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자겸의 난
1. 개요
인종 초기의 고려 왕조는 목종(고려), 천추태후 - 김치양, 강조(고려) 삼파전 이후로 가장 혼란스러운 정치 국면을 보였다. 이 국면 속, 먼저 손을 쓴 세력은 다름아닌 왕당파였다.
2. 배경
인종의 어머니는 이자겸의 둘째 딸, 인종의 두 왕후는 이자겸의 셋째, 넷째 딸이었다. 외척 중의 외척이 된 이자겸은 조선국공(朝鮮國公)으로 봉해졌고 그의 관저는 의친궁(懿親宮) 숭덕부(崇德府)[13] 로 봉해졌다. 또한 그의 자택은 중흥택(重興宅)[14] 으로 봉해져 그의 지위를 크게 올렸다. 그는 독자적으로 송나라와 교류했으며 자신을 지군국사(知軍國事)[15] 라 칭했다.
당시 시대에 군주의 허락 없이 독자적으로 타국과 교류한 건 자신의 국가를 건설하겠다는 것과 동일하게 취급되었다. 후삼국 시대의 왕봉규, 견훤의 외교 활동이 부각되는 것이 바로 그 이유다.
그는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당대 소문난 무인(武人)이자 무신(武臣)이었던 척준경을 끌어들였다. 그는 자신의 아들 이지원을 척준경의 딸에게 장가를 보내고, 이지의를 척준경의 절친 왕자지의 딸에게 장가를 보내 인척 관계를 맺으면서 동맹을 강화했다. 임금에 대해 딱히 충심이 없던 척준경 또한 권신 이자겸의 호의에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이렇게 군부와 정권을 모두 잡은 이자겸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지게 되었고 이는 결국 국왕 인종을 분노케 하였다.
3. 왕당파의 선공
중관(中官)[16] 이었던 김찬과 안보린은 대표적인 왕당파였다. 두 사람은 인종의 심기를 읽고, 이자겸과 척준경을 죽이고자 하였다. 이에 두 사람은 상장군(上將軍) 오탁과 최탁, 대장군(大將軍) 권수, 장군 고석과 연합해 계획을 짠다. 장군 직위를 가진 자들은 원래 척준경의 상관이었다가 척준경이 권력을 잡음에 따라 부하가 되버린 자들로 척준경을 매우 싫어했다.
'''인종 4년(1126년) 2월 왕당파가 움직였다.'''
왕당파는 저녁 시간에 본궐로 들어가 당시 궐에 있던 '''척순, 척준신 그리고 그들의 부하 전기상, 최영, 김정분을 죽였다.''' 그들의 시체는 본궐 궁성 밖으로 던져졌고 본궐은 폐쇄됐다.
4. 분노한 무인
이자겸파였던 신하 학문은 몰래 궁성을 넘어 다른 이자겸파 신하 지호에게 알렸고, 지호는 곧장 이자겸에게 변란이 생겼음을 알렸다. 이자겸은 왕당파가 먼저 싸움을 걸거라고 생각치도 못한 듯 하다. 고려사에 따르면 이자겸은 매우 당황해 장남 이지미와 척준경, 자신의 당파 소속 신하들을 의친궁으로 불러 어떻게 할지를 의논했다.
워낙 급박하게 정세가 변하니 아무도 뾰족한 수를 못내고 있던 중 이자겸의 사돈이자 척준경의 인척인 왕의가 몰래 본궐을 빠져 나와 상세한 설명을 한다.
자신의 유일한 아들과 친동생이 살해당했다는 걸 들은 당대 최강의 무력을 지닌 척준경은 그야말로 '''빡돌았다.'''
척준경은 윤한, 최식, 이후진 등 부하와 장졸 수십 명을 이끌고 가 바로 황성(皇城)의 남문이자 정문인 주작문[17] 에 도착했다. 하지만 봉쇄된 주작문을 열지 못하자 윤한을 시켜 '''성을 타고 넘어가''' 문을 강제로 열었고, 궁성(宮城)의 두번째 문이었던 신봉문[18] 에 도착해 '''땅이 흔들릴 정도로 분노에 찬 고함을 질렀다.'''[19]"'''일이 급하다. 앉아서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다.'''"
척준경, 급보를 듣고. 고려사 이자겸 열전.
왕당파는 척준경의 고함소리를 듣고 그가 대군을 끌고 왔다고 착각해 겁이나 신봉문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이자겸은 따로 움직여 왕당파의 집을 부수고 불태운 뒤, 처자식을 붙잡아 가두었다.
그렇게 하룻밤이 지났다.
5. 승평문 대치
다음날 아침, 척준경은 아들과 동생의 시체를 회수한다. 분노가 머리 끝까지 뻗친 척준경은 이자겸의 아들 이지보와 윤한, 최식, 이후진을 시켜 군대를 소환하고, 무기고를 털어 자기 마음대로 장비시킨 뒤, 궁성의 정문인 승평문[20] 을 포위한다. 또한 이자겸의 아들 의장이 자신이 주지로 있던 현화사의 승병을 끌고 와 가세하니 궁성 안의 병사들은 소극적으로 나설 수밖에 없었다.
척준경 - 이자겸파와 왕당파가 승평문 및 신봉문에서 대치하던 중, 인종이 직접 신봉문으로 움직였다.
인종은 금색 일산을 든 호위대와 도착했고, 척준경이 소환한 군대는 자신들의 군주를 보자 대열을 갖춰 절(拜)을 하고 만세(萬歲)를 외쳤다.[21]
인종은 신하 이중을 보내 문답한다.
인종은 이미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있었고, 분노에 찬 척준경을 달래기 위해 이중을 시켜 은화를 나눠주며 무장을 해제토록 했다. 그러나 척준경은 멈추지 않고 '''군주의 명령을 받은 이중을 검으로 위협해 물러나게 하고''' 군대를 다시 무장시켜 고함을 지르게 했다.인종: "네 무리(輩)는 왜 병(兵)을 끌고 왔는가?"
척준경파: "듣자하니 적이 금중(禁中)[22]
에 들어왔다하여 사직을 호위하기 위함입니다."인종: "없다. 짐 역시 무상하다. 너희 등은 갑옷을 풀고 해산하라."
인종과 척준경, 승평문 대치 중에. 고려사 이자겸 열전.
결국 싸움이 시작됐다. 화살이 날아다녔고, 심지어 인종에게까지 날아오자 호위대는 방패로 인종을 막으며 후퇴했으며, 의장의 승병은 신봉문의 기둥을 도끼로 찍어 무너뜨리려고 했다. 인종의 호위대는 신봉루에서 승병의 머리를 활로 쏘아 뚝배기를 깨버리며 항전했다.
6. 황도(皇都)의 본궐, 불에 타다.
이자겸은 자파 소속 신하를 보내 인종에게 전한다.
딱 봐도 매우 불손했고, 인종은 씹어버린다."부디 금중(禁中)에 있는, 난을 작당한 자들을 나오게 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금중(禁中)을 놀라게 할까 봐 두렵습니다."
이자겸, 인종을 협박하다. 고려사 이자겸 열전.
고려 본궐은 산 위에 자리잡고 있었으며 매우 크기로 유명해 쉽게 함락되지 않았다. 하루가 끝나가며 밤이 다가오는데도 궁성 안에 들어가질 못하자 속이 뒤틀릴 대로 뒤틀린 척준경은 자파 소속 신하를 시켜 이자겸에게 이자겸마저도 머뭇거리게 할 말을 전한다.
이자겸은 이 말을 듣고 바로 답하지 못하고 장남 이지미를 시켜 이공수란 신하에게 의견을 묻는다."오늘이 끝나가고 있소. 적이 밤을 틈타 도망칠까 두려우니 '''궁문을 불태운 뒤 들어가 탐색하는 것이 어떻소?'''"
척준경, 분노에 빠진 상태로. 고려사 이자겸 열전.
이 이공수란 신하는 이자겸이 자문을 구하는 걸 봐선 이자겸파로 보이는데 이 사건 이후 상당히 친왕당파적인 행보를 보인다."궁우(宮宇)가 서로 붙어 있으니 연소되면 멈추질 못합니다. 심히 불가합니다."
이공수, 어처구니 없는 전언을 듣고. 고려사 이자겸 열전.
여하간 척준경은 이자겸의 대답을 기다릴 생각도 없었다. 이자겸의 답이 오기도 전 근처 정부 청사에서 땔감을 들고 와 '''동화문(東花門)을 태워 없애버린다. 국왕 인종이 안에 있는데도!'''
그래도 좀 쫄린건지 아님 주변에서 말린 건지 승평, 신봉 등 대문은 불태우지 않고 근처의 소문을 태웠다.[23] 어쨋든 미친 짓이긴 하지만. 동화문에서 시작된 불은 궁궐 깊숙히 들어가 국왕이 먹고 자는 내전(內殿)까지 태웠다.[24]
시간이 조금 흘러 척준경과 이자겸의 아들 이지보가 갑옷을 입고 말을 탄 상태로 궁성 안에 들어간다. 그들은 춘덕문[25] 을 통과했는데 척준경이 문 안에 들어오자 인종의 호위부대 장교 송행충과 이작이 척준경을 공격했다. 당황한 척준경은 문 밖으로 물러났고 호위대는 문을 잠궈버린다. 척준경은 문 밖으로 나오는 자는 모두 죽이라고 명령을 내린 뒤 궁성을 수색한다.
"안에서 나오려는 자는 모두 죽여라."
척준경, 궁성 수색 중에 공격을 당한 뒤. 고려사 이자겸 열전.
7. 왕당파 패배
인종은 불을 피해 궁성 북쪽에 있었다가 호수가 있는 산호정이란 정자로 간다. 그는 직접 걸어갔으며, 시종하는 신하들이 다 도망치는 바람에 호위대 열 몇명만이 남아있었다. 하다하다 불까지 질러 궁궐이 타버리자 인종은 자신이 정말 이자겸 - 척준경에게 죽을까봐 걱정되었고... '''결국 이자겸에게 선위하겠다는 문서를 작성, 의친궁에 보낸다.'''
이자겸은 자파 신하들과 함께 문서를 받는다. 그러나 이자겸은 문서를 받고도 시원하게 답을 못했다. 그는 정부 관료와 민심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근데 갑자기 이공수가 크게 외친다.
이공수의 의미는 "우리 자겸이는 좋은 신하니까 당연히 선위 안받을 거임! 그치?"였고 자기 맘대로 답하기 힘들어진 이자겸은 바로 눈물을 흘리며 답했다."상께서 비록 조칙을 내리셨으나 이공(李公)께서 어떻게 감히 받들겠습니까!"
이공수, 먼저 손을 쓰다. 고려사 이자겸 열전.
인종 또한 진심으로 양위를 할려 했던 건 아닌 듯 하다. 최사전 묘지명을 보면 최사전이 인종이 양위할려 하자 한 말이 있다."신은 두 마음을 먹지 않았습니다. 부디 거룩한 분께서 다시 생각해주십시오."
이자겸, 선위의 문서를 받고. 고려사 이자겸 열전.
'삼한(三韓)이라는 것은 삼한의 삼한(三韓之三韓)이니, 폐하의 삼한(陛下之三韓)에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선군(先君)이신 태조(太祖)께서 근로하셨기에 (삼한이) 이렇게 완전해진 것인데, 부디 멈춰주십시오.'
상께서 오랬동안 눈물을 흘리다가 이르시길: '넌(汝) 생사와 육골을 되돌릴 수 있는가?'[26]
최사전이 인종에게 간언하다. 최사전 묘지명 중 발췌.
8. 이자겸, 척준경의 학살
사흘째 아침이 되었다. 인종은 계속 세지는 불을 피해 궁성 밖으로 나가려 했고, 때마침 이자겸이 척준경의 부하 김향을 시켜 인종을 남궁#s-3.2으로 나가게 하였다. 인종은 나가면서 중간에 태조 신성대왕의 신전인 경령전에 들러 태조의 어진을 우물 안에 숨긴 뒤, 말을 타고 남궁 연덕궁으로 간다.
이 때 상장군 오탁이 인종을 호위하고 있었는데, 이를 알게된 척준경은 부하를 시켜 오탁을 끌어내 목을 자르고 그의 부하도 죽였다. 이어 중관 안보린, 상장군 최탁 등 왕당파 주동자들을 모두 찾아내 죽이고, 그들의 부하들, 군사까지 모두 죽였다.
인종의 호위대가 남궁 가까이 오자 이자겸은 인종을 협박해 호위대원들을 내놓으라고 한다. 인종은 거부했으나 이자겸이 세번이나 계속 강요하자 그들을 죽이지 말라고 당부하며 넘겼다. 허나 이자겸의 아들 이지보가 호위대 장교 모두를 죽였다.
이자겸과 척준경은 서로 만나 의논하여 그 날 당시에 궁성 안에 있던 모든 사람을 귀천을 논하지 않고 죽이려 했다. 허나 이공수가 계속 말리므로 결국 실행하진 않았다.
지녹원 등 왕당파 중관들은 모두 유배보내거나 중간에 죽였고, 그들의 처자식은 노예로 계급을 낮춰 버렸다.
9. 해동천자의 수모
인종 4년(1126년) 3월, 이자겸은 남궁 연덕궁에 있던 인종을 사택인 중흥택의 서원(西院)으로 소환했다. 인종은 이제 호위 장교라곤 세 사람 밖에 없었다. 인종이 북문으로 들어 올 때 이자겸과 척준경은 이 세 사람도 죽이려고 부하를 시켜 인종에게서 끌어 냈는데 그 중 한사람이 인종의 곤룡포를 붙잡고 부디 살려달라고 빌었다. 인종은 이자겸의 부하를 질타했으나 부하는 아랑곳없이 장교의 가슴을 발로 찼다.
하지만 장교가 끝까지 손을 놓지 않아 '''인종의 곤룡포가 찢어지고 인종의 복두도 문에 걸려 찢어졌다. 이자겸의 아들 이지미와 이지보는 방문에 기대서서 섬돌 아래로 내려 오지 않고 인종을 쳐다보고 있었다.'''
오로지 한 신하만이 절을 올렸다. 이 신하는 이자겸의 부하에게 소릴 질렀는데:
그제서야 부하는 멈추었고 장교는 겁에 질려 중흥택 안으로 들어오지 못했다. 결국 인종은 이 신하와 이자겸파 중관에게 부탁해 죽이지 말라고 요청했다."성지(聖旨)가 내려졌다. 네가 어떻게 감히 이럴 수 있는가!"
한 신하, 중흥택 서원에서. 고려사 이자겸 열전.
결국 척준경이 유배로 명령을 바꾼다."이 세 사람은 지성으로 임금을 사랑하여 다른 마음을 품지 않았다. 그대들은 부디 날 위해 죽이라고 명령을 내리지 말아주게나."
인종, 자신의 호위대를 지키기 위해. 고려사 이자겸 열전.
인종이 집 안으로 들어와 이자겸 및 이자겸의 부인과 마주하고 앉았다. 이자겸과 부인은 손으로 바닥을 치고 크게 울며 말했다.
여기서 황후는 이자겸의 둘째 딸이자 인종의 모후인 자정문경왕태후를 말한다. 이자겸의 말을 들은 인종은 "부끄러워 얼굴이 빨개지고 말이 없어졌다"고 하는데 과연 정말 부끄러워서인지 아님 화가 나서인지는 본인만이 알 것이다."황후(皇后)[27]
께서 입궁하실 때부터 늘 태자를 낳길 원했습니다. 결국 성인(聖人)[28] 께서 태어나시니, 영원히 사시라고 하늘에 비는 것이 지극하지 않은 점이 없었습니다. 천지귀신이 제 지성을 알텐데 오늘날 적신을 믿어 골육을 해치려 하시다니요."
이자겸, 자신의 무고함을 강조하며. 고려사 이자겸 열전.
그렇게 2달 동안 인종은 이자겸의 집에 갇혀 모든 것이 제한당한다. 인종은 왕당파가 죽인 척순, 척준식 등에게 관직을 추증해주고, 이자겸이 견제하는 기타 왕당파 중관을 내쫓아야 했으며, 모든 업무를 이자겸에게 허락을 받아야 했다.
'''이렇게 진정한 이자겸의 세상이 왔다. 하지만 이를 아득바득 갈고 있는 인종은 여전히 포기하지 않았다.'''왕이 서원에 거처한 이후 좌우가 모두 이자겸 일당들이었으니, 나라 일을 듣고 결단하거나 행동거지와 음식도 자유롭게 하지 못했다. (...) 왕이 일찍이 홀로 북쪽 담에 가서 하늘을 우러러 통곡하며 시간을 보낸 일도 있었다.
<<고려사>> <이자겸 열전>
10. 이자겸과 척준경의 불화
인종이 패배한 이유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공인 척준경을 자극한 데 있었다. 적어도 인종은 그렇게 생각했다. 인종은 몰래 자신의 주치의였던 최사전을 척준경에게 보내 살살 달랬다. 척준경이 조금씩 마음을 바꾸자 인종은 조칙을 내리며 척준경을 포섭하기 위한 밑밥을 깐다.
대놓고 모든게 내 탓이니 서로 옛 감정을 버리고 같이 정권을 회복하자고 유도하고 있다. 척준경은 이자겸파보단 인종이 더 믿을 만하다고 생각한 듯하다."생각건대 짐이 밝지 못하여 흉도가 일을 터뜨리게 하였다. 대신이 걱정하고 힘들게 했으니 모두 과인의 죄다.
이를 이용해 몸을 굽혀 잘못을 후회하고 하늘을 향해 마음을 다잡아 신민과 함께 새로운 덕을 만들고자 한다.
경은 스스로를 다잡는데 노력하고 '''옛 일을 염두에 두지 않고''' 모든 힘을 다해 보조하여 후환이 없도록 하자."
인종, 척준경에게 하사한 조서. 고려사 이자겸 열전 중
이는 이자겸의 아들 이지언의 노비와 척준경의 노비끼리 싸우며 나온 발언이 불을 붙였다.
이 다툼을 전해들은 척준경은 대노하여 바로 중흥택으로 뛰어갔다. '''옷과 관을 벗어 던진 뒤 외쳤다.'''"네 주인이 궁궐에 화살을 쏘고 불태우니 이는 죽음으로 갚을 죄다. 너도 노비가 될 꼴인데 어찌 날 모욕하는가!"
그리고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가버리니 사람들이 말렸다. 그러자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내 죄가 크다, 마땅히 관청으로 하여금 판결을 내리게 하라!"
고려사 이자겸 열전.
이자겸은 아들 이지미, 이지의를 보내 화해를 구했지만 척준경은 도리어 그들에게 질타한다.
그리고는 그들을 만나보지 않았다. 냅다 또 선언하니"'''전일의 난은 모두 너희 등이 한 짓이다. 왜 내 죄만 죽어 마땅하다 하는가?'''"
척준경이 성질이 급하다는 것이 보인다. 그야말로 극단적인 말만 골라서 하고 있다. 하지만 솔직히 척준경이 정말 자신의 권력을 버리고 귀향해 버릴까? 당연히 아닐 것이다. 중요한 건 이자겸과 척준경이 난 이후 사이가 매우 틀어졌다는 것이다. 서로에게 난의 잘못을 돌리고 있는 걸 보면 그들이 난의 후폭풍을 감당하기 버거워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이자겸의 권세가 달랑 두 달밖에 유지되지 못한 듯하다."내 고향으로 돌아가 늙을 것이다!"
인종은 이를 듣고 또 척준경에게 시그널을 보내며 자신의 명마 한 필을 선물한다. 노비 분쟁 사건 이후 이자겸은 대충 누가 뭘 하려는지 알아차린 듯하다.
11. 연경궁 사변
인종 4년(1126년) 4월 이자겸은 인종을 데리고 안화사에 간다. '정국안화사(靖國安和寺)'는 원래 태조 신성왕이 창건한 사찰로 훗날 예종이 크게 증축했다. 예종은 안화사를 문경태후의 원찰로 바꾸었는데, 이자겸이 인종을 데리고 천수사, 봉은사[29] , 신흥사[30] , 현화사도 아닌 딱 이 사찰에 데리고 간 것은 그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었다.
절에 가던 도중 인종은 타버린 옛 본궐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 안화사에 도착한 뒤, 안화사의 승려, 일꾼들은 인종에게 절을 올렸는데, '''이자겸은 말 위에서 이것을 바라보았다.'''
다음 달 인종 4년(1126년) 5월 1일, 인종을 견제할 필요성을 느낀 이자겸은 연경궁으로 인종의 처소를 바꾼다. 그는 자신의 관저였던 의친궁 숭덕부를 연경궁 남쪽으로 옮겼고 '''의친궁 북쪽에 있는 연경궁 남쪽 성벽을 부숴 길을 바로 통하게 만들었다.''' 또한 자신의 사병을 국가의 무기고에서 꺼낸 무기로 무장시켜 늘 데리고 다니니 인종은 어이가 없어 한번은 혼자 북쪽 뒤뜰에서 하늘을 바라보고 오랫동안 운 적도 있었다.
인종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다방면으로 이자겸을 감시하며, 척준경을 끌어당겼다. '''결국 척준경은 이자겸을 배신하고, 인종에게 붙는다.''' 척준경의 충성 문서를 본 인종은 답한다.
인종은 늘 자기 휘하의 중관을 시켜 이자겸을 몰래 관찰하고 있었다. 1126년 5월 20일, 인종은 이자겸의 이상행동을 포착했고, 인종의 중관이 인종이 '''직접 쓴 쪽지'''를 장교들과 회의 중이던 척준경에게 전달했다. 이 쪽지엔 척준경도 망설이게 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국공(國公)은 비록 참적이나, 반역의 시도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다. 짐이 먼저 손을 쓰면 먼저 친족을 해치게 되는 꼴이니 나중의 변란을 기다리는 것도 늦지 않다."
인종, 척준경에게. 고려사 이자겸 열전.
척준경은 이를 보고 바로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이제 고려국왕과 조선국공 중 한 쪽을 고르면 절대 되돌릴 수는 없다. 척준경은 자신의 부하 김향에게 묻는다. 김향은 울면서 무릎을 꿇고 임금을 도와야 한다고 호소했다."오늘 숭덕부군(崇德府軍)이 병(兵)을 끌고와 전각의 북쪽에서 침전의 문을 부수려 한다. 짐이 만약 피해를 입는다면 내 덕이 모자라서 그런 것이다.
단지 내가 아파하는 것은 태조가 업을 세우고 열성(列聖)께서 서로 이어왔는데, 과인의 때에 이르러 이성(異姓)이 갈아버리려 하는 것이다.
이는 오로지 짐의 죄뿐만 아니라 보상대신(輔相大臣)[31]
들도 심히 부끄러워 할 일인 것이다. 부디 경은 잘 생각해보길 바란다."
인종, 마지막 결전을 앞두고. 고려사 이자겸 열전.
마음을 잡은 척준경은 즉각 움직였다. 휘하 장교 7명과 20여 명의 장정을 이끌고 바로 자신이 불질렀던 본궐로 향했다. 황성의 정문인 광화문(廣化門)[32] 에 도착한 척준경은 왕당파 중관과 이공수가 몰래 쪽문을 열어 주어 잽싸게 들어 갔다. 본궐 무기고에 먼저 도착한 척준경의 부하는 100명의 군사를 뽑고 그들을 무장시켰다.
그렇게 무장을 마친 척준경은 곧장 연경궁으로 갔는데 가던 중 이자겸파 신하 하나를 만났다. 그가 척준경의 군세를 보고 불손한 말을 하자 '''즉시 죽였다.''' 척준경이 군대를 끌고 연경궁의 천성전문(天成殿門)에 도착하자 미리 나와있던 인종이 그를 반겼다. 숭덕부군이 인종과 척준경을 향해 화살을 쐈지만 척준경이 으르렁거리며 칼을 휘두르자 기세가 밀렸다.
척준경은 인종을 데리고 본궐 무기고로 향했고, 호위를 강화했다. 척준경이 부하를 시켜 이자겸을 부르자 이자겸은 이미 모든 게 끝났음을 직감했는지 소복을 입은 채로 왔다고 한다. 척준경은 이자겸을 팔관보(八觀寶)[33] 에 가두었고 그의 처자식을 모두 찾아 역시 팔관보에 가두었다.
척준경은 본보기로 이자겸을 호위하던 장교 두어 명을 죽였고 군졸을 체포했다. '''드디어 복수에 성공한 인종은 광화문에서 선언했다.'''
그제서야 해동천자가 귀환했다는 걸 알게된 개경의 시민들은 모두 만세를 외치고 박수를 치며 눈물을 흘렸다.'''"재앙이 궁궐에서 일어나 대역죄인이 부도하니, 충신과 의사들 덕분에 의로움을 들어 해악을 없앴도다!"'''
“禍起蕭墻 大逆不道, 賴忠臣義士 擧義除害.”
인종, 드디어 정권을 회복하고. 고려사 이자겸 열전.
장남 이지미는 뒤늦게 변고가 생겼다는 걸 듣고 휘하 장정 100명을 끌고 광화문에 가려 했지만 폐쇄된 문은 열리지 않았고 그들은 결국 병부(兵部) 청사에 주둔했다. 당시 이지미는 아버지가 잡힌 줄 모르고 있었는데 병부의 군대와 척준경의 군대가 와 그들을 모두 잡아갔다.
12. 결말
인종은 다시 연경궁에 돌아갔다. 가기 전 중관들이 궁을 청소했는데 내전에서 이자겸의 아들인 현화사의 주지 의장이 발각됐다. 의장 역시 아버지를 따라 팔관보에 갇혔다."짐이 어리고 충동적이어서 조업(祖業)을 이어 받았으나 외가(外家)의 도움을 받고자 했다.
일의 크고 작음을 따지지 않고 위임하였다. 그러나 탐욕스럽고 난폭하니 민(民)을 다치게 하고 나라(國)를 해쳤다. 짐은 비록 이를 알고 있었으나 막을 수 없었다.
그러나 금월 20일 창졸을 시켜 환란을 일으켰으니 판병부사(判兵部事) 척준경이 의를 들어 난을 평정했다. 공을 잊을 수 없으니 관사에 명령해 상을 주도록 한다. 군기소감(軍器少監) 최사전[34]
도 마음을 다해 크게 보조했으니, 같이 상을 준다."
인종의 선지(宣旨), 고려사 인종 세가.
인종은 이어 이자겸파 사람들을 하나하나 없애기 시작한다. 이자겸파 소속 신하는 그 노비까지 모조리 사형을 받거나, 수장 되거나, 섬에 유배 되거나, 길거리에 칼을 씌인 채 조롱당하는 신세로 전락했다.
유배보냈다. 아들들은 아무도 돌아오지 못하며 유배지에서 죽었다.
이자겸의 딸인 두 왕후는 이자겸 실각 이후 당연히 폐비되었으나 인종을 독살하려는 시도를 막기도 한 걸 감안해서인지 그 이후로도 개경에서 살았으며, 인종이 나름대로 집과 노비들을 하사하는 등 챙겨줬다고 한다.
이자겸의 아내는 3년 뒤인 1129년에 돌아올 수 있었다. 이미 위협도 안되니 외척을 우대한다는 이유로 봐준 듯 하다.
'''이자겸은 인종 재위 4년째인 1126년 12월 5일, 영광서 총 7개월간 유배 생활을 하다 죽었다.''' 한 때 지군국사 겸 조선국공으로 군림한 권신치고는 참으로 허무한 최후를 맞았다.
척준경은 인종에 붙어
- 추충정국협모동덕위사공신(推忠靖國協謀同德衛社功臣) 공신호를,
- 삼중대광(三重大匡) 향직 품계,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문산계 품계를,
- 검교태사(檢校太師) 검교직을,
- 수태보(守太保) 수직을,
- 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 판호부사(判戶部事) 겸(兼) 서경 유수사(西京 留守使) 직위를,
- 상주국(上柱國) 훈위를 받았다.
그러나 인종이 본궐에 화살을 쏘며 태워먹어 자신을 죽이려한 미치광이를 냅둘 생각은 전무했고, 1127년 3월, 정지상이 척준경을 탄핵하자 이를 계기로 그를 전남 신안의 엄타도로 유배보냈다. 허나 자신을 도왔다는 걸 참작해서인지 척준경의 처우를 고향인 황해북도 곡산면에 옮기는 귀향형으로 고쳐주었다.[35]
'''척준경은 인종 재위 22년 째인 1144년, 곡산서 총 17년간 유배 생활을 하다가 그 곳에서 사망했다.''' 자기가 선언했던대로 본인 고향에 돌아가 늙은 셈이다.
1127년 10월, 이자겸이 수탈한 땅과 노비를 원 주인에게 돌려 주었고 이자겸과 척준경의 난을 전각에 기록해두니, 결국 최후의 승자는 인종이었다.
13. 영향
이자겸 일가의 패망은 숙종, 예종 대에 걸쳐 이어진 근신(近臣) 정치가 막을 내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종은 인척을 자신의 세력으로 삼아 신료들을 견제하기를 포기했고, 다른 방법을 시행한다.
이자겸이 폭주 기관차가 됐을 때 그를 그나마 막아낸 김부식은 개경 귀족 출신이다. 이자겸 난의 시발점인 중관 김찬은 서경 출신 인물이었다. 척준경 탄핵에 앞장선 정지상도 서경 출신이다.
숙종, 예종은 서경에 자주 행차하거나 궁궐을 지어 서경 출신 인물을 지원했고, 이로써 서경파와 개경파가 서로 견제하게 만들어 왕권을 강화했다. 인종은 이자겸의 난 이후 본격적으로 서경 세력 육성에 나서니, 정계엔 정지상, 백수한, 종교계엔 묘청이었다. 그리고 풍수지리 등을 동원하였다.
이렇듯 이자겸의 난으로 개경 출신 귀족과 서경 출신 귀족이 나뉘어졌으며, 중앙 집권층 사이의 분열로 그 동안 고려를 지배했던 문벌귀족 사회의 붕괴 조짐이 나타났다. 당장의 영향만 보아도 훗날 묘청의 난과 무신정권의 성립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이의민 역시 이자겸 마냥 십팔자위왕설 드립을 좋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