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모토 곤노효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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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 제국의 군인, 16, 22대 내각총리대신.
2. 생애
1852년 11월 26일, 사쓰마 번(현재의 가고시마현) 태생. 본명은 야마모토 곤베에로, 곤노효에라는 이름은 그가 군함의 진수식에 참석하였을 때 한 신관에게 받았다고 한다.[1]
메이지 유신 이후 해군병학교를 2기로 수료하고 태동기에 있던 일본 해군의 장교가 되었으나, 사실 그 이전에도 영국-사쓰마 전쟁과 보신전쟁에 사쓰마 번군의 무사로서 참전한 경험이 있었다. 그러다 보니 해군병학료 시절에는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맨날 싸움질이나 하고 다녔다고...... 돛대 빨리 올라가기 시합과 주먹질이 특기였다고 한다.
당시 해군의 대세를 이루고 있던 사쓰마 출신이었기에 일찌기 그 능력을 인정받아, 그가 쓴 포술 교본이 일본 해군의 정식 교재로 채택되기도 하고 순양함의 함장 시절에는 밀사로 파견되어 위안스카이와 비밀리에 회담하기도 했지만, 군정가의 모습으로 주로 기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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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해군 시절.
당시 해군대신이었던 사이고 주도와 콤비를 이루었다. 사이고 주도가 처음 부임했을 때, 해군의 막후 세력자였던 곤노효에가 신임 해군대신을 교육할 겸 길도 들일 겸 해서 자료+서류 뭉터기들을 보라고 제출했더니 사이고는 한 번도 읽지 않아서 곤노효에를 벙찌게 만들었다고 한다. 그리고는 폭발하려는 곤노효에에게 책임은 자신이 다 질 테니. 실무자 측에서 생각하는 대로 잘 해 보라는 대인배적인 멘트를 날렸다고. 이 콤비는 사쓰마 번 출신자들을 우대하는 관행을 폐지하고, 보신 전쟁 때부터 해군에서 복무해 왔던 머리 굳은 고급 장교들을 대거 물갈이해버렸다. 곤노효에 역시 사쓰마 출신이었지만 동향이고 선배고 친구고 뭐고 예외가 없었다. 단 애매하다는 이유로 평가가 유보된 사람이 있었는데, 그게 바로 도고 헤이하치로. 시바 료타로의 소설 언덕 위의 구름의 등장인물인 아키야마 사네유키의 표현으로는 '선저에 달라붙은 따개비들을 깔끔히 청소해버렸다'고. 결과적으로 일본 해군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모두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대청나라-대러시아 강경책을 지지하였으며 청일 전쟁 이후 해군 대장 겸 해군대신으로 진급. 1902년 남작, 1907년 백작에 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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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작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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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에도 사복간지 종결자라 불렸다.
하지만 정치가로서는 운이 안 따르는 케이스였는지 총리직 돌려막기하던 케이엔 콤비가 한 명은 실각, 한 명은 반대편의 정치공작인 다이쇼 덴노의 칙허를 이유로 총리직에 나설 수 없었다. 그러다가 정치거두이자 육군의 거물인 야마가타 아리토모마저 이 사건들에 연루된 다이쇼 정변으로 2차 사이온지 내각이 총사퇴되면서 호헌운동이 강력해진 분위기를 읽지 못한 원로들이 3차 가쓰라 내각을 설립했으나, 분노한 민중이 의회를 포위하고 가쓰라의 사퇴를 요구하였다. 가쓰라는 중의원 해산으로 맞서려 했으나 중의원에서 폭동이 일어날 것이라고 경고하자 결국 50일만에 사퇴하고 그 후임으로 지목된 것이 바로 야마모토 곤노효에였다. 야마모토는 정우회와 연합을 이룸으로 1913년 총리대신에 취임한다. 정당정치인들과 연합했으니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기 위해 민-군 간 분리에 힘쓴다. 대표적으로 이제 퇴역군인도 군부대신으로 부임할 수 있게 되어서 군대가 현직 대신을 사퇴시키고 차기 대신 선출을 보이콧함으로 내각 구성을 못하도록 훼방 놓는 걸 방지할 수 있게 되었다. 이때 행정부 구조조정, 문관임용제 개편 등등 여러 개혁을 실시했다.
허나 그는 해군에서 터진 군수 비리(지멘스 사건)의 책임을 지고 곧 사퇴하게 되었다. 사실 이 사건은 배경부터가 아주 복잡한데, '''국가채무의 지불불이행 선언을 하냐 마냐 운운할 정도로 심각한 경제상황+육군도 사단증설을 참고 있던 판에 해군요구만 받아들여서 팽창시킨 전함건조 예산을 중의원에서 막무가내식으로 관철하기''' 등, 악화일로의 경제상황과 육해군과 그들의 뒷배경인 원로들과의 분쟁부터 파악해야 한다. 게다가 '''가난한 향사출신인데도 정작 해군내에서는 재산이 제일 많았던 것'''까지 겹치면서 사건이 악화일로로 치달았다. 가난뱅이가 과연 봉급만으로 재산을 불렸겠냐는 것. 설상가상으로 지멘스 사건에 항의하는 3만명의 시위대를 4천명의 경찰이 강경진압을 시도하다가 시위가 폭동으로 번지면서 귀족원으로부터 정치를 개같이 했다고 혹독한 질책을 받고 제출한 해군 예산안이 퇴짜를 맞게 된다. 여기에 그간 야마모토와 동맹 관계였던 입헌정우회의 하라 다카시가 정우회의 단독 지도자로 자리매김하면서 다수당의 지위를 활용해 조각의 대명을 도모하게 되면서 야마모토 내각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고 귀족과 정당으로부터 동시에 버림받은 야마모토 내각은 매우 허망하게 무너졌다.
이 사건의 여파로 갓 건조에 들어가던 후소급 전함 3,4번함의 예산은 완전 삭감당하여, 1915년 후반기에나 간신히 기공에 들어가게 되었다.[2]
1923년 관동대지진 직후 총리대신을 한 번 더 맡아 재건에 애썼다. 당시 내각구성이 총리인 야마모토 본인을 비롯하여 고토 신페이 내무대신, 이노우에 준노스케 대장대신, 다나카 기이치 육군대신, 히라누마 기이치로 사법대신, 이누카이 쓰요시 체신대신 등 혁혁한 총리감 거물들을 잔뜩 불러서 조각을 했기 덕분에 독자세력화론이 솔솔 나올 지경이었으나,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고 재건 계획은 잘 풀리지 않았고, 또 반정우회 세력의 결집에 경악한 정우회가 내각을 적대시하면서 곤경에 처하였다. 마침 같은 해 12월에 도라노몬 사건[3] 이 터져 그 책임을 지고 사퇴하는 형식으로 물러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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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가족들과 여생을 보낸다.
3. 매체에서
무책임함장 테일러의 등장인물 야마모토 마코토의 선조라고 한다. 후손의 성격은 일본에서 이미징되는 선조의 성격과 거의 판박이인듯. 다만 몇 배는 더 대인배이면서도 또한 우주급으로 골때리는 상사를 만나 죽어라고 고생한다.
박열(영화)에서는 시바타 요시유키가 야마모토 곤노효에 역으로 분했다. 히로히토가 저격을 당했다는 소식에 우왕좌왕하는 등 미즈노 렌타로에게 놀아나는 무력한 노인네 정도로 묘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