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화군

 



조선 선조의 왕자
순화군
順和君

군호
순화군(順和君)[1]
시호
희민(僖敏)
본관
전주(全州)
이름
보(𤣰)
부왕
조선 선조
생모
순빈 김씨(順嬪 金氏)
부인
군부인 장수 황씨(長水 黃氏)
자녀
1남 3녀[2]
묘소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 청학리
생몰
기간

음력
1580년 10월 10일 ~ 1607년 3월 18일
양력
1580년 11월 16일 ~ 1607년 4월 14일
1. 개요
2. 생애
2.1. 어린 시절과 악행의 시작
2.2. 궁녀 겁간 사건
2.3. 수원으로의 귀양과 여전한 악행들
2.4. 서울로 다시 잡혀오다
2.5. 최후
3.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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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왕자. 연쇄살인범. 선조후궁 순빈 김씨(順嬪金氏) 사이에서 태어난 6남. 본명은 이보(李𤣰). 선조의 아들들 중에서 임해군, 정원군과 더불어서 선조의 인간 말종 왕자 3인방으로 악명높은 사람 중 하나이다. 사람을 잡아다 폭행하고 살해하기를 즐기면서 일반인이라면 정상참작도 없이 곧바로 수십 번 죽어 마땅한 악행을 수도 없이 저질렀지만, 왕자이기 때문에 법의 심판을 받지 않았던 터라 왕실의 골칫덩이가 되었다. 모친의 신분이 미천했음에도 불구하고 악행을 밥 먹듯 벌인 것을 보면, 아버지의 편애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던 듯하다.[3]
기록들을 요약하면 '살인을 포함한 온갖 범죄를 대놓고 저지르는 사이코패스압도적인 힘의 보호를 받을 경우 어떻게 되는가?'일 것이다.
비슷한 인물로 유송후폐제고려충혜왕이 있다.

2. 생애



2.1. 어린 시절과 악행의 시작


순화군은 어린 시절부터 상당히 잔혹한 성품이였는데, 후술할 경기도 수원에서 벌인 살인 사건을 두고 아버지 선조는 "순화군이 어려서부터 동물을 잔인하게 학대하거나 죽였다"고 회상한다. 현대의 연쇄살인범들을 분석한 자료들을 보면 항상 어렸을 적 동물학대가 빠지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16세기 순화군의 행동이 정확히 들어맞는다. 천성적인 사이코패스이자 극한의 새디스트에 가까운 인물이었던듯 하다.

내(선조)가 말하는 것은 미안하긴 하나, 내가 만약 말하지 않으면 조정이 어떻게 알겠는가. 그(순화군)의 성기(性氣)는 극히 이상하여, 어릴 때부터 천성적으로 잔인하였다. 이제 저곳에서 하는 일이 모두 사람을 때려 죽이는 짓으로 잔혹하기 그지없으니, 더욱 괴롭기만 하다. 비록 주색잡기(酒色雜技)와 같은 것에 광패(狂悖)한 사람이라면 그래도 괜찮겠으나 이 사람은 그렇지 않다. 어릴 때부터 새나 짐승일지라도 반드시 잔인하게 상해시켜야 만족해 하였다. 대체로 이 또한 나 때문이니, 조정 대신과 얼굴을 마주하고 말할 수가 없다.

선조실록 선조 34년(1601) 2월 10일 3번째 기사

13살 때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강원도에서 의병 운동을 지원하라는 지시를 받았으나, 강원도는 이미 함락되어 버린 상태였다. 그래서 함경도로 가서 미리 파견되어 있던 형 임해군을 만나 함께 회령에 주둔하였는데, 자신이 왕자임을 내세워 함경도민에게 행패를 부렸다고 한다. 결국 열받은 국경인과 국세필이 가토 기요마사와 내통해서 임해군과 함께 일본군에게 넘겨버렸다.[4] 다만 이때 나이를 감안할 시 그냥 개념 없는 초딩 정도 수준이었다고 추정된다.
이후 약 1년 넘게 포로 생활을 겪고 풀려났는데, 포로 생활이 원인이었는지 안 그래도 막장이던 성격이 완전히 더 개막장으로 바뀌었다. 황해도 신계(新溪)에 머물 때는 10대 중반의 미성년자가 신계 주민들에게 트집을 잡아 하루에 여러 명씩 형장을 때릴 정도로 잔학해서 이이첨의 건의로 삭탈 관직을 당할 정도였다. 10대 후반에는 전쟁 말기부터 살인을 저질러서, 전쟁이 끝날 때는 확인된 피해자만 여러 명일 정도로 완벽한 연쇄살인마가 되었다(선조실록 선조 33년[1600] 7월 16일).
임진왜란이 끝난 직후인 선조 31년(1598) 12월에 원손[5]의 탄생을 축하하는 대사령으로 어찌저찌 살았지만, 인간성을 완전히 버렸는지 4달도 안 지나 또 사람 하나를 때려 죽여 연쇄살인마 인증을 했다(선조 32년 3월 25일). 이후로는 매년 사람을 10명 가까이 죽이는 학살범이 되었다. 얼마나 인간쓰레기였는지 임해군이 그래도 이랍시고 순화군의 행실을 꾸중하자 순화군은 "전 남을 패기만 하지만, 형님은 집과 전답까지 빼앗지 않습니까?"라고 말했다고 한다.
순화군이 임해군에게 한 변명은 이렇게 해석해 볼 수도 있다. 임해군의 약탈은 주로 그럴 듯한 집과 전답을 가진 부유층에 집중되었지만, 순화군의 강간, 폭행, 살인 등의 범죄는 주로 가난하고 힘 없는 하인, 평민, 천민들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임해군이 권력형 부정 축재자라면, 순화군은 사이코패스에 연쇄 살인마 정도의 차이가 있으니까 지가 그래도 더 나쁘지는 않다고 발언한 것이다. 그렇다고 임해군이 강간, 폭행, 살인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2.2. 궁녀 겁간 사건


이렇게 사람을 죽여놓고도 든든한 빽 덕분에 처벌할 인간이 없어서 임해군처럼 막 나가고 있던 순화군은, 마침내 궁궐에서 한 궁녀겁탈하는 패륜을 저지른다. 당시 상황을 설명하자면, 선조 33년(1600) 6월 27일 선조의 첫 번째 중전인 의인왕후 박씨가 죽어서 장례를 치르는 중이었다. 그러던 7월 16일 순화군은 과거 의인왕후를 모시던 궁녀를, 대낮에 의인왕후의 관이 모셔져 있던 빈전(殯殿)[6] 옆 여막에서 강제로 붙잡아다가 겁탈했다. 순화군이 사람을 죽여도 눈 감고 봐주던 선조도 이것만은 참을 수 없었는지,[7] 비망기로 순화군의 처벌을 지시한다.

순화군(順和君) 이보(李𤣰)가 어려서부터 성질이 괴팍하여 내 이미 그가 사람 노릇을 못 할 줄 알아 마음 속으로 항상 걱정하였는데 성장하자 그의 소행은 차마 형언할 수 없었다. 앞서 여러 차례에 걸쳐 살인을 하였으나 부자간의 정의로 아비가 자식을 위해 숨기며 은혜가 의리를 덮어야 하기 때문에 그때 나는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고 유사(有司)의 조처에 맡겨두고서 오직 마음을 태우고 부끄러워할 뿐이었다. 그 후 대사령으로 인하여 다행히 죽음을 면하였으나 패악한 행동은 더욱 기탄하는 바가 없었다.

오늘 빈전(殯殿)의 곁 여막에서 제 어미의 배비(陪婢: 궁녀)를 겁간하였으니 경악을 금할 수 없다. 내 차마 입밖에 내지 못하겠으나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국가의 치욕과 내 마음의 침통함을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내가 이 자식을 둔 것은 곧 나의 죄로서 군하(群下)를 볼 면목이 없다. 다만, 내가 차마 직접 정죄(定罪)할 수 없으니 유사로 하여금 법에 의해 처단하게 하라.

이후 왕명에 따라 종부시[8]에서 순화군의 처벌을 보고했는데, 당시 법률에 따라 강간범인 순화군은 짤없이 사형이었다. 그나마 종부시도 왕자를 사형시키기는 곤란했는지 화간(불륜)으로 슬쩍 말을 바꾸는데 이래도 곤장 80대 이상에 유배형이고, 말이 곤장이지 장 80대는 그냥 맞아 죽어라 수준이었다. 이 보고를 받은 선조는 바로 순화군을 경기도 수원으로 유배하는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 짓는다.
【선조실록 선조 33년(1600) 7월 20일, 종부시의 순화군 처벌 보고와 선조의 대응】
종부시가 아뢰기를, "순화군(順和君)의 죄목을 의논하여 아뢸 것을 전교하셨습니다. 《대명률(大明律)》의 거상급승도범간조(居喪及僧道犯奸條)에 '부모의 상중에 있으면서 범간한 자는 평상의 범간보다 2등을 가중한다'고 하였는데 평상의 범간은 화간(和奸)이 장 팔십(杖八十)이며 유부녀 화간이 장 구십이니 이 죄목에 2등을 가중하는 것입니다. 동률(同律) 범간조에는 '모든 강간한 자는 교살한다' 하였으며 명례율(名例律)의 십악조(十惡條)에서는 '불효(不孝)란 부모상에 있으면서 스스로 가취(嫁娶)하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대전속록(大典續錄)》에는 '강상(綱常)의 범죄[12]로서 그 정상이 심히 중한 자는 전가사변(全家徙邊)[13]한다' 하였고 수교(受敎)에는 '사족(士族)으로서(양반) 전가사변에 해당되는 죄를 범한 자는 차율(次律)로 논죄하여 장 일백 유 삼천리로 한다' 하였으며 《대전》 금제조(禁制條)에는 '사인(士人)으로서 윤상(倫常)을 무너뜨린 자는 녹안(錄案)한다[14]' 하였습니다. 오직 이 율문밖에 달리 상고할 만한 율문이 없으나 빈소 곁의 여막에서 겁간한 죄는 더욱 중대한 것입니다. 아래에서 감히 함부로 의논하지 못하겠습니다. [15] 삼가 성상의 재결을 바랍니다."
라고 하니 선조는…… "순화군(順和君) 이보(李𤣰)를 외방으로 귀양보내고 법대로 녹안하라."

라고 하니 선조는…… "순화군(順和君) 이보(李𤣰)를 외방으로 귀양보내고 법대로 녹안하라."||}}}

2.3. 수원으로의 귀양과 여전한 악행들


이때부터 순화군은 완전히 미친놈으로 취급되어 궁궐의 골치덩이가 되면서, 결국 경기도 수원으로 귀양을 가게 된다.
하지만 왕도 포기한 망나니 왕자를 수원에서 뭐 어쩌라는 것인가? 수원에서도 왕자임을 내세워 위세를 부린 탓에 수원 부사 따위가 어떻게 단속할 도리가 없었다. 형구를 마음대로 꺼내가서 하인들에게 멋대로 형벌을 가하도록 해서 향리들이 죽을 지경으로 처맞았으며, 관리들이 순화군을 피해 도망친 탓에 수원부의 행정업무가 완전히 마비되고, 심지어 부사마저 도망갔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였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단순히 유배시켜 놓는 걸로만 안 된다고 생각했는지, 결국 가택 연금을 지시했다. 하지만 이랬는데도 불구하고 금부도사가 담장을 쌓을 때도 사람을 두들겨 패고, 문을 잠그자 자기 손으로 직접 열고 나오는 등, 여전히 제멋대로 굴었다.
처음 왔을 때 수원부사 최산립(崔山立)은 다른 데로 옮겨지고, 수원부사 권경우(權慶佑)가 부임해왔으나 부임하는 날 즉시 순화군에게 먼저 인사를 하지 않고 출관부터 하자, 부사 권경우를 미워한 나머지 패악한 짓을 저지른다. 긴 을 차고 을 타고 달려와서는 기둥을 칼로 치면서 '부사(府使) 몸에서는 피가 나오지 않는다더냐.'고 협박을 하고 그 다음에는 하인에게 도장을 찍은 봉지 하나를 가져가게 했는데, 그 안에는 먹으로 사람 머리를 그려놓고 '부사 권경우의 잘린 머리통이다.'라고 써 있었다. 권경우는 너무 겁을 먹은 나머지 부의 업무들을 보지 못해서 결국 잘리고 말았다.
이후 수원부사는 박이장(朴而章)으로 교체되었으나, 여전히 순화군을 감당하지 못했다. 순화군의 집 궁문을 봉쇄해버렸으나, 담장을 헐고 밖을 나다니면서 백성들에게 온갖 행패를 부렸다. 채소가 신선하지 않다면서 채소밭을 맡고 있는 노(奴) 임동(林同)의 숙모를 잡아다가 직접 몽둥이로 20여 차례 두들겨 팼으며, 읍내에 사는 김영수(金永水)가 궁에 상직하러 나갔을 때 잡아다 들여서 두들겨 패고 옷을 불태웠다. 심지어 소고기생선을 올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창고지기 노비 어리손(於里孫)의 가옥을 불태워 없애기도 했고 화공(畫工) 정업수(鄭業水)를 잡아다가 40차례 직접 몽둥이로 두들겨 팼다. 또한 약주를 가지고 간 원금(元金)이라는 사람을 무수히 구타하거나 역시 약주를 가지고 온 계집종 주질재(注叱介)를 을 전부 벗겨 결박하고 날이 샐 때까지 풀어주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는 장석을시(장돌똥) 사건으로 결정타를 찍는다. 군사(軍士) 장석을시(張石乙屎)는 집에 질병이 돌아 맹인 윤화(允化)의 아내 맹무녀(盲巫女)를 데려다가 역신(疫神)을 쫓는 굿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순화군이 이들을 잡아가서는 한 차례 형문을 한 뒤에 밤새도록 붙잡아 두었다. 그리고 맹무녀의 위아래 치아를 1개씩, 장석을시의 위아래 치아를 9개씩 쇠뭉치로 때려서 깨부수고 집게로 잡아 빼버렸다. 무녀는 궁 안에서 숨을 거두었으며, 장석을시는 이튿날 풀려났지만 죽을 정도의 상처를 입었던 터라 아마도 곧 사망했을 듯.
결국 수원 사람들이 순화군을 피해 앞다투어 고을을 떠나 도망쳐서 수원이 망할 지경이 돼서,[9] 어쩔 수 없이 다시 서울로 불러들여 가택 연금해두었다. 하지만 여전히 담을 허물고 나가 사람을 붙잡아다가 곤장을 치는 등 여전히 개망나니짓을 멈추지 않았다. 이때 임해군과 순화군의 악명들이 하도 높아서 이들을 사칭하면서 소란을 피우는 놈들까지도 다 나왔을 정도였다. 결국 사헌부를 비롯해서 순화군을 잡아 죽이라는 상소가 빗발쳤으나, 선조는 아들의 이런 행각을 안타까워하면서도 계속 두둔하였다. 실록. 그래도 성격이 워낙 흉포하여 고쳐질 생각이 없자, 손을 쓸 수 없게 된 선조는 결국 군호를 폐하고 서인으로 강등시켜버린다.

2.4. 서울로 다시 잡혀오다


서울에 잡혀와서도 조용히 살지 않고 훈련 도감 소속의 포수와 무뢰배를 모아서 자기 집에 머물게 하고 그들을 몰아 사람을 붙잡아서 두들겨 패고 죽이는 사건을 일으켰다.

순화군 이보가 사람을 죽였다.

사관의 주석: 순화군 이보가 위리(圍籬)에서 벗어난 뒤부터 더욱 흉학(凶虐)한 짓을 마구하여 거리를 드나들면서 사람을 만나면 번번이 죽였었는데 이날에도 두 여인을 죽여 참혹한 독기를 뿌린 것이 극도에 달하였으므로 조야(朝野)가 진동하여 놀라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이때 임금은 바야흐로 왕자(王子)들을 비호하기만 하여 감히 말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만 중한 배척을 가하였으므로 대관도 감히 논계하지 못하고 재상들도 감히 말하지 못하였다.

선조실록 선조 37년(1604) 5월 25일 기사

아무튼 순화군은 아버지 선조가 범죄를 감싸주니 상태가 더 심해져, 급기야 밤낮을 가리지 않고 집을 뛰쳐나와 길거리를 쏘다니며 사람을 죽이고 곤장을 치길 먹듯이 했다. 순화군이 온다는 말만 들어도 사람들이 도망치고 숨고, 순화군 밑의 무리들은 이 틈을 타서 도적질을 해댈 정도. 이쯤되면 완전한 도적떼다. 다시 잡아 가두려 했는데 문 앞에 앉아서 닫지 못하게 시위를 벌이고 폐문 공사를 담당한 감독관에게 죽이겠다고 협박해댔다. 당시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의금부가 아뢰기를, "순화군(順和君) 이보(李𤣰)를 안치(安置)시킨 곳의 수리가 끝났으므로 봉쇄하려는데 보가 문에 버티고 앉아서 봉쇄하지 못하게 합니다. 반복하여 타일러도 끝내 듣지 않으니 본부에서 처치할 수가 없습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선조가)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사관은 이같이 논한다. 임금도 이를 억제하지 못하니 다른 사람이야 어찌 논할 수 있겠는가. 하나의 왕자(王子)를 죽이는 것은 진실로 차마 할 수 없는 것이긴 하지만 백성은 무슨 죄인가. (죄 없는 백성을 위해 잡아서 죽여야 한다는 뜻)

선조실록 선조 37년(1604) 8월 7일 기사


2.5. 최후


결국 선조도 더는 참아줄수가 없어, 금위군 무사들을 보내서 순화군을 붙잡아 단단히 가택 연금했다. 이번에는 정말 단단히 갇혔는지, 집밖으로 나오지도 못했고 몇 년간은 별다른 사건이 없었다. 이렇게 지내다가 풍(風)을 맞아 쓰러져 움직일 수 없게 되어 행패를 부리지 못하게 되었다가, 마침내 죽음으로서 이 짓거리들도 끝을 맺었다.
1607년에 28세를 일기로 요절했는데, 순화군은 사후에 복권된 것. 후사가 없어서 익성군(益城君)[10] 아들 진릉군(晉陵君) 이태경(李泰慶)이 후사를 이었으나[11] 왕위 추대로 인한 역모로 파양되었고, 이복동생 인성군의 둘째 아들 해안군(海安君)이 후사를 이었다. 또한 그에게는 이계여(李桂餘)라는 딸이 있었다고 한다. 순화군의 부인은 인조 때까지 살았던 것 같다.
정조 때 희민(僖敏)이라는 매우 분에 넘치는 시호를 받았다. 비슷한 짓을 저지른 후폐제(유송)는 걸을 받은 것을 생각하면 얼마나 분에 넘치는 시호인지 잘 알 수 있다.

3. 평가


선조실록의 순화군 졸기(卒記)에 기록된 다음 문장이 그의 생애를 한마디로 압축해 보여준다.

비록 임해군정원군의 행패보다는 덜했음에도, 무고한 사람을 죽인 숫자가 해마다 10여 명을 헤아리기에 백성들이 그를 두려워하여 호환을 피하듯 했다.

이를 통해 그보다 더하다는 형 임해군과 정원군이 얼마나 인간 막장인지를 짐작케 한다. 다만 임해군과 정원군의 범죄는 (살인과 강간도 저지르긴 했지만) 주로 폭행이나 협박을 통한 재산 강탈이라서 피해자들이 살아 있었기 때문에 욕할 사람이 더 많았고, 순화군은 주로 평민층 피해자들이 많았고 대부분이 죽었기 때문에 욕할 사람이 상대적으로 적어졌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따지고보면 순화군은 신분이 낮은 사람들 즉 사회적 약자들만 골라서 죽이는 한마디로 임해군보다 더한 악질이다.
여담으로, 숙종실록에는 최유연(崔有淵)이라는 9살 어린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최유연네 집안의 계집종이 순화군에게 죄를 지었는데, 순화군은 성을 내며 가장을 잡아가 버렸다. 어린 최유연이 부모에게도 묻지 않고 스스로 순화군을 찾아가 빌고 빌었고, 순화군은 화를 풀어 가장을 풀어주었다. 그 덕분에 최유연이 효자로 칭송받았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조선시대에 '효자'로 공인받은 사람들이 했던 행동이란 것들을 간추려보면 이게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알 수 있는데…….
  • 단지주혈(斷指注血): 손가락을 끊어 그것을 재로 만들어 부모에게 먹이는 것. 왜인지는 모르나 이러면 병이 나았다나. 사실 이 정도까지 갈 필요 없이 상처를 내어 피를 마시게 하는 정도로도 효자 인정이 된다.
  • 할고료친: 배고픈 부모를 위해 자신의 허벅지 살을 잘라 구워드리는 것.
  • 상분(嘗糞): 부모의 똥을 찍어 맛을 보아 건강 체크를 하는 것. 쓰면 건강이 좋은 것, 달면 건강이 나쁜 걸로 생각했다(물론 한두 번 찍어먹는 걸론 안 된다. 한 1년 내내 한다면 모를까).
  • 변비 치료: 당시엔 변비가 중병 수준의 취급을 받았는데, 대표적인 치료 방법이란 게 변비 환자의 항문에 빨대를 꽂아 힘껏 숨을 불어넣기라고.
이런 짓거리(?)까지 했던 사람들과 동격으로 여겼다니 당시 사람들은 순화군으로부터 아버지를 살린 걸 위업으로 취급한 모양이다. 하긴 겨우 9살 아이가 미치광이 왕자에게서 가족을 살려냈으니, 기적이라 할 만하다.
[1] 군호는 평안남도 순안의 옛 이름인 순화(順和)에서 유래했다.[2] 후술하겠지만 1남은 양자이다.[3] 또한 조선왕조는 중종 치하 이후로부터 명종, 인종을 거치면서 손이 귀해졌기 때문에 조선 중후기로 갈수록 적서, 성별, 모친의 출신 등을 막론하고 태어나기만 하면 금지옥엽 귀하게 자라는 경우가 많았다.[4] 정확히 말하자면 국경인은 일본군을 도우려 왕족들을 바치려 한것인데 백성들이 그것을 도왔다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5] 이복형 광해군의 아들 - 폐세자 이지[6] 매장되기 전까지 왕이나 왕비의 관을 모시던 건물.[7] 부모에 대한 효를 숭상하는 유교국가 조선에서 이건 불효 중의 불효다! 모든 서자는 명목상 중전의 아들이 되는데, 말하자면 순화군은 어머니의 관 앞에서 어머니를 모시던 사람에게 강간을 저지른 천하에 둘도 없는 불효자 짓을 한 것이다. 심지어 당시에는 부모의 초상 중 최소한 3년은 아예 합방 자체가 금기시되었다.[8] 왕족을 처벌하는 기관[9] 여담으로, 당시 수원은 현재 수원시가 많은 인구를 바탕으로 경기도 남부의 중심지 역할을 한 것과 동일하게, 조선의 행정구역(부목군현) 중에서도 제법 크고 인구가 많은 지역이었다.[10] 덕흥대원군의 손자이자 하원군의 둘째 아들[11] 숙종 7년(1681)에 편찬한 선원록(璿源錄)을 보면 여전히 계후(繼後)라는 표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