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민고소금지법
1. 개요
'''部民告訴禁止法'''.
조선시대에 지방의 향직자(鄕職者)나 일반 백성들이 관찰사나 수령을 고소하는 것을 금지하던 제도. 세종 2년인 1420년에 세종의 명(상왕인 태종의 동의와 함께)에 의해 처음 시작되어 이후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2. 내용
수령고소금지법(守令告訴禁止法)이라고도 부른다.
고려와 달리 중앙집권화를 추구하던 조선에서 실시한 일종의 중앙행정정책의 일환이다. 겉으로는 백성들이 수령을 고소하지[1] 못하게 하는것처럼 보이나 속으로는 지방권력이던 향리들의 수령 고소를 막아 중앙행정권력인 수령을 보호하려는 중앙행정화정책이다. [2][3] 물론 백성들 또한 고소가 금지되어 초기부터 폐단이 나오나 세종은 이 문제를 알고 부민고소금지법을 계속해서 개정해나갔다. [4]
3. 역사
3.1. 성립
처음 법이 시행된 시기는 1420년으로,[5] 이 법을 주도한 인물은 허조이다. 세종과 허조가 이 법을 제정한 목적은 사리에 맞고 안 맞는 것을 불문하고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능멸하는 것을 금지함으로써 상하존비(上下尊卑)의 명분을 확립하고자 함에 있었다. 수령은 백성의 부모이고 백성은 수령의 자식인데, 자식으로서 부모를 고소할 수 없다는 논리를 적용하여 매우 아름다운 법이라고 보았다.
법의 내용은 관찰사·수령을 일반 백성이 고소한 경우 이를 수리하지 않으며, 고소자를 장(杖) 100, 도(徒) 3년에 처하였다. 또한 타인을 몰래 사주해 고소하게 한 자도 같으며, 무고한 자는 장 100, 유(流) 3,000리형으로 처벌하는 것이었다.
3.2. 쇠퇴
부민고소금지법이 잠시 폐지되었던 시기는 7대왕 세조 시기이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세조는 억울하다며 고소한 백성들에게 장을 때리고 유배를 보내는 부민고소금지법을 극혐하였던 것으로 보인다.[6] 세조는 즉위 후 부민고소금지법을 바로 폐지하였다. 계유정난 및 왕이 된 후의 각종 실책 때문에 세조를 싫어하는 이들도 이것만큼은 좋게 평가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막상 본인의 최측근 공신들에 대해서는 관리를 안하여(...) 파리들만 잡았지 막상 큰 호랑이들은 못 잡았다는 한계가 존재하였다.
3.3. 부활
이후 세조 사후 성종 4년인 1473년에 성종이 유학자들의 상소를 받아들여 다시 부활시켰고, 당시 개정되던 경국대전에도 수령고소금지법에 대한 내용을 수록했다. 이미 예종 때부터 수령에 대한 고소가 점차 활성화되었는데, 문제는 백성들이 이 고소를 빌미로 수령에게 상납까지 뜯는 일까지 발생해 중앙행정권력인 수령이 흔들리기 시작했고, 결국 성종은 부민고소금지법을 부활시켰다.
이에 대한 보완책으로 백성들의 안위를 보살피고자 암행어사나 격쟁 제도 등이 적극적으로 검토되었다.[7]
중종 19년인 1524년에는 전가사변(全家徙邊)으로[8] 부민의 고소를 더욱 중벌하게 되었고, 훗날 숙종년대에 전가사변율(全家徙邊律)이 폐지됨에 따라 원래의 장 100, 유 3천리형으로 되돌아왔다. 이후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부민고소금지법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아무래도 애민의 왕으로 불리던 세종이 이런 법을 만들었다는 것이 조선 당대에도 좀 그랬던지 후대의 왕들은 세종보다는 성종이 만든 법으로 얘기하곤 했다. 사실 완전히 폐지된 법을 성종조에 다시 부활시킨 것이니 아주 틀린 말도 아니다.
성종조에 부민고소법을 만들었는데, 이로부터 청렴하지 못한 수령들이 기탄 없이 방자한 행동을 하므로 그 폐단을 바로잡고자 하였으나 폐단이 이미 고질화되어 결정을 내리지 못하였다. ; 成宗朝 立部民告訴之法 而自是之後 守令不廉者 恣行無忌 欲矯此弊 而弊已痼也 亦未果焉
4. 옹호
현대인이 보기엔 악법이라 할 수 있으나 세종시대의 전문 연구자들의 말에 따르면 오히려 소신행정을 도와 국가 안정을 도모하기 위한 세종의 뜻에서 시행한 제도였다고 한다.
당시 세종이 추구한 최대 목표는 지역 수령을 성공적인 군현의 경영자로 만드는 것이었고 소신껏 일하는 일부 수령을 지켜주는 순기능을 위해서 이 법을 추진했다는 것이 옹호하는 사람들의 의견이다.[역사 속 행정] 세종의 부민고소금지법. 주민권리 침해인 줄 알면서도 소신행정 도와 국가 안정 도모
간단하게 지방권력이였던 향리들로부터[9] 중앙행정권력인 수령들을 보호하는 일종의 중앙집권적 정책인 셈이였다. 즉 세종의 부민고소금지법은 농민들의 수령고소금지가 아닌 향리들로부터 수령을 보호하는데에 초점을 맞추었고 지방권력을 완전히 잡는데에 목적을 둔 법이다.
물론 이에 대해 반대하는 의견도 있긴 하다.[지상 논쟁] 세종 논쟁 2라운드- 박현모 교수의 비판에 답한다 2018년 경에도 학계 내에서 이 제도가 세종의 애민정신과 국가발전을 위한 큰 뜻이 담긴 선법인지, 아니면 조선왕조 500년의 발전을 저해시킨 악법인지를 두고 의견이 갈리는 상황이라 할 수 있다.
두 의견을 종합해보면 세종이 이 법을 제정함에 따라 아랫사람이 윗사람의 잘못을 함부로 지적하거나 고발하는 데서 오는 명분의 파기를 막고 소송의 남발에 따르는 행정상의 공백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으나,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백성들의 민원과 언로(言路)가 억제되고 나중에는 백성들이 수령의 일방적인 통제와 지시에 따라야만 하는 노예와 같은 상황을 맞이한 부정적인 기능이 나타났다고 보면 될 듯하다.
[1] 정확히는 살인 같은 중범죄는 고소가능하게 했다. 허조의 경우는 역모 등의 일부를 제외하고 모두 하지 못하게 하지고 주장했다.[2] 이는 태종 때부터 향리들이 수령을 고소하며 부정부패을 일삼는다는 기록으로도 나온다.[3] 태종 10년 4월기사[4] 대표적인것이 백성들이 수령한테 오심을 받았다고 생각하면 상부기관에 재심을 요구할 수 있게 하는 것.[5] 세종 2년[6] 세조의 행적이 워낙 나쁘기는 했지만 애민군주의 측면도 있었다. 공신들과 얽히면 공신들 편을 들기는 했지만...[7] 격쟁의 경우 징을 두드리든 아니면 임금을 직접 뵙는 방식으로든 어쨌거나 임금에게 직접 "이러이러한 일이 있어 억울하옵니다" 하는 일이니 어쨌거나 고소는 아니다. 그냥 "제가 억울한 일이 있어요. ㅠㅠ"일 뿐[8] 가족 전체를 변방으로 쫓아내는 것[9] 조선초 아직 태종태세 시절에는 지방권력이였던 향리들의 권세가 지방에 남아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