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미르 비소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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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미르 세묘노비치 비소츠키
Vladimir Semyonovich Vysotsky
Владимир Семёнович Высоцкий
1938년 1월 25일 ~ 1980년 7월 24일
소련의 배우이자 가수, 시인.
비소츠키는 1938년 1월 25일 모스크바에서 태어났고 아버지는 군장교였으며 어머니는 독일어 번역사였다. 출생직후 이혼하여 계모의 손에서 컸으며 1954년 부모의 희망에 따라 모스크바 기술대학(Moscow Institute of Civil Engineering)에 진학해서 공부했으나 적성에 맞지 않아 한 학기 만에 학업을 중단했다. 1956년 모스크바 예술극장(МХАТ, MAT)의 배우학교에 입학하여 4년 동안 배우 수업을 받는다.
이후 1960년 배우학교를 졸업하고 푸시킨 극단에 입단한 후 단역배우로 전전하면서[1] , 가끔씩 친구들 앞에서 자신이 작곡하고 가사를 붙인 노래를 불렀다. 독재체제에 대한 비판과 억눌린 인민들의 삶에 대해 분노에 찬 목소리로 절규하듯 700여곡의 저항가요를 불렀다.
비소츠키는 생전에 소련에서 7개의 음반(EP판)[2] 을 냈다. 하지만 주로 정규 앨범이나 콘서트보다는 카세트테이프로 녹음되어 사람들 사이에서 전해지면서 소련은 물론 주변 국가들에까지 널리 퍼지게 되었다. 배우로써도 성공하여 수많은 연극과 드라마에서 연기했으며, 약 28편의 영화에 출연하였다.
그는 1980년 7월 27일 모스크바에서 42세의 젊은 나이에 심장마비로 죽었는데, 사인은 평소 과도했던 음주벽 때문이라고 한다. 당시 소련은 모스크바에 진행 중이던 올림픽에 악영향을 미칠까봐 장례식 당일, 모든 방송에서 비소츠키의 장례식에 대해 일언반구도 하지 말라는 지침을 내렸다. 그러나 한 용감한 라디오 프로그램 진행자가 참지 못하여 "지금 블라디미르 세묘노비치의 장례식이 거행 되고 있습니다..."라고 말을 해버렸다. 발빠르게 정보를 입수한 수백명의 사람들이 장례식에 미리 와있었는데 이 방송을 듣고 수만명이 장례식장에 운집했다고... [3]
사후에도 그의 노래는 꾸준히 사랑받았고, 1980년대 후반 개혁 개방의 바람이 불면서 소련 정부는 그의 시와 노래의 출판을 허용하기 시작했다[4] .
1982년 우파에서 데뷔한 락밴드 ДДТ의 보컬 유리 셰프추크는 비소츠키와 목소리가 흡사한데, 이 때문에 당시 소련 당국이 이들을 탄압했다는 루머가 있다[5] .
답답함을 토해내듯 노래불렀던 비소츠키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서정적인 음유시가를 부른 불라트 오쿠자바(Bulat Shalvovich Okudzhava)와 함께 러시아의 대표적인 음유시인이 되었다. 그는 인기있는 배우였지만 오히려 음유시가의 발전에 지대한 공을 세워 음유시가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우상이 되었다.
그의 노래는 영화 "백야"에 삽입되어 영화 당시 한국에 최초로 소개되었으나, 군사정권의 막바지였던 탓에 공식 OST에는 그의 노래가 삽입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어록 중 '''"내 목소리는 음계의 단순함보다도 더 단순하다. 하지만 내가 진실의 어조를 잃는 순간 마이크는 채찍이 되어 내 얼굴에 흉터를 남긴다(마이크 앞에 선 가수)."'''와 '''"돼지로 살면 돼지로 남을 뿐이다"'''라는 말이 유명하다.
러시아에서는 현재까지도 그의 인기가 엄청난 수준이라는 것을 주변에 아는 러시아사람이 있다면 물어보면 알 수 있다. 단순하게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80년대의 대학생이나 30,40대의 사람들이 김광석의 노래를 듣는 느낌과 비슷하다. 정확한 표현은 물론 아니겠지만, 김광석의 호소력에 강렬한 카리스마의 목소리와 김민기의 아침 이슬같은 의미를 담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두면 많이 벗어나지는 않았을 듯 하다. 비소츠키의 노래들은 러시아 록 음악에도 영향을 많이 미쳤다. 일례로 키노 역시 영미권 뉴웨이브 음악과 비소츠키의 음유시가를 결합해서 인기를 얻은 케이스다.
유튜브에 검색을 해보면 그에 대한 많은 영상들이 나오고 있는데, 대부분이 자신의 집에서 영사기로 녹음을 하거나 녹음기로 녹음한 것들이다. 그래서 음질이 깔끔한 편은 아니다. 검색할 때에는 영어인 'vysotsky' 보다는 러시아어인 'Высоцкий'로 검색하는것이 당연히 더 많은 결과물을 얻어낼 수 있다.
한국에서는 냉전이라는 정치적 상황 때문에 러시아와 수십년 동안 단절 되었기에 비소츠키에 대한 인지도가 한없이 낮다. 따라서 러시아 문화를 깊게 아는 사람이나, 포크 뮤지션이 아니고서는 그를 알기란 쉽지 않다. 또한 언어의 장벽도 상당한 문제다. 러시아 문화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적게나마 있지만 정작 러시아어의 미칠 듯한 난이도(...) 때문에.. 게다가 상당히 익살스러운 가사를 담고 있으면 우회적으로 사회를 비판하기 때문에 러시아인이 아니고서는 그 가사를 음미하기란 사실상 어렵다.
2011년에는 동명의 제목으로 영화가 러시아에서 상영된 바가 있으며, 제목은 'Высоцкий. Спасибо, что живой'이다. 로마자로 음차했을 때는 'Vysotskiy. Spasibo, chto zhivoy (2011)'라고 하며, '비소츠키, 당신이 살아있었음에 감사해요.'정도의 의미이다. 자세한 설명은 imdb영화설명 이 곳을 보도록 하자. 포크라는 음악의 특징상 가사의 전달은 매우 중요한 것이 사실일 것이며, 가창력이 돋보인다면 금상첨화겠지만, 밥 딜런처럼 그 가사의 의미가 목소리의 단점을 상쇄하고도 남는 일도 많이 있다. 비소츠키의 경우는 이 두가지 장점을 고루 갖춘 셈.
'야생마'라는 곡은 드라마 미생에서 OST로 장미여관에 의해 리메이크 됐다.
대표적인 곡 몇 개를 들어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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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미르 세묘노비치 비소츠키
Vladimir Semyonovich Vysotsky
Владимир Семёнович Высоцкий
1938년 1월 25일 ~ 1980년 7월 24일
1. 개요
소련의 배우이자 가수, 시인.
2. 생애
비소츠키는 1938년 1월 25일 모스크바에서 태어났고 아버지는 군장교였으며 어머니는 독일어 번역사였다. 출생직후 이혼하여 계모의 손에서 컸으며 1954년 부모의 희망에 따라 모스크바 기술대학(Moscow Institute of Civil Engineering)에 진학해서 공부했으나 적성에 맞지 않아 한 학기 만에 학업을 중단했다. 1956년 모스크바 예술극장(МХАТ, MAT)의 배우학교에 입학하여 4년 동안 배우 수업을 받는다.
이후 1960년 배우학교를 졸업하고 푸시킨 극단에 입단한 후 단역배우로 전전하면서[1] , 가끔씩 친구들 앞에서 자신이 작곡하고 가사를 붙인 노래를 불렀다. 독재체제에 대한 비판과 억눌린 인민들의 삶에 대해 분노에 찬 목소리로 절규하듯 700여곡의 저항가요를 불렀다.
비소츠키는 생전에 소련에서 7개의 음반(EP판)[2] 을 냈다. 하지만 주로 정규 앨범이나 콘서트보다는 카세트테이프로 녹음되어 사람들 사이에서 전해지면서 소련은 물론 주변 국가들에까지 널리 퍼지게 되었다. 배우로써도 성공하여 수많은 연극과 드라마에서 연기했으며, 약 28편의 영화에 출연하였다.
그는 1980년 7월 27일 모스크바에서 42세의 젊은 나이에 심장마비로 죽었는데, 사인은 평소 과도했던 음주벽 때문이라고 한다. 당시 소련은 모스크바에 진행 중이던 올림픽에 악영향을 미칠까봐 장례식 당일, 모든 방송에서 비소츠키의 장례식에 대해 일언반구도 하지 말라는 지침을 내렸다. 그러나 한 용감한 라디오 프로그램 진행자가 참지 못하여 "지금 블라디미르 세묘노비치의 장례식이 거행 되고 있습니다..."라고 말을 해버렸다. 발빠르게 정보를 입수한 수백명의 사람들이 장례식에 미리 와있었는데 이 방송을 듣고 수만명이 장례식장에 운집했다고... [3]
사후에도 그의 노래는 꾸준히 사랑받았고, 1980년대 후반 개혁 개방의 바람이 불면서 소련 정부는 그의 시와 노래의 출판을 허용하기 시작했다[4] .
1982년 우파에서 데뷔한 락밴드 ДДТ의 보컬 유리 셰프추크는 비소츠키와 목소리가 흡사한데, 이 때문에 당시 소련 당국이 이들을 탄압했다는 루머가 있다[5] .
3. 상세
답답함을 토해내듯 노래불렀던 비소츠키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서정적인 음유시가를 부른 불라트 오쿠자바(Bulat Shalvovich Okudzhava)와 함께 러시아의 대표적인 음유시인이 되었다. 그는 인기있는 배우였지만 오히려 음유시가의 발전에 지대한 공을 세워 음유시가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우상이 되었다.
그의 노래는 영화 "백야"에 삽입되어 영화 당시 한국에 최초로 소개되었으나, 군사정권의 막바지였던 탓에 공식 OST에는 그의 노래가 삽입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어록 중 '''"내 목소리는 음계의 단순함보다도 더 단순하다. 하지만 내가 진실의 어조를 잃는 순간 마이크는 채찍이 되어 내 얼굴에 흉터를 남긴다(마이크 앞에 선 가수)."'''와 '''"돼지로 살면 돼지로 남을 뿐이다"'''라는 말이 유명하다.
러시아에서는 현재까지도 그의 인기가 엄청난 수준이라는 것을 주변에 아는 러시아사람이 있다면 물어보면 알 수 있다. 단순하게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80년대의 대학생이나 30,40대의 사람들이 김광석의 노래를 듣는 느낌과 비슷하다. 정확한 표현은 물론 아니겠지만, 김광석의 호소력에 강렬한 카리스마의 목소리와 김민기의 아침 이슬같은 의미를 담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두면 많이 벗어나지는 않았을 듯 하다. 비소츠키의 노래들은 러시아 록 음악에도 영향을 많이 미쳤다. 일례로 키노 역시 영미권 뉴웨이브 음악과 비소츠키의 음유시가를 결합해서 인기를 얻은 케이스다.
유튜브에 검색을 해보면 그에 대한 많은 영상들이 나오고 있는데, 대부분이 자신의 집에서 영사기로 녹음을 하거나 녹음기로 녹음한 것들이다. 그래서 음질이 깔끔한 편은 아니다. 검색할 때에는 영어인 'vysotsky' 보다는 러시아어인 'Высоцкий'로 검색하는것이 당연히 더 많은 결과물을 얻어낼 수 있다.
한국에서는 냉전이라는 정치적 상황 때문에 러시아와 수십년 동안 단절 되었기에 비소츠키에 대한 인지도가 한없이 낮다. 따라서 러시아 문화를 깊게 아는 사람이나, 포크 뮤지션이 아니고서는 그를 알기란 쉽지 않다. 또한 언어의 장벽도 상당한 문제다. 러시아 문화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적게나마 있지만 정작 러시아어의 미칠 듯한 난이도(...) 때문에.. 게다가 상당히 익살스러운 가사를 담고 있으면 우회적으로 사회를 비판하기 때문에 러시아인이 아니고서는 그 가사를 음미하기란 사실상 어렵다.
2011년에는 동명의 제목으로 영화가 러시아에서 상영된 바가 있으며, 제목은 'Высоцкий. Спасибо, что живой'이다. 로마자로 음차했을 때는 'Vysotskiy. Spasibo, chto zhivoy (2011)'라고 하며, '비소츠키, 당신이 살아있었음에 감사해요.'정도의 의미이다. 자세한 설명은 imdb영화설명 이 곳을 보도록 하자. 포크라는 음악의 특징상 가사의 전달은 매우 중요한 것이 사실일 것이며, 가창력이 돋보인다면 금상첨화겠지만, 밥 딜런처럼 그 가사의 의미가 목소리의 단점을 상쇄하고도 남는 일도 많이 있다. 비소츠키의 경우는 이 두가지 장점을 고루 갖춘 셈.
'야생마'라는 곡은 드라마 미생에서 OST로 장미여관에 의해 리메이크 됐다.
대표적인 곡 몇 개를 들어보도록 하자.
[1] 배우 생활 중 '햄릿'을 연기한 적이 있는데, 이 연기는 비소츠키 연기 커리어의 정점을 찍었다고 평가받는다.[2] 하지만 EP판의 특성상 음반 당 네 곡 정도가 수록되었다. 생전 부른 노래를 감안하면 극히 일부인 셈.[3] 이런 탓에 장례식을 담은 영상 기록조차 서구권 방송에서 촬영하거나 개인이 촬영한 기록만 남아있다.[4] 이 때를 기점으로 주파르크, 키노 등 이전까지 당국의 인정을 받지 못하고 언더그라운드 밴드로 생활하던 밴드들 또한 양지로 나올 수 있게 되었다. 소련에서 밴드 생활을 하려면 당국의 공식 인정을 받는 대신 이들에 의해 통제받는 ВИА(보컬 및 연주 앙상블: 밴드를 의미하는 당시 러시아의 공식명칭) 생활을 하거나 마음대로 부를 수 있는 대신 양지로 나오기 힘든데다가 직업으로 인정을 못 받는(소련에서 '무직자'는 처벌 대상이었다) 언더그라운드 밴드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했다.[5] 이 루머가 사실이 아니더라도 셰프추크는 그때나 지금이나 소련/러시아 입장에서 '반체제적'으로 분류되기 때문에 공식 공연을 금지당하는 등 이래저래 고생을 했다. 데뷔 앨범인 '무지개 위의 암퇘지'부터 수록곡 중 대놓고 반전을 외친 '쏘지 마시오!' 때문에 홍역을 겪기도 했고, KGB에 끌려가 '무지개 위의 암퇘지가 누구에 대한 비유냐? 설마 브레즈네프냐?'라는 질문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 (이 때 셰프추크의 대답이 걸작인데, '어떻게 알았지?'였다고 한다(...)) 이 때문에 한동안 언더그라운드 밴드로 살다가 1986년 셰프추크가 레닌그라드로 이사했고, 그 곳에서 밴드를 다시 결성한 후 개혁/개방의 바람 덕분에 양지로 나올 수 있게 되었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