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쿠보 도시미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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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국 제1·3·5대 내무경
오쿠보 도시미치
大久保利通 | Ōkubo Toshimichi'''

  • 위엄을 갖추기 위해 기른 자신의 수염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겼다고 한다. 사진을 보더라도 수염을 매우 풍성하게 기른 후에 그것을 서양식으로 가꾸려 한 흔적이 보인다.
  • 매우 근엄한 사람이어서 함부로 말도 못 붙이는 구석이 있었다고 한다. 복도를 지나가기만 해도 주변을 긴장케 만드는 존재였다고. 다만, 사회생활과 달리 가정에서는 상당히 다정한 성격이었던 모양. 오쿠보가 오랫만에 집에 오는 날에는 딸 요시코(吉子) 등 아이들이 서로 오쿠보의 신발을 벗겨주려고 다투다 뒤로 벌렁 넘어진 적도 있고, 매주 금요일 밤마다 친척들을 불러 만찬을 가졌는데, 오쿠보는 이 만찬을 인생의 가장 행복한 순간 중 하나로 즐겼다고 한다.
  • 무대뽀스런 면은 있었어도 당시로서는 드물게 인텔리적인 사람이었다고 한다. 서양문물에 밝고 지성적이며 냉정하게 판단하는, 무사보다는 현대인에 가깝게 생각하는 사람이었다고. 또한 언변에 능해 신분에 관계 없이 사람을 잘 끌어모았다고 한다.
  • 부심이 강한 인물이었는지 지나치게 무게를 잡는 경향이 있었다고 한다. 유신 운동에 매진하기 이전 사쓰마 번저에서 근무할 때는 자신의 신분에 대한 우월감이 강해서[1] 신분이 낮은 무사는 거의 사람 취급을 안 했다고 한다. 퇴근할 때 숙직무사가 인사해도 쳐다보지도 않았다고. 그가 이끈 메이지 정부는 신분제 철폐에 앞장섰지만 정작 본인은 신분의식에 강하게 사로잡혀 있었던 것. 이후 유신에 가담하면서 동료를 끌어들일 때는 신분을 가리지 않았지만, 막상 이용가치가 없어지면 하급 무가 출신은 가차 없이 내버리거나 심지어 막부 측에 희생양으로 넘겨 버리기도 했다. 나중에 신 정부 내각을 결성할 때도 차별의식은 여전해서, 더 이상 눈치 살필 필요가 없어지자 본색을 드러냈는지 유신 지사 중 상인 출신이나 하급 무가 출신은 내각에서 배제하려고 노력했다. 유신군 측에 자금을 지원한 미쓰비시(三菱)나 미쓰이(三井)에서 심어놓은 인사들도 이 배제대상에 포함되어서, 유신운동 때보다 많은 불만과 원한을 샀다.(...) 나중에 어이없이 암살당하게 된 계기도, 이 당시 배제된 자들이 획책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
  • 세간에 흔히 알려진, 교활한 술책으로 선배인 사이고 다카모리를 정계에서 쫓아내고 서남전쟁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이야기는 사실과는 다를 가능성이 높다. 사이고와의 분열은 이타가키 다이스케나 에토 신페이 같은 히젠, 토사 번 출신들이 오쿠보와 이와쿠라 도모미가 해외로 순방을 떠나기 전에 맺은 12개소의 약정을 무시하고 관제개혁이나 징병령, 조선사절 파견 문제와 같은 중요 사항을 멋대로 처리해버렸으며, 참의의 숫자를 각 번에서 1명씩 뽑아놓은 밸런스를 무너뜨리고 토사 번, 히젠 번 출신을 늘려버렸기 때문이었다.
  • 사이고 다카모리를 따르는 그룹한테는 비정(非情), 잔인(殘)하다고 '忍人'이라고 불렸다. 사가의 난을 일으킨 에토 신페이를 '사라시구비'(효수형: 잘린 목을 길거리에 전시해서 사람들이 구경거리로 만드는 형벌)에 처한 것은, 근대 국가를 지향하는 메이지 정부의 전근대적 만행이었다.[2]
  • 취미는 바둑. 실력은 꽤 잘 두는 편이었나 본데, 그래서인지 더 지기 싫어하는 성격으로 바둑에서 지면 주변 사람들도 눈치챌 만큼 심기가 불편했다고 한다.
  • 지독한 골초였다는 증언이 있다. 담뱃대를 매일 부지런히 청소해야 할 만큼 담배를 많이 피웠다고 한다.
  • 키가 178cm로 당시 일본인치고는 상당한 장신이었다.[3]
  • 금전관리에 있어서는 충분히 권력을 이용해서 사리사욕을 채우고도 남을 위치에 있었어도, 오히려 공무를 위해서는 빚을 얻어서라도 자신의 사재를 쏟아부었다. 그가 죽은 후에 밝혀진 재산은 막대한 빚만 있어서, 오쿠보를 따르던 사람들이 모금 운동을 펼쳐 겨우 그 빚을 갚고 남은 가족들이 생활할 수 있도록 했다.
  • 오쿠보의 차남 노부아키(伸顕)는 마키노(牧野) 가문으로 양자로 가서 '마키노 노부아키'가 되었는데,[4] 훗날 일본 총리가 된 요시다 시게루는 노부아키의 사위가 된다. 시게루의 딸, 그러니까 노부아키의 외손녀인 요시다 카즈코(吉田和子)는, 2.26 사건 당시 외할아버지 노부아키를 위험에서 구하기도 했다. 자세한 것은 2.26 사건 참조. 카즈코는 아소 다로 前 일본 총리와 아소 노부코를 낳았는데, 노부코는 토모히토 친왕과 결혼하여 아키코 공주요코 공주를 낳았다.
  • 내무경을 맡던 1877년에는 울릉도, 독도에 대한 지적 편입 문제를 두고 태정관 우대신 이와쿠라 도모미에게 서신을 보냈고, 후대의 '독도 무주지 선점론'이 허구임을 알려주는 '태정관 지령'[5]을 전달받았다. 이후 시마네현에 울릉도와 독도 편입 중단 지시를 했다.
  • 친조부 : 오쿠보 도시타카 (? ~ 1801)
    • 백부 : 오쿠보 도시타츠 (? ~ 1821)
    • 친부 : 오쿠보 도시요 (1794 ~ 1863)
  • 외조부 : 미나요시 호토쿠 (? ~ 1838)
    • 친모 : 미나요시 후쿠
      • 오쿠보 도시미치(1830 ~ 1878) / 처 : 오쿠보 마스코 (1840 ~ 1878)[6] / 첩 : 스기우라 유우[7]
        • 장남 : 오쿠보 도시나카 (1859 ~ 1945)
        • 차남 : 마키노 노부아키 (1861 ~ 1949) 마키노 가에 양자로 보냄.
          • 친손녀 요시다 유키코 (? ~ 1941) / 손녀사위 : 요시다 시게루 (1878 ~ 1967) 일본 총리
            • 외증손자 : 요시다 겐이치 (1912 ~ 1977) 영문학자
            • 외증손녀 : 아소 카즈코 (1915 ~ 1996) / 외증손녀사위 : 아소 타카키치 (1911 ~ 1980)
        • 3남 : 오쿠보 도시타케 (1865 ~ 1943)
        • 4남 : 오쿠보 도시오 (1867 ~ 1894)
        • 5남 : 이시하라 유우쿠마 (1869 ~ 1943) 이시하라 가에 양자로 보냄.
        • 6남 : 오쿠보 슌쿠마 (1870 ~ 1912)
        • 7남 : 오쿠보 시치쿠마 (1871 ~ 1943)
        • 8남 : 오쿠보 (1878 ~ 1956) 유복자

"국가의 기초를 다지려면 30년이 필요해. 이제까지 바친 10년은 제1기 '창업'의 시기였던 거야. 앞으로 10년은 '발전'의 시기. 내정을 정비하고, 국내의 내실을 다지는 것. 이것이 가장 중요한 시기일세. 미력하나마 난 그 제2기 10년을, 온갖 역경을 헤쳐서 이루고 싶네. 마지막 제3기, '수성'의 시기는 후발 현자에게 맡기고, '''동시에 의회를 열어 정치를 민정으로 이행. 그렇게 일본은 '국민국가'로 거듭나''' 유신은 그 진정한 완성을 보게 될 걸세."

[1] 오쿠보 본인은 사쓰마 번주의 가신 출신.[2] 에토 신페이는 메이지 정부에서 참의, 사법경(법무부 장관직)을 맡았고, 자신이 관여한 메이지 정부 신법률에는 효수형 같은 전근대적인 악법을 폐지했다. 형법에도 없는 형벌이었다. 더구나 사법 제도를 무시하고 항소도 못하게 한 암흑 재판이었다.[3] 다른 유신 3걸 중 하나였던 사이고 다카모리도 180cm의 거구였다.[4] 정작 노부아키 본인은 양아버지가 일찍 죽으면서(7살에 보신전쟁에서 전사) 친아버지인 오쿠보와 계속 같이 살았고, 이와쿠라 사절단도 친아버지와 같이 동행했다...[5] 울릉도독도조선의 영토이며 일본과는 무관하다는 내용이다.[6] 아래 장남, 차남, 3남, 5남, 장녀만 낳았다. [7] 아래 4남, 6남, 7남, 8남의 생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