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4년 미국 대통령 선거

 

'''1964년 미국 대통령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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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별 선거인단 선거 결과

1960년 11월 8일
1960 대선

1964년 11월 3일
'''1964 대선'''

1968년 11월 5일
1968 대선
}}} ||
'''선거 일시'''
11월 3일 5시 ~ 11월 4일 6시 (UTC)
'''투표율'''
61.9%
'''선거 결과'''
'''후보'''
'''민주당'''}}}]]
'''대통령 린든 B. 존슨
{{{-2 부통령 휴버트 험프리'''
'''공화당'''}}}]]
'''대통령 배리 골드워터
{{{-2 부통령 윌리엄 E. 밀러'''
'''선거인단'''

'''486명'''
52명
'''전국 득표'''

'''61.1%
43,127,041표'''
38.5%
27,175,754표
'''대통령 당선인'''
'''부통령 당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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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배경
3. 경선
3.1. 민주당
3.2. 공화당
4. 본선
5. 결과
6.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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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36대[1] 내지 제37대[2] 미국 대통령을 선출하기 위해 1964년 11월 3일 ~ 11월 4일까지 실시된 선거. 민주당의 린든 B. 존슨 대통령이 선거인단 과반수를 확보해 당선되었다.
단순히 승리한 정도가 아니라 61.1% 득표율로 선거인단 486명을 확보한 대승이었는데, 득표율 61.1%는 1820년 단독 입후보한 제임스 먼로가 기록한 80.6% 이후 최고 기록이다. 사실상 경쟁자가 있었던 대통령 선거에서는 역사상 최고 기록인 셈.[3]
선거 광고로 데이지 걸이 나왔다.
이 선거부터 워싱턴 D.C.에도 선거인단이 할당되었으며 알래스카, 유타, 아이다호, 와이오밍, 노스다코타, 사우스다코타, 네브래스카, 캔자스 주에서 마지막으로 민주당이 승리한 대선이다.

2. 배경


1963년 11월 22일, 국민적 지지를 받던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괴한에게 피살되면서 미국 전역은 슬픔과 혼란에 빠졌다. 부통령이었던 린든 B. 존슨이 대통령 직을 승계하면서 혼란이 예상되었지만 부통령이 되기 전부터 정치 경력이 길었던 LBJ는 케네디 행정부가 내세웠던 국내 개혁과제를 순차적으로 수행하면서 국정을 빠르게 안정을 되찾았다.
특히 잔여 임기간 국정 관리자 역할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위대한 사회(the Great Society)' 정책'''과 '가난과의 전쟁(War on Poverty)'을 표방하며 미국 역사상 유례없는 대대적인 확장 재정 및 부의 재분배 정책을 집행했다. 그리고 흑인민권운동이 본격적으로 절정으로 치닫고 있던 이때 '''민권법(Civil Rights Act)을 통과'''시키면서 연방 정부 차원에서 흑인들의 법적인 평등을 보장했다. 경제 성장률도 워낙 안정적으로 관리하고 있었던지라 이로 인해 흑인을 비롯한 미국 국민들의 LBJ 행정부에 대한 지지율은 매우 높았다.[4]
또한 대선을 앞두고 전격적으로 베트남 전쟁 참여를 결정하는데 물론 이후 LBJ 최악의 선택으로 두고두고 미국을 수렁에 빠뜨리는 결정이 되었지만, 이 시기까지만 해도 아직 참전 초기였어서 여론이 나쁘지 않은 편이었고 의회의 초당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다. 즉, 오히려 참전 자체가 이 시기에는 대선에서도 호재였다는 얘기.

3. 경선



3.1. 민주당



'''린든 B. 존슨의 후보 수락 연설'''
'''현직 대통령 + 높은 지지율 + 전시 대통령'''이라는 3중 프리미엄을 누리고 있는 LBJ였지만 후보 지명을 앞두고 단 한가지 문제가 있다면 바로 '''로버트 F. 케네디의 존재'''였다. 형 케네디 사후에도 행정부에 남아 법무장관 직에 있었던 로버트 케네디가 존 F. 케네디에 대한 강력한 향수를 지니고 있던 진보 성향 당원들로부터 부통령 후보 지명에 대한 지지를 받고 있었던 것.
1964년 3월 10일 열린 뉴햄프셔 주 경선에서는 정식으로 입후보하지도 않은 로버트 케네디의 이름이 부통령 후보로 적힌 투표지가 다수 나오는 등 부통령 후보 지명에 대한 압력이 강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4년전 경선에서 이미 로버트 케네디와 갈등의 골이 깊었던데다가 케네디 가문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 자신만의 레거시를 구축하고 싶었던 LBJ는 이 요구가 마뜩지 않았다. 하지만 존슨 본인도 민주당 지지세를 단결시키고 넬슨 록펠러 등 온건 공화당원들의 초당적 지지를 얻으려면 국민적 인기가 높은 케네디를 부통령 후보로 지명해야 하는 상황임을 마지못해 인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공화당 경선에서 강경 보수파 배리 골드워터가 유력 후보로 떠오르면서 상황이 달라진다. 초강경 발언으로 인해 여론의 먹잇감이 된 골드워터의 등장으로 LBJ 역시 굳이 로버트 케네디의 도움 없이 단독으로도 충분히 압승할 수 있게 된 것. 여론조사 역시 골드워터의 부상과 함께 더이상 케네디의 부통령 지명을 열광적으로 지지하지 않았고, 로버트 케네디 역시 법무장관을 사임하는 대신 뉴욕 주 연방 상원의원을 출마하는 방향으로 발길을 돌리면서 자칫 당내 갈등으로 표면화될 수 있었던 존슨과 케네디의 충돌은 마무리된다.
그 외 앨라배마 주지사였던 조지 월리스가 도전장을 내밀어 LBJ에게 배신감을 느끼는 보수 성향 민주당원들을 자극했지만 성공적인 결과를 거두지는 못했고 전당대회 호명 투표를 통해 린든 B. 존슨 대통령이 재선에 도전하게 되었다. 부통령 후보로는 로버트 케네디를 대신해 케네디와 마찬가지로 리버럴 성향 당원들의 지지를 받던 미네소타 연방 상원의원인 휴버트 험프리가 지명되었다.

3.2. 공화당



'''배리 골드워터의 후보 수락 연설'''
공화당 온건파와 강경파를 아우르던 리처드 닉슨이 지난 대선 패배와 함께 당내 지지를 상실하면서 공화당의 분열상은 극심해졌다. 애리조나 주 연방 상원의원이었던 배리 골드워터는 당시 공화당 내 강경 보수파의 거두였는데, 원래 공화당 내 보수파는 골드워터가 기반을 둔 애리조나 등 미국 중서부 지역에 똬리를 틀고 있었으나, 북동부 지역 공화당원들이 점차 민주당처럼 리버럴화 되는데에 반대하며 남부 및 서부에서도 그 영향력을 키워가고 있었다. 특히 민주당의 프랭클린 D. 루스벨트라는 거물을 상대하기 위해 민주당 탈당파 출신인 웬델 윌키를 출마시키던 시점부터 6번 연속으로 보수파 후보가 지명을 받지 못했던 지라 64년에는 그야말로 칼을 갈고 있던 상태.
골드워터의 상대는 대표적인 당내 온건파 중 한 명인 넬슨 록펠러였으나 1963년 결혼한 해피 록펠러와의 혼인 이전 불륜 추문[5]으로 인해 당내 사회보수주의자들과 여성들의 지지를 잃으며 자멸했다. 반면 골드워터가 일리노이, 텍사스, 인디애나 경선에서 압승을 거두며 우세를 이어나갔고 마지막으로 승부처가 됐던 캘리포니아 경선에서도 여론조사를 뒤엎고 골드워터가 록펠러에게 3.14%p 차로 신승하면서 사실상 후보 지명이 확정되었다.
공화당 내 온건파들은 골드워터의 공식 후보 지명을 막기 위해 전당대회를 앞두고 펜실베이니아 주지사인 윌리엄 스크랜턴을 후보로 지지하기 위한 운동을 시작했고, 록펠러 역시 스크랜턴을 후보로 지지했다. 하지만 전당대회에서 2차 투표 끝에 골드워터가 후보 지명에 필요한 대의원을 확보하면서 당의 공식 지명을 받는 데 성공했다. 공화당 내에서는 무려 24년만에 보수파 후보가 대선에 출마하게 된 것.
문제는 이렇게 지명된 골드워터가 정작 전국단위 경선 여론조사에서는 지명 당일까지도 1위를 차지하지 못했다는 것. (1964년 7월 갤럽, 닉슨 22% - 골드워터 22% 동률) 골드워터는 이렇게 당의 지지를 모두 규합하지도 못한 채로 본선에 나가게 됐는데, 닉슨은 전당대회 지원 연설에서 '우리는 모두 골드워터 공화당원, 록펠러 공화당원, 헨리 캐벗 로지 공화당원, 스크랜턴 공화당원으로 나뉘어져있었지만 우리는 이제 후보를 결정했음으로 하나의 공화당원으로 모여 골드워터를 지지해야한다.'는 취지의 발언을 남겼는데 이 발언이 역설적으로 분열되어 있는 공화당의 현황을 가장 명백하게 보여주는 말이었다.
반면 배리 골드워터 후보는 수락 연설에서 "자유를 수호하기 위한 극단주의는 악이 아니다."라며 온건파 공화당원들을 도발했다.

4. 본선



'''선거의 판도를 결정지은 '데이지 걸' 광고'''
양 당 후보가 확정되면서 사실상 승부가 결정지어진 것으로 여겨졌다. 양당 후보가 확정된 8월 갤럽 여론조사에서 린든 B. 존슨이 65%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은데 반해 배리 골드워터가 29% 지지를 받는 수준에 그쳤기 때문. 골드워터가 안그래도 1964년 미국 연방 민권법 반대 투표 등으로 유색인종 및 공화당 온건 지지층의 불만을 사고 있던 상황에서 자신에게 도움을 줄 수 있었던 공화당 출신 전직 대통령인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에게도 날을 세우면서 스스로 외연 확장의 발판을 날렸다. 골드워터 입장에서는 아이젠하워 역시 리버럴 성향에 더 가까운 대통령이었기 때문에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
거기에 린든 B. 존슨은 선거사에 큰 영향을 준 TV 광고로 남은 데이지 걸1964년 9월 7일 내보내면서 쐐기를 박았다. 베트남 전쟁에서 핵무기를 사용해야한다는 등 과격한 어조를 이어가고 있던 골드워터를 말그대로 '전쟁광'으로 못박아 버린 것. 쿠바 미사일 위기가 불과 2년전이었고 통킹만 사건 이후 베트남 전쟁을 치르고 있던 미국 국민 입장에서는 이 광고를 그저 네거티브로 웃어넘길 수 없었다. 그덕분에 존슨은 골드워터와의 지지율 격차를 더 벌렸다.
위기에 처한 골드워터를 구하기 위해 한때 민주당 지지자 출신이었던 배우 로널드 레이건이 지원 유세를 하면서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한때 골드워터 진영이 받은 후원금이 백만 달러에 육박하기도 했지만 선거 구도에 영향을 미칠 정도는 아니었다. 한편, 양 후보의 선거 유세가 10월 20일, 허버트 후버 전 대통령의 서거로 잠시 중단되었는데 두 후보 모두 후버의 장례식에 참석하여 모처럼만에 화합하는 모습을 선보이기도 했다.
결국, LBJ가 큰 우세를 잡은 채로 선거 당일에 돌입했다.

5. 결과


'''최종 선거 결과'''
투표 시간
1964년 11월 3일(UTC +9}
투표 결과
후보자
린든 B. 존슨
베리 골드워터
'''선거인단 수'''
'''486 / 538명'''
'''52 / 538명'''
전국 득표 수
43,127,041표 (61.1%)
27,175,754표 (38.5%)
당선인
[image]
'''린든 B. 존슨 '''
그야말로 LBJ의 압승으로 선거가 마무리되었다. 워싱턴 DC와 함께 미국 전체 50개 주 중 44개 주에서 승리를 거뒀으며 전국 득표율에서는 무려 1936년의 프랭클린 D. 루스벨트의 60.8%를 넘어선 61.1%를 기록해 상대 후보 골드워터와는 22.6%p 차라는 어마어마한 격차를 냈다. 아주 적은 차이로 앞선 3번의 선거에서 공화당의 손을 들어줬던 플로리다, 와이오밍, 아이다호 등 보수 우세주에서도 승리를 거뒀으며 그밖에 알래스카, 유타, 아이다호, 와이오밍, 노스다코타, 사우스다코타, 네브래스카, 캔자스 주에서 마지막으로 이긴 민주당 후보가 되었다.

6. 관련 문서



[1] 현직 린든 B. 존슨 대통령 승리시[2] 도전자 배리 골드워터 후보 승리시[3] 1936년 대선에서 프랭클린 D. 루스벨트가 기록한 60.8%를 28년만에 뛰어넘은 기록이다.[4] 물론 인종차별주의 성향이 강한 남부에서는 남부 출신인 LBJ에 대한 배신감으로 드글드글 끓고 있었다.[5] 넬슨 록펠러가 해피 록펠러와 결혼하기 전부터 이미 만나고 있었고(불륜), 이로 인해 해피가 전 남편과 이혼하게 됐다는 내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