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예보 포위전
Opsada Sarajeva (세르보크로아트어, 크로아티아어)
Opsada Sarajeva / Опсада Сараjева (세르비아어)
Siege of Sarajevo (영어)
Le siège de Sarajevo (프랑스어)
Die Belagerung der Stadt Sarajevo, Belagerung von Sarajevo (독일어)
Осада Сараева (러시아어)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에서 1992년 4월 6일부터 1996년 2월 29일까지 1425일간 지속된 도시 포위전이다. 이 기록은 2차 대전 때 대표적인 포위전이었던 스탈린그라드 전투 지속기간의 3배에 달하며, 2차대전 이후 가장 오래 지속된 포위전으로도 꼽힌다.
1. 발발
1992년 보스니아 전쟁 개전 이전부터 세르비아계 정당과 단체들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가 연방에서 독립을 시도할 시 우리 또한 독립하여 세르비아계의 나라인 스릅스카 공화국을 세울 것"을 선언하였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사회주의 공화국은 국민투표를 거쳐 독립을 강행했고 마침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의 이름으로 독립을 선포한다. 국민투표를 보이콧하고 '스릅스카'의 깃발 아래 조직되어 있던 세르비아계 민병대는 '알리야 이제트베고비치 대통령이 지도하는 무슬림 공화국이 유럽 한복판에 서는 것에 반대한다'는 명분을 걸고 보스니아를 전격 공격한다.
1992년 4월 4일 세르비아 민병대(스릅스카군)는 사라예보 서남부의 사라예보 국제공항을 봉쇄했으며, 사라예보 시내를 관통하는 밀랴츠카 강 남부의 시가지를 점거하고 시내로 진입하였다. 이 사건이 물리적 충돌로 이어질 것이라 예상하지 못한 사라예보 시민들은 거리로 나와 독립국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의 건국을 축하하며 세르비아 민병대를 막아서고 있었고, 홀리데이 호텔을 점거한 세르비아 민병대의 저격으로 첫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한다.
세르비아 사회주의 공화국이 주도하던 연방 정부군인 유고슬라비아 인민군은 직접적으로 개입하진 않았지만 보스니아 전쟁에 대비해 전쟁 발발 직전부터 은밀하게 라도반 카라지치가 주도하던 보스니아내 세르비아계 민병대로 편입되고 있었다. 그 덕에 세르비아계 민병대는 민병대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13,000명에 달하는 병력과 이에 상응하는 기갑, 중화기로 무장하고 사라예보를 포위해 1425일간 사라예보를 드나드는 모든 물자와 사람을 통제하였다. 사라예보에는 7만명 규모의 보스니아 정부군이 있었지만 이들은 기본적으로 도시군대로서 화력과 작전계획이 충분하지 않았고, 사라예보를 둘러싼 산지의 요새를 빼곡히 점거한 세르비아 민병대를 밀어내지 못했다.
개전 초반에 빠르게 형성된 포위망을 보스니아 정부군 스스로 끝까지 뚫어내지 못한 이유 중 하나로 서방세계의 지원 미비를 꼽아볼 수 있다. 당시 서방세계는 유럽에서 또 다시 전쟁이 벌어졌다는 점에 대해 빨리 끝날 수 있도록 뭔가 역할을 해야 한다는 점에는 동의했지만, 독립하려는 보스니아가 이슬람교 우세 국가라는 점과 보슈냐크인들의 이슬람 신앙을 오스만 제국의 잔재로 부정적으로 여기는 시각들이 혼재하여 수도 사라예보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공세적으로 보호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는 데 실패하였다. 보스니아 정부군과 이제트베고비치 대통령은 서방세계가 보스니아의 독립을 승인해 놓고 세르비아의 개입을 모르쇠하며 형식적인 평화 협상만을 언급한다고 비판했지만 달라지는 것은 많지 않았다.
2. 도시 포격
2.1. 국립도서관 포격
사라예보 포위전 중 발생한 숱한 포격전으로 도시 내 무수한 숫자의 가옥이 파괴되었는데, 이 포위전으로 소실된 건물 중 가장 유명한 것으로 '''국립도서관(Nacionalna i univerzitetska biblioteka Bosne i Hercegovine / Национална и универзитетска библиотека Босне и Херцеговине)'''[1] 을 꼽을 수 있다. 오스트리아 양식으로 지어진 이 국립도서관은 1896년에 개관하여 보스니아에 남은 오스만 제국 문서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다양한 문서 원전이 보존된 보스니아 문화의 중심지로 기능했다.
사라예보 포위가 시작된 4월로부터 4개월간 세르비아 민병대는 도시 포위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막상 도시 내에 주둔한 정부군과의 직접 교전을 통한 소모전은 피하고 있었다. 사라예보에 대통령궁과 내각이 자리잡고 있는데, 전국토를 점거하기 전에 이들부터 잡아버리면 전국에 점조직으로 흩어질 무자헤딘을 감당할 자신도 없었고, 국제사회의 어그로를 끌지 않고 조용히 전체 영토를 집어삼키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 내전의 근간에 인종간의 증오가 깊이 뿌리박혀 있는 바, 세르비아 민병대는 보스니아 정부 지지도가 높은 민간인들의 사기를 꺾기 위해 직접적으로 시내로 진공하는 대신 비군사적 목표물들에 포격을 감행한다. 이로 인해 수십 만 권의 역사적 원본 문서들이 보관되어 있던 BiH 국립도서관이 완전히 불타고 만다.
포격으로 화재가 발생한 도서관은 거대한 불덩어리가 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졌으며, 관계자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유물은 대피되지 못했다. 화재를 진압하러 온 소방관조차도 포격에 이은 저격을 받아 물러나고 도서관이 완전히 잿더미가 될 때까지 손을 쓸 수 없었다. 최종적으로 80% 이상의 유물이 영구적으로 손실되었다고 전한다.
도시 전체가 폐허가 된 채 전쟁이 끝나고, 유물조차 남지 않은 잿더미 도서관은 민가와 상업시설 등 일단 사람이 먹고 사는 데 필요한 시설들을 재건하는 데 치여 17년간 빈터로 남아있다가 2014년에야 재건이 완료되었다.
2.2. 마르칼레 시장 포격
Markale market shelling or Markale massacres
Masakri na Markalama / Масакри на Маркалама
1994년 2월 5일,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고 대부분의 전선이 교착된 시점에서도 사라예보는 여전히 포위중이었으며, 시민들은 평소와 같이 봉쇄 속에서의 일상을 영위하고 있었다. 그리고 사람이 몰리는 정오(발칸 중부 시각으로 정오, 보스니아 시각으로 11시 경)를 기해 시내에 갑작스런 박격포 포격이 개시되었다. 백주대낮에 시내 한복판에 장을 보러 나온 많은 시민들이 포격에 희생되었다. 최종적으로 68명의 사망자, 144명 이상의 부상자가 집계되었다.
이로부터 1년 6개월 후인 1995년 8월 28일, 서방세계의 중재를 앞둔 시점에서 똑같은 시장에 똑같이 포격이 발생해 43명의 사망자와 75명의 부상자가 발생한다. 유엔 대변인은 이 사건에 대해 '남쪽에서 날아온 한 발의 120mm 박격포탄이 시장에 명중하여 발생한 참사로, 세르비아 민병대의 주둔지역에서 날아온 것으로 보인다'라고 정리하였다.
UN과 NATO로 대표되는 주변 국제사회는 이미 스레브레니차 학살을 무력하게 지켜보면서 인내의 한계에 도달해 있었고, 이 2차 포격 당시 파리에서는 평화 회담이 준비되고 있었다. 이 포격으로 다시 한 번 농락당한 서방세계는 3년간 이어온 '신사적인 중재'를 끝내기 위해 세르비아 민병대가 더이상 호전적으로 보스니아를 윽박지를 수 없도록 무력을 사용해야 한다는 점에 동의한다. 이로써 딜리버레이트 포스 작전(Operation Deliberate Force)이 NATO에 의해 한 달 간 개시되고, 그제야 비로소 세르비아 민병대 측에 예절이 주입되어 데이턴 협정을 체결해 종전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자칭 스릅스카 공화국 대통령이자 세르비아 민병대의 지도자 라도반 카라지치는 두 차례 포격에 대해 보스니아 측이 서방세계의 지지를 얻기 위해 벌인 자작극이라고 주장하였다. 결국 국제사법재판소에 의해 이 두 차례의 학살 모두 세르비아 민병대의 소행으로 판명되었고 라도반 카라치치는 이에 대해 유죄 판결을 받는다.
3. 저격수 거리
사라예보는 시가지 남부를 밀랴츠카 강이 관통하며 남북에 각각 산지를 낀 도시이다. 특히 사라예보의 중심가는 이 준분지의 남부, 밀랴츠카 강변에 위치했는데 강의 남부와 바로 이어진 산간 요새는 모두 세르비아계 민병대가 빠르게 장악한 상태였다. 오늘날 사라예보의 경계상 도시 동남부의 산악지대가 당시 세르비아 민병대의 공격이 가장 거셌던 요새였다.
세르비아 민병대는 남부 산지를 점거하고 도시 내에서 자신들의 영향력이 미치는 구역의 무슬림을 추방, 살해, 약탈하였으며 산악 요새와 강남의 고층건물들을 거점으로 삼아 사라예보 중심가를 공포로 몰아넣기 위한 민간인 저격을 벌인다. 세르비아 민병대는 저격총 뿐만 아니라 경기관총, 대공포 등 멀리 쏠 수 있는 화기라면 포격만 빼고 무엇이든 거리낌없이 사라예보 시내에 쏟아부었다. 물론 3년간의 포위동안 도시 포격 역시 빈번하게 이루어졌지만 이에 대해서는 '보스니아 정부군이 선공하여 원점에 반격하였다'라거나, 주로 야간에 사격하여 원점을 알 수 없도록 하는 식으로 '보스니아 정부군이 선동을 위해 스스로 쏘았다'고 주장하는 등 여러 변명을 댔다.
도시는 봉쇄되었지만 사람들은 살아가야 하기에 계속 시가지를 통행하였는데, 강남의 고층 건물에서 강북을 내려다볼 수 있던 세르비아 민병대는 낮에 무차별 저격으로 도시의 모랄빵를 유발하고 밤에 도시를 포격하는 방식으로 사라예보를 고사시켜 나갔다. 특히 저격수가 이 포위전의 가장 큰 비극으로 여겨지곤 하는데, 이는 순전히 민간인을 향한 무차별 테러였기 때문이다. 강북의 시가지 전역이 저격수들의 가시권에 있었고, 시민들은 저격수의 재장전 타이밍을 노려 달리거나 극소수 무장한 시민들의 반격을 틈타 이동하거나, 또는 후일 투입된 유엔 평화유지군 장갑차의 엄호를 받으며 도시를 왕래할 수밖에 없었다.
3년간의 무차별 저격과 포격으로 생명을 잃은 사람은 11,541명으로 집계되었으며, 물론 노약자도 포함되어 1,600명에 달하는 어린이들 또한 저격수에게 목숨을 잃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부상자의 수는 5만명을 넘는다.#
저격수들의 무차별 사격은 민간인만을 노린 것도 아니었다. 도시에 평화와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비무장 상태로 작업하는 유엔 평화유지군 역시 저격의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자폭은 세르비아계에게도 어떻게든 중립적 입장을 취해 주려고 평화회담을 주선하던 서방세계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일이었고, 결국 세르비아계는 매우 우세했던 전쟁을 치러냈음에도 불구하고 비긴 것만도 못한 평화협정을 체결해야만 했다.
4. 도시 마비
포위전으로 인해 도시는 3년간 만성적인 물자 부족에 시달렸다. 며칠씩 이어지는 정전 사태는 예사이며, 정전으로 인한 상하수도 마비, 식량과 유류 부족 등 다양한 재난이 사라예보 시민들을 괴롭혔다. 그나마 시민들의 노력과 유엔 평화유지군의 도움으로 물, 식량 등 기초 자원의 배급제가 시행되어 도시가 유지될 수 있었다. 정전이 발생하면 의료진은 횃불을 들고 먹통이 된 CT, MRI 기계 등을 등진 채로 저격당한 민간인들을 치료해야 했다고 한다.
5. 종결
1995년 12월 14일 맺어진 데이턴 협정으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연방과 스릅스카 공화국 양측의 존재의 공인, 내전을 둘러싼 세 민족정당의 갈등 봉합과 화해가 선언되었으나 포위전은 평화협정 이후에도 한동안 지속되었다. 협정만으로는 서로를 신뢰하기 너무 멀리 갔기 때문일 것이다. 이 봉쇄전의 마지막 피해자들은 1996년 1월 9일 그르바비차(사라예보 강남의 시가지) 포격으로 발생한 19명의 사상자(1명의 사망자 포함)였다.
오늘날 사라예보 홀리데이 호텔 인근의 강변도로와 시가지는 '저격수 거리'라는 관광 스팟으로 보존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