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탕카멘의 저주

 

1. 소개
2. 상세
3. 진실
3.1. 협박성 문구?
3.2. 카나본 경의 죽음과 불행?
3.3. 나머지 인원의 죽음?
4. 대중 문화에서의 투탕카멘의 저주
5. 기타
6.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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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1922년 이집트에서 고대의 파라오 투탕카멘의 무덤을 발굴한 팀이 하나둘씩 연이어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다는 도시전설. '파라오의 저주'로도 알려져 있다. 핵심 인물 파라오 투탕카멘은 기원전 1361년부터 9년 동안 재위하여 18세에 요절한 소년왕이었다.

2. 상세


도시전설에 의하면, 투탕카멘의 저주는 다음과 같이 이루어졌다.
"의 안식을 방해하는 자는 죽음의 날개닿으리라."는 협박성 문구가 부장품에 상형문으로 기술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런 저주는 파라오의 무덤에 경고용으로 따라붙는 상투적 문구이긴 했지만,[1] 발굴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차례로 의문사를 당했다고 한다.
저주의 첫 희생자는 발굴팀의 자금줄이자 유력자인 카나본 경이었다. 발굴 당시에 파라오의 상징인 코브라가 나타나서 카나리아[2]를 잡아먹는 사건이 있었다고 한다. 카나본 경은 발굴을 참관한 직후 오래지나지 않아 돌연사로 생을 마감했다. 발굴 당시 카나본 경은 모기에 물렸는데, 물린 곳이 심하게 부풀어 오른데다가 면도를 하다가 환부를 베는 바람에 덧나서 패혈증으로 사망했다. 카나본 경이 사망한 순간 카이로 전역에서 갑자기 전기가 나갔다고 한다. 연이어 그의 애견도 숨졌다.
서서히 다른 팀원들도 하나 둘씩 사망했고, 심지어 무덤으로 가이드를 한 사람마저도 급사했다고 하며, 이집트에는 때아닌 모래 폭풍이 발생했다. 몇 년이 지나자 투탕카멘의 묘를 발굴한 인부들은 투탕카멘의 저주로 희생되었다는 소문이 여기저기에 파다하게 퍼졌다. 훗날 집계된 희생자[3]의 수는 21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3. 진실


무덤을 팠다고 저주하는 방법이 있었다면, 왕가의 계곡에서 도굴꾼들이 마을을 만들고 대대손손 살 수 있겠습니까?

그런거 없다. 진실은 다음과 같다.

3.1. 협박성 문구?


투탕카멘의 무덤에 쓰여 있던 문구는 "왕의 안식을 방해하는 자는 죽음의 날개에 닿으리라."가 아니라, "왕의 죽음의 비밀을 밝히는 자를 축복하리라."는 뉘앙스였다.[4] 어떻게 보면 발굴자들에게 행운과 축복을 내려준 셈이다. 실제로 고대 이집트에서는 죽은 사람을 기억하기 위해 무덤을 찾는 것은 칭찬을 받을 만한 행동이었고, 이런 기준으로 보면 발굴자들은 충분히 축복을 받을 사람들이다.
침입자들에 대한 저주의 문구 자체는 완전한 창작은 아니며, 고왕국 시대에서 중왕국 시대에 이르기까지 많이 사용되었다. 하지만 저주의 문구는 흔히 알려진 "죽음의 날개에 닿으리라."나 "죽음이 날개를 펴고 내려오리라."와 같은 근사한 표현이 아니라, "이러이러한 병에 걸려서 고생하다가 죽을 것이며, 어떤 의사도 그 병을 치료할 수 없을 것이다." 같은 직설적인 위협으로 적혀 있었다. 나아가 투탕카멘의 시대에 저주의 문구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고, 투탕카멘의 무덤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고대 이집트'는 고왕국부터 신왕국까지 망라하는 2천년이 넘는 기간 동안 수많은 변화가 있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3.2. 카나본 경의 죽음과 불행?


카나본 경은 발굴 당시에는 건강이 매우 나빠서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1922년 11월에 발굴을 지휘한 고고학자 하워드 카터가 투탕카멘의 무덤을 발견하고 최대한 빨리 와 달라며 특급 전보를 보냈을 때, 그는 몸이 아파서 마음은 급하지만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 답장했다. 카나본 경은 몇 해나 거액을 후원하며 애타게 찾던 파라오의 무덤을 빨리 보고자 3주 만에 이집트로 갔는데, 이때 안 그래도 나빴던 건강이 타격을 받았을 것이다. 이렇듯 여러 가지 원인이 겹친 상황이었기에 사실 금세 숨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결국 그는 그로부터 반년도 못 살고 세상을 떠났다.
발굴 현장에서 코브라가 카나리아를 잡아먹었다는 것은 기자가 지어낸 이야기였으며, 주인을 따라 곧 죽었다던 카나본 경의 애견도 실은 훨씬 오래 살았다. 카이로에서의 정전 역시 1920년 당시에는 흔한 일이었기 때문에 특별한 사건은 아니었다.
카나본 경 본인은 어떤 의미에서는 저주를 받은 듯이 운이 나쁘기는 했다. 19세기만 해도 이집트 측은 발굴 기술이 없다며 유물을 찾아내면 절반 이상은 그 발굴단의 조국으로 가져가게 했었다. 게다가 이집트는 프랑스를 상대로 오벨리스크를 시계와 교환[5]했을 정도로 고대 이집트 유물을 우습게 봤기에, 19세기에 투탕카멘 무덤이 발굴되었다면 대부분의 유물들이 지금쯤 영국 대영박물관에 있었을 것이다. 나아가 당시 이집트인들은 이슬람교와 무관한 고대 이교도의 흔적은 마음대로 하라고 할 정도로 유물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하지만 20세기에는 이집트인들도 자국 문화재의 가치를 알았기 때문에, 투탕카멘의 모든 유물은 해외로 반출할 수 없었다. 카나본 경은 한때 발굴을 그만두려고 했을 정도로 재정 상태도 안 좋았는데, 병든 상태에서 발굴 현장을 보기 위해 무리하게 이집트로 왔다가 유물은 못 가져간다는 사실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6]

3.3. 나머지 인원의 죽음?


카나본 경 말고도 발굴에 참가한 인원 일부가 연쇄적으로 사망한 것은 사실이다. 이들의 죽음의 원인에 대한 다양한 추측[7]이 있지만, 기묘한 우연의 일치로 보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다. 카나본 경과 사망한 인원을 합치면 21명이 되지만, 실제로 관련된 1,500명에 비하면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카나본 경과 운 나쁘게 사망한 인원을 제외한 나머지 인원의 대다수는 모두 천수를 누렸다. 예컨대 발굴을 지휘했던 카터는 발굴 전까지는 평범한 고고학자였지만, 이 발굴로 부와 명예를 누리며 17년 동안 건강하게 지내다 66살에 생을 마감했다.[8] 각주에도 언급됐듯이 투탕카멘 유물의 해외 반출을 막은 라우드는 이집트 정부에게 훈장을 수여받았다. 나머지 관련자들의 상당수 또한 이 저주가 무색하게 잘 살았다.

4. 대중 문화에서의 투탕카멘의 저주


영화 <미이라>,[9] 부바 호텝, 만화 <천체전사 선레드>의 카멘맨, 애니메이션 <미이라왕 투탕>, 과거 우리나라에 출판되었던 만화책, 우리나라 인형극[10]에 이르기까지 이 도시전설이 서브컬쳐에 끼친 파급력은 헤아릴 수 없다.
덧붙여 서브컬쳐의 미이라파라오 류의 캐릭터가 '저주' 스킬을 패시브 설정으로 지니게끔 지대한 공을 끼쳤고, 이게 미이라를 통해 고착화된 뒤로는 이집트인 캐릭터는 죄다 괴인이나 오컬트 캐릭터로 등장하는 클리셰를 낳았다. 예를 들자면 만화 왕가의 문장에도 큰 영향을 끼쳤으며, 초반부에는 아예 파라오의 저주를 직접 실현하고 다니는 악녀 아이시스가 주인공처럼 보일 정도.
과학자 겸 소설가 이종호의 책자 "파라오의 저주"에 의하면, 이 도시전설의 유래는 카나본 경이 투탕카멘 발굴 관련 인터뷰를 특정 신문이 독점 계약한 것에 불만을 품은 다른 신문사라고 한다. 해당 신문사가 쓴 기사는 짧게 대충 쓴 기사였는데, 이게 워낙에 대박을 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덧붙여지고, 정설처럼 되었다고 한다.
영국의 역사학자 마크 베이넌은 투탕카멘의 저주로 죽었다고 하는 사람들 중 적어도 6명은 알레이스터 크로울리에게 살해당했다는 색다른 주장을 펼쳤다.

5. 기타


1996년에는 이집트 박물관에서 투탕카멘 유물을 훔치려던 자들이 적발되어 구속되었다. 어떤 기자가 이들은 다 투탕카멘의 저주 때문에 실패했다고 언급했다가, 저주라면 그들은 피를 토하고 죽었어야 하지 않냐는 경찰의 비웃음 섞인 면박을 받은 적이 있다. 엄청난 돈줄을 도둑맞을 뻔한 것에 분개한 호스니 무바라크 당시 이집트 대통령 명으로 이들은 아직까지 교도소 신세를 지고 있다. 경비도 철통같아졌으나, 2011 이집트 혁명으로 어수선한 와중에 경비가 허술해지자 일부 유물이 도난당했다. 일부는 아직까지도 회수되지 못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무령왕릉 발굴 시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또한 삼국유사 수로왕편의 기록에 따르면, 금관가야의 시조 김수로왕의 능인 수로왕릉 역시 함부로 건드린 사람들이 온갖 횡액을 당했다고 한다.

6. 관련 문서



[1] 당연히 도굴 문제로 골머리를 앓았기 때문이다. 현대로 따지면 쓰레기 무단투기를 막기 위해 'CCTV 감시 중'이라고 써붙이는 것을 생각하면 된다.[2] '카나본' 경의 이름과 유사하다.[3] 10년 이내에 자연사 외의 이유로 사망.[4] 투탕카멘 문서에서는 당시에도 그의 사인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기 어려워 이런 문구를 써두었을지도 모른다고 서술되어 있다. 현대에도 투탕카멘의 정확한 사인은 미지의 영역에 있다.[5] 해당 오벨리스크는 프랑스 파리에 있다. 참고로 해당 시계는 20년도 지나지 않아 고장났다.[6] 당시 이집트 카이로 박물관장 알 이븐 하지 라우드의 고집이 워낙 강했다. 참고로 그는 이집트 문화재 보호에 기여한 오귀스트 마리에뜨의 조수를 지낸 경력이 있다.[7] 무덤에 잠들어 있던 고대의 곰팡이가 세상 공기를 만나며 맞닥뜨린 발굴단의 일원들을 감염시키고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설이 있는데, 사람의 몸에 닿자마자 생명에 위해를 끼칠 정도로 유독한 곰팡이는 실존하지 않는다. 독성 물질 전반으로 범위를 넓히면 보톨리누스 정도를 꼽을 수 있지만, 그 정도면 들어가자마자 죽었을 것이다. 열대 모기에 의한 전염병이라는 추측도 있다.[8] 투탕카멘의 저주 때문에 자신도 죽을까봐 두려워서 공포에 시달리다 늘그막에 미쳐 죽었다는 썰도 있으나, 이는 틀린 이야기다.[9] 1932년판과 1999년판 모두 해당.[10] 80년대 모여라 꿈동산 같은 어린이 드라마에까지 미이라가 나와 발굴범들을 목 졸라 죽이는 것까지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