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관대첩
[clearfix]
1. 개요
[image]
▲북관유적도첩(北關遺蹟圖帖) 중 북관대첩을 다룬 창의토왜도(倡義討倭圖). 그림속의 성은 명천읍성이나 경성읍성으로 추정된다.
[image]
▲사진은 전투가 일어났던 명천읍성의 모습.
임진왜란 시기인 음력 1592년 9월부터 1593년 2월까지 함경도에서 의병장 정문부 등이 거병해 가토 기요마사의 일본군을 격파하고 순왜를 자처한 국경인 등을 참수한 전투.
2. 배경
1592년 5월 3일, 고니시 유키나가가 지휘하는 일본군 제1군과 가토 기요마사가 지휘하는 일본군 제2군이 조선의 수도 한양에 입성했다. 이후 고니시는 평안도로 진군했고, 가토는 강원도로 진군해 한 달도 안되어 강원도를 평정했다. 가토는 6월 1일 강원도에서 함경도로 진입하는 길목인 철령을 거치면서 함경도 주민들에게 무익한 저항을 하지 말고 항복할 것을 권고했다. 당시 함경도 주민들은 이시애의 난 이래 차별 대우를 받아 조선 왕조에 대한 반감이 강했다. 게다가 함경도로 파견된 임해군과 순화군이 주민들을 상대로 식량과 옷가지, 소를 약탈하는 등 온갖 행패를 부리자, 주민들의 반감은 폭발하고 말았다.
함경도 남병사 이혼과 병마절도사 한극함은 일본군과 교전했으나 병력이 너무 적어 패배했다. 그 후 이혼은 달아나다가 일본군에게 투항한 백성들에 의해 잡혀 죽임을 당했고, 한극함은 여진족의 땅으로 들어갔다가 그들에게 체포되어 일본군에게 넘겨졌다. 함경감사 유영립은 일본군이 함경도를 침략하자 달아났으나 역시 백성들에게 잡혀 일본군에게 넘겨졌다. 또한 명천과 종성에서는 관가의 노비들이 반란을 일으켜 관아를 점거하고 관원들을 붙잡아 적에게 내주었다. 이런 일련의 상황에 겁을 먹은 임해군과 순화군은 회령으로 도망쳤지만, 회령의 아전 국경인은 숙부 국세필과 함께 회령의 군사들과 무뢰배들을 선동하여 두 왕자를 붙잡아 일본군에게 넘겼다. 순변사 이영과 부사 문몽원은 이를 막아보려 했지만 국경인이 부하들을 보내 공격하자 겁에 질려 달아났다. 가토 기요마사는 자신에게 두 왕자를 넘긴 국경인을 판형사제북로(判刑使制北路)로 삼았고 국세필 등 다른 일당들에게도 벼슬을 내려줬다.
이리하여 함경도의 대다수 성과 마을을 별다른 희생 없이 한 달 만에 점령한 가토 기요마사는 호랑이 사냥을 즐겨하고 일부 병력을 두만강 너머로 파견해 여진족과 교전하는 등 기세등등했다. 그러나 함경도의 민심은 얼마 안가 일본군에게 적대적으로 변했다. 당시 이순신의 활약과 의병들의 봉기, 조선 국내 도로의 미비로 보급이 원활하지 못했던 일본군은 물자가 부족해지자 함경도 백성들을 상대로 양식과 옷을 빼앗고 이에 저항하는 백성들을 가차없이 죽였다. 이에 함경도 백성들은 일본군도 못 믿을 놈들이라는 걸 절실히 깨달았고, 만호 고경민이 행조에서 와서 "중국 군사가 곧 오게 되는데, 조정에서는 이미 북계(北界)를 역적의 소굴로 판단하고 있으니, 왜적을 평정한 뒤에는 맨 먼저 토벌할 것이다."라는 이야기를 전하자 매우 두려워했다.
이 무렵, 함경도 북병사를 맡았던 정문부는 일본군이 쳐들어오자 신분을 숨긴 채 숨어지냈다. 선조수정실록에 따르면, 정문부는 다른 관리들과는 달리 형장(刑杖)을 쓰지 않았고 항상 교생(校生)들에게 글을 가르쳤기 때문에 변란이 일어난 뒤에 제자 몇 사람이 비호하여 빠져나올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난민들이 그를 죽이려 들어 춘림(春林)과 폐야(蔽野)에서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긴 그는 경성의 해변가에서 가장 외진 곳에 있던 교생 지달원의 집에 오래도록 숨어지냈다.[1] 그러다가 지달원이 민심의 변화를 읽고 동지 최배천 등과 함께 몰래 교생들과 식견이 있는 무사들을 불러 모은 후 정문부에게 의병장이 되어줄 것을 청했다. 정문부는 처음에는 믿지 않았지만 지달원 등이 여러 번 간청하자 마침내 허락하고 남촌에서 장사들을 불러모아 전 만호 강문우 등 수백 명을 모았다.
이후 정문부가 이끄는 의병대는 강문우를 척후장으로 삼고 경성으로 진군했다. 당시 경성엔 국세필이 스스로를 예백(禮伯)이라고 일컬으며 병사(兵使)의 인(印)을 기지고 일을 보면서 태연히 부(府)를 다스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 군사가 갑자기 이르렀다는 소식을 접한 국세필은 성문을 닫고 성에 올라 항거했다. 이에 강문우가 화복(禍福)을 들어 위협하니 국세필이 대적하지 못할 것을 알고는 성문을 열어 맞아들이고 병사의 인을 반납했다. 정문부는 "크고 작은 병사와 백성들이 예전에 범한 죄는 문책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리며 국세필이 예전처럼 군사를 거느리게 했다.
정문부는 경성을 장악한 뒤 각 성문에 격문을 퍼뜨렸고, 종성의 무사 김사주와 경성 사람 오박 등이 병사를 이끌고 달려왔으며, 산 속에 숨어 있던 종성 부사 정현룡[2] 과 경원부사 오응태, 경흥 부사 나정언, 고령 첨사 유경천, 군관 오대남 등도 합세했다. 정문부는 자신의 직위가 정현룡보다 낮으니 정현룡이 의병 대장을 맡아야 한다고 권했지만, 정현룡은 두려워해 감히 맡지 못했고 유생들도 "비록 평사의 벼슬이 낮다고는 해도 많은 사람이 마음 속으로 따르고 있으니 의병대장이라 칭하여 통솔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권하자 정문부는 자신이 계속 대장을 맡기로 했다.
이렇게 해서 모인 병사가 3천 명이었고, 그 중에서 날래고 용맹한 기병대를 따로 선발해 유경천이 거느리게 했다. 이때 길주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은 경성이 의병대에게 공략당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백 명의 병사를 보내 경성의 서쪽으로 가서 정황을 알아보게 했다. 이에 강문우가 선봉 기병대를 이끌고 성문을 열고 나가 공격하여 일본군 수십 명을 참살하자, 살아남은 일본군 병사들은 급히 달아났다. 의병들은 첫 전투에서 가볍게 승리하자 사기가 충천했고 경성의 백성들도 비로소 의병에게 진심으로 복종했다. 이에 출동할 날짜를 가려 출발하려 할 즈음에 장사들이 일제히 요청했다.
이에 정문부는 국세필의 무리를 제거하기로 결심했다. <북관대첩비>에 따르면, 때마침 북방의 여진족이 북변을 침범하자 정문부가 국세필에게 이들을 막을 것을 제의했고, 국세필이 이를 허락하고 의병을 종성 성내로 맞아들였다고 한다. 그 후 정문부는 이튿날 아침에 남쪽 성루에 올라가서 국세필을 유인한 후 강문우를 시켜 국세필 등 13명을 체포한 뒤 처형했다고 한다. 이후 정문부는 이들의 머리를 베어 여러 사람들에게 보여주면서 "애당초 왜적과 내통해 역모를 하는데 앞장선 자들은 이들뿐이며 이 밖에는 참여한 자가 없으니 성 안 사람들은 안심하라."고 말해 많은 사람들이 기뻐했다. 이렇게 해서 기반을 확고히 하는 데 성공한 정문부는 본격적으로 의병 활동을 전개한다."앞으로 왜적을 토벌하려 하는데 국가에 반역한 적이 아직도 진중(陣中)에 있으니 먼저 토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3. 전투 경과
3.1. 회령과 명천을 탈환하다
정문부는 국세필의 무리를 참수한 뒤 6진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격문을 보냈다.
이 격문을 읽은 회령의 유생 오윤적은 가족이 피살될 것을 우려해 당시 회령을 통치하고 있던 국경인을 죽이려 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국경인은 이언우, 전언국 등을 시켜 밤중에 오윤적을 잡았다. 이후 국경인은 낮에 오윤적을 시장에 끌어내 참수함으로서 위엄을 보이려 했다. 그러나 유생 신세준은 그전에 무사들을 극비리에 모아서 국경인이 사는 집을 포위해 불을 질렀고, 갑작스런 화재에 놀라 집밖으로 뛰쳐나온 국경인을 붙잡아 참살했다."수천의 의병들이 정의의 깃발을 들고 일어섰으니, 이제 곧 북계는 회복될 것이며 왜적도 물러갈 것이다. 누구든 의기 있는 자는 역적 국경인의 목을 쳐 죄인의 굴레를 벗고, 나라에 공을 세우라!"
이후 정문부는 일부 병력을 고참역(古站驛)으로 이동시키고 60명의 기병대를 오촌권관 구황과 강문우에게 맡겨 명천을 탈환하게 했다. 당시 명천을 다스리고 있던 순왜 정말수는 자신을 몰아내려는 농민 봉기를 화포를 동원해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이에 민심은 극도로 분노했는데, 마침 구황과 강문우가 기병을 이끌고 명천에 이르자 명천 백성들이 앞다퉈 호응했다. 정말수는 갑작스런 공격에 당황해 성을 빠져나와 산에 숨었다가 경성 토병 진덕인에게 붙잡혀 처형되었다.
3.2. 석성령-장덕산 전투
회령과 명천을 탈환한 정문부는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길주성 탈환 작전에 착수했다. 정문부는 군대를 3개로 나누어 경성 이북 출산 군사 1000명을 자신과 정현룡이 맡아 길주성으로 진군했고, 길주 출신 군사 1000명을 고령 첨사 유경천에게 줘서 갯마을에 진을 쳐 일본군을 감시하게 했으며, 경원 부사 오응태에게 길주 양리와 서북보의 토병 1000명을 인솔해 복병으로 삼게 했다. 또한 인의 지방 사람 원충서에게 군사 200명을 줘서 길주 불쪽 야간창에 진을 치게 했고, 명천에서 300명의 기병을 차출해 고참에 배치시켰다.
1592년 12월 3일(음력 10월 30일), 일본군 1,000명은 명천 갯마을 가파리를 약탈하고 돌아오던 중 석성령에서 원충서의 병사 200명의 급습을 받았다. 일본군은 적의 갑작스런 출현에 놀라 후퇴하다가 곧 적의 숫자가 아군보다 열세하다는 걸 깨닫고는 반전해 원충서의 군대와 맞서려 했다. 그때 고참에 매복해 있던 방원 만호 한인제의 기병 300명이 원충서와 합류했고, 여러 복병들도 원충서와 합세했다. 이에 일본군 장수 5명이 400명의 정예 군사를 이끌고 돌격했으나, 조선군이 기병을 중심으로 돌격전을 펼치자 보병뿐이었던 일본군은 퇴각해 길주성에서 동쪽으로 5리 정도 떨어진 장덕산(長德山)에 이르렀다.
정문부는 즉시 분견대를 파견해 장덕산 꼭대기를 선점했고, 일본군이 산을 올라가며 총포를 쏘자 유경천이 기병대를 이끌고 산 위에서 돌격해 적병을 격퇴했다. 여기에 고경민이 미리 군사를 서쪽 산 밑에 잠복시켰다가 즉각 포(砲)를 쏘며 차단하니 일본군이 퇴각하여 계곡으로 숨어들자 의병이 사방에서 모여 포위했다. 이날 밤에 눈에 내리고 추위가 심하여 일본군은 모두 얼어 쓰러져 싸우지 못했다. 다음날 아침, 의병대는 산에 불을 지르고 계곡을 수색해 일본군 병사 6백명의 수급을 베었다. 조선군은 이 전투에서 깃발 20개, 갑옷 50벌, 투구 8벌, 창 16자루, 조총 26자루, 탄환 646개, 화약통 15개, 말 118필, 수많은 일본도 등을 노획했다.
3.3. 길주 공방전
가까스로 살아남은 일본군은 길주성으로 퇴각해 성을 굳게 지킨 채 나오지 않았다. 정문부가 세 부대를 모두 모아서 성을 포위하자, 일본군은 성벽 위에 올라 조총을 쐈다. 이에 정문부는 무작정 공격했다가는 아군의 피해가 클 것을 우려해 일단 물러난 뒤 성 주위를 완전히 포위해 적이 땔감을 얻을 수 없게 했다. 이때 일본군 1개 부대가 마천령 아래 영동관 책성(嶺東館柵城)에 주둔하면서 임명촌(臨溟村)을 불태우고 노략질했다. 그러자 정문부는 군사를 돌려 공격해 쌍포에서 전투를 벌여 일본군을 격파하고 수급 60개를 베었다. 이후 일본군은 길주성과 영동관 책성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고, 정문부는 군대를 둘로 나눠서 포위했다. 이로 인해 일본군은 땔감을 구하지 못해 많은 병사들이 얼어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1593년 1월 초, 안변에 있던 가토 기요마사는 길주의 상황이 위급하다는 보고를 받자 본군을 이끌고 북으로 진군하면서 "재차 관북을 평정하겠다."고 호언장담했다. 단천 군수 강찬이 정문부에게 군사를 합하여 요격하자고 청하자, 정문부는 유경천 등 기병 수백 명을 보내 단천으로 가게 했다. 이후 1월 21일 2백 명의 일본군 선봉대가 단천에 이르렀을 때 강찬이 이끄는 단천의 조선군이 교전하다가 일부러 패하는 척하며 후퇴하자, 일본군은 이를 급히 추격했다. 이때 미치 매복해 있던 유경천의 복병들이 일제히 쏟아져 나와 정면을 막고 후방을 차단하면서 일제히 공격하니, 일본군은 100명의 전사자와 수십명의 부상병을 남기고 겨우 30명만 가까스로 빠져나왔다.
그러나 가토가 며칠 후 2만이 넘는 대군을 이끌고 몰려오자, 유경천은 급히 퇴각했다. 정문부는 가토의 본대가 마천령을 넘어오자 3천의 의병대를 이끌고 영동책 외곽에서 맞서 일본군과 3번 교전했으나 모두 패했다. 결국 정문부는 길주성 포위를 풀고 경성으로 후퇴해 농성 태세를 갖췄다. 가토 기요마사는 폭설로 인해 북쪽으로 진군할 길이 모두 끊긴데다 아군의 피해가 누적되었고 보급품도 부족해 북상할 여력이 없다고 판단하고 길주성과 영동책에 주둔한 일본군을 모두 철수시키고 밤에 남쪽으로 돌아갔다. 정문부는 이 소식을 듣고 즉시 날랜 기병을 거느리고 추격하여 함흥에 이르렀지만, 가토가 이미 안변으로 돌아갔기에 미치지 못했다. 이렇게 해서 북관 대첩은 조선군의 승리로 종결되었다.
4. 결과
안변으로 철수한 가토 기요마사는 그 곳에서도 보급난에 시달려 수많은 아사자가 발생했고 극심한 추위로 인해 말과 군사 태반이 동사하자 더이상 견디지 못하고 한양으로 퇴각했다. 2월 29일 한양에 도착한 가토 기요마사의 제2군은 전사자를 확인한 결과 2만 2천 명중 8864명이 전사했음을 파악했다. 일본군이 이렇게 함경도에서 철수한 뒤 의병은 해산되었고 순찰사 윤탁연이 함경도 군사를 거느렸다.
북관대첩에서 큰 공을 세운 정문부였지만, 그는 곧바로 높은 벼슬을 제수받지 못했다. 이는 순찰사 윤탁연과 갈등을 빛었기 때문이다. 윤탁연은 직급이 낮은 신분으로서 의병 대장이라 자칭한 정문부를 꺼려해 "평사는 일개 막관(幕官)이니 마땅히 감사(監司)의 절제를 받아야 하고 서로 대등하게 대해서는 부당하다."고 꾸짖었다. 그러나 정문부가 따르지 않자, 그는 정문부가 세운 전공을 모두 사실과 반대로 조정에 보고했으며, 정문부의 부하가 수급을 가지고 관남을 지나는 걸 모두 빼앗아 자기 군사에게 줬다. 그리고 정문부의 행동이 불궤(不軌)스럽다고 조정에 아뢰었다. 이에 정문부가 바로 군사를 해산시키려 하였으나 군졸들이 모두 흩어지지 않고 그의 곁에 있었으며, 혹은 사잇길로 달려가서 행재소(行在所)에 보고하니, 조정에서는 의심을 하면서 둘을 무마시켰다.
또 정문부가 적을 추격해 함흥에 이르렀을 때 윤탁연을 만나지 않자, 윤탁연은 크게 노해 정문부를 뒤쫓게 하면서 "평사가 적을 놓아 내보낸 죄를 지금 당장 구문(究問)해야겠으니, 속히 잡아오라."고 명령했다. 이에 정문부도 "순찰사가 적을 놓아 들여보냈기 때문에 의병장도 적을 놓아 내보낸 것이니, 구문할 만한 이유가 없다."고 항변했다. 윤탁연은 조정에 정문부를 발호(跋扈)한 자라고 보고했으나 행조(行朝)에서는 또한 따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조정에서 사신을 보내 그 실상을 조사하게 하자, 윤탁연은 사신에게 후한 뇌물을 주고 사대부의 가속으로서 관남에 있는 자들에게 모두 곡식을 베풀어 구제하고 조정에서 북쪽으로 보낸 사람들에게 옷과 장비를 주니, 그들이 조정에 돌아와서 모두 윤탁연을 옹호하고 정문부의 공을 분명하게 말하지 않았다. 이에 함경도 남북의 백성들 중 분개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결국 조정은 전공을 세운 이가 정현룡에게 있다고 판단해 그를 함경도 병사로 제수하고, 정문부는 단지 반란을 일으킨 백성을 주참한 공만 인정받아 당상관에 올려 영흥 부사에 재수했다. 그러다가 광해군 3년 10월에야 비로소 공로를 인정받아 길주 목사에 제수되었고 이후에도 1615년까지 여러 관직을 맡았으나, 폐모론을 밀어붙이는 북인에게 분개해 관직에서 물러났다. 1623년 인조반정이후 복귀하여 전주부윤이 되었고 이듬해엔 부총관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관직을 맡지 않았다.
그러던 1624년 2월, 의관 이이, 무인 김인, 심일민 등이 이괄의 역모를 고변하면서 역적들이 정문부를 장차 설득하여 참여시키려 했으며, 역모에 가담한 박지장이 정문부를 설득했을 때 정문부는 "‘오늘날 아래 있는 사람들이 모두 선하지 못하다 하더라도 위에서는 대단하게 인심을 잃은 일이 없다. 만일 인성군이나 어느 사람의 후손을 세웠다가 찬적(竄謫)한 사람들을 모두 놓아 주어 다시 예전처럼 행동한다면 장차 어떻게 되겠는가."라고 말하며 거절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간이 "정문부가 지은 《초회왕(楚懷王)》이란 시 두 절구는 이미 재신(宰臣)들도 본 것입니다."라며 정문부를 국문할 것을 청하자, 인조는 이에 따랐다. 결국 정문부는 체포되었고 시종일관 원통하다고 하다가 형장을 맞고 죽었다. 향년 59세. 사후 신원이 복구되어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5. 같이보기
[1]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정문부는 적이 쏜 총에 맞은 뒤 부령에서 거지처럼 돌아다니면서 이름을 바꾸고 용성의 어느 무당의 집 하인이 되었다고 한다.[2] 임진왜란 당시 사관이었던 박동량의 일기 기재사초에 따르면, 정현룡은 "나를 사랑하면 임금이고 나를 학대하면 원수다. 누구를 부린들 신하가 아니며, 누구를 섬긴들 임금이 아니겠는가."라는 글을 남긴 뒤 일본군에게 투항하려 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