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 조약
1. 개요
베이징 조약은 1856년 발발한 제2차 아편전쟁의 강화과정에서 청나라가 1860년 10월 18일 영국, 프랑스 제2제국, 러시아 제국 3개국과 개별적으로 맺은 조약이다.
2. 원인
제 1의 원인은 제 2차 아편 전쟁에서 결과적으로 '패'했기 때문이다. 제 2의 원인은 1858년 톈진 조약의 비준을 거부한 것으로 인한 전쟁의 속행, 그리고 베이징 함락
3. 조약의 내용
'''<공통적인 내용>'''
'''1. 대등한 국교와 무역의 자유를 줄 것.'''
'''2. 크리스트교 신앙과 포교의 자유를 줄 것.'''
'''3. 뉴장(牛莊), 덩저우(登州), 한커우(漢口), 전장(鎭江) 등 새로이 10개의 항구를 개항할 것.'''
'''4. 공관을 설치하고 외교관을 주재시킬 것.'''
'''<각국에 따른 다른 내용>'''
'''- 영국'''
'''구룡반도 남부를 영국에 할양할 것.'''
'''- 러시아'''[1]
'''연해주를 할양할 것.'''
4. 결과
베이징 조약은 청의 몰락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일대 사건이었다. 조약 이후로 청은 열강들에게 철도 부설권을 비롯한 수많은 이권을 강탈당하고, 상하이 등의 주요 개항장에는 강제적으로 조차지[2] 를 내줘야 했다. 청나라 내부에서도 패전의 충격으로 중체서용[3] 이란 구호아래 양무운동으로 내부 개혁을 시도하지만 결과적으로 실패한다.[4]
지리적으로 보면 중국은 연해주 지방을 러시아에게 내주면서 고작 수 km 차이로 '''두만강을 통해 동해로 나가는 길이 막혀버렸고''' 결국 동해 진출의 교두보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반에 러시아는 유일한 부동항을 손에 넣었다. 더불어 조선과 러시아 간 국경선이 생기면서 한반도가 러시아와 연결되게 되었다. 이로써 네르친스크 조약과 아이훈 조약이 사실상 백지화 되어버렸다.
이후 러시아는 1864년과 1865년, 두만강을 넘어 조선 경흥군으로 접근해 통상을 시도한다. 흥선대원군이 이끄는 조선 정부는 일단 이를 거절했으나 러시아의 통상 요구에 부담을 느껴, 러시아를 견제할 수 있는 프랑스와 연결된 천주교 세력에 접근했다. 이는 병인박해와 병인양요로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