기도 하고, 서양에서는 왕족들이 공작 작위를 겸한 경우가 많아 딸이 공녀로 봉작되므로 공주왕녀와 많이 겹친다.
만약 공작의 딸이라고 '공녀'라고 부른다면 마땅히 후작의 딸은 '후녀', 백작의 딸은 '백녀'라고 칭해야 할 테지만, 아무도 이런 단어를 쓰지 않는다. 단지 한자만 보고 기존에 있는 '공녀'라는 단어에 근거 없는 의미를 집어넣은 것이다. 바로 윗 문단의 다른 뜻의 단어도 있는 공녀에 비해 다른 것들은 이전부터 없던 단어이기 때문이라는 이유도 물론 있다. 따라서 중국 문헌의 용례를 참고한다면, 공녀란 말을 꼭 공작의 딸이라고 한정할 필요는 없다.

3. 工女


공장에서 일하는 여성을 일컫는 여공의 동의어.

[1] 특히 왕비가 투기가 심하면 심할수록 더 그랬다[2] 유홍렬, 「고려의 원에 대한 공녀」, 『진단학보』 18, 1957, 34∼37쪽[3] 권순형, 「원나라 공주와의 혼인 및 공녀」, 『한국문화사』 권1, 2005, 85~96쪽[4] 『고려사 세가』, 충렬왕 2년(1276), 3월 29일 기사 참조.[5] 권순형, 「원나라 공주와의 혼인 및 공녀」, 『한국문화사』 권1, 2005, 85~96쪽[6] 지체 높은 집안의 아들을 가리키는 공자(公子)란 말 또한 본디 제후의 아들(또는 자식)을 가리키는 말에서 의미가 넓어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