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이워트 글래드스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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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로의 사랑은 영국 법에 의해 제한받지 않는다는 것과 기독교 문명의 범주에서 제한받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서로에 대한 사랑은 전 세계에 유효하다는 것을 기억하시오."
델케이스(Dalkeith) 연설에서, 1879년 11월
19세기 영국의 총리. 자유당을 대표하던 정치인 중 한명으로, 지금도 영국사에서 가장 위대한 총리 중 한명으로 꼽히는 인물이다. 제국주의가 절정이던 시기에 평화주의적 대외관계를 고수하였으며, 아편전쟁 반대, 아일랜드 자치법, 비밀투표 실시와 같은 많은 내정 개혁을 시도하는 등 자유주의와 19세기 의회정치를 대표하는 인물이기도 하다.'''가장 위대한 평민 (The great Commoner)'''[2]
무려 4차례에 걸쳐 영국 총리직을 역임했다. 덧붙여 최고령 영국 총리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사임했을때 나이가 무려 84세였으니..
글래드스턴이 유대인이라는 루머가 있지만, 글래드스턴은 유대인들이 많이 쓰는 성씨인 스턴(Stern)이 아닌 Gladstone이다.[3] 사실은 오히려 그의 동시대 라이벌로 유명했던 보수당 '''디즈레일리 총리가 유대인'''이었다.
2. 생애
2.1. 초기
1809년 잉글랜드 머지사이드 주 리버풀에서 부유한 상인이자 하원의원이었던 존 글래드스턴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튼 칼리지와 옥스퍼드 대학교라는 엘리트 코스를 거친 뒤 아버지의 권유로 정계에 입문해 1833년 24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하원의원에 당선된다. 정적이었던 디즈레일리가 6번 낙선되고서야 정계진출 성공한 것과 여러모로 대비된다.
초선 의원 시절인 1840년 영국 내각이 청나라와의 아편전쟁을 감행하려고 하자, 의회 연설을 통해 이를 통렬히 비판했다. 글래드스턴은 이것만큼 영국을 불명예스럽게 만들 전쟁은 없을 거라며 영국인들의 양심을 호소했다. 비록 전쟁 자체를 막진 못했지만,[4] 그의 연설을 계기로 아무런 이의 없이 진행될 뻔 했던 영국의 전쟁 선포가 의회 표결에서 불과 몇표 차이로 간신히 결정될 정도로 사회적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이는 글래드스턴에게 상당한 정치적 명성을 가져왔고, 이후 그가 실시하는 비(非)제국주의/도덕주의적 외교 정책을 예고하게 되었다.
1841년 재선된 이후 로버트 필 내각의 상무원 총재(President of the Board of Trade)로 입각한다. 자유무역을 지지하는 소위 필 파(Peelites)였던 그는 이 시기 관세 개혁을 통하여 자유 무역을 증진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1845년 아일랜드의 종교 문제가 본인의 신념과 어긋나자[5] 장관직에서 사임한다. 하지만 당시 수상이었던 로버트 필이 글래드스턴을 각별히 아꼈던 만큼 채 1년도 지나기 전이었던 같은 해 12월에 식민지 장관으로 재임용된다. 1846년 로버트 필 내각이 곡물법 폐지 문제로 인해 붕괴되었을 때, 자유무역의 옹호론자답게 시종일관 곡물법 폐지를 주장하면서 주요 정치인 중 하나로 부상하기 시작한 그는 1852년 휘그당과 필 파의 연정이었던 애버딘 내각의 재무부 장관으로 취임한다. 이 시기 각종 관세 인하를 비롯한 획기적인 예산안으로 재정가로의 명성을 얻는다. 그는 자유주의자답게 작은 정부를 지향했고, 정부의 규모를 줄이기 위해서 직접세의 폐지를 주장하였다. 이를 실행에 옮기기 위해서는 대중의 지지가 필요했는데, 글래드스턴은 직접세의 액수를 낮춰서[6]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직접세를 내게끔 하여 직접세 폐지 여론에 불을 붙였던 것.
이 시기 얻은 명성을 바탕으로 점점 자신의 지위를 키워나간 글래드스턴은 1850년대 후반 이후 자유당의 지도자 중 하나가 된다.
재무장관으로 재임하던 시절에는 "'''정신이 온전한 모든 성인남성에게 투표권이 주어지지 않을 이유가 없다.'''"[7] 라고 발언한 적이 있는데, 이는 당시로서는 엄청나게 급진적인 주장이라서 총리 파머스턴 경은 격노하여 선동적인 언행이라고 비난했고 심지어는 빅토리아 여왕의 귀에까지 들어가 여왕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고 한다[8]
이후 존 러셀 내각에서 노동자 계층 중 상당수에게 참정권을 부여하는 개혁을 추진하지만 당 내 보수파들의 반발로 인해 실패로 돌아간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정적 디즈레일리의 보수당 정부가 글래드스턴의 개혁안보다 오히려 더 급진적인 투표권 확대 정책을 실시하였고[9] 그 덕에 1868년 선거에서 승리하면서 글래드스턴이 총리직에 오르게 된다.
2.2. 대영제국의 총리로
2.2.1. 1기: 41대 총리, 5년 77일간
1868년부터 1874년까지 이어진 그의 1차 내각 시기 글래드스턴이 보여준 주요 자유주의적 정책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 아일랜드 내 종교의 자유 허용(1869) [10]
- 아일랜드 내 토지법을 실시하여 아일랜드인의 다수였던 소작농 권리를 보호(1870)
- 의무교육 실시(1870)
- 비밀투표 실시(1872)
1874년 총리직에서 물러난 이후 글래드스턴은 자유당의 당수직에서도 내려오고 언론인으로 활동하기 시작한다. 그러던 중 1876년 불가리아를 비롯한 발칸반도에서 오스만 제국에 대항한 독립운동이 일어나고, 글래드스턴은 오스만 제국의 잔학행위에 분노하여 영국의 인도주의적 개입을 호소[11] 하는 팸플릿을 쓴다.
2.2.2. 2기: 43대 총리, 5년 48일간
그런데 호소문이 대중 사이에서 대폭발을 불러일으켰고 이를 발판으로 글래드스턴은 다시 정계에 복귀했고 디즈레일리 내각의 제국주의적 외교의 비도덕성을 비판하면서[12] 1880년 선거에서 승리, 다시 총리직에 오르게 된다. 1881년 제2차 아일랜드 토지법을 성립시켰으나 외교적으로는 이집트에서 반영 독립항쟁 및 마흐디 신국 건국 전쟁이 일어났을 때의 유약함[13] 등을 비판당하면서 1885년 다시 총리직에서 물러난다.
2.2.3. 3기: 45대 총리, 169일간
이후에도 3차, 4차 내각에서 아일랜드 자치 법안을 상정했으나 3차 내각의 첫번째 법안은 하원의 보수당과 자유당 반란표[14] 로 부결되었다.
2.2.4. 4기: 47대 총리, 1년 199일
아일랜드 민족당의 도움으로 구성된 4차 내각의 두번째 법안은 하원에서 통과되었으나 보수당이 지배하는 상원에서 부결되었다.[15] 또한 독일 제국과의 군비 경쟁에도 반대하다가 물러난다.
2.3. 여생
이후 연구와 강연으로 여생을 보내다 1898년 8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다. 무덤은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있다. 은퇴한 그에게 백작 작위를 서임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그는 평민의 신분으로 죽겠다며 이를 거절했고, 그에게는 '가장 위대한 평민(The Great commoner)'이라는 찬사가 붙게 됐다.[16]
글래드스턴의 사상은 이후 제1차 세계 대전 시기 영국의 총리를 지낸 데이빗 로이드 조지 등에게 계승된 것으로 평가받는다. 사실 자유주의와 도덕 정치라는 개념 자체는 언제 어디서든 나타날 수 있는 호소력 있는 사상이긴 하다만.
3. 정치
그는 대표적인 도덕정치(Moralpolitik)[17] 의 지지자였다. 경쟁국가들 사이의 갈등이나 마찰을 국제적 여론과 중재에 의해 해결한다는 것이 글래드스턴 총리의 정치관이었다. 국제적 위기가 있을 때 주로 강경책을 내놓았던 디즈레일리 내각과는 달리, 글래드스턴의 내각은 주로 유화책을 사용했다. 1870년 러시아에게 흑해 재무장을 허용한 것이 그 대표적인 예. 1856년 크림 전쟁 종전 이후 흑해는 무장 중립지역으로 남았었는데, 이 '런던 협약'으로 러시아는 이 조항을 파기해 버렸다. 또 하나의 예는 1872년의 '앨라배마 호 보상사건'인데, 미국 남북전쟁에 남부연합 소속의 영국 배가 입힌 손실을 영국이 배상해 내라는 요구를 받아들인 것이다. 당시 대영제국의 위상을 생각하면 쿨하게 씹었어도 될 요구였으나, 글래드스턴은 "보상액은 도덕적 가치에 비하면 먼지에 불과한 수준"이라 말했다고 한다.
자유주의와 도덕정치를 중시했던 그의 관점은 많은 영국인들에게 찬사를 받으며 그에게 G.O.M(Grand Old Man)이라는 명예로운 별명을 얻게 했지만, 말년에는 실각하는 역효과를 불러오기도 했다. 1881년 이집트에서 일어난 반영항쟁에서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못한 것도 한몫 했고, 1883년 수단에서 민족주의 반란이 일어났을 때 군대 투입을 지나치게 망설인 것도 결정적이었다. 뒤이은 1885년 이집트 주둔군의 장군이었던 찰스 고든이 자의적으로 군대를 끌고 수단 문제에 개입했다가 포위되는 상황에 이르렀고, 글래드스턴은 구원군을 신속히 보내지 못해 고든은 효수당했다. 자세한 내용은 파쇼다 사건 참조.
사건 이후 그의 별명이었던 G.O.M은 안티들에게 '고든 살해자'라는 M.O.G(Murderer of Gordon)로 전위되었다고 한다.
4. 그 외
- 당대 세계최고의 과학자인 마이클 패러데이와의 일화가 유명하다. 간단한 전기 장치와 함께 찾아온 패러데이에게 글래드스턴 총리가 "이걸로 뭘 할 수 있소?"라고 시큰둥하게 묻자, 패러데이가 "훗날 여기에 세금을 매길 수 있을 겁니다"라면서 설득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하지만 패러데이는 글래드스턴이 총리가 되기 전에 이미 사망했고, 아마도 다른 정치인들을 상대로 했던 말로 여겨진다.
[1] 총리 본인에 대한 경칭[2] 전통적인 귀족 가문이 아닐뿐, 아버지가 하원의원을 역임하는 등 부유한 부르주아지 계층이긴 했다. 흔히 '평민'이라는 단어에서 연상되는 일반 서민과는 거리가 있었던 셈.[3] 이 루머가 황당하게도 꼴에 유대인에 대하여 분석했다는 책자(90년대 후반에 나온 책이었음)에 유대인 유명인이라며 여러 위인들, 인물들과 같이 나온 바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름만 보고 대충 비슷하면 유대인이라고 싸그리 넣어뒀는데, 같은 이유로 존 굿맨, 찰턴 헤스턴, 스티븐 스필버그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스티븐 소더버그까지 유대인이라고 기재했다. 태양중심설로 유명한 코페르니쿠스도 유대인으로 올라왔다.[4] 지금 와서 보면 아편전쟁은 대표적인 영국의 흑역사로 취급되니 글래드스턴의 말이 옳았던 셈.[5] 당시 아일랜드의 가톨릭 세력을 달래기 위해 필 내각에서 각종 국비를 지원하기로 결의했는데 이 시기 글래드스턴은 아직 자유주의로 성향이 바뀌기 전인 보수주의자였고 열렬한 성공회 지지자였다.[6] 150파운드에서 100파운드.[7] "다만 노동자들이 이 문제에 대해 좀더 관심을 가지게 된 이후에야 그것이 가능할 것이다" 라고 덧붙이기는 했다.[8] 차티스트 운동을 무엄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라고 여겼던 사람이니 당연한 반응이다. 여왕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귀족들과 상류층의 생각도 별로 다르지 않았다. 그 당시(19세기 중반)는 영국, 미국 정도를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나라에서 여전히 전제군주제가 유지되고 있던 시절이었으니 뭐...[9] 상술한 글래드스턴의 발언에 불쾌해했던 빅토리아 여왕은 정작 디즈레일리의 개혁에는 찬성했다. 실제로 여왕은 글래드스턴을 싫어하고 디즈레일리를 더 총애하기도 했고...[10] 정확히 서술하자면, 아일랜드의 국교를 성공회로 지정해놓았던 법령을 폐기했다. 이것으로 믿지도 않던 국교회에 내던 1/10의 교구세를 내지 않게 되었다.[11] 디즈레일리 항목에도 나와있지만 디즈레일리는 불가리아의 독립이 러시아의 남방진출을 불러올 것을 뻔히 알고있어서 개입에 소극적이었다.[12] 미들로디언 연설(Midlothian Campaign)이라고도 한다. 이 연설에서 글래드스턴은 제국주의의 배제와 자유주의의 수용을 선언했다.[13] 어떤 영국인 학자는 '네빌 체임벌린보다도 외교를 못했다'라고 까기도 했다. [14] 자유당 내의 신흥자본가와 구 휘그파가 중심이 되었으며, 제국주의에도 우호적이었던 이 반대세력은 탈당 후 "자유통일당(Liberal Unionist)"을 차리고 보수당과 연정을 구성하고 점차 보수당에 섞여갔다.[15] 자치권 관련 투표를 하루 앞두고 영국의 한 진보적인 성향의 일간지에서 가결은 평화, 부결은 피바다로 가는 길을 그린 시사만화를 그렸었는데 그대로 들어맞았다. 글래드스턴 총리의 후계자이자 아일랜드 수석장관이었던 였던 캐번디쉬경과 아일랜드 최고위 관료였던 토마스 버크가 더블린의 피닉스 공원에서 칼에 찔려 살해당한 것은 덤. 흠좀무.[16] 도리어 그의 자손들은 귀족 작위를 받게 되는데, 글래드스턴의 3남 헨리가 남작, 4남 허버트가 자작 작위를 받았다. 하지만 모두 자녀가 없어 1대로 끝났다.[17] '현실정치'를 뜻하는 Realpolitik과는 대립하는 성격의 정치사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