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노(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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멤버들의 사진.
왼쪽부터 유리 카스파랸(기타), 빅토르 초이(보컬, 기타), 게오르기 구리야노프(드럼), 이고르 티호미로프(베이스).
1. 개요
'''키노(Кино)'''[1]'''"자본주의 진영에 비틀즈가 있었다면 공산주의 진영에는 키노가 있었다"'''
1982년 레닌그라드에서 창설되어 1990년까지 활동한 러시아의 록 그룹. 장르는 포스트 펑크, 뉴웨이브, 쟁글 팝(Jangle Pop), 포크 락. 지금도 러시아에서는 러시아 락의 전설로 불린다. '키노'는 러시아어로 영화(cinema, film)를 의미한다.
2. 역사
키노의 전신을 1979년 레닌그라드에서 결성된 락 밴드 '제6병동(Палата № 6)'[2] 으로 보기도 하지만, 키노의 주체였던 빅토르가 이 밴드에서 보컬이 아닌 베이스 기타를 맡았기에 전신이라 보기엔 약간 미묘한 면이 없지 않다. 빅토르 초이가 시콜라(Shkola. 한국의 초/중/고등학교 과정을 합친 과정) 도중 학교 친구였던 파시코프 및 스미르노프와 결성했는데, 이 사건과 그전의 성적 불량이 문제가 되어 초이는 시콜라 8학년 과정에서 결국 퇴학당했다[3] . 이 외에 소련의 펑크 락 뮤지션 안드레이 파노프(Андрей Панов, 1960-1998)[4] 가 1979년 결성한 '자동으로 만족하는 자들(아프토마티체스키예 우도블례드보리텔리, Автоматические удовлетворители - 보통 АУ라고 줄여 부름)'이라는 밴드에서도 초이가 잠시(1980년-1981년) 베이스 기타를 맡은 적이 있기에 간간히 언급되는 편이다.
이후 그는 알렉세이 리빈(Алексей Рыбин), 올렉 발린스키(Олег Валинский)[5] 등과 함께 밴드 '가린과 쌍곡선(Гарин и Гиперболоиды)'를 결성해 활동한다[6] . 이 이름은 러시아의 SF 거장 알렉세이 톨스토이의 소설 '가린의 쌍곡선(Гиперболоид инженера Гарина[7] )'에서 가져온 이름이다. 1982년 봄부터 '레닌그라드 락 클럽(Ленинградский рок-клуб[8] )'에서 활동하던 그들은 같은 해 가을 밴드 이름을 '키노'라고 바꾸게 된다[9] .
이후 레닌그라드 락 클럽에서 키노는 첫 번째 콘서트를 가지는데, 당대 최고의 밴드로 불리던 아크바리움(Аквариум[10] )과 함께 공연을 했다. 당시 언더그라운드에서 영향력이 있던, 그리고 아크바리움의 리더였던 보리스 그레벤시코프(Boris Grebenshikov)가 프로듀서로 나서 주었기에 가능했었다. 이 즈음 밴드는 '키노'라는 이름으로 완전히 자리잡았다.
1982년 이들은 모스크바에서 최초로 단독 콘서트를 개최하지만, (이후의 명성과는 달리) 대중의 호응을 얻는 데는 실패했다. 이후 키노는 첫 번째 앨범인 '45[11] '를 출시한다. 그레벤시코프의 도움으로[12] '45'는 아크바리움의 멤버들인 프세볼로트 가켈(Vsevolod Gakkel, 첼리스트), 안드레이 로마노프(Andrei Romanov, 플루티스트), 미하일 페인스타인-바실리예프(Mikhail Feinstein-Vasilev, 베이시스트)와 함께 공동으로 작업했었다[13] .
앨범 '45'는 가볍고 활기찬 곡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초이가 작곡한 곡[14] 들의 가사는 도시의 낭만이나 시적 언어의 사용 등, 초기의 소비에트 바드 음악과 유사한 점이 돋보였다. 당시 키노는 잘 알려지지 않았었고,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크게 성공을 거두진 못했다. 이후 초이는 녹음의 질이 조악했으며[15] , 좀 더 제대로 녹음했어야 했다고 회고했다.
'엘렉트리치카', 앨범 '45' 수록
다만 수록곡 중 '엘렉트리치카(Электричка)'는 상당히 유명해졌다. 엘렉트리치카는 통근용으로 사용되는 러시아의 일종의 광역 철도로, 개인의 삶을 보장하지 않는 전체주의체제의 부조리를 짧고 우회적으로 비판하는 노래였다. 가사는 자신은 어젯밤 늦게 잠들어 간신히 일어났으며, 의사에게 가야 할 것 같지만 통근 기차가 자신을 원치 않는 곳으로 데려간다는 내용이다. 당시 초이는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끌려가는 것을 피하기 위해 정신병자 행세를 하며 정신병원에 자주 들락거렸는데, 이 당시 경험이 투영된 곡이라고 한다. 그 때문에 발표 직후 소련 당국에 의해 공연을 금지당했다는 에피소드가 있다[16] .
1982년 말에서 1983년 초, 키노는 리빈과 드러머 발레리 키릴로프(Valery Kirillov), 음향 엔지니어 안드레이 쿠스코프(Andrei Kuskov)와 두 번째 앨범을 내려고 시도했지만 초이가 흥미를 잃어 녹음이 중단되었다[17] . 겨울에 그들은 레닌그라드와 모스크바에서 몇 번 공연을 했고, 아크바리움의 드러머인 표트르 트로센코프(Pyotr Troschenkov)와 공연을 하기도 했다. 리빈은 간혹 리허설용 베이시스트였던 막심 콜로소프(Maxim Kolosov) 혹은 후기 키노의 전속 기타리스트가 되는 유리 카스파랸(Юрий Каспарян)으로 대체되기도 했다. 그레벤시코프의 회고에 따르면, 카스파랸은 처음에는 실력이 정말 형편없었으나 갈수록 잘하게 되었고, 이후 키노의 2인자 포지션까지 올라갔다고 한다. 콜로소프 및 카스파랸과 함께 키노는 두 번째 콘서트를 레닌그라드 락 클럽에서 개최한다.
하지만 1983년 3월, 원년 멤버인 초이와 리빈 사이의 해묵은 갈등이 터진다. 원래 초이는 음악을 작곡하는 역할을 주로 했고, 리빈은 콘서트 준비나 리허설, 레코딩 준비 등을 맡는 식으로 역할이 나누어져 있었다. 그런데 초이는 리빈이 자신의 곡이 아닌 리빈 자신의 곡을 연주하는 것이 불만이었고[18] , 리빈은 초이의 리더십에 반감을 드러냈다. 이 갈등은 결국 리빈의 탈퇴로 끝난다. 이후 둘이 다시 만나는 일은 없었으며(어쩌다 공연장에서 몇 번 마주치긴 했는데 서로 말도 걸지 않고 못 본 체 했다고 한다), 초이 사후 감정이 좀 풀린 건지 리빈은 추모 콘서트(2001년)에서 공연을 한 적이 있으며 이후 관련 인터뷰에서도 몇 번 등장한다.
1982년부터 후기 키노가 자리잡는 1984년 사이 초이와 리빈은 활발히 음악 활동을 했는데, 당시 곡들을 담은 데모 앨범[19] '46'이 대표적인 사례라고 볼 수 있다. '46'은 초이가 작곡한 데모 곡으로 이루어져 있는데[20] 대부분은 45의 낭만성을 그대로 가지고 왔지만 톤이 좀 더 어두워지 편이다.
'손님', 앨범 '캄차카의 지배인' 수록곡
1984년, 키노는 아크바리움 멤버들과 공동으로 (공식) 두 번째 앨범인 '캄차카/캄차트카[21] 의 지배인/지도원(Начальник Камчатки)'을 발표한다. 여기서도 그레벤시코프는 프로듀서로 나서 주었다. 당시 참여 인원으로는 카스파랸(기타), 알렉산드르 티토프(Alexandre Titov, 베이스), 세르게이 쿠리오힌(Sergei Kuriokhin, 키보드), 표트르 트로센코프, 프셰볼로트 가켈, 이고르 부트만(Igor Butman, 색소폰), 안드레이 라드첸코(Andrei Radchenko, 드럼)이 있다. 그레벤시코프 본인도 작은 키보드를 연주했다. 전반적으로 미니멀리즘 스타일에 카스파랸의 퍼즈 이펙트가 간간히 들어가 있었다. 이후 초이는 이 앨범에 대해 '앨범은 전반적으로 일렉 계열이었으며, 음향과 구조에서 전위적이었다. 소리나 스타일이 우리 생각대로 나왔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실험적인 측면에서는 흥미로웠다'라고 평가했다[22] '.
앨범의 완성 이후 초이는 카스파랸을 리드 기타로, 아크바리움의 티토프를 베이스 기타로, 이 외에 게오르기 구리야노프(Георгий Гурьянов)를 영입해 타악기 주자로 배치했다. 티토프는 프렛리스 베이스가 특기인데, 같이 참여한 '이건 사랑이 아니야(Это не любовь)' 등의 앨범에서 특징적이고 멋진 프렛리스 베이스 라인을 감상할 수 있다.
1984년 5월 이후, 키노는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고, 레닌그라드 락 클럽에서 주최하던 제2회 레닌그라드 락 페스티벌에서 대성공을 거둔다. 이 당시 '나는 나의 집을 선언한다...(비핵화 지대로) (Я объявляю свой дом...(безъядерной зоной))'라는, 대놓고 반전/반핵 사상을 드러낸 곡으로 화제가 되었다[23] . 같은 해 여름, 아크바리움 및 기타 인기 밴드들과 함께 모스크바의 교외인 니콜리나 고라(Nikolina Gora)에서 (공안의 감시 하에) 공연을 했다. 키노의 전성기는 이때부터로, 소련 전체에서 키노가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이건 사랑이 아니야', 앨범 '이건 사랑이 아니야' 수록곡
1985년 초, 키노는 안드레이 트로필로(Andrei Tropillo)의 지휘 하에 다른 앨범을 녹음했으나, 초이가 결과물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아 프로젝트는 무산되었다[24] . 이후 11월 티토프(당시 아크바리움과 키노에 공동으로 속함)는 두 밴드에서 동시에 활동하기 벅차했기에 키노를 떠나기로 했고, 재즈 기타리스트 이고리 티호미로프(Игорь Тихомиров)로 대체되었다[25] . 이후 키노는 해체 전까지 쭉 이 멤버로 가게 된다.
'별들이 여기에 떨어질 거야', 앨범 '밤' 수록곡
1986년 1월, 트로필로는 당시 미완성된 음반을 '밤(Ночь, Night)'이라는 제목으로 내놓는다[26] . 이 앨범은 20만장이나 팔리는 대기록을 세웠으며 키노는 다시 유명해졌다. 그러나 멤버들은 이 '미완성작'에 대해 상당히 부정적이었고, 언더그라운드 락 기사들도 이 앨범에 대해 비판했다. 이후 봄에 있었던 레닌그라드 락 콘서트 4회에서 이들은 'Дальше действовать будем мы(이제부터 우린 행동할 거야)'라는 노래로 대상을 차지하고, 가을에 앨범 '이것은 사랑이 아니야(Это не любовь)'를 발매한다.
이후 여름, 그들은 세르게이 리센코(Sergei Lysenko)와 영화를 찍기 위해 우크라이나 키예프로 여행을 간다. 7월, 그들은 모스크바에서 아크바리움과 알리사(Алиса[27] ) 등과 모스크바 문화 궁전에서 대규모 콘서트를 개최한다. 이후 이 세 밴드는 스트란니예 이그리(Странные игры)[28] 와 함께 'Red Wave'라는 컴필레이션 앨범을 내놓는다#[29] . 이 앨범은 캘리포니아에서 약 만 장 정도 팔렸으며, 서방에 출시된 첫 번째 러시아 락 앨범이었다.
1986년부터 88년까지 초이는 '휴가의 끝(Конец каникул)', '긴급구조대(Ассы)', '록(Pок[30] )' 등 많은 영화에 등장했으며, 와중에 키노를 위한 곡도 작동했다. 이 영화들 중 가장 유명한 영화가 바로 '이글라(Игла, 바늘, 정확히는 마약 주사의 바늘이라는 뜻)'로, 2012년 다시 리메이크되었다.
그리고 1988년, 키노는 '러시아 락 역사상 최고의 앨범 중 하나'라고 불리는 앨범 '혈액형(Группа крови)'를 내놓으며 명성의 정점을 찍는다[31][32] . 이 앨범은 1989년 미국의 유명 비평가 로버트 크리스트가우(Robert Christgau)를 통해 미국에서도 출시되었다. 키노는 소련의 중앙 TV에서 공연했으며, 1987년 초이가 러시아 락에 대해 다룬 영화 'Assa'에서 '나는 변화를 원한다(Перемен)!"라고 외치는 퍼포먼스로 유명해졌다[33] . 영화 맨 마지막에 나온다. # (다만 빅토르 본인은 이 영화나 엔딩의 퍼포먼스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는 뒷이야기가 있다) 이후 이 곡은 약간의 수정을 거쳐 리믹스 앨범 '마지막 영웅'에 수록된다.
이후 키노는 동구권을 포함한 외국 순회 공연에 나선다. 덴마크에서는 당시 아르메니아 지진에 대한 구호 콘서트를 개최하기도 했으며(1989년 1월), 부르고뉴(Bourges)에서 개최된 프랑스 최대의 락 페스티벌에서도 공연했다. 1989년에는 미국 뉴욕에서 영화 '이글라'의 시사회와 소규모 콘서트를 개최하기도 했다[34][35] .
'태양이라는 이름의 별', 앨범 '태양이라는 이름의 별' 수록
1989년, 밴드는 '태양이라는 이름의 별(Звезда по имени солнце)' 앨범을 내놓는다. 어둡고, 우울한 톤의 노래가 주를 이룬다. 이후 키노는 러시아 유명 프로그램인 우즈글랴드(Vzglyad)에 출현하고, 몇몇 비디오도 찍는다. 초이는 이걸 상당히 꺼려했지만, 이 비디오는 TV에 자주 상영되었다. 또한 이 당시 밴드는 가벼운 노래와 초이의 심오한 노래[36] 를 구분하기 위해 독립된 팝 밴드를 세우기로 계획했다고 한다.
1990년, 키노는 인기의 절정을 맞이했다. 당시 키노는 모스크바에 위치한 위치한 러시아 최대 경기장 루즈니키 스타디움에서 대규모 단독 콘서트를 열었는데, 이 때 경기장에 모여든 관중들은 공식 집계로 62000여 명에 달했고, 심지어 모스크바 올림픽 때나 볼 수 있었던 성화까지 점화되는 등 전설적 이벤트를 연주했다고 한다. 참고로 당시까지 루즈니키 스타디움에서 성화가 올라간 적은 딱 네 번 뿐이며, 이들 모두 국제적인 페스티벌이었다. 이후 7월, 마지막 콘서트를 마치며 초이는 '이번 가을에 출시할 앨범도 기대해 달라'라고 말했으며, 8월 무렵 키노는 라트비아의 스튜디오에서 새 앨범의 녹음을 대부분 마쳤다.
그러나 8월 15일 키노의 리더이자 실질적으로 키노의 전부였던 빅토르 초이가 자가용을 몰고가다 버스와 충돌해 즉사하는 일이 터진다. 당시 대부분의 녹음을 마친 상태에서 밴드 멤버들이 잠시 휴식을 가졌는데, 평소 낚시를 좋아하던 초이가 낚시를 하고 돌아오던 길에 변을 당했던 것. 당시 러시아는 그야말로 충격에 빠졌다[37] . 이후 12월 키노의 나머지 멤버들과 프랑스 스튜디오의 인원들[38] 이 손을 본 앨범이 발표되었다. 공식적으로 이 앨범의 제목은 그냥 '키노'인데 혼동을 피하기 위해 팬들은 보통 올블랙 앨범 커버에서 따온 이름인 '검은 앨범(Чёрный альбом)'이라고 부른다[39] . 이후 나머지 멤버들과 초이의 관계자들은 키노의 해체를 선언하는 기자회견을 가지며 키노는 막을 내리게 된다.
3. 초이의 사망 이후
기존 멤버들 중 이고리 티호미로프와 게오르기 구리야노프[40] 는 음악활동을 접었으며, 유리 카스파랸은 1997년부터 다시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했고. 2001년에는 러시아의 또 다른 전설적인 락밴드 '나우틸루스 폼필리우스(Наутилус Помпилиус)'[41] 의 리드싱어 뱌체슬라프 부투소프와 함께 그룹 '유-피테르(Ю-Питер[42] )'를 결성, 음악 활동을 재개했다[43] .
2015년 유-피테르의 공연 영상. 연주곡은 키노의 대표곡인 '태양이라는 이름의 별(Звезда по имени Солнце)'. 노래 부르는 사람이 부투소프.
영화 '이글라 리믹스'에 삽입된 유-피테르의 곡 '시간의 아이들(Дети минут)'. 곡은 부투소프가 썼으며, 가사는 초이의 유고에서 가지고 왔다[44]
이후 2012년, 빅토르 초이의 50번째 생일을 맞아 밴드는 잠시 재결성해 미공개곡 '아타만(Атаман)'을 공개하였다. '아타만'은 원래 '검은 앨범'에 들어가려던 음악인데, 당시 완성이 되지 않아[45] 실리지 못했으나 남은 멤버들이 편곡을 거쳐 공개하였다. 편곡이 되지 않은 어쿠스틱 버전은 공개되지 않았으나 이후 2018년 12월 마시나 레코드(Maschina Records)에서 싱글 앨범 '아타만'을 발매하며 공개되었다.
2012년 '아타만(Атаман)' 뮤직비디오. 후기 키노의 나머지 멤버들이 다시 모였으며, 인상적인 인트로 기타 부분은 카스파랸이 직접 작곡한 부분이다[46] .
이후 2013년 7월 20일, 드러머 게오르기 구리야노프는 C형 간염 및 췌장암 등의 질병으로 52세에 사망하며[47] , 카스파랸이 소속된 유-피테르도 2017년 활동 중단을 선언한다.
드러머 게오르기의 하관 영상. 배경 음악은 앨범 혈액형에 수록된 'Спокойная ночь'의 피아노 버전이다. [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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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키노 콘서트가 잡혔다.[50] 초이의 사망 이후 키노의 이름을 걸고 처음으로 열리는 콘서트이다. 라인업은 티토프(베이스)-티호미로프(베이스)-카스파랸(기타)-알렉산드르 초이(프로듀서)이며, 보컬은 기존 마스터 테이프에서 가져올 것으로 추정된다.
공연은 상트페테르부르크(2020년 10월 31일, 레도비 궁전(Ледовый дворец)) 및 모스크바(2020년 11월 21일, BTV 아레나(ВТБ Арена))에서 열릴 예정이며, 표는 2019년 10월 31일부터 판매를 시작할 예정이다. 하지만 전세계적인 COVID-19사태로 2021년으로 연기되었다.
4. 앨범 목록
- 스튜디오 앨범
- 데모 앨범
- 46 (1983)[58]
- 기타 앨범[65]
5. 스타일
모든 키노의 곡은 빅토르 초이가 작곡한 곡이다. 그의 가사는 시적이고 간결한 것이 특징이다. 노래들의 대부분은 삶에서의 시련과 사랑, 전쟁, 자유 같은 것을 위해 노력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노래 '혈액형'의 경우 반전을 외치는 노래로 구성되어 있으며, '나는 나의 집을 선언한다... (비핵화 지대로)'는 반전/반핵 사상을, '엘렉트리치카'는 전체주의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
직접적으로는 펑크 록 하위 분파인 뉴웨이브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밴드다. 듀란 듀란 같은 밴드처럼 녹음하고 싶었다는 초이의 증언도 있었을 정도. 때문에 키노는 포스트 펑크 밴드로도 분류된다. 이런 새로운 흐름들과 아크바리움이나 주파르크[66] 같은 선배나 동년배 러시아 록 선구자들, 비소츠키의 바르드 전통을 잘 혼합해 러시아 록의 새로운 표준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6. 이야깃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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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시아의 아르바트 거리에는 빅토르 초이와 키노를 위한 일명 '초이 벽(Стена Цоя)'이 있다[67] . 초이가 사망한 당일(1990년 08월 15일) 이 벽에 누군가 '오늘 초이가 죽었다(Сегодня погиб Виктор Цой)'라고 적어놨는데, 이 아래 다른 사람이 '초이는 살아있다(Цой жив)!'라는, 훗날 초이의 상징이 될 문장을 적어놓은 게 시작이었다. 이 곳을 방문할 때는 담배를 하나 들고 가서 아래 배치된 재떨이에 반쯤 피운(혹은 반으로 부러뜨린) 불 붙은 담배를 두고 가는 게 키노 팬들의 전통이다.
- 대체역사물인 일 베티사드에서는 소련의 위치를 대신한 백군이 승리한 러시아계열 대국인 SNOR에 저항하는 밴드인 NoMoreEagleZ로 바뀌었다.
- 키노와 키노의 리더였던 빅토르 초이는 서로 뗄 수 없는 관계고, 나무위키에서 두 문서는 내용이 서로 섞여 있거나 연결된 경우가 많다. 둘의 관계를 생각하면 빅토르 초이의 문서를 여기에 합치는 것도 좋겠지만, 일단 문서를 분리해 두었다. 그러니 좀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빅토르 초이 문서도 같이 읽는 걸 권한다.
- 조선일보 보도에 의하면 김정일은 생전 소련의 붕괴 이유 중 하나로 락 밴드 키노가 소련 젊은이들을 동요시켰기 때문이라고 믿었다고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빅토르 초이의 사망과 키노의 해체 1년 후 소련은 붕괴했다.
- 빅토르 최와 키노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레토가 제작되어 2018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경쟁후보작까지 올랐다. 빅토르 최 역할은 한국배우 유태오가 맡아 열연을 펼쳤다.
- 서구권이나 아시아에서는 반전노래로 알려진 '혈액형(Группа крови)'이 가장 유명한 곡이라 해도 무방하지만, 2020년 들어서 반정부 시위가 일어나는 동구권이나 구소련 소속 국가였던 곳 에선 '변화를 원한다(Хочу Перемен)'가 유명하다.
[1] 발음은 /kʲɪˈno/[2] 체호프의 단편 '제6병동'에서 따온 이름이다.[3] 이 '제6병동'은 2006년 당시까지 살아있던 파시코프와 스미르노프가 재결성했는데, 빅토르의 유명세를 빌리려는 의도가 있는지 매번 공연 때마다 빅토르의 초상화를 걸고 공연한다. 이들은 1980년 여름 '코끼리'라는 제목의 앨범을 녹음했는데 아는 친구 집에서 녹음해서 그런지 음질이 아주 엉망이다. 그래도 들어보고 싶으면 여기로. [4] 영화 '레토'에서 신스틸러로 등장한다. 영화 내에서 Psycho Killer(토킹 헤즈 원곡) 등의 노래를 불렀는데, 가로 줄무늬 티셔츠와 삐죽한 머리가 인상적인 그 사람 맞다.[5] 리빈과 발린스키가 원래 알던 사이었고, 리빈이 초이에게 발린스키를 소개해 주었다고 한다.[6] 당시 라이브 음원이 '첫 번째 녹음(Pervye Zapisi)'이라는 제목의 앨범으로 나와 있다. 들어보기 [7] '가린과 살인광선'이라고도 번역하며, 자신이 만든 살인광선(일명 '쌍곡선')으로 세계의 독재자가 되려는 엔지니어 가린의 이야기다[8] 1981년 루빈스타인 거리에 세워진 공연 장소로, 당시 러시아에서 거의 유일하게 락이 허용된 장소였다. 물론 KGB 감시 하에. 영화 레토에서 묘사된 바에 따르면, 말이 '락 클럽'이지 마치 극장처럼 엄숙하게 앉아서 '경청'해야 했으며, 하다못해 플래카드 하나 들어올리는 것도 금지되는 그런 곳이었다(...)[9] 초이와 리빈의 증언에 따르면, 밝게 빛나는 영화 사인을 보고 나서 짓게 된 이름이라고 한다. 다만 초이가 영화를 좋아해서 이름을 이렇게 지었다는 이야기도 있긴 하다. 이 외에도 멤버들은 이 이름이 짧고 '인공적으로 들려서(synthetic)' 좋다고 호응했으며, '키노'라는 이름이 고작 2음절이고 발음이 쉽다는 걸 자랑스러워한다고 증언했다.[10] 수족관이라는 뜻. 영어의 아쿠아리움(Aquarium)과 어원이 동일. 1970년대 결성한 러시아 록 밴드로 벨벳 언더그라운드 같은 개러지 록과 캣 스티븐스 같은 포크 록에 영감을 받아 시대를 앞서간 음악을 들려줘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다.[11] 이 제목은 전체 음악 길이가 약 45분이라는 것에서 나왔다고 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45의 데모판이 약 44분 30초 정도 된다. 현재 가장 보편적인 1996년 모로즈 레코드 판본 기준(초기 발매에서 빠진 마지막 트랙 '아스팔트'까지 들어간 판본)으로는 약 42분 정도 된다.[12] 1982년 발린스키가 입대하여 쿠바로 가버리는 바람에 밴드에는 2명밖에 남지 않는 상황이었다. 참고로 발린스키는 이후 음악계에서 완전히 떠났고, 제대 후 철도 업계에 몸을 담아 2016년 러시아 철도의 부국장까지 올라갔다. 이 쪽도 잘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성공한 인물이다.[13] 이때 드러머가 없어서 드럼 머신으로 녹음을 했다는 뒷이야기가 있다. 이 '드럼 머신'은 45 앨범의 특징으로 간주된다.[14] 키노는 약 90여개의 곡을 발표했는데, 가사의 거의 대부분은 초이가 직접 작곡한 것이다[15] 아무래도 언더그라운드 스튜디오에서 녹음하다 보니 질이 좀 떨어질 수 밖에 없었다. 당시에 질 좋은 녹음을 원했다면 소련 유일의 국영 음반사인 멜로디야로 갔어야 했을 건데, 그 쪽에서는 '반동 분자들이나 할 법한' 락을 취급하지 않았으며 또 당시의 키노는 무명 밴드였기 때문. 이 '음질'과 관련된 이야기는 영화 레토에서도 등장한다. [16] 이 금지령은 이후 풀리게 되며, 1989년 리믹스 앨범 '마지막 영웅'에서도 재수록되며 후기 공연에서도 자주 등장한다.[17] 당시 빅토르가 내려고 했던 앨범은 '마지막 영웅(Posledniy Geroy)'인데, 1989년 리믹스 앨범 '마지막 영웅'과는 다르다. 두 종류의 녹음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들어보려면 여기로(완성된 1-4번 트랙 + 라이브 녹음에서 가지고 온 나머지 트랙들) 이것도 있다(1-4번 트랙+녹음하다 만 5번 트랙). 1-5번 트랙은 리마스터링을 거쳐 1992년 '알려지지 않은 노래들' 앨범에 수록되었다. [18] 영화 레토에서 이 갈등이 간접적으로 암시되는데, 리빈이 초이의 곡을 바꿔 연주하자 '왜 꼭 내 노래를 가지고 바꾸려는 건데?'라며 불만을 제기하고 결국 둘은 싸운다.[19] 사실 '앨범'이라고 하기도 뭣한 게, 원래 키노 측에서는 이걸 앨범으로 찍어낼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음반사가 돈을 벌기 위해 찍어내 판매했다. 이 때문에 초이는 이 앨범을 '단순 연습곡'이라 칭하며 좋게 보지 않았고, 키노 측에서도 이를 공식 앨범으로 보지 않았다. 다만 팬들 대부분은 이걸 두 번째 앨범으로 인정하는 편. 여기에 실린 '연습곡들' 대부분은 편곡되어 이후 앨범들에 수록된다. 물론 «Без десяти(10분 전)»처럼 이후 찾아볼 수 없는 곡도 존재. 1996년 재판에서는 보너스 트랙 3개가 더 추가되었는데, 이 곡들은 이후 스튜디오 녹음과 라이브를 다 뒤져도 다시 연주한 기록이 없다.[20] 그래서인지 '45' 못지않은 초이의 '날백수 기질'을 엿볼 수 있다. «Я хочу быть кочегаром(난 화부가 되고 싶어)»은 '회사 가기 싫으니 난 화부로 일해야겠다! 일 주일에 세 번만 일하면 되니까!'라는 내용이고(다만 화부가 힘들다는 걸 고려할 때 반어적으로 노래를 지은 것 같기도 하다. 실제로 초이는 화부, 청소부 등 다양한 일자리를 거쳤다) «Без десяти»는 '아침에 일어났는데 출근 10분 전이잖아? 거기다 일단 아침부터 먹고 출근해야 하지 않겠어? 제기랄, 욕하고 싶으면 욕하라 그래, 난 아침 먹어야 해!'라는 내용이다. '혈액형'이나 '태양이라는 이름의 별' 등 후기의 난해하고 은유적인 가사와는 큰 차이를 보인다.[21] 러시아의 캄차트카 반도 맞다. '아주 먼 장소'를 의미하는 러시아어 속어인데, 당시 초이가 일하던 곳에서는 보일러공이라는 의미도 있었다고 한다. 이 보일러 공장(일명 Kamchatka House)은 현재 작은 술집 겸 빅토르 초이 박물관이 되어 있다. 락 밴드의 가수로는 돈을 벌기 힘들었던 당시 소련에서 초이는 보일러공으로 일했다. 이 외에 1967년 소련 코미디인 'Начальник Чукотки(추코트카의 지배인. 추코트카는 캄차트카 근처에 위치한 반도)'에서 가져온 이름이기도 하다.[22] 재밌게도 이 앨범 또한 발매 과정에서 삭제된 곡이 존재한다. 14번 트랙인 '사샤 알 수 없는 이유로 이 곡은 1996년 모로즈 레코드 판본에도 수록되지 않았다.[23] 이 곡은 세 번째 앨범 '이건 사랑이 아니야'에 수록되었으나, '비핵화 지대'라는 말은 빠졌다.[24] 이 미완의 앨범은 훗날 '밤'이라는 제목으로 출시된다. 후술. 여담이지만 '이건 사랑이 아니야(Это не любовь)' 앨범은 이 미완의 프로젝트 당시 2주일 만에 만들어진 앨범으로, 프로젝트 과정 중 지친 멤버들이 기존 초이가 작곡한 곡들을 가지고 와 후딱 만든 앨범이었다. 그래서인지 45/46 못지않게 가사가 활기차고 멜로디 또한 밝은 편이다.[25] 티토프는 유튜브에 'Alexander Titov'라는 이름으로 계정을 가지고 있는데, 키노의 당시 곡들 중 몇몇 곡들을 연주하는 영상을 올렸었다. 지금은 활동이 뜸하지만.[26] 이 앨범은 1988년 소련의 유일한 국영 음반사인 멜로디야(Melodiya)에 의해 제대로 된 앨범으로 다시 출시되는데 저작권이 미비했던 소련답게 키노 멤버들에게는 단 1코페이카도 주지 않는 흠좀무한 일이 있었다.[27] 레닌그라드를 중심으로 활동한 러시아의 유명 락 밴드. 현재도 활동하고 있다.[28] '이상한 밴드'라는 뜻으로, 현재까지 활동하고 있는 러시아 락 밴드[29] 참고로 키노와 같이 노래를 부른 '조안나 스팅그레이(Joanna Stingrey)'는 가수이자(키노와 같이 부른 노래도 있다. 라이브 녹음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 키노의 멤버인 카스파랸의 아내다. 1991년 이혼.[30] 당시 유명 영화감독인 알렉산드르 우치첼 작품[31] 여기에 수록된 곡들 대부분이 이미 1987년 레닌그라드 락 콘서트 5회에서 공개되긴 했다.[32] 이 앨범은 기술적으로도 의미가 있는데, 키노의 앨범들 중 가장 음질이 좋은 앨범이다. 카스파랸은 아내 스팅그레이를 통해 야마하 MT-44 등 유럽과 미국의 더 나은 장비들을 들여올 수 있었다.[33] 참고로 Assa에서 빅토르 초이는 그냥 특별출연한 것에 불과하다. 근데도 개봉 당시에는 마치 주연이라도 맡은 양, 당대 최고의 인기 스타였던 초이를 마케팅 차원에서 전적으로 앞세웠다(...). 이 영화의 진짜 주연 배우는 러시아의 아티스트인 아프리카(본명은 세르게이 부가예프)다.[34] 이후 1990년 1월 미국 유타 주에서 개최된 선댄스 영화 페스티벌에서도 참가했다. 당시 음원[35] 당시 키노, 주파르크, 아크바리움 등 많은 러시아 락 밴드들은 미국 등지의 서양에 진출하고자 했으나 이들의 행보는 무관심 속에서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당시 서구 사람들은 '러시아 하면 체호프나 차이코프스키 정도 있는 줄 알았는데, 이 곳에도 락이 있네?' 정도의 태도로 일관했지 이들의 음악 세계에 대해 진지하게 탐구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 이에 초이와 마이크 등은 실망했다는 태도를 드러냈다. 이는 영화 레토에서도 간접적으로 드러난다.[36] 45, 46 앨범을 들어보면 알겠지만 원래 초이는 비유하자면 '활기찬 20대 백수'처럼 노래를 했는데 후기 앨범으로 들어가면서 점점 가사에 은유적 표현이 많이 삽입되고 음 자체가 낮아지기 시작했다.[37] 확실치는 않지만, 이 사건에 KGB가 연관되어 있다는 의혹이 있다. 빅토르 최 의문사 사건 참고.[38] 1989년 키노는 프랑스의 발 도르주(Val d'Orge) 스튜디오에서 리믹스 앨범 '마지막 영웅'을 녹음했는데 이 인원들이 마지막 앨범의 녹음을 마무리했다.[39] 원래 앨범 제목과 앨범 아트 또한 초이의 몫이었는데 이를 정하기 전에 사고를 당했으니.[40] 구리야노프는 이후 미술가로 활동했으며,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위치한 신 미술 아카데미에서 1993년부터 명예 교수로 활동했다. 그는 동성애자(혹은 동성애적 성향을 가진 사람)였기에 그의 그림에서는 동성애적 성향이 간간히 드러나는 편이다.[41] 1983년부터 1997년까지 러시아 예카테린부르크를 중심으로 활동한 포스트 펑크/뉴웨이브 계열 락밴드. 영화 브라트 1편의 OST 대부분을 맡은 걸로 유명하며, 영화에 리더 부투소프가 출연하기도 했다. 대표곡으로 '굿바이, 아메리카(Гуд-бай, Америка)' 등이 있다.[42] 러시아어로 목성을 의미한다.[43] 이들은 키노 및 나우틸루스 폼필루스 당시의 노래들과 자작곡들을 공연했으며 2017년 활동을 중단했다.[44] 초이가 남긴 원고를 보면 멜로디를 붙이지 않은 가사들이 많이 남아 있다. [45] 초이가 연습삼아 녹음한 보컬 + 어쿠스틱 기타 반주가 전부였다.[46] 스튜디오 밖 조정실에 있는 사람(팔에 문신이 새겨진 사람)이 빅토르의 아들인 알렉산드르 초이.[47] 여담이지만 그의 사망 몇 주 전 러시아에서는 동성애를 처벌할 수 있는 법이 통과되었다 [48] 1분 1초 즈음에 나오는 선글라스를 착용한 사람이 유리 카스파랸이고 그 옆에 있는 사람은 이고리 티호미로프이다.[49] 카고첼이라는 러시아 제약회사 측의 이벤트. 연주되는 곡은 키노의 '네 여자친구가 아플 때.' 곡에 맞춰 실제로 아픈 여자친구를 위해 남자친구가 이벤트를 열어준다는 방식. 곡 후반부에검은 선글라스를 쓰고 나타나 흰색 Jazzmaster 기타를 들고 독주하는 사람이 카스파랸이다.[50] 영상에서 나오는 노래는 무언가(가사없는 노래)이다.[51] 제작 중 초이의 결정으로 엎어졌다. 현재 수록곡 목록은 남아 있으나, 총 12개 트랙 중 4개(+불완전한 1개)만 녹음되어 남아 있다. 이들은 '알려지지 않는 노래들' 앨범에 수록되었다.[52] 이 앨범은 3개의 판본이 존재한다. 1-13번 트랙까지 있는 판본 / 14번 트랙('사샤')이 존재하는 판본 / 1-13번 트랙 + 캄차트카 하우스에서 녹음한 3개의 미공개곡이 수록된 판본(1996년 모로즈 레코드 판본)[53] 아래의 '밤' 앨범을 만들다 지친 키노 멤버들이 기분 전환겸 만든 앨범. 실제로 녹음하고 찍어내는 데 고작 2주일 밖에 걸리지 않았다고 한다.[54] 제작 중 초이의 결정으로 엎어졌는데, 위의 '마지막 영웅(1983)'과 달리 녹음한 트랙이 한 10개 정도 나왔기에 당시 프로듀서였던 트로필로가 국영 음반사 멜로디야와 손잡고 무단으로 찍어내 팔았다. 약 20만 부가 팔려나갔지만 키노 측에 돌아간 돈은 1코페이카도 없었기에 당시 논란이 되었고, 초이 본인도 앨범의 판매에 대해 부정적이었다.[55] 안트로프(AnTrop) 등 배급사가 있는 다른 앨범들과 달리 이 앨범은 배급사가 아예 없다. Discogs 등지에서도 'Not on label'로 분류된다.[56] 밴드 이름과 혼동의 여지도 있고, 빅토르 초이의 유작이기도 하고, 쌈빡한 검은색의 표지로 인해, 정식명칭 대신 검은 앨범(Чёрный альбом) 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원래 앨범 아트나 제목은 초이의 몫이었는데 이걸 정하기도 전에 사망해 버렸기 때문. 스포티파이에도 "검은 앨범" 이라는 이름으로 등록되어 있다.[57] 1996년 모로즈 판본에서 미공개곡 2개가 더 수록되었다.[58] 원래 그냥 연습곡을 녹음해 둔 거였는데 레코딩 회사 측에서 초이 동의 없이 찍어낸 앨범이라 생전 초이는 이 앨범을 별로 좋아하지도 않았고, 인정하지도 않았다. 다만 대부분의 팬들은 2번째 앨범으로 인정하는 듯.[59] 초이 본인이 직접 관여한 리믹스.[60] 라이브에서 부른 노래와 만들다 엎어진 1983년 '마지막 영웅' 녹음본 등 수록.[61] '이글라', '휴가의 끝', '아사(АССА)' 등 키노가 참여한 영화에 수록된 키노의 음악 수록[62] '검은 앨범'과 색깔만 반대된 앨범 아트로 인해 '하얀 앨범(белый альбом)'이라고도 불린다. 미공개곡 'Вопрос'(오리지널+데모) 및 'Смотри - это КИНО' 수록.[63] 키노의 전신인 '가린과 쌍곡선' 시절 라이브 녹음 수록[64] 마시나 레코드 발매. 위의 '아타만'과 달리 초이가 직접 녹음한 보컬+어쿠스틱 판본 / 2012년 리믹스 / 2012년 리믹스 데모 총 3개 트랙으로 구성한 싱글.[65] 원체 리믹스, 컴필레이션 앨범 등이 많아 중요한 것만 수록[66] 빅토르 초이 이전 레닌그라드의 락스타였던 미하일 '마이크' 나우멘코가 만든 밴드. 영화 레토는 마이크와 초이의 이야기를 다룬다.[67] 상트페테르부르크 등 다른 도시에도 있는데, 아르바트 거리의 벽이 제일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