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인

 



'''박정인'''
'''복무'''
대한민국 육군
'''기간'''
1948년 ~ 1973년
'''임관'''
육군사관학교 6기
'''최종계급'''
준장
'''최종보직'''
제3보병사단장
[image]
朴定仁
1928 ~ 2016. 2. 3
1. 개요
2. 초기 경력
3. 1973년 3.7 완전작전
4. 이후


1. 개요


대한민국 육군의 군인으로 최종계급은 준장이다.

2. 초기 경력


1928년 함경남도 신흥군 하원천면 중흥리#에서 태어났다.
1946년 월남하여 2년 뒤인 1948년 육군사관학교(6기)에 입학 후에 임관하게 된다. 6.25 전쟁대대장으로 활약하면서 죽을 고비를 많이 넘겼다. 1967년 거의 막차로 준장으로 진급을 하게 된다.

3. 1973년 3.7 완전작전


1973년 3월 7일 제3보병사단장으로 부임했을때의 일이었다. 진백골 18연대 전방대대에서 군사분계선 표지판 작업 도중 북한군의 사격도발로 부상자가 생기자 당시 사단장이었던 박정인은 직접 마이크를 통해 적측에 사격중지를 요구했다. 그러나 북한측은 아측의 경고를 끝내 무시했고, 결국 포병연대에 사격명령을 내렸다. 직후 105mm 견인곡사포에서 발사된 백린연막탄이 북한군 GP내부를 관통해 폭발하는 바람에 북한군 GP건물이 통째로 날아갔고, 후일 밝혀지길 그 안에 있던 상주인원 36명까지 몰살되었다고 한다. 이후 부상당한 장병이 무사히 구출되어 후송되면서 포격은 끝났다. 이른바 3.7 완전작전. 이 작전은 1976년 8월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당시의 미루나무 절단 작전(일명 '폴 버니언' 작전), 1999년 6월의 제1연평해전, 2009년 11월의 대청해전, 그리고 2015년 8월의 서부전선 포격 사건등과 더불어, 휴전 이후 한국군이 북한의 도발을 성공적으로 격퇴한 대표적인 모범 사례로 평가받는다.
그 사건 이후 북한군에게는 공포의 대상이 되었고 사단이 통째로 교체된 건 물론이고 남쪽 3사단에 대응하기 위해 2개사단을 배치했는데 북한 장교와 사관들이 가장 꺼리는 곳이라고 한다. 한 예로 1975년 김부성(소좌급 대우)와 같이 귀순한 인민군 유대윤 소위의 증언을 통해 그날의 공격이 심리적으로 얼마나 효과적이었는지 밝혀졌다. 유 소위는 “그날 백골 포병이 GP 막사에 명중시킨 포탄에 인민군 36명이 사망했다”며 '''지금도 백골부대는 북한군이 가장 겁내는 부대”라고 증언했다.'''[1]
하지만 당시는 7.4 남북 공동 성명으로 인한 남북협상 기간이어서 과도한 충돌은 피해야 할 시기였다. 무엇보다 이 작전 당시 박정인은 사단 내 모든 차량의 조명을 켜고 남방한계선까지 돌진하게 하는 무력 시위를 감행했는데, 자칫하면 국군의 북침으로 오해할 수도 있는 행위였다. 이에 당황한 북한은 김일성이 직접 전군에 비상 동원령을 내려 준전시태세에 돌입했고, 한반도에는 일촉즉발의 위기가 감돌았다. 만약 이 때 북한군이 발끈해서 전면전으로 확대했다면, 중일전쟁의 시초인 루거우차오 사건 급의 엄청난 결과를 초래했을 것이며, 평화지향적인 정부에 찍혀서 보직해임이나 최악의 경우 사형을 당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2]

4. 이후


이로 인해 작전 약 1달 뒤에 박정인은 육본에서 무보직으로 5개월 있다가 예편하였다. 1985년 이산가족 평양방문단원이 평양에 방문했는데 북한 로동당 정치보위부의 고위간부가 찾아왔다. 그는 “함경남도 신흥군 출신의 박가 성을 가진 요란한 사단장 요즘 뭘 하오?”하고 질문했다. 평양방문단원은 "나는 군대 일은 모르오" 라고 대답했지만 그만큼 북한이 무서워하는 맹장이었다.
1998년 1월에 박정인의 아내가 신장투석으로 투병하다가 향년 68세로 별세했고, 2016년 2월 3일에는 박정인도 향년 89세로 별세했다. 3대가 육군 장교인 집안으로 장남 박홍건 예비역 대령(육사 31기)[3]과 쌍둥이 손자 중 장손 박선욱 현역 소령(육사 64기[4], 서라벌고 졸업, 현재 육군사관학교 심리경영학과 복무 중)이 있고, 박 대위의 쌍둥이 동생도 현직 공인회계사지만 병역은 육군 장교로 마쳤다.[5]

[1] 제3사단은 지난 6.25 전쟁에서도 서울 수복이후 국군 부대로는 가장 먼저 38선을 돌파, 북진하여 명성을 떨치기도 했던 명문 부대다. 부대의 별칭인 '백골'도 이북 출신 실향민을 주축으로 구성되었던 18연대에서 유래했을 정도. 그 유대윤 소위도 훗날 이 부대에 정훈교육차 방문하게 되었을때 악명높은 부대에 자신이 가게 될줄은 몰랐다는 발언을 했다. [2] 군법에서 상부의 허가가 없는 불법 전투 개시는 사형에 처하는 중범죄이기 때문이다.[3] 예편 후 철도청 비상계획관을 역임하였다.[4] 이순진 전 합참의장의 아들인 이석 소령과 동기다.[5] 쌍둥이 형과 육사에 같이 지원했으나 형만 합격하고 본인은 불합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