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도반 카라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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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모스크바 에서의 카라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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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지치와 믈라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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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포 후 재판에서의 카라지치
Радован Караџић(Radovan Karadžić)
1945년 6월 19일 ~
1. 개요
2. 상세
3. 기타


1. 개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을 구성하던 스릅스카 공화국[1]의 전 대통령, 독재자로, 보슈냐크인/크로아티아인에 대한 대학살을 주도한 전쟁범죄자이다.
정치를 하기 전에는 정신건강의학과 의사시인이었다. 같은 의사 출신인 독재자 프랑수아 뒤발리에바샤르 알아사드와 비슷한 사례라고도 볼 수 있다. 카라지치는 의사시인으로 활동했는데, 1968년 첫 시집을 출간[2]하고 2005년까지 8권의 시집을 출간하였다. 스릅스카 공화국대통령(독재자)을 지내는 동안에도 1992년, 1994년 두 차례 시집을 출간하였다. 스릅스카 공화국의 첫 국가의 가사를 라도반 카라지치의 시집에서 따 왔다. 2021년 현 스릅스카 공화국 국가인 나의 공화국 가사도 카라지치의 시집에서 모티브를 따 왔을 정도.
왼손잡이이다. 1991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자치의회에서 알리야 이제트베고비치디스전을 벌일 때 영상을 보면 손가락질을 할 때 왼손을 쓰는 것을 알 수 있다. 특이점으로 카라지치가 한창 정치인으로 살 때에는 콘텍트 렌즈를 꼈지만 1996년 스릅스카 공화국 대통령적에서 사퇴하고 도피생활을 벌리기 시작한 때부터는 안경을 착용했다.

2. 상세


1945년 몬테네그로 북부의 소도시 페트니차에서 태어났다. 이후 사라예보로 가서 정신의학을 공부하기 시작했으며, 미국 유학 이후 귀국하여 병원에서 일하였다.
1984년사기 혐의로 체포되어 수년간 재판을 받아 결국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으나, 이미 재판으로 인해 수년간 갇혀 있었음이 참작되어 징역살이는 면했다.
이후 정계에 입문한 후에 세르비아 민주당을 창당했고[3] 1992년에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가 분리독립을 선언하자 이에 반발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을 이루고 있는 스릅스카 공화국의 대통령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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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니아 전쟁이 한창이던 1994년 4월 22일 베오그라드를 방문한 라도반 카라지치. 세르비아 대통령 슬로보단 밀로셰비치와 함께 찍은 사진. 사진 출처 날짜 출처

보스니아 전쟁 당시 미국 AP통신하고 인터뷰한 영상.
유고슬라비아 전쟁의 일환인 보스니아 전쟁이 일어난 이후 1995년에는 수천 명의 무슬림가톨릭교도 학살을 주도하였다. 이 때 살해당한 사람들은 무슬림인 보슈냐크인은 물론 헤르체고비나 지방에 살던 가톨릭 신자인 크로아티아인들도 포함되어 있었다.[4] 특히 그가 저지른 가장 큰 전쟁 범죄는 역시 보스니아 내전 막바지인 스레브레니차 학살 사건이 가장 악명이 자자하며, 40개월 이상 보스니아 수도인 사라예보에 포격을 가하고 이 지역을 봉쇄해 민간인 약 1만 명을 숨지게 한 사건이 가장 유명하다.
데이턴 협정으로 보스니아 전쟁이 종전을 맞자 라도반 카라지치는 1996년 3월 1일 재빨리 대통령직에서 중도 사직[5]을 한 이후 종적을 감췄다. 데이턴 협정은 1995년 11월 체결됐지만, 보스니아 전쟁은 1996년 3월 1일까지로 되어 있는데 이게 카라지치의 중도 사퇴날짜를 기준으로 하기 때문이다. 카라지치가 사퇴하면서 세르비아 민주당(보스니아)에서 계속 대통령을 냈지만 카라지치만큼 막장은 없었기에 데이턴 협정을 파기하지는 않았다. 참고로 스릅스카 공화국에서 세르비아 민주당이 정권을 상실한 것은 2003년까지 가야 한다.
카라지치는 처음에 바로 세르비아를 가지 않고, 1996년 7월 오스트리아로 간 후에 종적을 감췄다. 오스트리아, 스위스를 거쳐서 스페인으로 줄행랑쳤다가 스페인에서 세르비아로 이어지는 비행기를 타고 베오그라드에 들어가게 된다.[6] 이 때문에 카라지치는 1999년에 와서야 세르비아에 들어가 정착했다.
보스니아 전쟁 이후 세계적으로 그 악명이 알려지면서 전쟁범죄자로 수배되었다. 하지만 세르비아인들의 도움으로 십여 년 간 잡히지 않았으며, 미국 정부가 카라지치에게 5백만 달러의 현상금을 걸기도 했었다. 그러다가 2008년에야 뒤늦게 세르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에서 체포되었는데 알려진 바에 따르면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르고 신분을 숨긴 채로 뉴에이지 의사로 위장했다고 한다. 심지어 실명 그대로 개인 웹사이트까지 운영했을 정도였다.

라도반 카라지치가 체포된 날 밤, 사라예보보슈냐크인들은 거의 축제 분위기였다.

반대로 카라지치가 체포되자 세르비아 베오그라드에서는 카라지치는 죄인이 아니라는 항의 시위까지 있었다.
이후 2009년부터 7년 동안 계속된 카라지치 재판에는 1만 1천500개의 증거물이 제출되고 증인 586명이 법정에 나왔을 정도로 기나긴 재판이 이루어졌고, 선고가 나는 당일에는 재판장이 판결문 요약을 읽는 데만 90분이 걸렸다. 그리고 결국 2016년에 보스니아 내전 당시 무슬림 8000명 학살을 지시하고 사라예보의 민간인 10000여 명을 죽게 한 혐의가 인정되어 1심에서 징역 40년을 선고받았다. 2019년 항소심에서는 형량이 더욱 증가되어 최종적으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카라지치의 재판 장면.
여담으로 1심에서 대한민국의 권오곤' 재판관이 선임재판관을 맡았다. 나토 국가나 이슬람 국가 출신의 인물이 선임재판관을 맡을 경우 중립성에 대한 논란이 발생할 수 있으므로 접점이 거의 없는 권오곤 재판관이 선택된 것으로 보인다.[7]

또한 그의 생애에 대한 영상도 있다.
#카라지치가 옥중에서 전화를 통해 외부행사에 참석하여 논란이 일고 있다.

3. 기타


  • Remove Kebab에서 물을 마시는 모습으로 나오기도 한다. 노래의 내용 자체가 그를 찬양하는 내용이다. 이러한 이유로 양웹에서는 카라지치를 지칭할 때 "Water Man/Water Guy"라고도 부른다.
  • Karadžić이라는 철자법 때문에 '라도반 카라드직'이라 알려진 경우도 있다. 외래어 표기법에 맞는 표기는 카라지치[kâradʒitɕ\]이다.

[1]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지역의 세르비아계 거주 지역을 근거로 한 국가 내 구성국.[2] 카라지치는 16살 때인 1961년 유고슬라비아 신문 공모전에서 당선되면서 등단했다.[3] 세르비아 본토의 민주당과는 성향이 전혀 다른 빼박 극우정당이고(이 민주당은 중도파에서 중도좌파로 분류되는 정당이며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에도 가맹했다.), 세르비아 민주당보다 성향이 극단적인 정당이다.[4] 세르비아는 정교회, 크로아티아는 가톨릭을 믿어 둘 사이는 예전부터 좋지 않아 서로 툭하면 공격하고 죽이기 일쑤였다. 우스타샤 참조.[5] 카라지치는 1994년 대통령직에 재선이 됐기에 원래 임기는 1998년까지였다.[6] 카라지치 뿐만 아니라 보스니아 내전에서 잔혹행위를 저지른 범죄자들 다수가 유럽 국가들로 도피했으며 현지 국가에서 재판을 받거나 체포되어 국제재판소로 인도된 바 있다.[7] 권오곤 재판관의 퇴임 후 인터뷰에 따르면 카라지차가 밀로셰비치보다는 재판에 조금 더 협조적이었다고 한다. 권오곤 재판관을 부를 때 밀로셰비치는 '미스터 권'으로만 불렀지만 카라지치는 '재판관님'이라고 부르며 존칭을 사용했고 재판정에서 기립하라는 명령을 밀로셰비치는 무시한 반면 카라지치는 따랐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