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한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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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 개요


ᠪᠤᠷᠬᠠᠨ ᠬᠠᠯᠳᠤᠨ, Бурхан Халдун
몽골 동부 헹티 주에 있는 몽골족의 성산. 부르칸, 불칸, 부르한 할둔 등으로 불리우며 그냥 산 대신 바위라고 불리기도 한다.
칭기즈 칸이 젊은 시절 아버지 예수게이타타르에게 잃고 이 산 근처에서 어머니 호엘룬와 함게 지냈으며, 메르키트 족에게 습격을 받아 아내 보르테까지 빼앗긴 후에도 부르칸 산의 밀림 속에 숨어 목숨을 건졌다. 그 때 문득 <영원한 하늘>이 자신을 도와준다고 느끼고, "부르칸 산을 아침마다 섬겨라. 날마다 섬겨라. 내 자손의 자손들아, 이것을 잊지 말아라." 하고 맹세했다고 한다. 또한 케레이트를 쳐부수고 마지막으로 나이만 부족의 타얀 칸을 쓰러뜨리고 몽골을 통일했을 때도 부르칸 산의 신령한 기운을 받아 칭기즈 칸이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칭기즈 칸의 유해가 묻혀 있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는 곳이지만, 그의 무덤은 아직도 어디있는지 미스터리. 왜냐하면 칭기즈 칸의 시신을 이 곳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마주친 '''모든 살아있는 생명체를 죽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입막음을 위해 무덤을 만드는 데에 동원된 인마까지 몰살'''당해 상세한 위치는 알려져 있지 않다고 한다. 이걸로도 모자라 '''칭기즈 칸의 무덤은 묻은 후 파헤쳐지는 것을 막기 위해 기병대가 수없이 짓밟아 평지로 만들어버린 상태'''고. 그 후에 그 '''밟은 말들과 기수들도 몰살'''되었다. 그럼 이들을 죽인 놈들은? 그나마 이것도 사실 여부가 불분명하다. 이는 당시 몽골에게 지독한 학살을 당한 이슬람 쪽에서 나온 말로 근거도 없을 뿐더러 '지상 최악의 살인마'라는 악의를 가득 담아 지어낸 독설일 뿐이다.
그 때문에 이에 대해 이견이 제기되고 있다. 당시 몽골의 장례식이 '무덤 위로 말떼를 달려 다지는' 방식인 건 사실이지만, 죽인 자를 또 죽이고 그 죽인 이들을 또 죽이고... 의 방식은 그저 몽골의 잔혹성을 부각시키기 위한 낭설이란 것이 주장. 위의 연쇄살인(?) 방식은 데바닷타 관련 설화에도 나올 정도로 흔한 클리셰이기도 하고...[1] 그래서 이를 부정하는 측에서는 단순히 대제왕의 이미지와 그에 걸맞는 화려한 분묘의 이미지를 추종하며 생긴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라고 주장한다. 투탕카멘 왕의 분묘와 같은 사례를 들어 아직 발굴된 게 아니라고 하는 이들도 있지만, 이 경우는 '''정말로 운이 좋은 사례'''[2]
이 때문에 칭기즈 칸의 성향과도 연관해서, '처음부터 그의 무덤이 제대로 남아 있지 않다'는 주장도 있다. 유목민의 전통에 충실한 칭기즈 칸의 성격을 존중해서 무덤 또한 전통 유목민식 장례로 아주 소박하게 치루어서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은 흔적도 남아있지 않았다는 이야기.
일본 제국은 중일전쟁 때 칭기즈 칸의 무덤을 찾으려고 무진 애를 썼다. 칭기즈 칸이 일본인이라는 사이비 역사를 인증하여 대동아 공영권이라는 제국주의를 정당화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 밖에도 북경 원인 유골도 일본인의 조상이라며 강제로 차지하려고 하고 히믈러처럼 유적이나 역사에 맛탱이 갔던 짓거리가 똑같다. 하지만 실패하고, 대신 몽골의 고고학 기술만 어마어마하게 발전했다고 한다.
관광 명소로도 이름이 높은데, 201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1] 그나마 데바닷타 설화에서 나오는 방식은 마지막에 데바닷타 본인이 마지막 실행자들을 '직접 전부 독살하는' 식이지만 그거야 데바닷타 본인이 살아있는 상태인데, '''그럼 어떻게 입을 다물게 된 데바닷타의 살인을 알 수 있을까?''' 투탕카멘의 저주도 아니고.[2] 고대 이집트 시절부터 현대에까지 대를 이어 '도굴'을 '''가업'''으로 이어오는 가문이 있을 정도로 도굴이 심하다. 반대 사례로 로마 제국의 '다키아 침공' 당시를 보면, 다키아는 로마군으로부터 보물을 뺏기지 않으려고 '''강의 물길을 막은 뒤 그 강바닥에 보물을 파묻고 다시 강을 흐르게 하는''' 등의 방식까지 썼지만, 로마군은 이걸 금방 찾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