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랜드 대기근
아일랜드어: An Gorta Mór(대기근), An Drochshaol(끔찍한 시기)
영어: Irish Great Famine[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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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 대기근을 묘사한 유명작 "Gorta[2] ", 릴리안 루시 데이비슨(Lilian Lucy Davidson)의 1946년 작품. 캔버스에 유화(油畵).
1. 개요
근대 들어 아일랜드 섬의 기근은 1740 ~ 1741년, 1847 ~ 1852, 1879년으로 총 세 차례 있었다. 그 중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던 두 번째 기근을 가리켜 '대기근'이라고 부른다. 영국 본토의 수탈로 인해 아일랜드에는 감자 이외에 먹을 것이 거의 없던 와중 감자가 병들어 버렸다. 후에 기근에 대한 조치를 위해 아일랜드 구제방안이 영국 의회에서 꾸준이 제안되었으나 상원과 하원의 '''끝없는 반대로 실행되지 못하여''' 참사가 일어났다. 기근 전 800만명을 상회하던 아일랜드의 인구수는 100만여명이 아사, 또다른 100만명이 기근을 피해 이민길에 올라 기근이 끝날 시점에는 총 인구수의 '''25%가''' 없어졌다. 이 수치는 '''200년가까이 지난 21세기에도 회복되지 않아 현 아일랜드 섬의 주민 수는 도합 800만명을 넘지 않는다.''''''물론 감자 농사를 망친 것은 신이었다. 하지만 그걸 대기근으로 바꾼 것은 영국인들이다.'''
- 존 미첼
2. 배경
아일랜드에는 청동기시대때부터 켈트족이 정착해 살고 있었다. 아일랜드는 잉글랜드가 노르만 왕조에 정복당한 후인 12세기 후반부터 헨리 2세의 주도 하에 잉글랜드의 침입이 계속되어 점차 예속화되어 갔다.
16세기 유럽을 강타한 종교개혁으로 잉글랜드의 국교가 성공회로 바뀌면서 잉글랜드는 아일랜드인에게 성공회를 믿을 것을 강요했다. 가톨릭을 믿는 아일랜드인들은 저항하기 시작했다. 엘리자베스 1세부터 시작하여 올리버 크롬웰에 이르기까지, 잉글랜드 지배층은 아일랜드인의 저항을 무자비하게 진압한 다음 아일랜드 자영농들의 토지를 몰수해 아일랜드로 건너온 잉글랜드인들에게 나눠주었다. 잉글랜드인이나 성공회로 개종한 일부 아일랜드인들은 대규모 토지를 소유한 지주층이 되었다. 나머지 아일랜드인은 소작농으로 전락해 비참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소작농들은 먹을 것을 얻기 위해 상대적으로 값이 싼[3] 감자를 대량으로 재배했다. 아일랜드인 소작농들이 먹는 감자는 주로 개인 텃밭에 심었다. 일년 내내 감자와 버터 밀크[4] 만으로 버티는 수준이었다.[5] 대기근이 아일랜드를 덮치기 직전인 1846년에 조사된 결과에 따르면, 성인 남성이 단 하루에 최대 '''6.35kg(14 파운드)'''에 달하는 감자를 소비했다고 한다. 대식가로 명성이 자자한 조선인들조차 밥 한 공기에 약 690g 정도의 쌀을 먹었다고 하니, 아일랜드인들은 어마어마한 양의 감자를 먹었던 것이다.[6] 결국 감자의 끝내주는 구황효과[7] 로 어찌어찌 가난을 견딜 수 있게 된 아일랜드 하층민들은 아이를 낳아 기를 수 있게 되었고, 아일랜드의 인구는 눈에 띄게 증가했다. 당시 경제학자였던 맬서스는 아일랜드의 상황을 보고 '인구론'에서 '곡물 생산량은 산술 급수로 늘어나는데 이렇게 기하 급수적으로 애들을 낳기만 하면 분명 인류는 망한다'라고 적었다.[8]
1801년, 아일랜드는 그레이트 브리튼 아일랜드 연합 왕국에 합병되었다. 대기근이 일어나기 직전인 1840년대 후반의 아일랜드 인구는 800만 명 정도였는데, 인구의 1/4이 무려 86%의 토지를 독점하고 있을 정도로 빈부 격차는 심각한 상태였고 그만큼 빈민의 수도 많았다. 아일랜드 농업은 기본적으로 영국이 필요로 하는 밀과 소, 돼지를 키우는 플랜테이션 체제였다.
이런 배경 때문에, 역사학자들은 아일랜드가 대영제국이 이이제이 전략을 통해 현지 정치체제를 해체하고 플랜테이션을 강제한 제국주의의 첫 실험장이자 희생자였다는 데 주목하기도 한다.
2.1. 배경에 대한 오해
'당시 아일랜드 감자의 종이 한 종류 뿐이라서 병이 돌자 이런 사태가 일어났다'는 이야기가 있다.[9] 실제로 아일랜드 대기근은 식물 병리학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진균류가 식물병을 일으킨다는 최초의 입증인 동시에, 한가지 품종만 심는 것이 어떤 재앙을 불러일으키는지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이다. 특히 감자는 유전적 문제로 인해 더 문제가 심각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아일랜드 대기근의 가장 큰 원인은 '''종 다양성의 문제가 아니다'''. 아일랜드 섬의 기후 자체가 극히 불안정하여 현대 기술 없이는 곡물 경작이 극히 어려웠기 때문에 인구가 불어난 '''아일랜드인들은 감자만 먹을 수밖에 없었고''', 이런 상황에서 역병으로 감자가 다 사라지고 구제마저 끊기면서 재앙이 일어난 것이다. 사실 아일랜드에서 밀과 호밀이 경작 가능한 곳은 더블린 주변의 영국인 거주지역뿐이었다. 이 지역은 기근을 피해갔다.[10]
3. 진행과정
1842년 미국 동부의 감자 농장은 대규모의 감자 역병으로 인해 쑥대밭이 되고 말았다. 이 역병은 순식간에 북미 전역으로 확산된 뒤 다시 배를 통해 전 유럽으로 번졌다.
감자 역병균의 포자는 잎에서 증식하기 시작해 섭씨 10도 이상, 습도 75% 이상인 조건, 그러니까 여름만 되면 쉽게 조성되는 조건에서 이틀 정도만 있으면 작물 전체로 퍼진다. 만약 이 때 비가 내리면 포자가 빗물을 타고 땅에 스며들어 식용으로 쓰이는 덩이줄기 부분까지 퍼지게 되며, 병균 포자가 바람을 타고 다른 곳으로 날아가 작물을 전염시키기도 한다. 역병에 걸린 감자는 이파리 끝과 줄기에 짙은 반점이 생기기 시작하고, 감염된 덩이줄기는 갈색으로 변하면서 다른 세균이 침입하면서 2차 감염으로 썩어버리게 된다.
그런데 하필 이 시기, 그러니까 1845년 여름의 아일랜드는 유난히 비가 잦았던 탓에 밀과 같은 다른 작물의 작황도 엉망이었을 뿐만 아니라 감자 역병이 돌기에 최적인 환경을 제공해주고 있었다. 그리고 1845년 가을, '''감자 수확이 시작되면서 대재앙이 막을 올렸다'''.
이 때, 영국 정부는 역병에 매우 민감한 반응을 보이면서 적극적인 구제 활동을 펼쳤기 때문에 문제가 커질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미국과 영국 본토에서 정부가 직접 밀을 공급하여 1845년 겨울 동안 70만명을 구제했고, 1846년에는 곡물법을 폐기하여 밀의 수입을 자유화함으로서 식량의 유통량을 늘리는 한편 간접적으로 식량의 가격을 조정하려 했다.
그러나 1845년의 겨울을 넘긴 아일랜드 소작농들에게는 그림의 떡이었다. 비록 곡물법의 폐기로 밀 관세가 철폐되었으나, 감자 역병으로 농사를 망친 지역은 아일랜드만이 아니었으므로 외국에서 많은 식량을 들여올 수 없었다. 그로 인해 폭등하는 식량 가격을 안정화시킬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 식량이 아일랜드로 들어오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나마 아일랜드로 들어온 식량 대부분은 항구 도시와 그 인근 지역에만 유통되었다.
사실 아일랜드에서 밀을 비롯한 작물은 1845년의 흉작을 제외하면 계속해서 생산이 이루어지고 있었고, 심지어 가축의 수출은 대기근 내내 증가하는 중이었다.[11] 그러나 환금 작물을 재배하고 남은 자투리 땅에 감자를 심어 식량을 자급자족하던 아일랜드의 빈농들이 수입 식료품을 구입하기는 힘들었다. 그나마도 아일랜드뿐만 아니라 전 유럽을 휩쓸었던 대기근으로 인해 수입 가격이 폭등해 있었다. 아일랜드에는 제 돈 주고 밀을 사먹을 수 있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밀과 가축 대부분이 계속 수출되고 있었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1846년의 곡물 수출은 아일랜드 자체 소비를 위해서 1/3수준으로 폭락했다. 또한 정부는 공공 공사를 시행하고 공사비 전액을 현지에서 지출함으로써 아일랜드인 노동자를 먹여 살렸다.
그래도 기근 첫해에는 정부가 지속적인 관심을 보여 개입했기 때문에 상황이 양호한 편이었다. 그런데 정권이 교체되고 자유당이 집권하자 자유방임주의적 원칙에 따라 직접적인 개입에 제동이 걸렸다. 쉽게 말해 물고기를 주는 것보다는 물고기를 잡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 더 도움이 된다는 논지였다. 이런 주장에는 곡물 상인들이 자기네 이익이 저하된다며 반발을 한 것이 크게 작용했다. 결국 업자들의 반발과 정부의 무관심으로 지원은 중단되었고 이제 공권력은 기근에도 불구하고 식량이 어디로 유통되든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1845년에 5만 명이었던 아일랜드인 이민자 숫자는 1846년 10만 명으로 폭증했다.
그나마 1846년에 아일랜드를 탈출한 이들은 이후에 닥쳐올 최악의 사태를 보지 않고 떠날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행운아였다. 자유당이 집권한 1846년 여름부터 정부는 식량 공급을 포기했으며 아일랜드는 계속 유럽에 식량을 수출했다. 더군다나 씨감자도, 씨감자를 묻을 땅도 잃어버린 빈민들을 1846년의 기록적인 폭설과 한파가 기다리고 있었다. 대기근 시대 사망자의 대부분이 1846 ~ 1847년의 겨울에 발생했다.
아일랜드인들은 입에 넣어 소화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먹어서 목숨을 부지해야 했는데, 유럽에서는 거의 식용으로 쓰지 않는 해조류까지 닥치는 대로 채취해 먹는 지경까지 갔다. 이때 많이 먹었다는 적갈색 해조류에는 '아이리시 모스(Irish Moss)'라는 별명까지 붙어있고, 지금도 저 해조류로 만드는 젤리나 음료수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12] 어찌나 상황이 참혹했던지 '''식량을 지켜야 할 영국군 병사들이 상부의 명령없이 굶주리고 있는 아일랜드 민간인들에게 식량을 직접 나눠줄 지경이었다.'''
1846~1847년 겨울의 참사 이후, 아일랜드에서는 빈농이고 지주고 모두 몰락하기 시작했다. 1847년 2월 자유당 정권은 뒤늦게 구제소를 마련하고 무료 식량 공급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자유주의에 따르자면 정부가 그 책임을 도맡아서는 안되었다. 그러자 자유당 정권은 새로운 병크를 더 추가하는데, 6월에 해당 지역 납세자들이 모든 책임을 떠맡도록 법제화해버렸다. 토지 소유주들이, 구제소에 의존해 목숨을 잇고 있던 아일랜드인 300만 명의 구호 비용을 감당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막대한 구제 비용을 감당해야 했던 아일랜드 지주들은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자기 토지에서 굶어 죽어가는 소작농들을 쫓아내기 시작했지만, 이렇게 쫓겨난 소작농들을 대신해 농사를 지어 지주들에게 지대를 낼 사람은 이미 아일랜드에 존재하지 않았다. 주 소득원을 자기 손으로 내쫓아버린 지주들은 줄줄이 빚더미에 올라 서로 땅을 떠넘기며 무너졌다. 오히려 이들의 땅과 농장을 영국인들과 친영국파인 아일랜드 신교도들이 헐값에 대거 매입했다. 아일랜드의 구교도와 신교도간의 경제적 격차는 더욱 심해졌다. 아일랜드인의 반영 감정은 증폭되었다.
빈민 구제를 위해 영국의 종교단체들이 아일랜드에 들어갔는데, 대부분이 수프를 대가로 개종을 강요했다는 소문이 널리 퍼졌지만, 현대 연구에 따르면 그런 일이 널리 발생했다는 증거는 없고, 대부분의 성공회 단체는 개종과 관련 없이 식량을 제공하였다.
빅토리아 여왕은 1849년 아일랜드를 방문했는데, 이때 여왕이 방문한 항구도시인 코브(Cobh)는 이를 기념해서 도시 이름을 '여왕의 도시'란 뜻의 퀸스타운(Queenstown)으로 바꾸었다.[13] 당시만 해도 빅토리아 여왕에 대한 아일랜드인들의 감정은 나쁘지 않았고, 비교적 호의적으로 여왕을 환영했다. 여왕의 방문을 통해서 아일랜드의 참상이 더 잘 알려지고 영국 정부는 보다 효과적인 지원 정책을 추진했다...면 해피 엔딩이었겠지만 현실은 시궁창이었다. 여왕은 퀸스타운과 그 근교만 방문했고, 당연히 이 곳들은 여왕의 방문을 앞두고 사전에 지원을 받았다. 여왕은 아일랜드인들이 윤택해 보이는 모습만 목격할 수 있었다. 따라서 빅토리아 여왕은 아일랜드의 현실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한 채 떠났고, 그러니 아일랜드에 대한 관심도 오래가지 않았다.
4. 결과
4.1. 이민과 인구 감소
결국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많은 아일랜드인들은 고국을 뒤로 한 채 미국, 캐나다, 뉴질랜드, 오스트레일리아 등으로 이민길에 올랐다. 2010년 통계에 의하면 아일랜드계 미국인의 수는 '''3,467만 명'''에 달해 독립국 아일랜드 인구의 7배를 넘기는 수준이다.[14]
아일랜드는 대기근 이후 '''현재까지 기근 전의 인구 수를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대기근 직전 800만이었던 아일랜드 인구는 대기근 쇼크 후, 이민으로 인한 인구 감소가 이어진 끝에 독립 당시 400만명으로 내려 앉았으며 현대에 이르러서도 아일랜드와 북아일랜드를 합쳐도 650만명정도인 수준이다.
4.2. 반영 감정
이 사건은 아일랜드 반영 감정의 주요한 기원으로 꼽힌다. 아일랜드에서는 미국으로 가는 이민이 급증, 그리고 도착 후에는 이탈리아계, 아프리카계들과 함께 남북전쟁이 한창이던 북군에 동원,[15] 아일랜드계 미국인이 증가하는 계기가 되었다.[16]
또한 미국으로 이주해 온 아일랜드계 미국인들은 동포들을 굶어죽도록 그대로 내버려 둔 영국에게 복수를 하려는 증오심에 불타서 아일랜드 전설에 나오는 전사들의 모임인 '페니언'에서 이름을 따온 무장 조직인 페니언 민병대를 만들어, 1866년부터 1886년까지 20년 동안 영국의 영토였던 캐나다로 쳐들어가 영국군을 집요하게 공격했다. 당시 미국 정부는 이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잠재적 적국인 영국[17] 을 돈 한 푼 안 들이고 견제하려는 속셈에서 그냥 눈감아 주었다고...#
5. 문화적 영향
이 기근을 주제로 하여, 아일랜드인들을 모욕하는 'Famine Song(직역:기근 노래)' 곡이 만들어졌다. 영국 축구 경기장에서 이 노래를 부르는 것은 절대 금지되어 있다. 노래 내용이 영국에서 잉글랜드와 나머지 3개 지방(북아일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 간의 지역감정을 직접적으로 자극하기 때문이다. 훌리건들은 난동을 피우며 이 노래를 즐겨 부른다.
대신 아일랜드 쪽 축구팬들이 많이 부르는 노래는 피터 세인트 존(Peter St. John)이 작사, 작곡한 <The Fields of Athenry>인데, 듣는 사람 입장에선 '''이건 이거대로 눈물바다.''' 무슨 노래인고 하니, 아이가 굶어죽게 생기자 절박해진 남성이 높으신 분[18] 의 옥수수 창고를 털었다가 붙잡혀서 '''오스트레일리아로 끌려가기 전날에 아내와 생이별하는 노래'''다. 이건 뭐 레 미제라블이 따로 없다(...). 대놓고 훌리건 짓을 하기에는 가사가 너무 슬프기도 하고 축구장에서 이걸 부르는 사람들도 꽤 얌전하기 때문에 축구장 금지곡은 아니다. 오히려 아일랜드의 각종 스포츠 대표팀이나 관련 성향을 가진 팀(셀틱 FC라든가...)이 뛰는 경기에서 단골 메들리로 불리는 노래다. 대신 가사가 너무 슬퍼서 분위기가 처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인지(?) 간혹 가다 Our love was on the wing~ '''(Sinn Féin![19] )''' We had dreams and songs to sing '''(IRA!)'''처럼 가만히 듣다보면 무서워지는 추임새를 넣기도 한다.[20]
다만, 이 사건은 최근까지 아일랜드에서 논의가 크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미국으로 이민갔던 빈민들의 자손들에게서 활발한 연구가 이루어졌고, 이들이 아일랜드에 투자를 하기 시작하면서 아일랜드 내에서도 관심이 생겼다. 예를 들어 제임스 조이스의 작품들에서는 대기근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걸리버 여행기를 쓴 작가 조너선 스위프트가 지은 겸손한 제안이 이 기근을 두고 쓰여진 것[21] 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그보다 100년 전에 쓰인 글이다. 하지만 당시 아일랜드와 영국의 관계와, 100년이 넘도록 비참한 현실이 해결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자료일 것이다.
제임스 프레체빌, 휴고 위빙이 주연한 아일랜드 영화 블랙 47(2018)이 이 시절을 다루고 있다. 집도 먹을 것도 없어서 황야에 살다가 얼어죽는 가족, 수프 한 그릇에 신앙을 포기해야 하는 천주교 신자[22] , 아일랜드인들의 기근 따위엔 신경쓰지 않는 영국 관료 등 당시 아일랜드의 비참한 모습을 잘 묘사하고 있다.
6. 기타
영국이 터키의 아르메니아 학살을 비난하자 터키는 이 사건을 꺼내들며 맞받아쳤다. 함께 터키를 비난한 덴마크에게는 1783년 라카기가르 화산 폭발에 이은 아이슬란드 기근[23] 으로 역공을 시도하다가 빈축만 샀다.
덜 알려진 이야기지만 비슷하게 같은 시기에 스코틀랜드의 하일랜드 지역에도 같은 감자 역병으로 인한 기근이 있었는데, 아일랜드만큼 심하지는 않았지만 아일랜드의 대기근처럼 영국 정부가 식량지원의 책임을 방임, 지역 지주들에게 전가하여 무능한 대처를 하고 이로 인해 대규모 아사와 이주가 일어나 아일랜드 대기근과 매우 유사하다 평가받는다.
당시 오스만 제국의 황제였던 압뒬메지트 1세(Abdülmecit)는 아일랜드와 별다른 접점이 없었음에도 인도적인 차원에서 1,000파운드를 지원했다. 이에 아일랜드인들이 황제의 관대한 호의에 감사하는 편지를 보내고 일부 도시에서 오스만 제국의 상징인 초승달과 별을 도시 문장에 추가하는 등,[24] 지원 자체는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그러나 압뒬메지트 1세가 구호를 위해 1만 파운드를 보내려 했는데 빅토리아 여왕이 자기는 2천 파운드만 보냈다며 1천 파운드만 기부해 달라고 요구했다거나, 금전 지원이 좌절되자 터키 선원들이 영국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아일랜드에 식량을 적재한 선박 3척을 전달했다는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라 각색된 일화일 가능성이 높다.아일랜드, 압뒬메지트의 도움에 163년만에 감사를 표하다.(터키어)
2011년과 2016년에 캐나다 퀘벡주 해안가에서 발견된 인골들이 대기근 시기인 1847년 당시 아일랜드 이주민들을 태워 캐나다로 오다가 난파된 배에 탑승했던 아이들로 밝혀졌다.#
대기근 당시 미국 오클라호마의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인 촉토족이 당시 돈으로 약 170달러를 모금해서 아일랜드 구호 단체에 기부한 적이 있었다. 21세기 현대 가치로는 약 5000달러이다. 2020년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가 유행하자 아일랜드에선 이에 보답하는 의미에서 아메리카 원주민들에 대한 구호 기금을 모금하였다. #
7. 읽을거리
100만 명 굶어 죽은 대기근…19세기 아일랜드에 무슨 일이
아일랜드 감자 대기근
"전국민이 거지인 나라, 아일랜드밖에 없을 것"
8. 부록: 아일랜드는 왜 옥수수를 심지 않았나?
아일랜드인들은 단위 면적당 뛰어난 생산력을 자랑하는 옥수수를 왜 키우지 않았냐는 의문이 생길 법 하다. 당시 아일랜드 소작농들은 '''옥수수 종자를 살 자본이 없었'''을 뿐더러, 아일랜드에서의 생산 효율은 옥수수보다 감자가 높았다. 당시 유행했던 부업 중 하나였던 돼지 사육에 필요한 부수물[25] 을 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대기근 중에 영국이 옥수수 가루를 배급했고 아일랜드인들이 이걸 유황 가루로 착각해서 폭동을 일으켰다는 잘못된 소문이 있다. 당시 아일랜드는 이스터 섬 마냥 고립된 섬이 아니었고 외부에서 여러 수단을 통해 식량이 유입되었다. 이미 많은 아일랜드 사람들은 미국에 진출해 있었고, 그들 덕에 상당한 식량이 아일랜드로 유입되었다. 다만 낙후된 수송능력 때문에 식량이 제때 도착하기 어려웠고 아일랜드 항구에 도착해도 '''그 구역에서 다 소모되었다.''' 드넓은 아일랜드 전역을 담당하기는 불가능했다. 알려진 것처럼 옥수수를 유황 가루로 인식해서 사람들이 감자를 찾으며 폭동을 일으켰다는 것은 루머에 불과하다. 옥수수 가루라도 제대로 공급됐으면 대기근이라 부르지도 않았을 것이다. 정량조차 채우지 못한 배급량 덕에 사람들은 옥수수를 아주 멀겋게 끓인 '''죽'''조차 먹기 힘들었다. 게다가 설령 죽을 받더라도 위에서 말한 이유로 그냥 물에 가까운 무언가. 받기도 힘든데 겨우 받은 것도 엉망, 사람들이 들고 일어난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이 혼란 와중에 '''잉글랜드 놈들이 우리에게 유황을 먹이려 든다!'''라는 소문이 돈 것이다. 출처
또한 당시 대부분의 아일랜드인은 맷돌이 없었다. 현재 흔히 사람들이 즐겨먹는 옥수수는 스위트콘과 찰옥수수로 알려진 감미종과 나종으로 그냥 삶거나 찌거나 구워먹으면 그만이지만 이 당시 주식으로 먹던 옥수수는 아주 단단해서[26] 맷돌로 갈아 옥수수 가루를 만들어 먹어야 했다. 다른 나라에서는 밀가루도 먹어야 하므로 맷돌이 동네마다 있었는데 아일랜드는 감자밖에 먹을 게 없으니 맷돌이 거의 없었다. 때문에 영국 정부가 급히 미국 옥수수 화물선을 아일랜드로 보냈지만 단단한 옥수수를 먹을 수가 없었다. 영국에서 맷돌까지 급히 보내주고 나서야 옥수수 가루를 내 죽을 먹을 수 있었고, 아일랜드인은 난생 처음 맷돌로 옥수수 가루를 내며 '영국 총리의 유황 가루'라 투덜거렸다. "아일랜드인들은 감자 외에는 요리할 줄 모른다"는 말이 아주 거짓말은 아니었던 셈이다
아일랜드에서의 생산 효율이 옥수수보다 감자가 더 높았던 또 다른 이유는 옥수수가 C4식물[27] 이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면 강한 빛에서 광합성 효율이 높은 작물이라는 점인데, 아일랜드의 날씨는 영국보다 덜하지만 맑은 날이 적은 편이다. 따라서 아일랜드의 기후에서는 옥수수가 감자에 비해서 효율이 크게 높지 않았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오해 내지는 착각을 하는 경향이 있는 데 영국의 위도는 모스크바보다 비슷하거나 더 높다. 기후가 온후한 건 편서풍과 멕시코 난류 덕분이기 때문에 연평균 기온 대비 일사량 자체가 적다. 당장에라도 옥수수의 원산지인 아메리카 지역에서도 옥수수가 기후가 덥고 온화한 북아메리카 서남부와 동남부, 중앙아메리카, 남아메리카, 서인도 제도 지역에서만 자생이 가능하고, 기후상 춥고 북극과 가까운 유콘 준주와 누나부트 준주, 노스웨스트 준주 등 캐나다 북부와 미국 알래스카 주 등 북아메리카 북부 지역에서는 자생하지 못하는 것만 봐도 옥수수는 날씨가 따뜻한 지역에서만 기를 수 있는 농산물이라는 점을 짐작할 수 있다.
여기에 옥수수는 지력을 소모시키는 경향이 강해서 화학비료를 사용하거나, 농지에 질소와 영양분을 보충하는 콩이나 호박 같은 부수적인 농산물들과 같이 재배하지 않으면 지속적으로 농사를 짓는 것이 불가능하다. 실제 옥수수의 원산지이자 생산국인 미국이나 브라질, 캐나다, 페루, 아르헨티나, 에콰도르, 파라과이, 멕시코, 과테말라, 쿠바, 칠레, 엘살바도르 같은 아메리카 국가들에서도 옥수수를 기를 때 비료와 농약을 막대하게 사용하거나, 콩, 호박과 같이 혼합해서 재배하는 것도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셈이다. 게다가 영양분도 부족해서 이 당시 유럽에서는 옥수수를 주식으로 먹은 사람들 사이에서 펠라그라 병마저 발병했다.[28] 이런 상황에서 굳이 비싼 돈 들여가면서 옥수수를 심을 이유가 없었다.
9. 대중 매체에서
- Sound Horizon의 앨범 중 하나인 할로윈과 밤의 이야기에서 첫부분은 이 사건을 모티브로 쓰여진 에피소드가 나온다.
[1] 언론에서는 Irish Potato Famine(아일랜드 감자 기근)이라고 부르기도 한다.[2] "Burying the child"(아이를 묻다)라는 직관적인 영어 별명으로도 잘 알려져있다. 작품의 아랫 부분이 잘려있으나, 굶어 죽은 아기를 굶주려 장작개비처럼 마른 아일랜드인들이 묻고자 땅을 파고있는 모습이다. "Gorta"는 아일랜드어로 기근이라는 뜻이다.[3] 대부분의 유럽 국가에서는 '악마의 작물'로 부르며 거의 먹지 않았다. 대신 '''가축 사료'''로 쓰기 위해 재배했다. 프랑스와 벨기에, 프로이센에서만 식용으로 쓰였다.[4] 아일랜드에서 생산된 우유는 버터로 만들어져 영국으로 수출되었고, 소작농들은 찌꺼기마냥 남은 버터 밀크만 먹어야 했다.[5] 으깬 감자와 버터 밀크로 만든 요리는 현대에도 '''콜캐넌'''이란 이름으로 남아 있다(아일랜드 요리 문서 참조).[6] 물론 곡식인 쌀에비해 감자는 수분함량이 많으므로 단순히 무게로만 비교하기는 어렵지만 그걸 감안해도 충분한 칼로리를 섭취하기 위해 엄청난 양을 먹은것은 자명하다.[7] 감자는 구황작물의 끝판왕이다. 단위 면적당 칼로리는 쌀보다 약간 낮지만, 생장속도가 빠르기 때문에 일정 기간 동안의 칼로리 생산량이 매우 높아 '''연간 생산량으로 따지면 최대'''라고...[8] 불행인지 다행인지 맬서스는 대기근이 시작되기 전에 죽었다.[9] 국내의 한 학습 만화에선 아일랜드인들이 감자가 제일 많이 나니까 감자만 심으면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며 '''아일랜드 대기근의 원인이 아일랜드인들의 탐욕인 것 마냥''' 역사왜곡성의 내용을 적어놓기도 했다. 심지어 기근이 일어난 후에 아일랜드인들이 '다양하게 심을 걸 그랬다'고 후회하는 장면까지 나오는데, 후술하겠지만 당시 아일랜드인들은 감자 외에 다른 곡물을 심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감자는 당시 운송기술로는 운송의 어려움 등의 이유로 어디까지나 구황작물일 뿐 팔아서 돈을 벌기 위한 작물일 수는 없었다. 현대 감자가 수출이 본격화된 것은 가공 기술, 유통, 운송 기술의 발전이 있었기 때문이다.[10] 헨리 홉하우스 저, 역사를 바꾼 씨앗 5가지 참조.[11] 그러나 곡물 생산량과 수출량은 폭락했다. 농가의 소작농들이 땅값을 내지 못하고 토지에서 쫓겨나거나 도망치고 식량을 구할 수 있는 항구나 구빈소가 있는 도시로 향했기 때문에 더 이상 농사를 짓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12] 지금은 구황식품 용도보다는 식품첨가물인 카라기난을 추출하는데 훨씬 많이 사용한다.[13] 아일랜드가 독립한 이후 원래 이름인 코브로 바뀌었다.[14] 아일랜드계 이민자들은 유독 자신들의 혈통을 중시해서 조상 중 한사람만 아일랜드계인 사람도 자신을 아일랜드계라고 당당히 주장해서 유난히 수치가 높게 잡힌다. 반면 영국계 이민자들은 미국 백인 인구의 태반을 차지할 정도로 엄청난데도 딱히 혈통에 집착하지 않는 탓인지 통계에서 수치가 매우 낮게 잡힌다. 참고로 아일랜드계 이민자들과 마찬가지로 혈통에 큰 자부심이 있는 이민자들의 후손은 이탈리아계다. [15] 영화 갱스 오브 뉴욕의 시대적 배경이 된다. 영화에서도 이민을 온 유럽인들이 가족 모두가 시민권을 얻기 위해 오자마자 남자들이 군대에 입대하고 가족들과 이별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16] 보스턴에는 당시의 이주를 기념하는 공원이 있다.[17] 미국의 건국부터가 영국과의 치열한 혈전 끝에 이뤄졌으니 미영관계가 처음부터 하하호호하는 관계였을 리가 없다. 건국 이후로도 얼마 안 지나서 미영전쟁이 발발했고, 미국이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타국과의 전쟁을 상정하고 만든 색부호 전쟁 계획 중 가장 구체적으로 짠 게 대영제국의 완전 해체를 목표로 한 적색 전쟁 계획(war plans red)이었다. 미영관계가 혈맹으로 맺어지게 되는 시기는 제2차 세계대전부터의 얘기다.[18] 잉글랜드계 박사 찰스 트리벨린 경. 아일랜드의 기근 문제를 해결한다고 미국에서 옥수수를 들여왔으나, 이건 가축 사료용 옥수수라서 맛이 없었다. '''그런데 그거라도 먹겠다고...''' 게다가 이 트리벨린이란 자는 당시 이 기근에 대해 주옥같은 망언을 쏟아냈다. The Fields of Athenry 문서 참고. [19]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좌파 개혁주의)가 결합된 아일랜드의 좌파 민족주의 정당으로, 아일랜드 독립전쟁 시기까지 올라가는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Sinn Féin이라는 말 자체가 아일랜드어로 we ourselves 정도의 의미를 지닌다. 아일랜드에서는 한동안 한자릿수 의석을 차지하는 군소정당이었으나 나름대로 탄탄한 지지 기반을 확보하고 있었으며, 이 정당의 과격파가 바로 IRA와 연결된다. 2016년 총선에서 양대 보수 정당과 노동당이 싸그리 폭망하는 가운데 158석 중 무려 23석을 쓸어담으며 압승을 거두었다. 2020년 총선에서는 더욱 약진하여 득표율로 전체 1당의 지위를 달성.[20] 다만 국내 축구팬들은 사실 이 가사보다는 리버풀 FC 팬들이 자뻑스러운(?) 개사 버전(The Fields of Anfield Road로 알려져 있다)으로 부르는게 더 익숙하다. 리버풀 FC 자체가 셀틱 FC와 친하게 노는 팀이기도 하고 아일랜드에도 팬이 꽤 있기 때문에 어색한 버전은 아니다.[21] "이럴 바에 다 죽을테니 소수를 희생시켜 다수를 살리자. 아일랜드에서 수출품은 감자뿐이고 감자도 지금 흉작이니, 갓 낳은 아기를 잉글랜드에 수출하는게 어떻겠냐. 진미 좋아하는 귀족들에겐 이만한 고기가 없을테고, 아기 하나 가지고 최소한 3인분의 고기가 나올테니 만찬으론 그만이다. 내가 알기로는 겨울에 아기를 갈라 소금에 절여 눈 속에 식히고, 후추를 좀 뿌리면 최고의 진미가 된다더라." - 본문 중.[22] 수프 한 그릇으로 배교하는 모습이 이 영화에서 그대로 묘사된다. 마을 한켠에 영국인 개신교 목사가 천막을 차리고 개신교로 개종하는 사람들에게만 음식을 나눠주고, 그 바깥에선 천주교 사제가 '저 음식을 먹으면 천국에 가지 못하오!'라며 처량하게 외치는 모습이 나온다.[23] 아이슬란드 가축의 80%가 죽는 등의 타격으로 아이슬란드 인구의 4분의 1 가량이 사망했다. 아일랜드 대기근과는 달리 자연 재해로 인한 피해였다. 아이슬란드를 지배하던 덴마크에서도 이 기근으로 약 8만에서 20만명이 사망했다.(특히 덴마크는 예나 지금이나 인구가 적어서 더더욱 타격이 컸다)사실 이 화산폭발은 전 유럽에 기근을 가져왔고, 프랑스 대혁명의 기폭제가 되었던 화산이다.[24] 터키의 국기는 오스만 제국 시절인 1844년 제정된 것이다. 공화국 수립 이후 규격만 좀 더 확실히 정해서 계속 사용 중.[25] 먹고 남은 감자 찌꺼기, 감자 잎, 감자 뿌리(우리가 먹는 감자 부위는 뿌리가 아니고 덩이줄기다)를 돼지들에게 먹였다고 한다. 아일랜드인들이 돼지고기를 먹을 수 있는 형편은 아니었다. 거의 대부분의 돼지는 영국에 수출되었다.[26] 현재 팝콘용으로 사용하는 폭립종 옥수수 정도와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27] 광합성 과정 중 4탄소 화합물을 생산하는 식물. 대부분의 식물은 3탄소 화합물을 광합성중 생성하고 C3식물로 분류된다. 예를들면 벼라던가.[28] 옥수수에는 필수 아미노산과 비타민 B의 니이아신 성분이 부족하기 때문에 옥수수만 주식으로 섭취하는 경우에 발생하는 일종의 영양 결핍증이다. 일례로 옥수수의 원산지인 북아메리카와 중앙아메리카, 남아메리카의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옥수수를 석회수에 하루이틀동안 불려서 조리해 먹거나, 또는 옥수수를 들소, 큰뿔양, 사슴, 토끼, 페커리, 과나코, 맥, 비둘기, 칠면조, 메추라기, 레아, 고래 등 야생동물의 고기나 피라냐, 피라루크, 송어, 연어 같은 어류들, 감자와 콩, 호박, 고추 등 다른 식용 농작물들과 같이 먹으며 단백질과 니이아신을 보충하였기에 펠라그라가 쉽게 발병하지 않았다.(이는 지금도 마찬가지여서 옥수수의 원산지인 아메리카 지역의 국가들에서는 펠라그라 환자들이 적다.) 그러나 유럽에서는 그러한 조리법이나 식습관까지는 전파되지 않는 바람에 이러한 결핍증들이 발생하였다. 게다가 19세기까지 원인도 발견되지 않았고, 특히 1870년대 중반 이탈리아의 빈농층을 중심으로 폭발적으로 유행했다. '''아일랜드 대기근이 발생하고 불과 20년 뒤의 이야기다'''. 현재에도 이 병을 막기 위해 요즘에는 주식이 되는 식자재나 식품에 비타민을 첨가하기도 하며, 옥수수를 고기나 달걀, 우유, 생선 등 단백질 성분이 풍부한 다른 음식들과 같이 먹으라고 의사들이 조언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