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만지로
[image]
1880년경의 사진.
ジョン万次郎(ジョン まんじろう)(1827~1898). 에도 막부 말기(막말)에서 메이지 시대 인물로, 고기잡이를 하러 나갔다 표류한 뒤 미국을 다녀와 일본의 통역가, 번역가, 교사가 되는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 본명은 '나카하마 만지로(中濱 萬次郎)'로[1] 존(John) 만지로는 일종의 별명이다.
만지로는 도사 번 출신으로, 원랜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농어업을 하던 평범한 평민이었다. 그런데 1841년 여름, 그의 나이 만 14살 때 동료 4명(이 4명은 형제였다고 한다)과 고기잡이를 하러 나갔다가 폭풍우를 만나 5일간 표류, 일본에서 남쪽으로 750km 떨어진 '토리시마(鳥島)'라는 이름의 '''무인도에 표착'''하게 되면서 그의 인생이 급작스럽게 변하게 된다. 이들은 여기서 돌을 던져 새를 때려잡아먹고 빗물을 마시는 등의 방법으로 약 150여일을 연명하는데, 그러다 어느날 근처를 지나가던 '''미국의 포경선 존 하울랜드(John Howland) 호에게 구조'''된다. 그런데 함께 구출된 동료들은 배의 기착지인 하와이에 남았지만, '''만지로는 배에 있던 세계지도를 보고는 모험을 희망했고 선장 윌리엄 윗필드도 그를 마음에 들어하여 그를 거둔 후 포경선의 선명을 따 John이란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선장은 만지로를 그의 가족이 있는 매사추세츠에 데려가 옥스포드 학교 선생 제임스 아킨에게 의탁시켰다. 어린 만지로는 거기에서 영어와 수학, 측량, 항해술 등을 익혔고 4년 후 포경선 프랭클린 호에 선원으로 취직하여 매사추세츠에서부터 항해를 시작하였다. 그는 Harpooner(작살 다루는 사람)로서 일했는데 1847년, 프랭클린 호가 하와이에 기착했을 때 그는 그와 함께 표류했었던 동료 4형제를 다시 볼 수 있었다. 막부의 허락없이 국외에 나갔다는 것이 발각됐을 때 처벌 받을까봐 두려워 일본에 귀국하지 못하고 하와이에 남은 것이었다.
1849년, 만지로는 일주를 마치고 메사추세츠에 돌아온 프랭클린 호에서 350달러의 보수를 받고 이후 '''골드 러시에 참가'''해 캘리포니아에 가서 추가로 600달러를 벌었다. 그리고 이듬해 가족에 대한 그리움 등으로 배를 한 척 사서 귀국을 결심, 그야말로 팔자에도 없는 다이나믹한 생활을 하다 일본으로 돌아오게 된다. 당연하다면 당연하지만, 이 시기 그는 일본인 최초로 철도, 증기선을 타보고, 최초로 근대식 포경업에 종사한 인물로 기록되었다.[2]
1851년 음력 2월 2일, 만지로는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역시 귀국을 희망하던 과거의 동료 2명과(한 명은 도중에 심장병으로 사망) 만나 함께 류큐에 상륙했고, 당시 류큐를 복속 중이던 사쓰마 번에서 취조를 받았다. 원래는 무단 해외 여행범(?) 비슷하게 되어 처벌을 받아야 됐지만, 표류했다는 하소연이 먹혔고, 평소 서양 문물에 관심이 많았던 번주 시마즈 나리아키라의 호기심에 불려가 질문에 답하여 그의 지식을 높이 산 번주로부터 오히려 선생으로 임명되어 사쓰마 번의 사무라이들에게 서양의 조선술과 항해술을 전수하고 번의 양학교(洋學校)에서 영어를 가르치도록 했다. 이때 알파벳 ABCD… 노래를 일본에 처음 전파했다고 한다.
그러다 다시 나가사키 봉행소로 옮겨져 긴 심문을 받고, 다시 도사 번으로 넘겨져 또 심문을 받다가 귀국 1년 반만에 고향집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된다. 참고로 도사 번의 취조에 동석했던 화가 카와다 소료는 만지로의 이야기를 듣고 일러스트가 들어간 <표손기략(漂巽紀略)>이라는 서양 정보 책을 썼다.
귀향 후에는 도사 번으로부터 사무라이 신분을 받고, 도사 번의 번교(번이 세운 학교)에서 교수로 임명됐다. 이때 뒷날 도사 번의 참정이 되어 대정봉환에 기여한 고토 쇼지로, 사사키 다카유키, 정한론을 주장한 이타가키 다이스케, 미쓰비시 기업을 창업하는 이와사키 야타로 등을 가르쳤다.
그러나 도사 번으로 돌아온지 4개월만인 1853년, 흑선내항 사건이 발생하고, 만지로는 미국에 대한 정보가 필요한 에도 막부에 불려갔다. 그리고 여기서 로주[3] 아베 마사히로와 접견하여, 자신이 미국 포경선에서 일한 경험으로 미국의 개항 요구를 받아들일 것을 제안했다. 당시 포경업은 미국의 국가 주요 산업으로 포경선들은 일본 근해까지 자주 진출했다. 포경선은 한 번 출항하면 4년 정도 바다를 항해하며 고래를 잡았고, 물과 식량, 증기선의 연료인 석탄을 보급할 항구가 절실했다. 그러나 일본은 쇄국정책으로 일관, 항구를 개방하지 않고 난파해서 표류한 선원을 죄인 취급했다. 미국에서는 이런 일본을 야만적이라고 불만의 목소리가 컸다. 미국이 요구한 사항 제1조는 난파해서 표류해 온 선원을 보호하고, 항구를 개방하라는 것이었다. 실제 미국의 포경선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만지로는 항구는 개방하지만 통상은 안해도 된다는 조언을 했다. 막부는 이 의견을 검토해서 받아들였다.
이 공적으로 막부로부터 직참 하타모토의 벼슬을 얻고, 평민이라 성이 없었는데 고향 이름을 따와 나카하마라는 성씨를 칭했다. 미일화친조약에서는 통역사로 발탁됐지만, 애초에 전문 통역 기술을 배운 것도 아니었고(외교 용어에 서툴렀다) 당시엔 미국의 스파이 아니냔 편견 역시 있었기에 페리 제독과의 직접 통역은 하지 못했다.[4] 하지만 화친 조약 체결을 위한 회의가 열린 장소의 옆방에서 모든 문서를 점검하고 번역하는 역할을 했다. 이후 영어회화책인 <영미대화첩경>을 저술하기도 했고, <보디치 항해술서> 등 항해나 조선에 관한 각종 서양 기술서적들을 번역하거나 영어 교육, 강연 등을 했다.
1860년 미일수호통상조약의 비준서를 교환하기 위해 일본 최초로 태평양을 횡단해서 미국으로 가는 선박 항해에서도 통역사로 동행했다. 참고로 이때의 선장은 가쓰 가이슈. 그러나 배멀미로 드러누워서 만지로가 배를 조종했다고 한다(...). 또 이 항해에는 20대의 후쿠자와 유키치도 군함부교로 꼽사리 동행하고 있었다. 이때 만지로는 후쿠자와와 함께 미국의 서점에서 웹스터 영어 사전을 구입하여 이를 일본에 가져와 번역하였다. 또한 은인인 윌리엄 윗필드 선장도 만나 감사를 표하고 일본도를 선물했다고 한다.
1866년, 일본으로 돌아와서는 도쿄대학의 전신이 되는 가이세 대학교의 교수가 되어 영어, 항해술, 측량술 등을 가르쳤다. 1870년에는 보불전쟁 시찰단으로 유럽에 파견되었다.
평민 출신으로 출세했음에도 자만하지 않고 빈민구제에 힘썼으며, 정치인 친구들이 높은 자리를 제안했음에도 거부하고 교육자로서 헌신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조용히 살다가 도쿄에서 71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존 만지로의 행적은 당시 사카모토 료마 등 메이지 유신 관련 일본 개화파 인물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예를 들어 24살 청년이었던 요시다 쇼인은 해외에 갔다왔는데도 벌을 받지 않고 오히려 막부의 벼슬을 얻었다는 존 만지로의 이야기를 듣고는 앞으로 출세하려면 외국의 정보를 얻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어, 1854년 미일화친조약이 체결된 직후, 조각배를 타고 쿠로후네로 찾아가 해외 밀항을 부탁했다가 페리 제독한테 거절당하고 옥살이를 했고(...), 요시다 쇼인의 제자 '조슈 파이브' 이토 히로부미 등은 번의 공금을 횡령해서 영국으로 밀항을 하기도 했다. 이런 흐름은 이와쿠라 도모미의 이와쿠라 사절단으로도 이어졌다.
만지로의 영어 실력을 구체적으로 따지자면, 회화 능력은 뛰어났지만 어린 시절 학문을 배운 적이 없어서 영어 문장을 일본어로 옮기는 것은 서툴러서, 서양의 체계적인 학문 지식을 도입하려는 메이지 정부가 들어선 후에는 능력을 크게 발휘하지 못했다고 한다. 참고로 만지로 본인은 미국에서 포경업을 배웠기에 일본에서도 고래를 잡으려고 귀국했는데, 시대가 시대이다 보니 결국 영어와 미국에 대한 지식을 요구하는 일을 생업으로 삼게 되었다.
국내에선 만지로보다 조금 앞선 시기 표류되어 해외를 들렀다 온 조선의 문순득과 비교되기도 한다. 참고로 조선사절단이 미국에 간건 1883년 보빙사가 최초였다.
료마전이나 아츠히메 같은 에도 막부 말기를 다룬 드라마에 종종 등장한다.
2015년 4월, 메사추세츠의 도서관에서 존 만지로와 함께 윌리엄 윗필드 선장으로 추정되는 노인이 촬영된 사진이 발견되었다.#
1880년경의 사진.
1. 개요
ジョン万次郎(ジョン まんじろう)(1827~1898). 에도 막부 말기(막말)에서 메이지 시대 인물로, 고기잡이를 하러 나갔다 표류한 뒤 미국을 다녀와 일본의 통역가, 번역가, 교사가 되는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 본명은 '나카하마 만지로(中濱 萬次郎)'로[1] 존(John) 만지로는 일종의 별명이다.
2. 생애
만지로는 도사 번 출신으로, 원랜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농어업을 하던 평범한 평민이었다. 그런데 1841년 여름, 그의 나이 만 14살 때 동료 4명(이 4명은 형제였다고 한다)과 고기잡이를 하러 나갔다가 폭풍우를 만나 5일간 표류, 일본에서 남쪽으로 750km 떨어진 '토리시마(鳥島)'라는 이름의 '''무인도에 표착'''하게 되면서 그의 인생이 급작스럽게 변하게 된다. 이들은 여기서 돌을 던져 새를 때려잡아먹고 빗물을 마시는 등의 방법으로 약 150여일을 연명하는데, 그러다 어느날 근처를 지나가던 '''미국의 포경선 존 하울랜드(John Howland) 호에게 구조'''된다. 그런데 함께 구출된 동료들은 배의 기착지인 하와이에 남았지만, '''만지로는 배에 있던 세계지도를 보고는 모험을 희망했고 선장 윌리엄 윗필드도 그를 마음에 들어하여 그를 거둔 후 포경선의 선명을 따 John이란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선장은 만지로를 그의 가족이 있는 매사추세츠에 데려가 옥스포드 학교 선생 제임스 아킨에게 의탁시켰다. 어린 만지로는 거기에서 영어와 수학, 측량, 항해술 등을 익혔고 4년 후 포경선 프랭클린 호에 선원으로 취직하여 매사추세츠에서부터 항해를 시작하였다. 그는 Harpooner(작살 다루는 사람)로서 일했는데 1847년, 프랭클린 호가 하와이에 기착했을 때 그는 그와 함께 표류했었던 동료 4형제를 다시 볼 수 있었다. 막부의 허락없이 국외에 나갔다는 것이 발각됐을 때 처벌 받을까봐 두려워 일본에 귀국하지 못하고 하와이에 남은 것이었다.
1849년, 만지로는 일주를 마치고 메사추세츠에 돌아온 프랭클린 호에서 350달러의 보수를 받고 이후 '''골드 러시에 참가'''해 캘리포니아에 가서 추가로 600달러를 벌었다. 그리고 이듬해 가족에 대한 그리움 등으로 배를 한 척 사서 귀국을 결심, 그야말로 팔자에도 없는 다이나믹한 생활을 하다 일본으로 돌아오게 된다. 당연하다면 당연하지만, 이 시기 그는 일본인 최초로 철도, 증기선을 타보고, 최초로 근대식 포경업에 종사한 인물로 기록되었다.[2]
1851년 음력 2월 2일, 만지로는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역시 귀국을 희망하던 과거의 동료 2명과(한 명은 도중에 심장병으로 사망) 만나 함께 류큐에 상륙했고, 당시 류큐를 복속 중이던 사쓰마 번에서 취조를 받았다. 원래는 무단 해외 여행범(?) 비슷하게 되어 처벌을 받아야 됐지만, 표류했다는 하소연이 먹혔고, 평소 서양 문물에 관심이 많았던 번주 시마즈 나리아키라의 호기심에 불려가 질문에 답하여 그의 지식을 높이 산 번주로부터 오히려 선생으로 임명되어 사쓰마 번의 사무라이들에게 서양의 조선술과 항해술을 전수하고 번의 양학교(洋學校)에서 영어를 가르치도록 했다. 이때 알파벳 ABCD… 노래를 일본에 처음 전파했다고 한다.
그러다 다시 나가사키 봉행소로 옮겨져 긴 심문을 받고, 다시 도사 번으로 넘겨져 또 심문을 받다가 귀국 1년 반만에 고향집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된다. 참고로 도사 번의 취조에 동석했던 화가 카와다 소료는 만지로의 이야기를 듣고 일러스트가 들어간 <표손기략(漂巽紀略)>이라는 서양 정보 책을 썼다.
귀향 후에는 도사 번으로부터 사무라이 신분을 받고, 도사 번의 번교(번이 세운 학교)에서 교수로 임명됐다. 이때 뒷날 도사 번의 참정이 되어 대정봉환에 기여한 고토 쇼지로, 사사키 다카유키, 정한론을 주장한 이타가키 다이스케, 미쓰비시 기업을 창업하는 이와사키 야타로 등을 가르쳤다.
그러나 도사 번으로 돌아온지 4개월만인 1853년, 흑선내항 사건이 발생하고, 만지로는 미국에 대한 정보가 필요한 에도 막부에 불려갔다. 그리고 여기서 로주[3] 아베 마사히로와 접견하여, 자신이 미국 포경선에서 일한 경험으로 미국의 개항 요구를 받아들일 것을 제안했다. 당시 포경업은 미국의 국가 주요 산업으로 포경선들은 일본 근해까지 자주 진출했다. 포경선은 한 번 출항하면 4년 정도 바다를 항해하며 고래를 잡았고, 물과 식량, 증기선의 연료인 석탄을 보급할 항구가 절실했다. 그러나 일본은 쇄국정책으로 일관, 항구를 개방하지 않고 난파해서 표류한 선원을 죄인 취급했다. 미국에서는 이런 일본을 야만적이라고 불만의 목소리가 컸다. 미국이 요구한 사항 제1조는 난파해서 표류해 온 선원을 보호하고, 항구를 개방하라는 것이었다. 실제 미국의 포경선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만지로는 항구는 개방하지만 통상은 안해도 된다는 조언을 했다. 막부는 이 의견을 검토해서 받아들였다.
이 공적으로 막부로부터 직참 하타모토의 벼슬을 얻고, 평민이라 성이 없었는데 고향 이름을 따와 나카하마라는 성씨를 칭했다. 미일화친조약에서는 통역사로 발탁됐지만, 애초에 전문 통역 기술을 배운 것도 아니었고(외교 용어에 서툴렀다) 당시엔 미국의 스파이 아니냔 편견 역시 있었기에 페리 제독과의 직접 통역은 하지 못했다.[4] 하지만 화친 조약 체결을 위한 회의가 열린 장소의 옆방에서 모든 문서를 점검하고 번역하는 역할을 했다. 이후 영어회화책인 <영미대화첩경>을 저술하기도 했고, <보디치 항해술서> 등 항해나 조선에 관한 각종 서양 기술서적들을 번역하거나 영어 교육, 강연 등을 했다.
1860년 미일수호통상조약의 비준서를 교환하기 위해 일본 최초로 태평양을 횡단해서 미국으로 가는 선박 항해에서도 통역사로 동행했다. 참고로 이때의 선장은 가쓰 가이슈. 그러나 배멀미로 드러누워서 만지로가 배를 조종했다고 한다(...). 또 이 항해에는 20대의 후쿠자와 유키치도 군함부교로 꼽사리 동행하고 있었다. 이때 만지로는 후쿠자와와 함께 미국의 서점에서 웹스터 영어 사전을 구입하여 이를 일본에 가져와 번역하였다. 또한 은인인 윌리엄 윗필드 선장도 만나 감사를 표하고 일본도를 선물했다고 한다.
1866년, 일본으로 돌아와서는 도쿄대학의 전신이 되는 가이세 대학교의 교수가 되어 영어, 항해술, 측량술 등을 가르쳤다. 1870년에는 보불전쟁 시찰단으로 유럽에 파견되었다.
평민 출신으로 출세했음에도 자만하지 않고 빈민구제에 힘썼으며, 정치인 친구들이 높은 자리를 제안했음에도 거부하고 교육자로서 헌신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조용히 살다가 도쿄에서 71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3. 기타
존 만지로의 행적은 당시 사카모토 료마 등 메이지 유신 관련 일본 개화파 인물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예를 들어 24살 청년이었던 요시다 쇼인은 해외에 갔다왔는데도 벌을 받지 않고 오히려 막부의 벼슬을 얻었다는 존 만지로의 이야기를 듣고는 앞으로 출세하려면 외국의 정보를 얻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어, 1854년 미일화친조약이 체결된 직후, 조각배를 타고 쿠로후네로 찾아가 해외 밀항을 부탁했다가 페리 제독한테 거절당하고 옥살이를 했고(...), 요시다 쇼인의 제자 '조슈 파이브' 이토 히로부미 등은 번의 공금을 횡령해서 영국으로 밀항을 하기도 했다. 이런 흐름은 이와쿠라 도모미의 이와쿠라 사절단으로도 이어졌다.
만지로의 영어 실력을 구체적으로 따지자면, 회화 능력은 뛰어났지만 어린 시절 학문을 배운 적이 없어서 영어 문장을 일본어로 옮기는 것은 서툴러서, 서양의 체계적인 학문 지식을 도입하려는 메이지 정부가 들어선 후에는 능력을 크게 발휘하지 못했다고 한다. 참고로 만지로 본인은 미국에서 포경업을 배웠기에 일본에서도 고래를 잡으려고 귀국했는데, 시대가 시대이다 보니 결국 영어와 미국에 대한 지식을 요구하는 일을 생업으로 삼게 되었다.
국내에선 만지로보다 조금 앞선 시기 표류되어 해외를 들렀다 온 조선의 문순득과 비교되기도 한다. 참고로 조선사절단이 미국에 간건 1883년 보빙사가 최초였다.
료마전이나 아츠히메 같은 에도 막부 말기를 다룬 드라마에 종종 등장한다.
2015년 4월, 메사추세츠의 도서관에서 존 만지로와 함께 윌리엄 윗필드 선장으로 추정되는 노인이 촬영된 사진이 발견되었다.#
[1] 사실 후술되어있듯 평민 출신이라 원랜 성도 없었다고 한다. 이후 '나카하마'란 성을 칭한 것.[2] 존 만지로의 10년간의 여정은 인터넷 존만지로 자료관 참고.[3] 老中, 쇼군 직속으로 국가 정사를 통솔하는 직책.[4] 직접 통역은 미국인 래널드 맥도날드에게 영어를 배우고, 네덜란드어 역관 집안의 자제인 모리야마 에이노스케가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