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레브레니차 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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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스릅스카 공화국 찬차리(Čančari) 계곡에서 벌어진 학살의 피해자 유골들. 2015년 5월 21일 구 유고 연방에 대한 유엔국제재판정 주도로 발굴하던 도중 촬영.
1. 개요
2. 배경
3. 이후
4. 기타 - 보스니아 내전 전반의 참혹성에 대하여
5. 관련 증언


1. 개요


'''【언어별 명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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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니아어
Genocid u Srebrenici
세르비아어
Масакр у Сребреници
크로아티아어
Genocid u Srebrenici
알바니아어
Gjenocidi i Srebrenicës
영어
Srebrenica massacre
Srebrenica genocide

보스니아 전쟁(1992–1995) 말기인 1995년 7월 경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접경도시 스레브레니차(Srebrenica / Сребреница)에서 스릅스카 공화국 소속 라트코 믈라디치가 지휘하는 민병대의 주도하에 계획적으로 자행된 민간인 집단학살 사건. 공식적으로 '''8,372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사건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유럽에서 발생한 가장 큰 규모의 대량 학살사건으로 유럽 사회에 큰 충격을 안겼다.

2. 배경


스레브레니차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동부의 스릅스카 공화국에 속하는 산악 마을로 오늘날 중심가 인구 2,604명, 광역권까지 따져도 13,409명(이상 2013년 인구조사에 따름)에 지나지 않는 작은 도시이다. 보스니아 전쟁 종료 이전까지 이 지역의 주된 민족은 무슬림계 보슈냐크인이었다.
독립 선언 이전부터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사회주의 공화국 내각과 의회는 3개 민족의 당파싸움으로 몸살을 앓았다.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붕괴가 임박하면서 보슈냐크계 대통령 알리야 이제트베고비치와 세르비아계의 지도자 라도반 카라지치의 정쟁이 치열해짐에 따라 분위기가 차츰 살벌해졌고, 서로 친했던 무슬림과 세르비아계 이웃들은 이미 한 식당에서 밥을 먹지 않았으며 인사를 하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 특히 보스니아와 크로아티아에서 살던 세르비아계들은 과거 크로아티아계 우스타샤 정권과 보슈냐크계 의용군인 한트샤르에 의해 학살당한 경험이 있어 피해의식이 강했다. 이런 경험이 위기의식을 촉발하여 "너희 무슬림과 크로아티아인들이 우릴 다 죽이거나 세르비아로 쫓아내고 너희들만의 나라를 세우려고 하고 있지?"란 증오성 발언들이 공공연히 나오게 되었다고 한다.
1992년 보스니아가 유고 연방에서의 독립을 선언하면서 보스니아 내의 세르비아계 정당과 민병대는 보스니아 내에 세르비아계 자치구, 자치공화국, 또는 세르비아로 편입될 영토(개전 초에는 개별 단체마다 입장이 상이했다)를 확보하기 위해 활동을 시작했다. 세르비아계 반군은 스릅스카 공화국을 결성해 통합하였고 세르비아계가 많이 사는 남부-중동부-북부를 이어서 드리나 강을 경계로 세르비아와 이웃하며 온전하게 이어지는 영토를 확보하는 데에 집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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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인구 분포
스릅스카 공화국의 희망사항과는 별개로 개전 당시 동부 지역은 보슈냐크인만으로도 과반을 넘는 지역이 많았고, 정치공학적으로 크로아티아계가 보슈냐크인과 연합했음을 고려하면 거의 대부분의 지역에서 세르비아계 주민은 소수파였다. 하지만 보스니아 동부는 세르비아와 직접 맞닿아 있어 개전 직후부터 수도 사라예보를 포위할 만큼 세르비아계의 힘이 강성했고, 보슈냐크인과 크로아티아계가 다수를 차지하는 동부의 도시들은 내전 내내 여러 차례의 포위전을 당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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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인구 분포
내전의 후반인 1994년에 이르면 여러 차례의 학살, 추방, 포위전으로 보슈냐크인과 크로아티아계가 동부를 떠나고, 스릅스카 공화국의 세력권 전역이 세르비아계 우위로 뒤집힌다. 하지만 스레브레니차는 지속적으로 보스니아 정부군의 통제력이 닿아 스릅스카 반군이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는 지역이었다. 또한 드리나 강 유역의 무슬림들이 이 도시로 피난하면서 동부 전역이 스릅스카 반군의 통제권에 드는 와중에도 스레브레니차는 보스니아계 인구 우위를 이어갔다.
인구 우위에도 불구하고 보스니아 정부군은 동부지역에서 패퇴를 반복했다. 이유는 세르비아가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을 등에 업고 러시아산 무기를 대규모로 수입하여 중화기로 무장한 반면, 보슈냐크인들은 무슬림이다 보니 기독교계 서구의 지원을 받지 못해 무장이 빈약했기 때문이다. 가톨릭계인 크로아티아계는 크로아티아 본국의 지원을 받아서 세력을 불리기도 했는데. 크로아티아계는 세르비아와 직접 싸우기보다 '''보슈냐크인들을 세르비아랑 짜고 학살하는 데에 열을 올려서'''[1] 전쟁이 터지자 도움이 안 됐다. 보슈냐크인들은 크로아티아랑 연합했다가 크로아티아한테 제대로 뒤통수를 맞은 셈이다. 이 사실이 밝혀지자 미국NATO, 당시 막 출범한 유럽연합은 기겁을 했고 브뤼셀로 투지만 대통령을 소환해 크로아티아가 점령한 헤르체고비나 지역을 반환하고 보스니아 공세를 멈출 것을 종용하며 그러지 않으면 크라이나-세르비아 공화국을 인정하고 크로아티아에 대한 지원을 끊겠다고 협박해 투지만이 헤르체고비나 지역을 보스니아에 반환하게 했다. 당연히 눈이 뒤집힌 보슈냐크인들에 의해 크로아티아인들이 보복학살당하기도 했다.[2]
1993년 초 보스니아 정부군 28산악사단과 스레브레니차 마을은 스릅스카 반군에게 완전히 포위되고, 이 산악 도시로 들어가는 모든 보급이 차단된다. 생산력도 없는 두메산골에 피난한 5만 명에 달하는 보슈냐크인들은 기아에 빠졌고, 여기에 주둔한 보스니아 정부군 28산악사단 및 캐나다 평화유지군 1개 대대 역시 같은 위기에 처해 있었다. 1993년 4월 16일 유엔 안보리는 결의안 819호를 만장일치로 통과시켜 스레브레니차로 들어가는 물자 수송을 방해하고 도시를 봉쇄하여 인도주의적 비상사태를 일으킨 세르비아 민병대를 규탄하고 아래와 같은 사항들을 결의하였다. #

1. 모든 이해 당사자가 스레브레니차와 이를 둘러싼 지역권을 안전구역으로 지정하여 적대행위를 멈출 것.

1. 세르비아 민병대는 즉시 스레브레니차 포위를 풀고 철군할 것.

1. 유고 연방(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은 보스니아 내 세르비아 민병대에 대한 모든 군사 지원을 즉시 중단할 것.

1. 유엔 사무총장에게 스레브레니차 안전구역의 인도주의적 상황을 감시할 평화유지군의 증파를 요구하며, 모든 이해 당사자는 평화유지군에게 적극 협조할 것. (이하 생략)

이 결의안의 발효와 함께 스레브레니차를 중심으로 44,000명에 달하는 주민들이 거주하는 56 평방마일(145 제곱킬로미터. 성남시의 면적이 141.7제곱킬로미터이다.)의 구역이 안전구역으로 지정되었고, 스레브레니차는 무장을 해제하며, 그 대신 인접 무슬림 도시로 통하는 도로의 이용이 보장되었다. 하지만 이는 공염불에 그쳤다. 포위된 스레브레니차에 주둔 중이던 평화유지군은 캐나다군 소속 150명이 전부로, 성남시 전체 면적에 달하는 구역에서의 평화를 담보하기에는 택도 없었다. 안전구역을 담보할 평화유지군의 규모가 이 모양이니 보슈냐크인들은 무장을 섣불리 해제할 수 없었고, 스릅스카 반군들도 여전히 보슈냐크인들과 국지전을 이어가고 있었다. 스릅스카 공화국 대통령 라도반 카라지치는 이 지역에서의 우위를 무기로 평화유지군의 증파에 반대하고 사람 한 명, 총알 한 발이라도 늘릴 수 없다는 기조를 명확히 하여 안보리 결의안을 정면으로 무시하였다.#
이 결의안이 통과되고 5개월이 흐른 1993년 9월, 본래 보스니아 중부 발령을 희망했던 600명 규모의 네덜란드 평화유지군은 스레브레니차에 배치되어 있던 캐나다 평화유지군 대대와 교대하여 18개월간 주둔하기로 한다. 하지만 스릅스카 측이 스레브레니차로 통하는 모든 길목을 틀어쥐고 평화유지군의 실질적 증파가 이루어지지 않도록 감시한 탓에 증파는 완전히 무산되고, 155명의 1진만이 1994년 3월 1일 캐나다군과의 일대일 교대에 성공했으며, 나머지 병력은 스레브레니차 외부를 겉돌다 철군해 스레브레니차 내부에 155명, 외부에 200명 가량의 병력만이 현지에 남게 되었다. 네덜란드군은 4개 주둔지로 나뉘어 중부 2개 도시(투즐라, 루카바츠)와 스레브레니차 일대(스레브레니차, 포토차리)에 각각 주둔하고 주둔지를 순환교대하는 방식으로 보스니아를 지켰다.#
네덜란드 평화유지군이 주둔한지 1년 4개월이 흐른 1995년 7월 6일, 종전 압박이 커져가면서 스릅스카 공화국은 역내 보스니아 월경지를 빠르게 '정리'해야 한다는 유혹에 빠진다. 라트코 믈라디치가 지휘하는 세르비아 민병대는 '안전지대 내부로의 불법적인 군사물자수송 및 비무장 협정 위반' 등을 들며 압도적인 머릿수와 세르비아로부터 지원받은 기갑 전력을 내세워 스레브레니차 안전구역에 진입한다. 보급 부족으로 전투력을 상실한 보스니아 정규군 28산악보병사단과 머릿수상 전투력을 기대하기 어려웠던 네덜란드 평화유지군은 순식간에 제압당했으며, 이들이 긴급요청한 근접공중지원(CAS)는 스릅스카 측의 포로 살해 협박으로 제대로 시행되지 못했다.

스레브레니차에 입성하여 마을 전체에 불을 지르는 스릅스카 공화국군과 믈라디치. 이내 피난민 수용소에 도달하여 수용소를 시찰하곤 피난민들을 보호하고 있는 네덜란드군과 협상을 하는 모습이 담겼다.
네덜란드군은 규모상 스릅스카 반군과 맞붙을 수도 없었을뿐더러 영내로 피난한 현지인들을 보호하는 데에도 실패했다. 스릅스카 측의 살기어린 '협상'을 받아들인 네덜란드군은 기지 내로 피난한 현지인들을 스릅스카 반군에게 넘기는 굴욕적인 행동을 하였다. 2017년 네덜란드 대법원은 네덜란드군이 당시 기지에서 방출한 350명의 무슬림이 입은 피해에 대해 네덜란드 정부가 10%의 배상책임을 진다는 판결을 내렸다.#
스릅스카 민병대의 공격으로 5만명에 달하는 스레브레니차 거주민들의 대규모 피난이 시작되었다. 하루아침에 20,000~25,000명의 주민들이 스레브레니차를 떠나 북쪽의 이웃도시인 포토차리로 몰려갔으며, 28산악보병사단 잔여병력을 포함한 1만명의 피난민 행렬이 별도로 형성되어 서쪽으로 탈출했다. 동쪽과 남쪽은 세르비아계가 확고하게 장악하고 있었지만 이쪽으로도 천 수백 명이 탈출을 시도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정확한 규모는 미상. 하지만 제때 피난하지 못한 1만 명 규모의 후발대는 꼼짝없이 스릅스카 민병대의 포위망에 갇히고 말았으며, 그 순간부터 오늘날까지도 온전히 밝혀지지 않은 대규모 학살이 자행되었다. 믈라디치는 여성과 약자들에게 관용을 베풀 것임을 선전하였으나 그 역시 말뿐이었다.
곳곳에서 온갖 형태의 처형이 집행되었고, 곧 죽을 사람들과 이미 죽은 사람들이 트럭과 버스로 바쁘게 실어날라졌으며, 도시 곳곳에 불도저로 닦아낸 암매장지가 만들어졌다. 나이를 불문하고 수많은 남성들이 처형되었고, 아이와 노인이 포함되었으며, 여성들도 예외가 되지 못했다. 나이를 불문하고 많은 여성들이 인종 정화를 명분으로 세르비아 민병대에 의해 계획적으로 강간 피해를 입고 살해당했다. 생존자들은 여전히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 이 학살 피해자로 집계된 공식 실종자 및 사망자는 총 8,372명이 확인되어 있으며 발굴이 진행됨에 따라 계속 추가될 예정이다.
이 학살 사건으로 스릅스카 측과 세르비아는 다 이기다시피 한 전쟁을 결정적으로 말아먹었고, 유엔 역시 크게 체면을 구기게 되었다. 당초 유엔은 세르비아 민병대에게 포위된, 또는 그럴 위협이 있는 보스니아 전국의 6개 도시(사라예보, 투즐라, 비하치, 스레브레니차, 고라즈데, 제파)를 안전구역으로 선언했으나 이 중 동부의 스레브레니차와 제파는 포위전으로 함락되었고, 서북부의 비하치는 함락만 모면하고 철저하게 박살났으며, 사라예보는 3년간 포위당했고, 고라즈데와 투즐라 역시 총합 1년 이상의 포위전을 겪었다.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유엔의 평화유지군 파병 요청을 거부하고 '우리 국민들을 사격장에 몰아넣고 싶지 않다'라 쏘아붙이며 유엔이 지정한 안전구역들의 실태를 비꼬았다.#

3. 이후


전세계 지도자의 이목이 집중된 내전의 한복판에서 너무나 터무니없는 규모의 학살이 벌어졌고 그 증거가 명확하기에 '그 날 이 곳에서 수천 명의 무슬림이 세르비아인에게 죽었다'라는 사건 여부 자체는 세르비아와 스릅스카도 부정하지 못하는 엄연한 사실이 되었다. 이는 스릅스카 반군의 스레브레니차 점령 직후 뜬 정찰기가 대규모 암매장지를 확인하고 복귀한 데서 이미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데이턴 협정으로 이 전쟁이 후다닥 덮여버린 탓에 오늘날까지도 내전 주체들끼리의 앙금은 고스란히 남아있고, 세르비아계 측에서는 이 사건의 앞뒤에 여러 말을 덧붙이려 노력하고 있다. 그 내용들은 아래와 같다.

* 보스니아 대통령이 계획적으로 보슈냐크인 학살을 유도해 국제여론을 호도하려 했다.

* 도시 인구 대부분이 피난을 시도했고 피난에 성공한 사람 중 여성과 아이들이 있었다. 학살을 원했다면 보내줬을 리가 없다.

* 독실하고 선한 기독교인인 우리 세르비아인들도 그곳에서 일어난 범죄에 대해 별로 기쁘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의 책임은 아니다.

* 발굴된 유골 중 세르비아인이 많은데 사망자 목록에는 별로 없다. 그러니까, 사망자 명단에 있는 무슬림들 중에 분명 살아있는 사람들이 있다.[3]

* 발굴된 유골 중 군인들도 있고 교전하다 죽은 보슈냐크인도 많은데, 이를 감안해 몇 천 명 정도는 명단에서 빼야 한다.

자국 내에서는 잘 써먹는 변명거리일지 모르나, 외부인들의 입장에서는 진지하게 고민할 필요가 없는 주장들이다.

4. 기타 - 보스니아 내전 전반의 참혹성에 대하여



'저격수 거리'의 모습. 저격수의 총탄이 쏟아지는 가운데, 시민들은 맞지 않기 위해 이리저리 달아나고 있다.

사라예보의 또다른 지역. 역시 세르비아인 저격수들이 총탄을 시민들에게 퍼붓고 있다. 그 중 한 흰색 차량은 이 영상을 촬영한 외신 카메라맨과 '''UN 평화유지군 장갑차의 코앞에서''' 저격을 당해 뒷 창문이 깨진다.[4] 영상 최후반부에는 평화유지군 소속 프랑스군이 장갑차를 동원해 시민들을 저격으로부터 보호하며 호송하고 있는 장면이 담겼다.

사라예보의 또다른 지역. 역시 총탄이 빗발치고 있으며, 시민들은 사격을 피해 급히 뛰어다니고 있다. 그 중 운 나쁜 민간인 남성 한 명이 '''가슴팍에 총상을 입고 쓰러져''' 주변 시민들에 의해 병원으로 실려가는 모습이 보인다. 그 옆의 또다른 한 명은 허벅지에 저격을 당해 총총걸음으로 뛰어다니고 있다. 영상 후반부에는 유엔군 장갑차가 저격수의 사격 방향을 가로막고 시민들을 보호하고 있다.
라트코 믈라디치 장군이 이끄는 세르비아계 무장세력은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정권의 유고 연방군이 건네준 중포화기로 사라예보를 무자비하게 폭격하여 1993년 7월 23일에는 16시간에 걸쳐 3777발의 포탄이 사라예보 시내에 떨어졌다 [5] 이로 인해 시장에 장을 보러 나온 시민들이 떼죽음을 당하기도 했다. 한편 세르비아 저격수들은 평화롭게 시가지를 걸어가는 시민들을 향해 마치 사냥이라도 하는 듯 총을 쏘아댔고 이로 인해 약 1만명의 시민이 목숨을 잃었다.[6]
심지어는 강간 공장을 만들어서 학교, 교회 등에 가임기 여성으로 판단되는 무슬림 여성(10~60세 사이)을 한 곳에 몰아두고 집단 강간을 해서 혼혈 아기를 임신시켰고 강간으로 임신한 여성들이 낙태하지 못할 때까지 수용소에 감금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보스니아계의 무슬림 남성을 학살로 제거하고, 여성들에게 세르비아계의 아이를 갖게 함과 순수한 핏줄을 더럽히는 동시에 무슬림 여성을 성노예로 만들어 종교적 신앙까지 파괴하는 최악의 전쟁범죄를 조직적으로, 그리고 계획적으로 실시했다. 한국어 위키백과
보스니아에서 자행된 학살에서 한 가지 끔찍한 점은, 전혀 낯모르는 민병대들이 몰려와서 학살을 자행한 것이 아니라 '''어제까지만 해도 친구였고 이웃이었던 사람들이''' 돌변하여 군복을 입고 나타난 다음에 같이 밥을 먹고 술을 마시며 같이 일하고 공부를 하며 파티를 즐기던 사람들에게 총칼질을 해대며 죽이고 약탈하고 강간해서 임신시켜 댔다는 것이다. 보스니아계 뿐만 아니라 세르비아계 주민이라도 이웃을 죽이기를 거부한다면 자비없이 학살당해서 함께 구덩이에 묻히고 말았다.
학살의 생존자들은 자신들에게 총을 쏘고 칼을 휘두르던 학살자들의 직업, 이름, 취미까지 죄다 읊을 수 있을 정도로 잘 알고 있었다. 일부 세르비아 민병대는 최대한 자신들의 무슬림계와 크로아티아계 지인을 보호하려고 애를 썼고 어떤 세르비아계들은 보스니아 공화국에 여전히 충성을 바쳤지만 극소수에 불과했다. 가령 세르비아계에 의한 보스니아 포위전 당시 50대 후반의 노구를 이끌고 보스니아 공화국에 충성을 바친 요반 디뱌크(Jovan Divjak, 1937년 3월 11일 ~) 동안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연방군 부사령관) 장군도 있다.[7] 그래서 당연하지만 애석하게도 '''이들이 민족의 반역자란 이유로 가장 먼저 학살당했다.'''

아르칸의 민병대에게 생포된 보스니아 병사들. 관련 글.
또한 보스니아 전쟁의 참상을 말할 때 보슈냐크인들 사이에 인간 도살자로 불리던 젤리코 라즈나토비치 "아르칸"이란 인물을 빼놓을 수 없다. 유엔의 추산으로는 보스니아 내전에 약 2만명의 세르비아 민병대가 참전했는데, 아르칸은 그 지도급 인물로 꼽혔다. 세르비아 마피아 출신인 아르칸은 베오그라드 축구구단의 구단주로 여러 이권사업에 개입하면서 슬로보단 밀로셰비치의 수족 노릇을 한 베오그라드 비밀경찰과 가까이 지내면서 친분을 쌓았다. 유고슬라비아 내전이 발발하자, 실업자와 거리의 깡패들을 모아 군사훈련을 시킨 뒤 이른바 "아르칸의 호랑이" 민병대를 조직하는 한편, 독자적인 언론매체를 이용하여 신병을 모집하기도 했다. 세르비아 경찰과 유고연방군(세르비아군)이 이 단체에게 탱크와 대포를 지원하여 이를 바탕으로 비세르비아계에 대한 조직적인 학살과 강간, 약탈행위를 자행했다. 더 자세한 내용은 FK 츠르베나 즈베즈다 항목도 참조하면 좋다.
애초에 스릅스카 공화국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 영토의 50% 가까이를 차지했으며, 사라예보 역시 바로 국경에 접하고 있었기 때문에 세르비아계의 우세 아래 이들의 전쟁 범죄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세르비아군의 90%가 전쟁범죄에 가담했다는 CIA의 추정이 있다. 인종 청소는 보통 이들이 점령한 동보스니아 지역에서 일어났으며, 대부분 피해자는 스릅스카 공화국 내 인구 비율이 높았던 보슈냐크인이었다. 유엔군과 NATO군이 파견된 95년까지 이 지역은 사실상 방치된 상황이었다. 드리나 강 서쪽의 피해도 막심해서 수도 사라예보에서만 시민 1만 2천명이 세르비아인들의 공격으로 살해되었다. 당시 스릅스카 공화국군은 보스니아 시민이 세르비아계든, 보슈냐크인이든, 크로아티아계든 가리지 않고 무조건 학살했다. 참고로 저 수치는 '''민간인'''만 집계한 것이 저 정도다. 보스니아군 사망자는 6천여 명. 오늘날까지 사라예보는 포위전의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오늘날 인구는 전쟁 전 인구의 60% 수준에 불과하다고 한다. 사라예보의 경우는 밀수꾼까지 자발적으로 봉사하여 시내에 보급품을 전달했을 정도로 보스니아 정부의 방위의지가 필사적이었다. 결국 끝까지 지켜낸다.

스레브레니차 학살 피해자들이 한데 묻힌 구덩이를 발굴하는 모습. 수많은 인골이 뒤엉켜 묻혀 있다.
보슈냐크인들의 고초가 어찌나 심했는지를 다룬 서적으론 조 사코의 만화 안전지대 고라즈데가 있다. 거기서 인터뷰한 인물들의 발언이 의미심장하다. 상당수는 인터뷰를 아예 거절했고 간신히 섭외한 어느 여인은 조 사코가 인터뷰를 시도하자 머뭇거리더니 "다 말해줄 수는 없수. '''눈이 뽑힌 사람들을 봤지.'''" 라고 말하고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비셰그라드 학살을 목격한 노인은 세르비아 민병대가 여자와 아이들도 죽였냐고 묻는 조 사코의 질문에 코웃음치며 '''"그렇게 당연한 것을 왜 묻소?"''' 반문했다.
세르비아계는 실질적으로 서방측의 푸쉬를 받았다. 군사적으로 완벽하게 무장된 세르비아에 대한 제재가 거의 없었다. 반면 보슈냐크인들은 서방측에게 묶인 뒤 일방적인 공격을 받고 있는 상황이었고 늦게나마 보슈냐크인들에 대하여 사우디아라비아 등의 이슬람 국가들이 지원을 해주려 했으나 이미 시기를 놓친 상황이었다.[8]

5. 관련 증언


나는 세르비아인을 부모로 보스니아의 포발리치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졸업이 전부다. 그 후 사라예보로 무작정 상경해 노점상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그러던 중 아는 사람의 부탁으로 1992년 5월부터 사라예보 근교에 주둔하고 있는 세르비아 민병대에 식량을 공급하는 일을 시작했다. 그 일을 시작한 데에는 세르비아 방송의 영향이 컸다. 세르비아 방송은 이슬람교도들이 보스니아를 회교 공화국으로 독립시켜 세르비아인을 말살하려 한다는 것을 되풀이해서 강조하곤 했다. 나는 정말로 큰 충격을 받았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우리 모두는 이슬람교로 개종해야 될 것이고 결국 그들의 노예가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 곳곳에 모인 세르비아인은 우리가 살기 위해서 저들을 몰아내야 한다고 강조하기 시작했다. 그들을 ‘인종 청소’하지 않으면 우리 세르비아인은 결국 처참한 말로를 맞게 될 것이라는 얘기들이었다. 세르비아 민병대에 식량을 공급하면서 만난 민병대원들은 이같은 얘기들을 더욱 강조했고, 특히 이슬람교도로부터는 어떤 값진 것이든 탈취해도 좋고 이슬람 여자들을 강간해도 좋다는 얘기를 들었다. 이로 인해 태어나는 아이들도 세르비아인이 되어, 결국은 세르비아인의 수를 늘려 나가는 것이 궁극적으로는 인종 청소의 방법이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곧바로 민병대에 자원입대했다.

6월에 민병대에 들어간 뒤 다른 두 명의 동료와 함께 이슬람교도 지역인 보스니아 서북부의 아하도비치 마을에 들어간 적이 있었다. 한 집의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두 명의 노파가 있었는데 한 노파가 가진 게 없다고 강변했다. 나는 화가 나서 그 노파를 총의 개머리판으로 쳐버린 뒤 옷장을 열어 보니 여러 종류의 귀금속이 들어 있었다. 우리는 그들을 모두 죽이기로 했다.

당시 집 안에는 모두 열 명의 이슬람 교도가 있었다. 나는 단 2초만에 14㎝의 칼로 한 사나이의 목을 베었다. 이미 나는 한 늙은 세르비아 민병대 병사로부터 목을 자르는 방법을 배웠었다. 어느 날 그는 나와 다른 세 명의 동료를 돼지 우리로 데리고 가더니 돼지 목을 어떻게 베어 죽이는지 가르쳐 주었다. 그는 자기가 사로잡은 보스니아 이슬람교도를 모두 그런 식으로 죽였다고 자랑스럽게 얘기했다.

우리는 나머지 아홉 명을 모두 집 밖으로 끌어냈다. 나는 그들에게 벽에 기대라고 명령했다. 그 가운데에 열 살쯤 되어 보이는 어린 여자애가 무서웠던지 울음을 터뜨리는 순간 우리는 기관단총을 발사했다. 민병대 지휘관들은 이슬람교도 한 사람을 죽이는 댓가로 6달러 50센트를 지불했다. 인종 청소가 끝나자마자 마을을 불질러 버렸다.

6월 초순, 나는 들판을 지나가다가 또다른 민병대원들이 1백여 명 가량의 이슬람교도들을 학살하는 것을 목격했다. 그들은 시체를 트럭에 실어 한적한 곳으로 옮긴 뒤 휘발유를 부어 불태워 버렸다. 7월에는 또다른 회교 마을에서 세르비아 민병대가 30명의 이슬람교도를 죽인 뒤 근처에 있는 용광로에 넣는 것을 보았다. 그때 몇 명은 신음 소리를 내며 살려 달라고 애원하고 있었다.

7월 초 나는 사라예보 근교에 있는 한 건물에 들어갔다. 이곳은 이슬람 여성들을 수용하는 곳이었는데 미로 부코비치라는 민병대원이 관리하고 있었다. 부코비치는 이슬람 여성을 강간한 뒤에는 반드시 죽이라고 명령했다. 나는 일주일에 서너 번 그 수용소로 갔다. 그곳에서는 매일 수많은 여자들이 강간당하고 죽어 갔다.

6월 초순 나는 들판을 지나가다가 세르비아 ‘특별수사대’란 단체가 1백20명 가량의 회교인을 학살하는 것을 목격했다. 그들은 덤프트럭을 이용해 사라예보 근처의 한 철도 야적장으로 시체를 운반했다. 병사들은 야적장에 구덩이를 파 시체를 묻은 후 휘발유를 붓고 불을 질렀다.

7월 어느날 보스니아 북부 보고스카시에서 서북쪽으로 3마일(약 5km) 떨어진 회교마을에서 나는 세르비아 병사들이 30명의 회교인을 학살해 그 시체를 근처의 제철소 용광로에 집어넣는 것을 보았다. 용광로에 던져질 때 몇사람은 아직 살아 있었다.

7월 초 나는 사라예보에서 자그레브로 가는 길목의 음식점을 겸한 여관에 들어갔다. 그 여관은 회교 여성만을 수용하는 교도소로 바뀌어져 있었는데 미로 부코비치라는 세르비아인 병사가 책임자였다. 부코비치는 회교 여성을 강간한 후에는 반드시 죽이도록 하는 일종의 규칙을 만들어놓았다. 그는 회교 여성을 강간하는 것이 병사의 사기를 올리는 데 아주 좋다고 말했다.

나는 수많은 여자를 강간한 후 죽였다. 에미나, 사비나, 아멜라, 파티마…아직도 생생히 떠오르는 이름이다. 개중에는 10대도 있었고 많게는 35살 먹은 여자도 있었다. 부코비치는 내게 “여자들에 대한 처리는 알아서 해라. 일단 여관에서 끌고 나간 후엔 다시 데리고 오지 말라”고 말했다. 나는 30세 가량의 파티마라는 여인을 강간한 후 총으로 위협해 차에 태워 근처 야산으로 끌고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산으로 가는 도중에 총살해버렸다.

나는 일주일에 서너번 꼴로 모텔에 갔다. 회교여성은 거의 매일 강간당하고 죽어갔지만 늘 넘칠 정도로 수가 많았다. 따라서 맘에 내키면 언제든 열쇠를 가지고 방안에 들어가 아무 여자나 닥치는 대로 고르면 그만이었다.

내가 지난 6개월 동안 저지른 짓은 분명히 잘못한 일이다. 요즘도 밤이면 내가 죽인 사람들의 모습이 떠올라 식은땀이 흐른다. 잊으려고 애를 써보아도 자꾸만 떠오르는 오스만과 할머니 뒤로 숨던 빨간 옷을 입은 꼬마소녀의 모습은 지워지지 않는다.

A special report.; A Serbian Fighter's Path of Brutality]]

"한 군인이 군중 가운데 있던 한 여자에게 다가가더군요." 그가 말했다. "그 여자의 아이가 울고 있던 거에요. 군인이 이 아이가 왜 우냐고 묻자 여자는 배가 고파서라고 그랬어요. 군인이 이렇게 말했어요. ''''더 이상 배고플 일이 없겠지.\'''' 그는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아이의 목을 칼로 그어버렸어요.'''"

("One soldier approached a woman in the middle of a crowd," he said. "Her child was crying. The soldier asked why the child was crying and she explained that he was hungry. The soldier made a comment like, 'He won't be hungry anymore.' He slit the child's throat in front of everybody.") 출처

[1] 보스니아 전쟁은 보스니아-세르비아 전쟁과 보스니아-크로아티아 전쟁으로 구성돼 있다. 보스니아-크로아티아 전쟁에서는 크로아티아군의 대대적인 무슬림 학살이 동반돼 헤르체고비나 지역과 사라예보 부근에서 크로아티아에 의한 무슬림 제노사이드가 발생했다. 크로아티아군에 의한 보슈냐크인 사망자는 약 15,000명. 나중에 크로아티아군 사령관들도 학살 혐의로 유고 전범재판소에 대거 넘어가 유죄 판결을 받았다.[2] 크로아티아는 1995년 초에 와서야 보스니아한테 사과하고 무슬림 학살을 중단했다.[3] 당연하지만 보스니아 측에서는 "당연히 발골된 유골 중에 세르비아인들이 많다. '''왜냐면 그 세르비아인들 대부분을 너희들이 학살했으니.'''"라고 반박한다.[4] 28초 부근[5] ‘뉴욕타임스’ 1993년 7월 24일자[6] 물론 잡힐 경우에는 알다시피.... 특히 이 경우는 전쟁범죄까지 섞여 있어 더더욱 사람취급이 힘들었다.[7] 다만 이 사람은 세르비아계 보스니아인이 아닌 세르비아 본토 베오그라드 출신이었다.[8] 단 서방과 사이가 안 좋은 이란은 이미 자국의 친위대인 이슬람 혁명 수비대를 파견해 보스니아를 지원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밀입국해 들어와 '성전'을 치루는 무슬림, 무자헤딘은 꽤 있었다.(2000~5000명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자세한 것은 위키피디아의 보스니아 무자헤딘 문서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