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마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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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가몬은 '구쓰와'라고 부르며, 일본식 '말의 입에 다는 재갈'이다. 본래는 붓으로 쓴 '十'자였으나 이후 위와 같은 형태로 변화된 것이다.(참고)[1]
'''시마즈(島津)'''는 '''가마쿠라 시대부터 메이지 유신까지, 그리고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일본의 명문가이다.
세이와 겐지(清和源氏)를 칭하였고, 본성은 하타(秦) 씨[2] 의 코레무네(惟宗)였다. 이름에 타다(忠)나 히사(久)를 많이 넣었으며 메이지 시대 이후 현재에도 이어져 장남의 이름에는 타다(忠)를, 차남에겐 히사(久)를 넣는다.
"시마즈에 암군은 없다(島津に暗君なし)"는 말처럼 유능한 인물들이 당주로 역임했기 때문에 가이에키 한 번 없이 소마 나카무라(相馬中村) 번주 소마씨(相馬氏), 히고 히토요시(肥後人吉) 번주 사가라씨(相良氏), 쓰시마 후추(対馬府中) 번주 소씨(宗氏) 가문과 더불어 '''가마쿠라 시대부터 메이지 시대까지 영지를 통치한 일본은 물론 세계에서도 극히 드문 가문이다.''' 이 문서는 사츠마의 시마즈 가문을 주로 서술하였다.
사쓰마 번의 당주로서 류큐 왕국[3] 를 통치한 상위 군주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오키나와현의 류큐인 원주민들에게는 증오의 대상인 가문이기도 하다.
2019년 기준 21,800여명이 사용중인 성씨이다.
일설에는 가마쿠라 막부의 초대 장군 '''미나모토 요리토모'''의 장남으로써 아기 때 바다에 던져져 살해당했다는 이토고젠의 소생 치즈루마루(千鶴丸)가 시마즈 가문의 시조라고 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시마즈 가문이야말로 가와치 겐지 가문의 장손으로, 가와치 겐지의 가장 가까운 분가 출신인 무로마치 막부의 아시카가 장군가나 먼 분가[4] 를 사칭한 미카와 지역의 일개 토호 출신인 에도 막부의 도쿠가와 장군가보다 더 정통성 있는 무사 정권의 장군 가문 자격을 갖췄다고 할 수 있겠으나 전설에 불과하고 실제론 헤이케 편을 들었다가 겐지 계열로 갈아탄 것에 가깝다 할 수 있다.
초대 당주인 '''시마즈 타다히사'''가 사츠마, 오스미, 휴가의 슈고직을 맡아 가마쿠라 막부 내의 유력 고케닌이였으나 히키 요시카즈의 변(比企能員の変)에 연좌되어 오스미, 휴가의 슈고직을 박탈당하였고, 가마쿠라 시대 대대로 사츠마 슈고직을 물려받았다.
타다히사의 적자 '''시마즈 타다토키'''가 조큐의 난(承久の乱) 당시 활약하여 와카사 슈고직과 각지의 지두(地頭)직을 얻었으며, 난 이후 타다히사는 에치젠의 슈고직을 받았다. 또한 난 당시 사용했던 타치(太刀)는「강절」이라 불러지게 되었으며, 겐지의 백기와 타다히사의 오요로이(大鎧)와 같이 시마즈 당주들이 대대로 물려받았다.
1227년, 타다히사의 사망으로 에치젠 슈고직은 타다토키가 상속받았으나 곧 고토 씨(後藤氏)에게로 돌아갔다. 3대 당주 '''시마즈 히사츠네'''의 원구 토벌을 계기로 시마즈 가의 사츠마 입부가 시작되었으며, 4대 당주인 '''시마즈 타다무네''' 대엔 본격화되었다. 타다무네는 사츠마에서 사망한 첫 시마즈 가문 당주가 되었다.
가마쿠라 막부의 힘이 쇠퇴하고, 반막부의 힘이 강성해지자 5대 당주인 '''시마즈 사다히사'''는 고다이고 천황의 막부 토벌 운동에 참여하였고, 규슈의 고케닌들과 함께 산제이 탄다이(鎮西探題)[5] 를 공략, 다시 오스미, 휴가의 슈고직을 받게 된다.
겐무의 신정(建武の新政)이 붕괴하면서 겐무 정권에서 이탈한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셋츠에서의 전쟁에서 패하여 규슈로 달아나온 것을 도와 타타라하마의 전투(多々良浜の戦い)에서 활약하는 등 규슈 세력의 유력 다이묘로 활약하였다. 사다히사는 적자인 무네히사를 일찍 잃었기에 3남 모로히사와 4남 우지히사에게 각각 사츠마, 오스미의 슈고직을 분배하여 시마즈 씨를 분할 상속시켰다.
'''시마즈 모로히사'''는 카즈사노스케(上総介)에 임명되어 있었기에 그의 자손은 '''소슈 시마즈 가(総州家)''', 시마즈 우지히사는 무츠노카미(陸奥守)에 임명되어 있었기에 그의 자손은 '''오슈 시마즈 가(奥州家)'''로 불리게 되었다. 외척 세력을 상대할 때는 놀라운 단결력을 보였지만 그러한 외척 세력이 사라진 후엔 서로를 견제하였다.
타도해야 할 적이 사라진 시마즈 양 가는 서로 대립하였으나 7대 당주인 '''시마즈 코레히사'''와 그의 적자 모리히사와의 관계에 불화가 생겨 소슈 시마즈 가에 내분의 위기가 고조되자 오슈 시마즈 가의 당주 '''시마즈 모토히사'''가 중재하여 주었으며, 이것에 은의를 느낀 코레히사가 사츠마 슈고직 시마즈 가의 중요 가보를 물려주어 겉으로는 시마즈 가문이 통일되었다. 후의 무로마치 막부에도 상속이 인정되었으나 소슈 시마즈 가문이 멸망한 것이 아니였기에 양가의 갈등이 존재하였다.
그리고 모토히사의 대를 이를 아들이 없어 시마즈 가문의 필두 가로였던 이쥬인 요리히사(伊集院 頼久)는 자신의 아들을 시마즈 가의 차기 당주로 세우기 위해 획책했으나 모토히사의 동생, '''시마즈 히사토요'''가 이를 알아채 형 모토히사의 위패를 앗아가 8대 당주가 되었다. 이에 이쥬인 가문은 앙심을 품게 되었고, 이쥬인 가문이 본래 소슈 시마즈 가(総州家)를 지지하였기 때문에 이쥬인 요리히사의 난(伊集院頼久の乱)을 일으켰으나 히사토요가 진압하여 시마즈 가의 수호령국제(守護領国制)를 완성시켰다.
9대 '''시마즈 타다쿠니'''의 대에 들어선 시마즈 가는 슈고 다이묘로 확립되었고, 비교적 안정적인 치세를 누렸으나 여전히 크고 작은 문제점이 존재하였다. 타다쿠니의 동생인 시마즈 모치히사(島津用久)의 명성이 늘어나자 형제간의 대립이 일어났으나 타다쿠니의 승리로 끝났다.
10대 '''시마즈 타츠히사''' 대는 오닌의 난이 발발, 동군에 가담하였다.[6]
11대 '''시마즈 타다마사'''는 게이안 겐주(桂庵玄樹)를 초빙하여 사쓰난 학파(薩南学派)를 일으키는 등 학문의 연구에 힘썼으나 영지 내의 일족, 토착민의 반란 등으로 인해 세상을 비관하다 자진하였다.
이후 12대, 13대 당주는 모두 요절하여 토착민과 오스미의 키모츠키, 휴가의 이토를 누를 수 없었고, 여기에 시마즈 일족들까지 더해져 시마즈 본가는 크게 약화되었다.
이윽고 '''이자쿠 시마즈 가'''의 시마즈 타다요시(島津忠良)와 '''삿슈 시마즈 가'''의 시마즈 사네히사(島津実久)가 본가에 비해 압도적인 세를 보이자 14대 당주인 '''시마즈 카츠히사'''는 사네히사의 압박에 어머니의 친가인 오토모 가의 분고로 망명하였다. 이자쿠 시마즈 가의 타다요시·타카히사 부자는 사네히사와의 전투를 통해 사츠마와 오스미를 무력으로 제압하였으며, '''시마즈 타카히사'''[7] 가 15대 당주가 되었다.
16대 '''시마즈 요시히사'''는 휴가의 이토 가문을 구축하고 3주를 통일하였다.
1578년 규슈 최대의 세력이였던 오토모 군을 미미가와 전투에서 박살내었으며, 1581년 히토요시의 사가라(相良)를 항복시켰다.
미미가와 전투 이후 쇠퇴한 오토모 가문 대신 규슈 최대의 세력이 된 히젠의 류조지(龍造寺)를 오키타나와테의 전투(沖田畷の戦い)에서 박살내면서 규슈 최대의 전국 다이묘로 성장, 분고와 부젠 일부를 남겨놓고 규슈 통일을 목전에 둔 시마즈는 최대의 전성기를 구가한다. 이러한 급성장에는 실전을 통해 익힌 철포 전술이 큰 힘을 발휘했다고 사료된다.
하지만 얼마못가 1587년 오토모 소린의 구원 요청에 의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군대가 규슈 정벌을 시작하자 몇 번의 전투 끝에 항복, 사츠마와 오스미, 그리고 휴가의 일부분만을 통치하게 된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 서군에 속해 도쿠가와와 적대 관계에 빠지게 될 뻔하였지만 순순히 항복하자 영지 안도를 인정받았다. 이후 사쓰마 번으로서 막번 체제에 포함되었으며, 분가하여 사도와라 번(佐土原藩)이 생겼다.
1614년의 오사카 전투에는 참전하지 않았기에 훗날 토요토미 히데요리가 사쓰마로 도주하였다는 소문이 전국에 퍼졌지만 별일 없이 넘어갔다.
에도 시대 초기에 류큐를 침공, 정벌에 성공하여 아마미 제도와 류큐 왕국을 지배하에 두었다. 호레키 치수와 같은 막부의 번 약화 정책을 겪는 등 압박을 받았으나 도쿠가와 츠나요시의 양녀 타케히메가 시마즈 츠구토요의 후처로 시집오거나 나리아키라의 양녀이자 텐쇼인으로 유명한 아츠히메가 13대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사다의 정실이 되는 등 도자마 다이묘로선 극히 이례적으로 막부와 혼인 관계도 맺었다.
막말에 이르러 28대 나리아키라 때 서양식 제철, 조선, 방직을 중심으로 한 근대 사업을 진행하였으며 워낙에도 전통있는 명문 다이묘 집안에다 실력까지 겹쳐지니 막부와 조정 후지와라 5가문중 니조 가문과 깊은 족벌 관계를 맺었다.[8]
나리아키라가 죽은 후에는,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 등의 토막파 하급 무사 출신이 실권을 잡고, 막부에 등을 지고 막부를 타도하려는 조슈 번과 손을 잡아 삿초 동맹을 맺고 에도 막부를 무너뜨리는 한 축이 되었다 하지만 막부에 대한 원한이 깊은[9] 모리 가문의 조슈 번과 달리 구 막부인사들의 처우는 온건하게 대해주었다. 토막파라 하더라도 사쓰마는 별로 도쿠가와 막부에 원한이나 불이익을 당한 적도 없었고. 막부와 손잡고 조슈 토벌에 참여한 적이 있었으며 막부와 조슈번 사이를 중재하기도 했었다. 더욱이 사쓰마의 시마즈 가문은 이미 도쿠가와 쇼군가의 외척이자 막부의 실력자였다.
메이지에 이르러 시마즈 타다요시의 본가와 아버지 히사미츠의 타마사토 시마즈 분가 2집 모두 공작의 작위를 수여받았다. 황가와 인척 관계가 있는 사도와라 시마즈 가는 백작의 작위를 수여받았으며 다수의 분가는 남작의 작위를 수여받았다. 쇼와 덴노의 장모이자 아키히토의 외할머니가 시마즈 타다요시의 7녀인 치카코(俔子)로 현재도 황실과 혈연 관계에 있다.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를 당주로 표기한 첫 사료는 막말에 편찬된 『시마즈씨 정통계보(島津氏正統系図)』라고 생각되고 있다. 그리고 이것에 의해 '17대 당주=시마즈 요시히로'라는 인식이 정착되었고 또한 히데요시의 규슈 정벌 후 요시히사에게 오스미, 요시히로에게 사츠마를 하사하여 사츠마=시마즈라는 인식과 겹쳐져 요시히로가 당주라는 인식을 확고히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1980년대 니시모토 세이지의 연구를 시작으로 요시히로는 17대 당주가 아니다라는 파가 생성, 여러 논문이 나오고 있으며 학계에서 인정받고 있다.
'''에도 시대 이전의 분가'''
시마즈 당주가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양자가 된 무로마치 초기에는「코레무네 노 아소미[19] (惟宗朝臣) ○○」라고 서명하였으나 전국 시대부터 닛타류 겐지를 자칭하기 전까지는 쿠게(公家) 고노에(近衛: 후지와라 고셋케의 일원.)의 서자 혈통이라며 「후지와라 노 아소미(藤原朝臣) ○○」라고 서명하였다.
에도 시대부터 도쿠가와 가에서 마츠다이라 성을 부여받으면서 「마츠다이라 사츠마노카미 ○○」라고 서명하였다. 단 에도 시대 중기의 문서에「미나모토 아소미 ○○」라고 서명한 것을 보아 약간의 변동이 있었다고 추측된다.
이 가몬은 '구쓰와'라고 부르며, 일본식 '말의 입에 다는 재갈'이다. 본래는 붓으로 쓴 '十'자였으나 이후 위와 같은 형태로 변화된 것이다.(참고)[1]
1. 개요
'''시마즈(島津)'''는 '''가마쿠라 시대부터 메이지 유신까지, 그리고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일본의 명문가이다.
세이와 겐지(清和源氏)를 칭하였고, 본성은 하타(秦) 씨[2] 의 코레무네(惟宗)였다. 이름에 타다(忠)나 히사(久)를 많이 넣었으며 메이지 시대 이후 현재에도 이어져 장남의 이름에는 타다(忠)를, 차남에겐 히사(久)를 넣는다.
"시마즈에 암군은 없다(島津に暗君なし)"는 말처럼 유능한 인물들이 당주로 역임했기 때문에 가이에키 한 번 없이 소마 나카무라(相馬中村) 번주 소마씨(相馬氏), 히고 히토요시(肥後人吉) 번주 사가라씨(相良氏), 쓰시마 후추(対馬府中) 번주 소씨(宗氏) 가문과 더불어 '''가마쿠라 시대부터 메이지 시대까지 영지를 통치한 일본은 물론 세계에서도 극히 드문 가문이다.''' 이 문서는 사츠마의 시마즈 가문을 주로 서술하였다.
사쓰마 번의 당주로서 류큐 왕국[3] 를 통치한 상위 군주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오키나와현의 류큐인 원주민들에게는 증오의 대상인 가문이기도 하다.
2019년 기준 21,800여명이 사용중인 성씨이다.
2. 역사
2.1. 가마쿠라 시대
일설에는 가마쿠라 막부의 초대 장군 '''미나모토 요리토모'''의 장남으로써 아기 때 바다에 던져져 살해당했다는 이토고젠의 소생 치즈루마루(千鶴丸)가 시마즈 가문의 시조라고 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시마즈 가문이야말로 가와치 겐지 가문의 장손으로, 가와치 겐지의 가장 가까운 분가 출신인 무로마치 막부의 아시카가 장군가나 먼 분가[4] 를 사칭한 미카와 지역의 일개 토호 출신인 에도 막부의 도쿠가와 장군가보다 더 정통성 있는 무사 정권의 장군 가문 자격을 갖췄다고 할 수 있겠으나 전설에 불과하고 실제론 헤이케 편을 들었다가 겐지 계열로 갈아탄 것에 가깝다 할 수 있다.
초대 당주인 '''시마즈 타다히사'''가 사츠마, 오스미, 휴가의 슈고직을 맡아 가마쿠라 막부 내의 유력 고케닌이였으나 히키 요시카즈의 변(比企能員の変)에 연좌되어 오스미, 휴가의 슈고직을 박탈당하였고, 가마쿠라 시대 대대로 사츠마 슈고직을 물려받았다.
타다히사의 적자 '''시마즈 타다토키'''가 조큐의 난(承久の乱) 당시 활약하여 와카사 슈고직과 각지의 지두(地頭)직을 얻었으며, 난 이후 타다히사는 에치젠의 슈고직을 받았다. 또한 난 당시 사용했던 타치(太刀)는「강절」이라 불러지게 되었으며, 겐지의 백기와 타다히사의 오요로이(大鎧)와 같이 시마즈 당주들이 대대로 물려받았다.
1227년, 타다히사의 사망으로 에치젠 슈고직은 타다토키가 상속받았으나 곧 고토 씨(後藤氏)에게로 돌아갔다. 3대 당주 '''시마즈 히사츠네'''의 원구 토벌을 계기로 시마즈 가의 사츠마 입부가 시작되었으며, 4대 당주인 '''시마즈 타다무네''' 대엔 본격화되었다. 타다무네는 사츠마에서 사망한 첫 시마즈 가문 당주가 되었다.
2.2. 남북조 시대
가마쿠라 막부의 힘이 쇠퇴하고, 반막부의 힘이 강성해지자 5대 당주인 '''시마즈 사다히사'''는 고다이고 천황의 막부 토벌 운동에 참여하였고, 규슈의 고케닌들과 함께 산제이 탄다이(鎮西探題)[5] 를 공략, 다시 오스미, 휴가의 슈고직을 받게 된다.
겐무의 신정(建武の新政)이 붕괴하면서 겐무 정권에서 이탈한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셋츠에서의 전쟁에서 패하여 규슈로 달아나온 것을 도와 타타라하마의 전투(多々良浜の戦い)에서 활약하는 등 규슈 세력의 유력 다이묘로 활약하였다. 사다히사는 적자인 무네히사를 일찍 잃었기에 3남 모로히사와 4남 우지히사에게 각각 사츠마, 오스미의 슈고직을 분배하여 시마즈 씨를 분할 상속시켰다.
'''시마즈 모로히사'''는 카즈사노스케(上総介)에 임명되어 있었기에 그의 자손은 '''소슈 시마즈 가(総州家)''', 시마즈 우지히사는 무츠노카미(陸奥守)에 임명되어 있었기에 그의 자손은 '''오슈 시마즈 가(奥州家)'''로 불리게 되었다. 외척 세력을 상대할 때는 놀라운 단결력을 보였지만 그러한 외척 세력이 사라진 후엔 서로를 견제하였다.
2.3. 무로마치 시대
타도해야 할 적이 사라진 시마즈 양 가는 서로 대립하였으나 7대 당주인 '''시마즈 코레히사'''와 그의 적자 모리히사와의 관계에 불화가 생겨 소슈 시마즈 가에 내분의 위기가 고조되자 오슈 시마즈 가의 당주 '''시마즈 모토히사'''가 중재하여 주었으며, 이것에 은의를 느낀 코레히사가 사츠마 슈고직 시마즈 가의 중요 가보를 물려주어 겉으로는 시마즈 가문이 통일되었다. 후의 무로마치 막부에도 상속이 인정되었으나 소슈 시마즈 가문이 멸망한 것이 아니였기에 양가의 갈등이 존재하였다.
그리고 모토히사의 대를 이를 아들이 없어 시마즈 가문의 필두 가로였던 이쥬인 요리히사(伊集院 頼久)는 자신의 아들을 시마즈 가의 차기 당주로 세우기 위해 획책했으나 모토히사의 동생, '''시마즈 히사토요'''가 이를 알아채 형 모토히사의 위패를 앗아가 8대 당주가 되었다. 이에 이쥬인 가문은 앙심을 품게 되었고, 이쥬인 가문이 본래 소슈 시마즈 가(総州家)를 지지하였기 때문에 이쥬인 요리히사의 난(伊集院頼久の乱)을 일으켰으나 히사토요가 진압하여 시마즈 가의 수호령국제(守護領国制)를 완성시켰다.
9대 '''시마즈 타다쿠니'''의 대에 들어선 시마즈 가는 슈고 다이묘로 확립되었고, 비교적 안정적인 치세를 누렸으나 여전히 크고 작은 문제점이 존재하였다. 타다쿠니의 동생인 시마즈 모치히사(島津用久)의 명성이 늘어나자 형제간의 대립이 일어났으나 타다쿠니의 승리로 끝났다.
10대 '''시마즈 타츠히사''' 대는 오닌의 난이 발발, 동군에 가담하였다.[6]
11대 '''시마즈 타다마사'''는 게이안 겐주(桂庵玄樹)를 초빙하여 사쓰난 학파(薩南学派)를 일으키는 등 학문의 연구에 힘썼으나 영지 내의 일족, 토착민의 반란 등으로 인해 세상을 비관하다 자진하였다.
이후 12대, 13대 당주는 모두 요절하여 토착민과 오스미의 키모츠키, 휴가의 이토를 누를 수 없었고, 여기에 시마즈 일족들까지 더해져 시마즈 본가는 크게 약화되었다.
이윽고 '''이자쿠 시마즈 가'''의 시마즈 타다요시(島津忠良)와 '''삿슈 시마즈 가'''의 시마즈 사네히사(島津実久)가 본가에 비해 압도적인 세를 보이자 14대 당주인 '''시마즈 카츠히사'''는 사네히사의 압박에 어머니의 친가인 오토모 가의 분고로 망명하였다. 이자쿠 시마즈 가의 타다요시·타카히사 부자는 사네히사와의 전투를 통해 사츠마와 오스미를 무력으로 제압하였으며, '''시마즈 타카히사'''[7] 가 15대 당주가 되었다.
2.4. 전국 시대 ~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
16대 '''시마즈 요시히사'''는 휴가의 이토 가문을 구축하고 3주를 통일하였다.
1578년 규슈 최대의 세력이였던 오토모 군을 미미가와 전투에서 박살내었으며, 1581년 히토요시의 사가라(相良)를 항복시켰다.
미미가와 전투 이후 쇠퇴한 오토모 가문 대신 규슈 최대의 세력이 된 히젠의 류조지(龍造寺)를 오키타나와테의 전투(沖田畷の戦い)에서 박살내면서 규슈 최대의 전국 다이묘로 성장, 분고와 부젠 일부를 남겨놓고 규슈 통일을 목전에 둔 시마즈는 최대의 전성기를 구가한다. 이러한 급성장에는 실전을 통해 익힌 철포 전술이 큰 힘을 발휘했다고 사료된다.
하지만 얼마못가 1587년 오토모 소린의 구원 요청에 의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군대가 규슈 정벌을 시작하자 몇 번의 전투 끝에 항복, 사츠마와 오스미, 그리고 휴가의 일부분만을 통치하게 된다.
2.5. 에도 시대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 서군에 속해 도쿠가와와 적대 관계에 빠지게 될 뻔하였지만 순순히 항복하자 영지 안도를 인정받았다. 이후 사쓰마 번으로서 막번 체제에 포함되었으며, 분가하여 사도와라 번(佐土原藩)이 생겼다.
1614년의 오사카 전투에는 참전하지 않았기에 훗날 토요토미 히데요리가 사쓰마로 도주하였다는 소문이 전국에 퍼졌지만 별일 없이 넘어갔다.
에도 시대 초기에 류큐를 침공, 정벌에 성공하여 아마미 제도와 류큐 왕국을 지배하에 두었다. 호레키 치수와 같은 막부의 번 약화 정책을 겪는 등 압박을 받았으나 도쿠가와 츠나요시의 양녀 타케히메가 시마즈 츠구토요의 후처로 시집오거나 나리아키라의 양녀이자 텐쇼인으로 유명한 아츠히메가 13대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사다의 정실이 되는 등 도자마 다이묘로선 극히 이례적으로 막부와 혼인 관계도 맺었다.
막말에 이르러 28대 나리아키라 때 서양식 제철, 조선, 방직을 중심으로 한 근대 사업을 진행하였으며 워낙에도 전통있는 명문 다이묘 집안에다 실력까지 겹쳐지니 막부와 조정 후지와라 5가문중 니조 가문과 깊은 족벌 관계를 맺었다.[8]
나리아키라가 죽은 후에는,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 등의 토막파 하급 무사 출신이 실권을 잡고, 막부에 등을 지고 막부를 타도하려는 조슈 번과 손을 잡아 삿초 동맹을 맺고 에도 막부를 무너뜨리는 한 축이 되었다 하지만 막부에 대한 원한이 깊은[9] 모리 가문의 조슈 번과 달리 구 막부인사들의 처우는 온건하게 대해주었다. 토막파라 하더라도 사쓰마는 별로 도쿠가와 막부에 원한이나 불이익을 당한 적도 없었고. 막부와 손잡고 조슈 토벌에 참여한 적이 있었으며 막부와 조슈번 사이를 중재하기도 했었다. 더욱이 사쓰마의 시마즈 가문은 이미 도쿠가와 쇼군가의 외척이자 막부의 실력자였다.
2.6. 메이지 이후
메이지에 이르러 시마즈 타다요시의 본가와 아버지 히사미츠의 타마사토 시마즈 분가 2집 모두 공작의 작위를 수여받았다. 황가와 인척 관계가 있는 사도와라 시마즈 가는 백작의 작위를 수여받았으며 다수의 분가는 남작의 작위를 수여받았다. 쇼와 덴노의 장모이자 아키히토의 외할머니가 시마즈 타다요시의 7녀인 치카코(俔子)로 현재도 황실과 혈연 관계에 있다.
3. 역대 당주
- 1대 당주 시마즈 타다히사(島津忠久): 사츠마・오스미・휴가・에치젠 등의 슈고. 장원인 시마즈에서 따와 시마즈의 이름을 사용하였다.
- 2대 당주 시마즈 타다토키(島津忠時): 이전 이름은 타다요시(忠義)였으나 개명하였다. 시마즈 슈고였으며 가마쿠라 막부의 쇼군의 시종으로서 섬겼다.
- 3대 당주 시마즈 히사츠네(島津久経): 이전 이름은 히사토키(久時)였으나 개명하였다. 시마즈 슈고였으며 시마즈 가문의 사람으로서 처음으로 시마즈에 입국하였다.원구[10] 당시 활약하였다.
- 4대 당주 시마즈 타다무네(島津忠宗): 사츠마의 슈고로 시마즈 가의 사츠마 입부를 본격적으로 진행하였다. 시마즈 가의 사람으로서 처음으로 사츠마에서 죽었다.
- 5대 당주 시마즈 사다히사(島津貞久): 사츠마・오스미・휴고의 슈고로 아시카가 다카우지에게 가담하여 활약하여 3주의 슈고직을 회복하였다.
- 6대 당주 시마즈 모로히사(島津師久): 사츠마 슈고로 사다히사의 3남이다. 소슈 시마즈 가의 초대 당주이다.
- 6대 당주 시마즈 우지히사(島津氏久): 오스미・휴가・치쿠고의 슈고로 사다히사의 4남이다. 오슈 시마즈 가의 초대 당주이다.
- 7대 당주 시마즈 코레히사(島津伊久): 사츠마 슈고로 모로히사의 장남이다. 소슈 시마즈 가의 2대 당주이며 모토히사에게 조상 대대로의 가보를 물려주었다.
- 7대 당주 시마즈 모토히사(島津元久): 이전 이름은 타카히사(孝久)로 사츠마・오스미・휴고의 슈고이다. 우지히사의 장남으로 오슈 시마즈 가의 2대로 가독을 통일하였다.
- 8대 당주 시마즈 히사토요(島津久豊): 사츠마・오스미・휴가의 슈고로 우지히사의 차남이다. 시마즈 가문의 슈고 다이묘화를 확립하였다.
- 9대 당주 시마즈 타다쿠니(島津忠国): 이전 이름은 타카히사(貴久)로 사츠마・오스미・휴가의 슈고이다. 시마즈 가문을 슈고 다이묘로서 안정시켰다.
- 10대 당주 시마즈 타츠히사(島津立久): 사츠마・오스미・휴가의 슈고로 오닌의 난에서 동군에 속하였다.
- 11대 당주 시마즈 타다마사(島津忠昌): 본래의 이름은 타케히사(武久)로 사츠마・오스미・휴가의 슈고이다. 학문을 즐겼으나 국내 소란으로 괴로워하다 자진하였다.
- 12대 당주 시마즈 타다하루(島津忠治): 사츠마・오스미・휴가의 슈고로 타다마사의 장남이다.
- 13대 당주 시마즈 타다타카(島津忠隆): 사츠마・오스미・휴가의 슈고로 타다마사의 차남이다
- 14대 당주 시마즈 카츠히사(島津勝久): 사츠마・오스미・휴가의 슈고로 타다마사의 삼남이다. 사츠마노카미 사네히사(薩摩守実久)의 횡포에 괴로워하다 후에 분고 국으로 도망갔으며 그곳에서 객사하였다.
- 15대 당주 시마즈 타카히사(島津貴久): 사츠마・오스미・휴가의 슈고로 카츠히사의 양자이며 시마즈 타다요시(島津忠良)의 적자이다. 9대 당주인 타다쿠니의 현손이었으며 내란으로 혼란한 사쓰마를 통일하였다.
- 16대 당주 시마즈 요시히사(島津義久): 이전 이름은 타다요시(忠良), 요시타츠(義辰)이며 사츠마・오스미・휴가의 슈고로 3주를 통일하여 일시적으로 큐슈의 통일을 목전에 둔 시마즈 가의 전성기를 누렸다.
- 17대 당주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이전 이름은 타다히라(忠平)로 시마즈 타카히사의 차남으로 오니시마즈(鬼石曼子)라는 별명이 유명하다.
- 18대 당주 시마즈 이에히사(島津家久): 시마즈 타다츠네(島津忠恒)라고도 하며 초대 카고시마의 번주이다. 요시히사의 양자이며 요시히로의 3남이다. 카고시마 성을 축성하였다.
- 19대 당주 시마즈 미츠히사(島津光久): 이전 이름은 타다모토(忠元)로 카고시마 번의 2대 번주이다. 번주의 별장인 센간엔을 조성하였다.
- 20대 당주 시마즈 츠나타카(島津綱貴): 이전 이름은 노부히사(延久)로 카고시마 번의 3대 번주이다. 시마즈 츠나히사(島津綱久)의 적남이며 미츠히사의 적손이다.
- 21대 당주 시마즈 요시타카(島津吉貴): 이전 이름은 타다타케(忠竹)로 카고시마 번의 4대 번주이다. 키리시마 신궁(霧島神宮)의 신전을 조영하였다.
- 22대 당주 시마즈 츠구토요(島津継豊): 이전 이름은 타다야스(忠休)로 카고시마 번의 5대 번주이다. 도쿠가와 츠나요시의 양녀・타케히메와 결혼하여 에도 쇼군가와 인척관계가 되었다.
- 23대 당주 시마즈 무네노부(島津宗信): 이전 이름은 타다아키(忠顕)로 카고시마 번의 6대 번주이다. 츠구토요의 장남이다.
- 24대 당주 시마즈 시게토시(島津重年): 이전 이름은 히사카도(久門)로 카고시마 번의 7대 번주이다. 츠구토요의 차남으로 호레키 치수(宝暦治水)[11] 등 막부의 토목 공사에 고생하였다.
- 25대 당주 시마즈 시게히데(島津重豪): 이전 이름은 시게카타(久方)로 카고시마 번의 8대 번주이다. 딸인 시게히메가 도쿠가와 이에나리와 결혼, 이후 이에나리가 쇼군으로 임명되고, 미다이도코로가 되었다.
- 26대 당주 시마즈 나리노부(島津斉宣): 이전 이름은 타다타카(忠堯)로 카고시마 번의 9대 번주이다. 분카 붕당 사건으로 실각하여 은거하였다.
- 27대 당주 시마즈 나리오키(島津斉興): 이전 이름은 타다요시(忠温)[12] 로 카고시마 번의 10대 번주이다. 번의 정치 개혁을 강행하여 번의 재정을 회복하였으나 오유라 소동으로 실각하여 은거하였다.
- 28대 당주 시마즈 나리아키라(島津斉彬): 이전 이름은 타다카타(忠方)로 카고시마 번의 11대 번주이다. 문명 개화적인 막말의 사현후 중 한 명으로 알려져있다. 아츠히메가 나리아키라의 양녀가 되는 형식으로 1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사다와 결혼해서 세번째 정실이 되었다.
- 29대 당주 시마즈 타다요시(島津忠義): 이전 이름은 타다노리(忠徳)로 카고시마 번의 12대 번주이다. 나리아키라의 양자로 시마즈 히사미츠(島津久光)의 적남이며 27대 당주 나리오키의 손자이다. 유신 후 공작이 되었다.
- 30대 당주 시마즈 타다시게(島津忠重): 공작이였으며 해군 소장을 역임하였다. 타다요시는 나리아키아의 딸과 혼인하는 형식으로 양자가 되었으나 대를 이은 타다시게는 나리아키의 외손자는 아니고 타다요시 첩의 아들이다.
- 31대 당주 시마즈 타다히데(島津忠秀): 수산학자이다.
- 32대 당주 시마즈 노부히사(島津修久): 테루쿠니 신사[13] 의 궁사[14] 이다. 고노에 후미마로의 외손자들 중 하나이며[15] 일본의 제79대 총리인 호소카와 모리히로와 외사촌 관계이다. 1938년생으로 2017년 기준 한국 나이로 80세이다. 조상의 옛 가신인 사이고 타카모리의 증손녀와 결혼하여 사이고의 핏줄이 주군의 집안에 들어가게 된다.참고로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타다히데의 차남이나 장남이 조졸함에 따라서 자연스럽게 차남인 노부히사가 가문을 잇게 되었다.
4. 17대 당주에 대하여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를 당주로 표기한 첫 사료는 막말에 편찬된 『시마즈씨 정통계보(島津氏正統系図)』라고 생각되고 있다. 그리고 이것에 의해 '17대 당주=시마즈 요시히로'라는 인식이 정착되었고 또한 히데요시의 규슈 정벌 후 요시히사에게 오스미, 요시히로에게 사츠마를 하사하여 사츠마=시마즈라는 인식과 겹쳐져 요시히로가 당주라는 인식을 확고히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1980년대 니시모토 세이지의 연구를 시작으로 요시히로는 17대 당주가 아니다라는 파가 생성, 여러 논문이 나오고 있으며 학계에서 인정받고 있다.
5. 시마즈 가의 분가
'''에도 시대 이전의 분가'''
- 에치젠 시마즈 가(越前家) : 종가 초대 타타히사의 아들 타다츠나의 자손.
- 이자쿠 시마즈 가(伊作家) : 종가 3대 히사츠네의 아들 히사나가의 자손. 중간에 단절돼 종가 9대 타다쿠니의 아들 히사야스가 양자로 들어갔다.
- 오슈 시마즈 가(奥州家) : 종가 6대 우지히사와 그 자손. 우지히사가 형 모로히사와 종가 자리를 놓고 다투었기에 종가임에도 가문 명칭이 따로 있다.
- 삿슈 시마즈 가(薩州家) : 종가 8대 히사토요의 아들 모치히사의 자손.
- 소슈 시마즈 가(総州家) : 종가 6대 모로히사와 그 자손. 모로히사가 동생 우지히사와 종가 자리를 놓고 다투었기에 종가임에도 가문 명칭이 따로 있다.
- 소슈 시마즈 가(相州家) : 종가 9대 타다쿠니의 아들 토모히사의 자손.
- 호슈 시마즈 가(豊州家) : 종가 8대 히사토요의 아들 스에히사의 자손.
- 우슈 시마즈 가(羽州家) : 종가 8대 히사토요의 아들 아리히사의 자손.
- 하쿠슈 시마즈 가(伯州家) : 종가 8대 히사토요의 아들 토요히사의 자손.
- 신슈 시마즈 가(信州家)[16] : 시나노에서 활동한 시마즈 가문.
- 카지키 시마즈 가(加治木家)
- 타루미즈 시마즈 가(垂水家)
- 시게토미 시마즈 가(重富家)[17]
- 타마자토 시마즈 가(玉里家)
- 이마이즈미 시마즈 가(今和泉家)
- 미야노조 시마즈 가(宮之城家)
- 나가요시 시마즈 가(永吉家)
- 히오키 시마즈 가(日置家)
- 사도와라 시마즈 가(佐土原家)[18]
- 하나오카 시마즈 가(花岡家)
- 신시로 시마즈 가(新城家)
- 토쿠시 시마즈 가(佐志家)
- 아소타니 씨(阿蘇谷氏)
- 이쥬인 씨(伊集院氏)
- 이즈미 씨(和泉氏)
- 우스키 씨(宇宿氏)
- 카츠라 씨(桂氏)
- 카바야마 씨(樺山氏)
- 카와카미 씨(川上氏)
- 키이레 씨(喜入氏)
- 사코미즈 씨(迫水氏)
- 사타 씨(佐多氏)
- 니이로 씨(新納氏)
- 노노야마 씨(野々山氏)
- 혼고 씨(北郷氏)
- 마치다 씨(町田氏)
- 야마다 씨(山田氏)
- 요시오카 씨(義岡氏)
- 요시미츠 씨(吉満氏)
6. 공식 서명에서 사용하는 성
시마즈 당주가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양자가 된 무로마치 초기에는「코레무네 노 아소미[19] (惟宗朝臣) ○○」라고 서명하였으나 전국 시대부터 닛타류 겐지를 자칭하기 전까지는 쿠게(公家) 고노에(近衛: 후지와라 고셋케의 일원.)의 서자 혈통이라며 「후지와라 노 아소미(藤原朝臣) ○○」라고 서명하였다.
에도 시대부터 도쿠가와 가에서 마츠다이라 성을 부여받으면서 「마츠다이라 사츠마노카미 ○○」라고 서명하였다. 단 에도 시대 중기의 문서에「미나모토 아소미 ○○」라고 서명한 것을 보아 약간의 변동이 있었다고 추측된다.
7. 관련 서적
- 시마즈 가문서(島津家文書)
- 시마즈 사료집(島津史料集)
- 미키 야스시(三木靖)의 『사츠마 시마즈 씨(薩摩島津氏)』
- 『전국큐슈군기(戦国九州軍記)』
- 무라카와 코헤이(村川浩平)의 「사츠마 씨에의 마츠다이라 씨 하사」 『일본근세무가정부론(日本近世武家政権論)』
- 『렌파쿠 시마즈전기(裂帛 島津戦記)』
- 요시나가 마사하루(吉永正春)의 『큐슈전국합전기(九州戦国合戦記)』
8. 인물
8.1. 실존 인물
- 센고쿠 시대의 시마즈 4형제 장남 시마즈 요시히사, 차남 시마즈 요시히로, 3남 시마즈 토시히사, 4남 시마즈 이에히사
- 센고쿠 시대의 시마즈 토요히사
- 텐쇼인 - 쇼군 도쿠가와 이에사다의 3번째 정실부인.
- 성우 시마즈 사에코
- 시마즈 치카코(島津俔子) - 쇼와 덴노의 아내인 고준 황후의 친정어머니. 아키히토 덴노의 외할머니이다.
- 쇼와 덴노와 고준 황후(나가코)의 5녀 시마즈 타카코
- 시마즈 하츠코 - 아키히토 황태자의 비가 될 뻔했던 여성이지만, 쇼다 미치코에게 밀려 황태자비가 되지 못했다. 이후 나가코 태후의 친정인 시마즈 가에 시집갔다.
8.2. 가상 인물
- 진심으로 날 사랑해라!!의 시마즈 가쿠토
- 이 세상 끝에서 사랑을 노래하는 소녀 ~YU-NO~의 시마즈 미오
- 마리아님이 보고 계셔의 시마즈 요시노
- 사립 저스티스 학원의 시마즈 히데오
- 전국 란스의 시마즈 4형제
- 드리프터즈의 시마즈 토요히사
- 비명을 찾아서의 시마즈 도키에
- 춤추는 대수사선의 시마즈
- 드리프터즈의 시마즈 도요히사
[1] 모양 때문에 일본 내에서도 기리시탄과 관련된 설이 나돌기도 했으나 현재까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이 정설이다.[2] 하타 씨는 도래계 씨족이다.[3] 現 오키나와현[4] 정확히는 닛타류 겐지의 일문인 세라다 가문이지만.[5] 규슈의 도호부 같은 거라고 생각하면 된다.[6] 단 군사를 파병하지는 않았다.[7] 족보상으로는 이자쿠 가 기준으로 카츠히사의 18촌 손자라는 어마어마하게 먼 관계지만, 혈연으로는 7촌 조카뻘이다.[8] 이를 통해 천황가와도 인척 관계가 된다.[9] 막부 말기에 금문의 변과 막부의 조슈정벌로 여러 번사들이 처형되었기 때문이다.[10] 원나라가 침공한 일.[11] 미에 현 구와나 시에 위치해있다.[12] 타다요시라는 설이 주류고 그 외에 타다하루, 타다아츠라고도 한다.[13] 카고시마 소재의 신사로 27대 당주인 시마즈 나리아키라를 모시는 신사이다.[14] 宮司. 신사의 제사를 맡은 신관들 중 최고위이다.[15] 다만 여기에는 흑역사가 있는데, 2차대전 후 혼란한 시기에 어머니인 시마즈 아키코가 노구치라는 유명 지압사와 바람이 나서 도망간 일이 있었다.[16] 시나노 시마즈 씨라고 부른다.[17] 에치젠 시마즈 가이다.[18] 사도와라 번의 번주 가문이다.[19] 아소미(朝臣)란 황족 이외의 신하 중 가장 높은 지위를 나타내는 팔색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