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해군

 


'''조선 선조의 왕자'''
'''임해군
臨海君'''

'''군호'''
임해군(臨海君)[1][2]
'''시호'''
정민(貞愍)
'''본관'''
전주(全州)
'''이름'''
진국(鎭國) → 진(珒)
'''부왕'''
조선 선조
'''생모'''
공빈 김씨(恭嬪 金氏)
'''부인'''
군부인 양천 허씨(陽川 許氏)
'''자녀'''
1남 1녀[3]
'''생몰
기간
'''
'''음력'''
1572년 8월 14일 ~ 1609년 5월 2일
'''양력'''
1572년 9월 20일 ~ 1609년 6월 3일
'''묘소'''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송능리
1. 개요
2. 생애
3. 사망
4. 평가
5. 일본에 잡혀간 임해군의 자녀들?
6. 창작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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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왕족으로 선조의 서장자이다. 공빈 김씨의 아들이자 광해군의 동복형이다.[4]
이복동생들인 정원군, 순화군과 더불어 선조의 아들들 중 개막장이자 인간 말종으로 '''악명 높다.''' 그 때문에 임진왜란으로 국가가 위태롭던 시기에 세자가 되지 못하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왕자 시절부터 저지른 패악이 극에 달했던 막장 왕족이다.

2. 생애


개차반 인성의 예를 보여주는 사건이 임진왜란 중 이복 남동생 순화군과 함경도로 떠나[5] 병력을 모으는 임무를 맡게 되었는데 원래의 임무는 하지 않고 순화군과 함께 관리들과 백성들한테 온갖 행패를 부리고 다닌 사건이다.[6] 결국 참다못한 국경인(鞠景仁)과 국세필(鞠世弼), 함경도 백성들이 일본군의 가토 기요마사와 내통해 임해군과 순화군을 붙잡아 일본군에게 넘겨버렸다. 왕의 자식들을 적에게 넘기는 반역을 할 정도로 빡쳤다는 말. 오죽했으면 일본군조차도 이들의 막장 행각을 듣자 혀를 차며 국경인 형제와 함경도 백성들을 이해하고 막장 왕자들을 사람 취급도 하지 않았을 정도.
이후 포로 협상으로 풀려나지만 임해군은 안 그래도 막장이었던 성격이 포로 생활 동안 겪은 일 때문인지 더욱 막장이 되어버려서[7] 민가에 엄청난 피해를 주는 등 깽판만 치고 다녔다.
이런 임해군의 미친 짓에도 그 미친 왕자를 난리통 속에서 구한 사람이 정문부였으나 정문부도 전쟁 중에 반란을 도모한 국경인을 척살하기 위해서였지 임해군을 위한건 전혀 아니었다.
일단 임해군은 확인되는 범죄 행위들만 따져도 폭행, 강도, 권력을 이용한 재산 강탈은 기본에 공물 약탈[8], 심지어는 첩실을 빼앗기 위해 강도로 위장해 도승지 유희서[9]를 살해[10]하기까지 했다. 이때 한음 이덕형의 상소를 받은 선조도 임해군을 불러내서 크게 화를 내며 질책했다. 하지만 임해군은 자신은 그런 적이 없다며 끝까지 오리발을 내밀었다. 선조는 임해군의 태도에 엄청나게 화가 났으나 그래도 자기 아들이라고 감싸고 돌며 질책만 하고는 처벌은 하지 않고 유야무야 넘어갔다.
무엇보다 임해군은 형제간의 우애도 나빠서 동복동생인 광해군 때문에 자기가 세자가 되지 못했다고 생각해 광해군을 미워했다. 이는 적반하장보다는 열등감에 가까울 듯하다. 광해군도 그런 임해군을 상당히 증오했다. 명색에 친형이라는 작자가 왕실의 모범을 보이고 자신을 도와주지는 못할 망정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 백성들을 괴롭히는 일에만 힘을 써서 왕족에 대한 여론을 계속 깍아먹고 있으니, 어떻게든 왕실의 권위를 세우고 세자 지위를 지킬려고 노력하는 광해군 입장에서는 그런 임해군을 증오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였다.
이렇게 백성과 조정 대신들은 물론 친형제마저 학을 뗄 정도로 인성과 행실이 막장인 임해군을 선조가 세자로 책봉하지 않은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임해군의 막장이라 불러도 할 말 없는 더러운 인성을 보면 왕이 될 경우 연산군보다 심한 암군이자 폭군이 될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다.[11] 다만 선조는 이런 아들을 계속 감싸고만 돌아 임해군은 더욱 막장질만 골라했다. 어떻게든 임해군을 처벌하라 상소가 빗발치는데도 말이다.

3. 사망


당연히 광해군도 이렇게 만행 밖에 저지를 줄 모르는 동복형 임해군을 이가 갈리도록 싫어했고, 선조 생전에도 이미 처벌하라는 상소가 빗발쳤지만 선조가 끝끝내 감싸고 돌아서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유일하다시피 임해군을 비호해주던 선조가 승하하고 광해군이 왕이 되자 기다렸다는 듯이 훗날 영창대군을 지키려고 사실상 목숨을 건 상소를 올리는 의병장 곽재우를 비롯해서 '''서인, 북인, 남인을 가리지 않고 각 당파를 초월해서 임해군을 처단하라는 상소가 끊이지 않았다.'''[12][13]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선조 말년에 명나라 조정에서 만력제황태자주상순을 두고 일으킨 후계자 교체 문제로 임진왜란 때와는 달리 입장을 바꿔 장자를 세자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판으로 광해군의 세자 자리가 위태로워졌고, 장남인 자신이 정신 차리고 얌전하게 행동하면 다들 임해군이 세자 자리를 노리고 점수를 따려고 일부러 그런다고 생각할 것이므로 임해군이 정신 못 차리고 계속 망나니짓을 한 것은 임해군 나름대로의 처세가 아닐까 하는 설을 제시했다.[14] 그러나 문제는 광해군에게 자신의 충정 의사를 전달하는데 실패했다고 서술한다.[15] 설령 그런 의도가 있었다 한들 워낙 상상 이상의 막장 행각을 저지른 건 빼도 박도 못하고 사실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왕권의 위신을 떨어뜨리는 존재로 찍혀버려 스스로 자기 명을 재촉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16]
물론 옥사 과정이 한심했던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고변을 들었을 때야 "내 형이 그럴 리 없다." 했지만 삼사가 절도 안치를 청하자[17] 혐의를 기정사실해 유배한 후 옥사를 벌이는데 문제는 무죄추정의 원칙따위 쌈싸먹고 종들의 입에서 혐의를 인정할 때까지 마구잡이를 하고 그나마도 종 한 명이 고문을 이기지 못해 군기를 땅에 묻었다고 진술했는데 왕은 "바보가 아닌 이상 벌써 파냈을 거다."(...) 라는 말을 한 것은 물론 '''대사헌''' 정구, 이덕형 등이 전은론을 펴자 못마땅한 반면 정인홍이 임해군의 처벌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리자 기뻐했다. 그러니까 임해군이 역적이라는 결론을 먼저 내린 후 원인을 밝혀내는 과정을 거친 이 뭐병스런 과정을 거친 것. 뭐 그 어떤 것으로든 이것이 임해군을 억울하다 말해줄 순 없겠지만...
결국 광해군은 임해군을 붙잡아 교동으로 귀양 보내버렸고, 임해군은 귀양지에서 의문사했다. 광해군이 암암리에 암살했거나 사사했을 거라는 심증만 제기되고 있을 뿐, 정확한 사인은 지금도 불명이다.[18] 훗날 인조 때, 귀양지의 관리가 독살했다는 노비의 증언이 나오긴 했는데, 그나마 이 독살설도 반정 세력 권력 정당화를 위해 조작한 것이 아닌가라는 추측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사실 임해군도 자기가 살 길을 모르는지 맨날 무사들과 어울리고[19] 자신이 잡힐 것 같자 여장을 하고 도망쳤는데(...) '''정치적으로 공격받는 마당에 도망까지 쳐서 아예 역적 인증을 했으니 죽지 않을 수가 있을까?'''[20]

4. 평가


선조 실록에서도 당대의 사관이 평한 글을 보면 온통 악평밖에 남아있지 않을 정도로 역대급 막장 왕족이다. 하도 저지른 악행이 많다보니 임해군이 살아있을때 무뢰배들과 종실의 망나니들이 그의 이름을 사칭해서 대신의 집을 습격, 강도질을 저지르는 사건까지 벌어졌다. 특히 사관이 "자업자득이다" 식으로 평해놓을 정도. 실록의 기사. 오죽하면 인조반정을 일으킨 서인들과 인조도 '''임해군이 죽은 건 큰 문제로 여기지 않았을 정도다.'''
사실 보다시피 여러 면에서 개막장인 인물이지만, 선조인조반정 주도 세력들의 광해군 견제, 깎아내리기 및 후대의 인지도 부족 및 동정심(!?) 등으로 인해 상당히 충공깽스러울 정도로 미화되었던 인물이기도 하다.

5. 일본에 잡혀간 임해군의 자녀들?


역사스페셜에서 임해군의 아들이 일본의 어떤 영주(다이묘) 밑에서 자라다가 도쿠가와 이에야스, 즉 에도 시대의 저명한 일연(日延) 스님이 되었다고 하며 딸은 도가와 다츠야스의 (측실)으로 살다 죽었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해당 방송은 임해군의 아들이 아버지의 죽음을 듣고 슬퍼하며 지은 글이 전해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다뤘다. 그렇지만 실제로 임해군은 자식이 없어 조카를 양자로 입양해 대를 이었다. 임해군과 순화군처럼 생포된 사람들의 이름이나 직책도 실록에 적혀 있지만, 임해군의 아들이나 딸의 이야기는 없다. 왕릉 도굴 사건으로 조선과 일본의 국교 재개 문제가 논의되었을 때도 아무도 이 사람들의 이야기가 없었다.
고로 임해군 자녀들의 이야기는 일종의 야사라고 봐야 할 것이다. 예컨대 현재 일본 도쿄도 미나토 구에는 가쿠린지(覚林寺)라는, 일연이 창건했다는 일련종의 절이 있다. 이 절에서 모시는 신은 바로 세이쇼(清正) 공이라는 신으로, 바로 가토 기요마사를 신격화한 것이다.[21] 주지하다시피 가토 기요마사는 임진왜란 당시 임해군과 순화군을 납치한 사람이다. 게다가 해당 절의 자리는 가토 기요마사의 영지인 구마모토 번의[22]에도 저택이 있던 자리라고 한다.
Why? 한국사 '왕자와 공주' 편에서 임해군을 다루면서 위 야사를 서술하고, 임해군이 원래부터 막장끼가 있었지만 자식들과 생이별한 후 더 막장이 되었다고 묘사했다.

6. 창작물에서


그래도 사극에서는 입체성이 필요해서인지 마냥 미화하거나 사이코로 묘사되진 않고, 음모에 휘말린다거나 양녕대군처럼 위악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어정쩡하게 묘사된 경우가 많다.
  • 조선왕조오백년 “임진왜란” 편에서 배우는 정성모. 여기서는 순화군과 같이 어울려 다니면서 갖은 악행을 저지르고 다니다가 국경인과 국세필의 밀고로 가토 기요마사에게 위치가 노출되고 온성구조사 이수가 직접 가토 기요마사에게 임해군과 순화군을 넘겨준다. “회천문” 편에서는 임정하로 바뀌었다.
  • 만화 효게모노에서는 배용준이 분했다. 장동건의 어색한 일본어 구사를 패러디한 대사를 해서 현대아줌마 한류팬들을 패러디한 것 같은 나이가 좀 있는 시녀를 한방에 뿅 가게 만들어서 그 도움을 받아 탈주하려고 하다가 들켜서 가토에게 대차게 싸닥션을 맞는다. 이때 순화군도 같이 등장했지만 이쪽(순화군)은 생긴 것도 평범하고 존재감도 공기였다.
  • 왕의 여자에서는 배우 김유석이 임해군 역을 맡았다. 굉장히 미화되어 무인 기질의 인물로 나오면서 선조 독살 소문을 듣고 명과 손잡으려다 광해군이 자기를 보호한 걸 알고 명 사신 앞에서 미친 척 연기하는데, 이걸 보고 이항복 등의 온건파 대신들은 진정 나라를 생각하는 왕자라고 감탄하고, 이이첨대북도 이 평가에 동의한다. 하지만 대북의 결론은 그래서 더욱 죽어야 한다라서 살해당한다.
  • 불의 여신 정이에서도 등장했는데 배우가 다름아닌 이광수. 이광수의 배우 인생에서 첫 번째 악역 연기다. 다만 배우가 배우인지라(...) 실제 역사 속 임해군에 비해 포악함보다는 찌질함과 푼수 같은 면모가 강하다.
  • 왕의 얼굴에서는 배우 박주형이 임해군 역을 맡았다. 막장이었던 성격이 작중에 그대로 반영되어서인지 실제 역사의 임해군과 매우 가깝게 묘사되었다는 평을 받았다. 실제 역사대로 성격을 빌미로 세자가 되지 못했으며, 시종일관 막장 짓을 벌였다.
  • 징비록에서는 배우 윤홍빈이 임해군 역을 맡았다. 임진왜란기가 중심인지라 등장이 잦지는 않다. 포악하고 거친 면모보단 왕자랍시고 기세만 등등하며 정말 철딱서니 없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 화정에서는 배우 최종환이 임해군 역을 맡았다. 여기서는 광해군과 대립 모드가 아닌 조력자 역할로 나오나, 매번 무리수를 두어 오히려 화를 자초하는 포지션이다. 결국 광해군의 즉위 후 반역을 도모하다 실패하여 제거되는 것으로 나온다.
  • 네이버 웹툰 오성X한음에서도 그 패악은 어디 가지 않아서, 오성 이항복이 추노꾼 최오십동과 함께 임해군의 귀양지로 가서 임해군을 죽이려 하지만, 차마 임해군을 죽일 수 없었던 이항복과 최오십동이 실랑이를 벌이는 사이에 도망을 치지만, 누군가의 손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 대체역사소설 이순신의 나라에서는 이순신의 반정으로 함흥으로 파천하다, 왕실 가족들과 함께 혜산으로 또 파천하게 된다. 현실의 개같은 인성이 그대로 반영되어, 여진족들이 조선에 와 깽판을 벌이는것에 찬동하고, 파천길에도 술타령을 하여 주변인들이 혀를 찬다. 결국 정원군을 조선 왕으로 만들기 위해, 여진족들이 왕실 가족들을 살해하는 와중에 살해된다.
  • 이순신의 나라와 같은 작가가 쓴 대체역사소설 명군이 되어보세!에서는 아버지 하성군 대신 가공인물인 경성군이 왕이 되어서 왕자가 아닌 그냥 종친이다. 역사처럼 각종 악행을 저지르는데 무리를 모아 조폭짓을 하며 지내다가, 일본의 차차가 조선에 볼모로 보내지게 되자 차차의 미모와 재산에 반해 차차를 겁간하여 아내로 삼으려다가 오히려 차차가 놓은 덫에 걸려 차차의 남편이 되기는 하되 분노한 왕(현대인인 소설 주인공이 빙의한 상태임)에게 곤장을 쳐맞고 차차에게 꽉 잡혀 산다. 차차는 평강공주가 온달을 장군으로 길러냈듯 임해군을 장군으로 길러내 후일 조선의 왕위를 차지하겠다는 야심으로 임해군에게 무술 훈련을 빡세게 시킨다. 그러나 임해군은 제 본성을 버리지 못하고 북방 여진족과의 대전쟁에서도 민간인 학살과 강간이나 저지르고 이 사실을 눈치챈 이순신과 이항복에 의해 경계근무로 돌려지는데, 사실상 적군의 손에 죽으라고 보낸 것. 이를 모르고 경계고 뭐고 내려놓고 술판을 벌이다 수하들은 적군의 기습에 의해 몰살, 임해군 본인은 그때 마침 배탈이 나 술을 안 마시고 따로 있다가 가까스로 목숨만 건져 돌아오지만 경계근무에 실패한 책임으로 장창병으로 강등되어 굴려지고 돌아와서도 차차에게 개갈굼 당한다. 결국 나비효과로 죽지 않고 일본을 통일한 오다 노부나가에게 설득되어 노부나가의 막내딸 아이히메를 둘째 부인으로 맞고 노부나가의 괴뢰가 되고, 조선 왕을 하겠다면서 왜군과 함께 조선에 침공하며 자신의 노비들을 왜군의 첩자(순왜)로 협조하게 하는 반역질을 저지른다. 하지만 주인공이 왕이니.... 패망은 확정이고 어떻게 죽을지가 문제.... 신립을 회유하다가 신립에게 귀를 물어뜯겨 짝귀가 된데다가, 심지어 노부나가도 학을 떼고 어떻게든 주인공과 평화 협상만 타결되면 선물로 줘버리겠다(=주인공 손에 참수되든 말든 신경 끄겠다.)고 생각 중이며, 주인공은 아예 친히 백각형 기술자를 중국에서 초청해올 계획이다.... 차라리 전쟁에서 죽는 게 편하고, 이젠 어느 쪽이 이기든 편히 죽긴 힘들 팔자... 조선군에게 참패한 노부나가가 있지도 않은 반역자 탓을 하며 반역자를 색출하라고 해서 조선인 순왜들이 그 타깃이 되었을때 부하인 국경인이 자신을 구하러 온 줄로 알고 따라나서나 국경인은 임해군을 바쳐야 자기 죄가 덜어진다는 꼼수로 임해군을 조선군에게 바친다(그러나 국경인도 참수당한다). 주인공에게 친국을 당하는데, 그냥 사형으로는 부족하다 싶었는지 그만을 위한 스페셜 서비스를 베풀어줬다. 바로 명나라식 능지형인데, 명나라에서 아예 집행인을 데려온 다음 칼질 1천번을 집행하게 하여 조선 역사상 가장 참혹한 죽음을 맞이하고 머리는 효수, 회떠진 살은 젓갈로 담궈져 전국에 조리돌림하는 처벌을 내린 것. 이후에도 가끔식 언급되는데, 항상 역도 이진이라 불리며, 주인공은 생각날때마다 욕짓거리를 한다. 조선의 공식 흑역사가 된듯. 그의 살점은 강에 던졌고, 뼈와 머리는 모조리 태워버렸다고 한다.[23]
  • 네이버 웹툰 녹두전에서는 어린 이혼을 괴롭히는 형, '이진'으로 나온다. 결국 왕이 된 혼에게 죽는다.
  • 대체역사소설 임해군에서는 현대인이 빙의하여 동서붕당을 조정하고 왕위에 올라 개혁을 진행한다.

[1] 군호는 경남 김해의 옛 지명인 임해(臨海)에서 유래했다.[2] 여담으로 고려 후기 인물인 익재 이제현의 아버지인 이진(李瑱)의 군호도 임해군이다. 심지어 이름의 음인 "진"도 같다.[3] 후술하겠지만 1남은 양자이다.[4] 나이 5세에 모친을 잃고 적모 의인왕후 손에서 자랐다. 광해군과는 달리 생모의 얼굴을 기억하는 탓인지 의인왕후와 사이가 좋지는 않았다고 전해진다.[5] 정확히는 순화군은 강원도에서 병력을 모으는 것이었지만 강원도가 가토 기요마사에게 넘어가면서 함경도로 피해 임해군과 합류했다.[6] 함경도는 세조 이후로 조선 조정에서 천대받은 북방 지역 중 하나이자 방치시하던 지역이였다.[7] 하지만 선조수정실록과 임해군과 순화군을 포로로 잡았던 가토 기요마사 측의 기록에서 공통된 점이 있는데 포로로 잡은 조선 왕자들을 잘 대접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다만 본래 성격을 생각하면 잘 대접받았다는 사실과는 별개로 포로가 되었다는 사실 자체로 인해 굴욕을 느껴서 성격이 더 망가졌을 수는 있다. 나중에 명나라에서 '장남인 임해군이 있는데 왜 차남인 광해군이 즉위했냐'고 딴지를 걸자 '임해군이 왜군에 포로로 잡혔다가 미쳐버렸다'고 둘러대기는 했지만 차마 '타고난 미친 놈이다'라고 대놓고 말할 수는 없어서 핑계로 둘러댄 명분일 공산도 있다.[8] 당시 공물은 국고로 가는 중요한 물품인터라 왕자가 멋대로 강탈한 것 자체가 당시에도 큰 범죄다.[9] 영의정 유전의 아들로 한음 이덕형과 외종지간인데 형제보다도 더 친해서 이덕형이 사건 당시 특히 분개했다.[10] 도승지는 현재로 치면 대통령비서실장으로 중요 신하로서 왕의 최측근이자 심복에 속한다. 승정원의 승지 6명은 서로 품계는 같지만 도승지를 가장 높게 쳤다.[11] 사실 연산군도 세자 때 말썽을 부리지는 않았고 왕이 된 이후 10년 동안의 정치는 나쁘지 않았다. 이후 어머니의 사사를 명분으로 살인귀가 되어 무자비한 숙청을 가하고 사치와 향락으로 백성들을 고통받게 한 것이 문제.[12] 다만 북인, 서인, 남인 등 모든 당파가 임해군을 죽이자고 주장하기는 했지만 남인 내에서는 이원익, 이덕형, 정구, 홍가신, 서인은 심희수, 이항복, 북인 내에서는 정온 등이 임해군을 살려주자고 주장하기는 했다. 그러나 결국 이들도 "제가 뭘 잘 몰라서 역적을 용서하자고 했습니다."라고 납작 낮춰야 했다.[13] 남인 내에서 임해군을 살려주자고 주장한 사람들이 다른 당파보다 많았기에 하담파적록과 연려실기술의 기록에 의하면 이이첨이 남인이 역적을 비호하였다며 공격해 남인들 중에 죄를 받은 자가 많았다고 한다. 또한 안방준의 혼정편록의 기록에서 나온 이귀가 광해군에게 올린 상소의 내용을 보면, 대북파가 소북은 유영경의 당, 서인은 김제남의 당, 남인은 임해군의 당파로 몰아가고 있다며 대북파를 비판하는 대목이 있다.[14] 임해군의 입을 빌려 "들어보라구. 말썽만 피우던 내가 갑자기 얌전해졌다고 쳐. 안 그래도 중국에선 장자를 세자로 삼아라 하는데 다들 내가 세자 자리 노리고 점수 따려고 하는거라고 생각하지 않겠어?" 라고 했다.[15] 대사에서 누군가가 임해군에게 "무사들과 어울린다며?" 라고 묻자 임해군이 "아니... 그럼 내가 문신들이랑 어울리는게 맞다고 생각해?" 라고 하는데 대답은 '''"아무랑도 사귀지 말아야지."'''였다. 성종의 형 월산대군문신이든 무신이든 친분을 쌓지 않고, 자신은커녕 노비들조차 말썽을 부리지 않았을 정도로 자기관리에 철저해서 죽을 때까지 왕족으로 예우받을 수 있던 것과 대조적이다. 설령 임해군의 개망나니 성격을 감안해도 무사들과 어울리는 건 왕을 시해하려는 의도가 있는게 아니냐는 의혹을 사기 충분하다.[16] 물론 적당히 사고를 쳤다면 광해군도 옹호할 건덕지가 있었을 것이지만, 당시 임진왜란으로 인해 조선 왕실의 권위는 추락한 상황에 옛날부터 심각할 말썽을 부렸으니 이쯤 되면 처벌 안 하는 게 이상했다. 더군다나 이전부터 광해군과의 관계가 나빴으며 양녕대군 뺨치는 말썽을 상습적으로 부려왔으니...[17] 사실 이 정도는 일반적인 수순이다. 조선에서 언론 역할을 하는 삼사가 역모 사건에서 형식적인 말조차 하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18] 사실 원래 계승 경쟁에서 밀려서 왕족을 죽인 경우 기록상으로는 대부분 이렇게 되어 있다. 게다가 암살을 사주했을 걸로 추정되는 왕들은 '사망자들이 불행히 혹은 갑자기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슬퍼서 엉엉 울었다는 식으로까지 기록되어 있다.(...) 상대가 빼도 박도 못할 반역죄를 저지른 게 아니고서야 자기가 찝찝해서 죽였다고 그대로 대놓고 보여지기 식으로 기록되었다가는 자신과 왕실의 권위가 추락하기 때문이다.[19] 이때문에 초반에 임해군을 탄핵하는 상소에서 임해군이 몰래 사병을 양성하니 처벌해야 한다는 내용이 나온다.[20] 비슷하게 태종이 죽은 후에도 양녕대군을 죽이라는 상소가 매우 빗발치긴 했으나(심지어 태종은 양녕대군이 나라에 해가 된다면 죽여도 좋다는 유언을 남겼다), 세종은 그런 의견을 다 묵살하고 끝까지 못난 형을 지켜줬던 것과 종종 비교된다. 다만, 양녕대군은 그런 동생 세종의 노고에 보은하긴커녕 세종 재위기에도 내내 패악질을 저지르고 다닌 건 물론, 세종이 죽은 후에는 수양대군이랑 눈이 맞아 계유정난 이후 왕실 여론 바람잡이 역할을 하거나, 폐위한 단종을 죽이라는 주청이나 계속 올려대는 등 죽을 때까지 막장 짓거리를 하고 다녔다. [21] 清正는 훈독으로 "기요마사"인데, 훈독으로 읽을 이름을 음독으로 읽으면 해당인물을 좀 더 공경하여 부르는 것이었다. 기요마사를 음독으로 읽어 세이쇼다.[22] 가토 기요마사가 사건에 연루되어 영지를 다른 곳으로 옮김당하여 호소카와 가문이 구마모토 번의 영지로 들어온 것은 1632년의 일이고, 해당 절의 창건 연도는 1631년이다.[23] 이때 주인공이 한 말이 걸작인데 주인공 왈, 그따위 개같은 쓰레기를 묻을 땅은 한평이라도 내어주고 싶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