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유

 

1. 고려시대의 인물
1.1. 개요
1.2. 대중매체에서
1.2.1. 드라마 태조 왕건
2. 중국 당(唐)대의 시인이자 화가


1. 고려시대의 인물


王儒/王柔
생몰년도 미상.

1.1. 개요


고려 초기의 인물. 자는 문행(文行).
본래 성은 박(朴)씨로 광해주(춘천시) 출신. 품성이 수수하면서도 정직했고, 경서, 사서 등에 통달했는데, 태봉에서 원외랑, 동궁기실 등을 지냈지만 궁예가 미치자 벼슬을 버리고 산 속으로 가서 숨었다.
이후 왕건이 정변 끝에 즉위하자 918년 여름 6월에 그를 알현했는데, 왕건은 부열, 태공망을 얻은 것에 비유하면서 그를 얻은 것을 매우 기뻐했고 관모와 띠 등의 공복을 내려주고 기밀을 관장하는 직위를 맡도록 하였다. 공을 세운 후에는 왕(王)씨 성을 하사받았고 그로써 해주 왕씨의 시조가 되었다. 벼슬은 대광에 이르렀으며, 그의 딸은 왕건의 18번째 비인 예화부인이 되었다.
예종(고려) 묘정 배향공신 '''왕자지'''가 그의 후손이다.

1.2. 대중매체에서



1.2.1. 드라마 태조 왕건


드라마 태조 왕건에도 등장했다. 배우김진태.
금강산에 숨어 지내던 학자이며, 마침 아지태철원 천도를 밀어붙인 탓에 민심이 흉흉하던 시기에 허월종간에게 그를 추천해주었다. 사람 볼 줄아는 눈을 갖고 있던 허월이 적극 추천한 인물인 만큼 박유는 뛰어난 학식을 갖춘 인물이었고, 궁예는 그에게 태자들의 교육을 맡겼다. 문제는 그 태자들이 어린이도 아니고 겨우 두 살 배기의 갓난 아기들이었다는 것. 궁예는 나름 엘리트 교육(?)을 시킨답시고 태자들에게 가혹한 생활[1]을 강요하였다. 교육의 중요성을 말하던 박유마저도 이건 영 아니다 싶어 궁예에게 이건 너무 가혹하다며 간언했지만 궁예는 일절 씹었다.
강직한 모습도 자주 보이는데, 궁예 앞에서 그의 정책을 대놓고 반대한 적도 있었다. 그때 궁예는 아직 미치지는 않은 관계로 그 대범함을 마음에 들어하며 그냥 유야무야 넘어가는데, 종간은 혹시라도 박유가 잘못될까봐 되도록이면 그런 정치 얘기는 하지 말라고 조언해준다. 물론 종간과는 대놓고 같이 궁예의 정책과 아지태를 견제 및 비판하는 사이였던 만큼, 궁예와 달리 종간은 박유의 생각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또한 대놓고 간신배짓을 하는 동문 아지태를 싫어하는 동시에 아예 은부에게 아지태를 제거하기 위해선 왕건과 손을 잡아야 한다고 간언을 올리기도 했다. 왕건과의 관계에 대해선 종간과는 시각이 아예 다르긴했지만, 종간 입장에선 박유는 몇 안되는 우군이었던 것.
완전히 미쳐버린 궁예가 석총을 쳐죽이는 등 폭정을 일삼자, 현실에 절망한 박유는 종간으로부터 궁예의 병을 낫게 하기 위해 도인을 데려와달라고 부탁받은 것을 계기로 도성을 떠나 그대로 은둔해 잠적해버린다. 도성을 떠날 때, 박유는 종간에게 이러한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자는 왕건 밖에 없으며, 그와 협력해야한다는 편지를 남겼고, 이에 종간은 병력을 보내 박유를 찾았지만 끝내 찾지 못했다. 이후 박유는 세상을 여행하던 중 역성혁명이 발생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도성으로 돌아간다. 실제 역사와 같이 왕건이 즉위한 후에 찾아와 태자 무의 스승이 된다. 이 때 박유는 왕건에게 송악은 철원과 달리 민심이 살아있는 곳이라 그 송악으로 천도할 것을 간언하였고 이에 왕건도 박유의 뜻을 받아들여 철원에서 송악으로 수도를 옮겼다.
이후 무가 정윤, 즉 왕위 계승자로 책봉되는 과정을 비롯해 간간이 모습을 드러내지만, 궁예 때보다는 비중이 조금 줄어든 편. 그러다가 태자 무가 성장하여 배우가 바뀐 뒤에서부터는 간간히 출연하다 2차 조물성전투 직전(145회)을 끝으로 소리없이 퇴장한다.

2. 중국 당(唐)대의 시인이자 화가



渭城朝雨浥輕塵 위성조우읍경진

위성의 아침 비는 가벼운 먼지를 적시고

客舍靑靑柳色新 객사청청류색신

객사에는 푸르고 푸른 버들빛이 새로워라

勸君更盡一杯酒 권군갱진일배주

권하노니 그대 다시 이 한 잔 술을 들라

西出陽關無故人 서출양관무고인

서쪽으로 양관 땅 나서면 아는 이도 없으리라.

ㅡ안서로 나가는 원이를 보내면서(送元二使安西 송원이사안서)

王維
699년 - 761년
자는 마힐(摩詰). 중국 산시성(山西省) 출신이다. 시성(詩聖) 두보, 시선(詩仙) 이백과 견주어 '''시불(詩佛)'''이라고 불린다.[2][3]
왕유는 아홉 살 때부터 문학적 재능을 보였고, 15세 때부터 장안의 명사들과 교유했으며, 개원 7년(719년) 진사(進士)로 급제했다. 그는 대악승(大楽丞)이라는 고위 관직에 올랐지만, 바로 이듬해에 산동성의 제주사창참군(済州司倉参軍)으로 좌천당했다. 《집이기》에 따르면 황제만이 출 수 있는 황사자(黄師子)라는 춤을 악인이 불경하게 제멋대로 추었기 때문에 책임자로서 이에 대한 책임을 물은 것으로 전하고 있는데, 그보다는 왕유가 종친들과도 가까운 사이였기에 현종이 그를 종친들로부터 떨어뜨려 놓은 것이라는 해석도 존재한다.
734년 다시 수도로 소환되어 급사중의 자리에까지 올랐지만 안사의 난이 일어나 756년 장안이 함락되고 왕유도 반란군에 포로로 잡혀 낙양으로 압송되어, 원치 않은 관직 생활을 해야 했다. 장안이 수복된 뒤 어쨌든 반란군에 부역했다는 이유로 처형당할 뻔 했으나 형이 고위 관리로 그의 구명에 나섰으며, 반란군에 잡혀있을 때에도 당 황실에 대한 충성을 토로한[4]시를 썼다는 점이 부각되어 겨우 살아날 수 있었다. 그러나 이후 그는 차츰 속세에 환멸을 느끼게 되었다. 어머니의 죽음으로 더욱 슬픔에 빠진 그는 장안 종남산의 망천(輞川) 옆에 있는 시골 집에 틀어박혀 불교 연구에 몰두했다.
한국에서는 두보나 이백에 비해 다소 알려져 있지 않은 감이 있다.
일본견당사로 당 조정에서 비서감을 지냈던 아베노 나카마로(阿倍仲麿呂)가 귀국할 때 지어준 '일본으로 돌아가는 비서 조감을 전송하며(送書秘晁監還日本)'라는 시가 있는데, 이 시는 오노 후유미의 소설 십이국기 '마성의 아이'에 실려 있다.
積水不可極 바다의 큰 물결 끝이 없는데
安知滄海東 어찌 이 바다의 동쪽을 알 수 있으리
九州何處遠 세상 어느 곳이 이보다 멀까
萬里若乘空 만리 공중을 타고 오르는 것 같도다
向國惟看日 나라를 향하는데 보이는 것이란 오직 해
歸帆但信風 돌아가는 배는 다만 바람에 맡긴다
鰲身映天黑 거북이 몸이 하늘빛에 비쳐서 검고
魚眼射波紅 물고기 눈이 파도 사이로 빨갛게 얼른거리네
鄕樹扶桑外 고향 나무는 동해 저쪽에 있고
主人孤島中 주인은 외로운 섬 안으로 간다네
別離方異域 헤어지면 정말로 다른 나라이니
音信若爲通 소식이 어떻게 전할 수 있으리오
주요 작품으로 창주도(滄州圖), 망천도(輞川圖) 등이 있다.
[1] 스님들처럼 새벽에 일어나 불경을 듣게 하고, 아침을 으로 때우게 하는 등 어른에게도 힘든 생활을 강요한다.[2] 마힐이라는 단어 자체가 불교의 유마힐거사의 명칭에서 따온 것이다. 왕유가 불교 신자가 된 것은 어머니 최씨의 영향을 받은 것.[3] 여기에 시귀(詩鬼) 이하를 더해 당시사걸(唐詩四傑)이라 부르기도 한다.[4] 안록산이 장안을 점령한 뒤에 궁중악공은 불러모아 연주를 시켰는데 뇌해청이라는 악공만은 반란군 따위를 위해 연주하지 않겠다며 비파를 집어던져 부쉈고 결국 안록산에게 사지가 찢겨져 죽임을 당했다. 왕유는 이 일을 소재로 시를 썼던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