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태후

 

'''고려의 역대 왕후'''
숙종
명의태후

'''예종비'''
경화왕후
'''문경태후'''
문정왕후

인종
폐비(연덕궁주)
폐비(복창원주)
공예태후
선평왕후
'''시호'''
'''예종'''
'''순덕왕후(順德王后)'''
'''인종 이후'''
'''자정문경왕태후(慈靖文敬王太后)'''
'''존호'''
연덕궁주 왕비(延德宮主 王妃) / 황후(皇后)
'''작위'''
연덕궁주(延德宮主)
'''관저'''
연덕궁(延德宮)
'''본관'''
인주 이씨
'''능호'''
수릉(綏陵)
'''생몰연도'''
? ~ 1118년 9월 5일
1. 개요
2. 가족관계
3. 상세


1. 개요


예종의 제2비. 인종 공효대왕의 어머니. 시호는 예종 文효대왕과 文 자 돌림이다.

2. 가족관계


당대 최강의 외척 대가문인 인주 이씨(인천 이씨)의 일원으로, 아버지는 '''조선국공 이자겸''', 어머니는 변한국대부인 최씨[1]이다. 언니가 한 명 있었고 여동생 두 명이 있었다. '''여동생 둘은 나중에 자신의 아들과 결혼한다.''' 태후의 형제들은 인종 시기에 모두가 한자리씩 차지했다.

3. 상세


동문선 제28권 순덕왕후애책[2]에 의하면 순덕왕후는 15살 때 6촌간인 예종과 결혼했다고 한다.[3]
야사에 의하면 경원 이씨(인천 이씨) 집안 여자들이 뛰어나게 아름다웠다고 하는데 순덕왕후도 그러했다. 고려사 종실 열전 기록엔 그녀는 성격이 매우 넓고 부드러웠으며 굉장히 똑똑했다고 한다.[4]
순덕왕후와 예종의 결혼은 이자겸의 권위를 크게 높혔다. 하지만 예종은 강력한 왕권을 가지고 있었기에 이자겸은 가만히 숙이고 있어야 했다.
순덕왕후는 연덕궁을 하사받아 연덕궁주에 봉해졌다. 연덕궁이 아닌 자신의 친정 집에서 아들을 낳으니 그가 바로 인종 공효왕이다. 예종은 조서를 내려 축하했고 연덕궁주도 표문을 올려 감사했다. 후에 예종의 왕비로 봉해져 정식 왕후가 된다.
아들 인종이 7살일 때 훙(薨)하였으며 예종은 그녀에게 순덕왕후 시호를 추숭했다. 순덕왕후가 죽자 예종은 크게 슬퍼하였고, 신하들이 말라고 간관들이 나서서 안된다고 하는데도 신봉문(神鳳門)[5]까지 나가서 손수 조제를 올리고 영구 행렬을 보냈다.
심지어 예종이 혼당으로 가 절을 하자 간관들이 강력히 만류하였다. 이에 예종은 "조제의 예식은 송나라 임금도 한 적 있다. 나는 그 일을 본받은 것 뿐이다! 그리고 혼당 한번 간다고 무슨 큰일이 나는가?" 하고는 기어코 하고 싶은대로 했다고 한다. 이 점도 왕권 강화의 상징. 다만 이런 부분은 왕권은 강화해 놓고 후대가 약하면 외척 정치가 시행되는데, 후계 왕조인 조선 정조와 이미지가 유사해진다. 정조도 예종 마냥 강력한 군주여서 본인 대는 상관 없었지만 세자 순조 때부터는 외척으로 인해 엉망이 된다.[6]
순덕왕후가 죽고 2년 뒤, 예종은 원찰을 옮기니 안화사는 순덕왕후의 원찰이 된다.
아들 인종이 등극하자 남편과 文 자 돌림인 문경왕태후(文敬王太后) 시호를 추존하였고 후 자정(慈靖)을 추가로 올렸다. 고려사 이자겸 열전엔 이자겸이 문경태후를 황후(皇后)라고 불렀다.
인천광역시의 지명을 정하게 된 인물이다. 원 인천시는 경원군이었는데, 인종이 어머니의 고향을 높히기 위해 인주(仁州)로 바꿨고, 조선태종 대에 주(州) 명칭을 가진 지역 다수를 천(川)으로 변경시킨 것이 지금의 인천이 되었다.

[1] 최충의 증손녀이며 최사추의 둘째 딸.[2] 예종의 조명(詔命)에 의해 박인량이 쓴 애도문.[3] 예종은 이자겸의 외증손자이고, 문경태후는 이자연의 증손녀이다.[4] 증조부 이자연도 매우 박학해 당대의 중신이었고 친부 이자겸도 영악하여 많은 정적을 이기고 조정을 장악했다. 부녀가 모두 명철했던 셈. 하나 더하자면 고려도경에서 이자겸에 대해 이르기를 풍채가 맑고 온화했다 하니 아버지 외모의 유전이 있었다면 인상좋고 참한 미인이었을 듯 하다. 참고로 서긍은 왕후의 아들인 인종도 외모나 풍기는 기운 등에 대해서 어머니나 외할아버지와 비슷한 평가를 내리고 있다.[5] 본궐의 세번째 대문. 앞에 넓은 광장이 있었고 본궐의 대문 중 가장 크고 화려했다. 이중루로 윗층은 신봉루라 해 왕이 사면령을 내렸다.[6] 이 둘은 또 하나의 공통점을 가지는데 둘 다 본인이 후계자가 너무 어릴 때 사망하여 왕권을 제대로 이양해주지 못한 점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