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쓰에이 전쟁

 


'''사쓰에이 전쟁
(さつ(えい(せん(そう'''

[image]
'''시기'''
분큐 3년 음력 1863년 7월 2일~4일(1863년 8월 15일~17일)
'''장소'''
일본 사쓰마가고시마
'''원인'''
나마무기 사건으로 인한 사쓰마와 영국의 대립
'''교전 세력'''
[image] 대영제국
[image] 사쓰마 번
'''지휘관'''
[image] 레오폴드 쿠퍼
[image] 시마즈 히사미츠
'''전력'''
증기선 7척
증기선 3척
해안 포대
'''손해'''
3척 손실
함장, 부함장 포함 13명 사망
50명 부상
3척 소실
비전투원 5~8명 사망
18명 부상
막대한 재산피해
'''결과'''
사쓰마 번의 영국에 대한 배상금 지불, 양측의 화평
1. 개요
2. 상세
2.1. 전투
3. 결과
4.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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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862년 9월 14일 현재 요코하마시 쓰루미구 나마무기 마을에서 발생한 일명 '나마무기 사건'으로 촉발된 전쟁. 영국 등 서양에서는 가고시마 포격전(Bombardment of Kagoshima)이라고 칭한다.

2. 상세


막말기에 유력 웅번의 일원인 사쓰마 번주의 아버지 시마즈 히사미츠의 행렬에 영국 상인들이 말에서 내려 예를 갖추지 않고 말을 탄 채로 행렬에 끼어들자 호위하던 사무라이들이 무례하다며 1명을 베어 죽이고 2명에게 중상을 입힌 나마무기 사건(生麦事件)이 일어났다. 영국에도 막부사쓰마 번 모두에게 이 사건에 대한 책임자 처벌 및 사죄와 배상을 요구했고 막부는 보상금으로 10만 파운드를 지불했다. 여기에 만족했으면 됐는데 영국은 유가족에 대한 위로금으로 사츠마 번에게 2만 5천 파운드의 합의금을 받아내고자 했다.
사쓰마 번 입장에서는 다이묘 행렬에 무례를 범한 죄는 일본 국내법상에서는 당연히 죽어 마땅한 죄에 해당하므로 정당한 행위라 생각했고, 보상금과 책임자 체포 및 처벌에 대해서 거부했다. 게다가 범인의 처벌에 대해 젊은 시절의 후쿠자와 유키치가 잘못 번역해서 (영국 측이) 히사미츠의 목을 내놓으라는 영국이 요구하지도 않은 조항으로 오역돼 사쓰마 번에 전달되었고, 사쓰마 번의 양이파 세력은 격노했다.[1]
이에 영국 공사관은 단독으로 무력행사를 결정, 쿠퍼 제독이 지휘하는 7척의 함대를 파견한다. 그러나 실제로 전쟁을 할 생각은 없었고, 함대로 위협해서 배상금을 뜯어내려는 목적이었다.

2.1. 전투


이듬해 7월 2일, 사쓰마 번의 본거지인 가고시마만에 도착한 영국 함대는 처음에 교섭을 시도했으나 별 진전이 없자 정박한 사쓰마군의 증기선 3척을 나포했다.
사쓰마 측은 이를 선전포고로 간주하고 10군데의 해안 포대에서 85문의 대포로 선제공격을 가했다. 때마침 들이닥친 강풍 때문에 쿠퍼 제독은 나포한 선박을 끼고 대형을 유지하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 나포선은 귀중품을 탈취하고 불태워버렸고, 영국 함대는 100문의 함포로 반격을 시작했다.
영국 함대는 2일간 사츠마 번의 10곳의 해안 포대를 초토화 시켰고, 시가지와 가고시마 성에도 포격을 가하여 대규모 화재를 일으켰고 사쓰마의 항구와 근대식 무기공장에도 피해를 입혔으나 거친 날씨와 예상 밖으로 강력한 사쓰마군의 화력에 결국 전투를 포기하고(탄약과 증기선의 연료인 석탄이 떨어져서) 요코하마로 퇴각했다.

3. 결과


영국 해군은 1척 대파, 2척 중파의 피해와 쿠퍼 제독이 승선하고 있었던 기함 HMS Euryalus의 함장과 부함장을 포함해 13명의 사망자와 50명의 부상자를 냈다. 영국 함대 측은 설마 전쟁으로 번질 줄을 예상하지 못해서 대포에는 포탄을 장전하고 있지 않았고, 탄약고 문 앞에는 에도 막부로부터 받은 배상금을 쌓아두었기에 반격에 2시간 이상이 걸렸다.
사쓰마 번은 포대 10개가 전부 초토화 되어 말 그대로 해안 포대 전체가 괴멸 해버렸으나 흙더미와 석벽으로 엄폐받는 해안포대의 특성상 인명피해 자체는 비전투원 5~8명 및 부상자 18명 정도로 상대적으로 경미할 수 있었다.[2] 또한 영국 함대의 무차별 포격으로 인해 관공서와 양학연구소,서양식 무기공장 등이 몽땅 불타며 도시는 불바다가 되었고, 막대한 금전적 손실을 입었다. 게다가 당시 사쓰마 해군력의 핵심이던 서양에게 구매한 증기선 3척도 소실되어 버렸다.
당시 서양 열강들은 세계최강이라는 영국해군이 겨우 일본의 일개 지방정부를 상대로 전투를 포기하고 퇴각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으며, 미국뉴욕타임스는 1863년 10월 4일호에서 일본이 의외로 서구의 무기와 전술에 익숙하니 그 전력을 만만하게 봐선 안 된다라는 평을 남겼다.
영국에서는 민간인 거주지역까지 무차별 포격을 한 것에 대해 비난의 목소리가 높았다. 빅토리아 여왕까지 나서서 쿠퍼 제독을 질책했다.
전투 이후 사쓰마와 영국은 오히려 서로를 높이 평가했다. 강화조약에서 사츠마 측은 영국으로부터 군함과 무기를 구입한다는 조건으로 배상금을 지불하기로 제안했다. 실은 전쟁후에 영국군의 포탄을 보고 사츠마번은 놀랐다. 자신들이 쓰던 둥근탄환이 아니라 길죽한 탄환으로 사정거리가 4배가 넘는 4킬로가 날아가는 최신식 암스트롱포(신정부군 세력으로 가담하는 사가 번의 주무기이며 보신 전쟁 중에 막부 세력으로서 '신정부군을 압도하는 불패 번'이라고 우겨대던 쇼나이 번을 공포로 위협하였다.)였다. 이에 영국과 싸울게 아니라 손을 잡아야한다는 여론이 조성됐다.
영국도 원래부터 원하던 것이 통상이었고, 교역의 대상을 막부 뿐만 아니라 여러 번을 상대하면 보다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고, 또 경쟁국가였던 친막부 성향의 프랑스를 견제하기 위한 일환으로 사쓰마와 조약을 맺고 친밀한 협조 관계가 된다.
여하튼 사쓰마 번은 막부로부터 2만 5천 파운드의 차관을 빌려 영국에게 배상하여 갈등을 종결 지었다. 이후 본래 양이론자가 아닌 히사미츠는 무모한 양이는 안된다고 번사들에게 명하고 교역을 통한 부국강병의 정책을 추진했다.
1864년에 서양에 대한 지식을 배우는 개성소(開成所)를 개설[3], 다음해인 1865년에는 20명의 번의 국비 장학생을 영국으로 보냈다. 1867년에는 네덜란드에서 증기기관을 들여와 증기선을 만들기 위한 부품을 만드는 서양식 공장인 '집성관(集成館)기계공장'과 방적소(紡績所)를 설립하고, 서양의 기술을 지도하는 영국인 기술자들이 머무는 이인관(異人館)도 건축했다.
여담으로 쓰시마 해전의 영웅 도고 헤이하치로가 당시 사쓰마의 해안포대 병사로 참전했었다고 한다. 야마모토 곤노효에도 참전했다. 그리고 일본 최초의 내무경이 되는 오쿠보 도시미치도 이 전쟁에 참전해서 싸웠다. 행정가 이미지로 전투 경험이 없는 것으로 여겨지지만 하급 무사 계급으로 군인 출신이다. 반면 사이고 다카모리는 오키노에라부 섬에서 유배 생활을 하고 있어서 참전하지 못했다.

4. 같이 보기


  • 시모노세키 전쟁 : 숙명의 라이벌이였던 조슈 번 역시 라이벌답게 서양에 무차별 공격했다가 사쓰마보다 훨씬 세게 깨진 사건.
[1] 다만 이 부분은 진위여부가 불분명하다.[2] 일반 백성들이 함포 사격이 있을 줄 알고, 미리 대부분 사정거리 밖으로 벗어나 산 뒤에 숨어있던 것이 피해를 줄이는데 일조했다.[3] 존 만지로등이 교수로 참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