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촌한옥마을

 


1. 개요
2. 지명의 유래와 역사
3. 특징
3.1. 대중매체
4. 문제점
5. 교통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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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kchon Hanok Village / 北村韓屋마을
서울특별시 종로구 가회동, 삼청동 내의 한옥 밀집지역을 칭한다. 편의상 그 일대를 북촌이라 부르나 엄밀하게는 가회동, 계동, 화동 등 일부 법정동만을 포함한다.

2. 지명의 유래와 역사


서울 북쪽에 위치한 한옥동네라는 뜻으로 조선왕조 때부터 왕족, 양반, 관료 출신들이 살았던 고급 가옥이 대부분이라 하여서 일각에서는 '양반촌', '양반 동네' 라고도 불렸다. 일제강점기 때 한옥이 일부 증, 개축되고 1992년 가회동 한옥보존지구에서 해제되어 한옥 이외에도 일반 건물도 들어섰다. 특히 원서동은 업자들이 유혹해 빠르게 빌라가 들어서 이전의 풍경을 잃었다. 2001년 서울시가 '북촌가꾸기사업'을 진행하여 한옥과 주변 경관을 개선해 2009년 유네스코 아태문화유산상 우수상을 받았다.
지금 남아있는 한옥들은 조선시대 고관대작들이 살던 한옥들이 아닌 일제시대에 만들어진 개량한옥들이다.[1]
한국 최초의 디벨로퍼라 불리는 부동산개발업자인 정세권씨가 조성한 한옥대단지이다. 경남 고성 출신 정세권은 1919년에 상경한 뒤 건축사업을 시작하였다.
당시 서울(경성)은 급팽창하고 있었다. 지방 빈농의 유입도 급증하고 일본인의 서울 이주도 급증했다. 인구 증가는 주택난을 불렀다. 당시 청계천 남쪽에는 일본인들이 주로 모여살았는데 일본인들이 증가하자 청계천 북쪽으로까지 확장을 노렸고 총독부는 정부기관을 국공유지에 먼저 들인 후 일본인을 진출시키는 방식으로 청계천 북쪽으로 일본일 거주 확장을 주도하였다.
당시 북촌은 일제침략으로 어려워진 권세가들이 내놓은 집들이 많았다. 정세권은 조선인의 영역을 지키고자 조선인 건설업자들과 함께 민간주택 건설 사업에 진출하였다. 권세가, 귀족들이 소유하였던 넓은 토지나 택지를 쪼개 여러채의 작은 규모의 한옥을 대량공급함으로써 조선인 주거지역을 확보하고 고유 주거방식을 잃어버리는 것을 막았다.
이러한 한옥 집단지구에 공급된 한옥은 전통한옥의 구조를 ㅁ자 안에 집약하고, 부엌과 화장실을 신식으로 개선하는 등 근대적인 편리함과 생활약식을 반영한 도시한옥(개량한옥)이었다.
소규모 도시한옥은 날개돋친 듯 팔렸다. 상대적으로 낮은 집값이 한몫했다. 정세권의 회사인 건양사는 한 해 평균 300채의 한옥을 공급했는데 1920년대 한성(서울)의 연간 주택공급량은 1700채 정도였고, 정세권은 그 중 20%를 담당했다. 경성의 '건축왕'이라 불렸다. 북촌 한옥의 대부분은 정세권의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세권은 경성의 한옥단지 개발로 10년도 안돼 부동산 재벌이 됐다. 그렇다고 돈 버는데만 집착하지는 않았다. 민족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1923년 조선물산장려운동이 일어나자 정세권은 경성지회 설립을 주도했다. 좌우 독립운도 연합체인 신간회 운동에도 참여해 재정 담당을 맡아 물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조선어학회의 최대 후원자이기도 하였다.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으로 체포되어 고문을 받기도 하였다. 해방후에도 조선어학회의 우리말 사전 편찬사업 후원을 이어갔다.

3. 특징


한옥의 대부분이 팔각지붕을 한 기와집이며 대부분의 구조는 평면이 'ㄷ'이나 'ㅁ'모양으로 된 도시형 한옥구조이다. 이 때문에 외부에서 마당이 노출된 전통 한옥과 달리 길에서 보면 높은 대문과 방으로 막혀 집안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구조는 2000년대 들어 개축하지 않은 한옥들에서 흔히 볼 수 있으나 한옥 개축을 장려[2]한 터에 최근 지은 한옥은 전형적인 도시한옥에서 많이 벗어났다. 다만 여전히 담장은 높은데, 범죄 위험도 있지만 관광객 때문에 높게 올리지 않곤 못 배긴다(...).

3.1. 대중매체


지붕뚫고 하이킥(2009)에서 극중 김자옥이 운영하는 하숙집이 여기에 위치하고 있다. MBC 개인의 취향(2010)과 TVN 로맨스가 필요해 2012(2012)의 촬영이 이루어진 적도 있었고, 홍상수오! 수정북촌방향에서도 등장한다.
그리고 한때 무한도전에서 마이너리티 리포트 특집으로 이 마을에 촬영을 가기도 했었으며, 또한 1박 2일에서 서울특집으로 이 마을 촬영을 하기도 했었다.
이천원의 뮤직비디오 '서울이 싫어졌어'도 이곳에서 촬영되었다.
가수 서태지2014년 10월 20일 9집 발매에 앞서 선공개한 소격동의 배경도 실제로 서태지가 나고 자란 소격동을 배경으로 촬영하였다. 실제 고향은 가회동이지만 다 북촌 언저리라서 거기서 거기다. 또한 서태지는 증조할아버지부터 줄곧 서울토박이 집안이다.


4. 문제점


북촌 지역은 거주지역으로 엄연히 사람이 사는 곳이며, 관광지화된지도 불과 10여년 밖에 안된다. 그러나 관광객 입장에선 그저 돌아다니면서 보고 즐기는 관광지일 뿐이다. 이 점은 관광지화된 국내외 다른 지역들도 마찬가지. 주로 동대문과 면세점을 뺑뺑이 돌리는 저가중국여행사들이 비용을 낮추기 위해 무료(?)인 북촌을 애용하고 있다. 가보면 거주민보다 한복입고 사진찍는 외국인이 더 자주 눈에 띈다. 이 때문에 여러 마찰이 발생하게 된다. 분명히 차도임에도 거주자 차량이 관광객 때문에 통행하기 어려워졌고 일부 관광객은 왜 이런 곳으로 차가 다니냐고 툴툴대기도 한다. 소음문제의 경우 민원이 많이 들어오다보니 에서 침묵관광을 해달라는 팻말을 여기저기 부착했으나 현실은 그런 거 없다(...).
또 쓰레기 무단투기가 아주 심각한데, 쓰레기 무단투기 때문에 제설용 염화칼슘통을 철거하고 여기저기 팻말을 붙이고, 이동식 쓰레기통을 설치했음에도 나아지지 않았다. 이러한 문제는 2014년 들어 떠오르는 서촌도 마찬가지나 구청시청은 손을 놔버린 상태다.
2001년부터 6년여간 했던 북촌가꾸기사업도 또 다른 문제점을 낳았는데, 마을 정비에 따라 지가가 1억원 근처까지 치솟아 원주민들이 떠나고 그 자리에는 재벌집 등 금수저들이 터를 잡았다. 더 나아가 개조된 한옥도 콘크리트를 쓰고 내부까지 현대식으로 만들어 한옥 그 자체의 정체성을 잃기도 하며 투기도 빈발했다. 이에 따라 영국인 거주자 데이비드 킬번(1943~2019)[3]이 한옥 원형보존을 위한 투쟁을 전개했다.(킬번의 홈페이지)

5. 교통


도시철도는 수도권 전철 3호선 안국역이 가장 가깝다. 버스는 서울 버스 종로01, 서울 버스 종로02가 있다.
[1] 사실 북촌한옥마을, 서촌의 한옥 등은 모두 일제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정세권의 작품이라 할 수 있다.[2] 다만 이 때문에 행정을 막장으로 해서(...) 후일 구청이 허가를 내줬음에도 불구하고 용적율이나 여러가지 면에서 불법 상태에 놓인 한옥들이 생겼다. 다만 현재 건축법이 한옥을 고려하지 않은지라 건축법 개정요구가 학계와 주민들 사이에서 있어왔다. [3] 전 <Advertising Age>지 도쿄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