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창원주
1. 개요
福昌院主
? ~ 1195년 11월 27일
인종의 2비. 본관은 인천 이씨. 조선국공(朝鮮國公) 이자겸의 넷째 딸이다. 어머니는 해주 출신으로 문하시중을 지낸 최사추의 딸이다.
2. 상세
이자겸은 인종의 외할아버지였지만 다른 가문의 여자가 인종의 후비가 되면 자신의 권세가 흔들릴까 두려워 인종에게 자신의 딸 둘을 후비로 삼도록 강요했다. 이에 언니에 이어 1125년 조카인 인종과 혼인했다. 고려사에 따르면, 이자겸이 반역을 음모하고 떡에 독약을 넣어 왕에게 보냈는데 폐비가 몰래 왕에게 알렸고, 왕이 그 떡을 까마귀에게 던져 주었더니 까마귀가 먹고 죽었다. 또 이자겸은 독약을 보내 왕에게 보냈는데 폐비가 독약 그릇을 들고 가다가 일부러 넘어지면서 쏟아버렸다.
이자겸의 난이 진압된 후 1126년 4월 폐비가 되었으나 이후에도 인종은 목숨을 구해준 은혜를 잊지 않고 토지와 저택, 노비를 하사했으며 그 외 대우를 후하게 했다. 인종 사후 의종과 명종에게도 극진한 대우를 받았다. 1195년 11월 27일(음력기준) 사망하자 명종은 왕후의 예로 장례를 치러주었다.
1146년에 38세로 죽은 인종보다도 49년이나 더 길게 산 것으로 미루어보아, 인종과 나이가 비슷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 실제로 인종의 모후 문경태후는 15세에 예종과 혼인했고 인종이 7세 되는 해에 죽었다고 하니, 혼인하고 10달 뒤에 바로 인종을 낳았다고 쳐도 16세는 되고, 7년 뒤인 23세에 죽었다고 하면 남은 동생은 조카와 나이가 비슷하다는 계산이 충분히 나온다. 대략 동갑이라고 봐면 인종이 죽은 해에는 38세가 되는데 그러면 87세에 죽었다는 계산이 나온다. 환갑만 넘어도 장수랍시고 온 동네가 잔치를 할 정도로 평균 수명이 낮았던 시대인데 87세까지 살았으니 상당히 장수한 셈이다. 1125년 입궁했을 당시 인종이 17세였는데 당시 기준으로 여성이 20세까지 미혼이면 노처녀 취급받았기 때문에 15세 정도에는 혼인을 시키는 것이 당연했다. 또한 당시 상황을 고려해보면 초혼으로 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인종과 비슷한 연령대로 잡을 수밖에 없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