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문학)

 


2. 詞
2.1. 역사
2.2. 종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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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춘추전국시대 초나라에서 생겨난 운문으로, 굴원이 지은 것들을 모아 놓은 초사(楚)라는 운문집이 유명하기 때문에 초사라고도 부르며, 그 중 <이소(騷)>가 가장 유명하여 소(騷)라고도 부른다. 초사 문서 참조.

2. 詞


江南好,風景舊曾諳。

日出江花紅勝火,春來江水綠如藍。

能不憶江南。

강남은 좋을시고, 옛 풍경 눈에 선하네.

해 뜨면 강가의 꽃이 불보다 붉었고, 봄 오면 강물은 쪽처럼 푸르렀네.

강남이 아니 그리울 수 있으랴.

백거이 - <억강남(憶江南)>

大江東去浪淘盡千古風流人物

故壘西邊人道是三國周郞赤壁

亂石崩雲驚濤裂岸捲起千堆雪

江山如畫一時多少豪傑

遙想公瑾當年小嬌初嫁了雄姿英發

羽扇綸巾談笑間强虜灰飛烟滅

故國神遊多情應笑我早生華髮

人間如夢一樽還酹江月

큰 강이 동쪽으로 흐르는데 물결에 천고의 풍류와 인물도 다하였다.

옛 보루(堡壘)의 서편이 곧 삼국 주유적벽이거늘.

어지러이 바위는 구름 위로 솟았고 놀란 파도는 기슭을 찢으며 천 무더기 눈을 말아올린다.

강산은 그림 같거늘 한때 호걸이 얼마나 많았던가!

공근[1]

당시의 해를 생각해 보니 소교가 처음 시집 왔고 웅자는 영기를 펼쳤다.

깃털 부채에 윤건 쓰고 웃고 떠드는 사이에 강노를 재로 날리고 연기로 사라지게 하였으니.

고국을 생각하며 노는데 다정한 이는 마땅히 웃으며 내가 일찍이 흰머리가 났다 하겠지.

인간은 꿈과 같으니, 한 잔 술을 강물의 달을 위해 따르네.

소식(시인) - <염노교사 - 적벽회교>

(cí)
사는 당나라 때 생겨난 운문양식으로, 생겨난 당시엔 근체시에 밀려 유행하지 못하고 송나라 때 유행하였다. 본디 당시 유행하던 곡조에 붙여 읊기 위한 노랫말[2]이나, 당시엔 제대로 된 악보가 없어 현재는 그 곡조를 알 수 없기 때문에 노랫말만 전한다.
당시엔 한 곡조에 부르는 사람이 자유롭게 사를 지어 붙이는 방식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제목만 같고 나머지는 다 다른 사가 속출하였다. 결국 송대에 이르러 소동파가 부제#s-1를 붙이는 방식으로 곡조와 사를 분리하여 이 문제를 해결하였다.

2.1. 역사


당나라 때 유행한 문학 장르는 위에서 설명했다시피 근체시이다. 문서를 참조하면 알겠지만 근체시는 지켜야 할 형식이 많아 지식이 부족한 민중보다는 지배계층에게 널리 퍼졌으며, 민중에게는 위진남북조시대부터 형식이 자유로운 노래가 유행하였다. 한편 남북조시대에서 수나라#s-4, 당나라에 이르는 동안 서역(인도, 중앙아시아) 음악이 유입되어 민간가요가 크게 발전한다. 그리고 당나라에 이르러 이러한 민간가요가 상류사회에 전파되었다.

개원 이래로 노래하는 사람들이 오랑캐와 민간악곡을 뒤섞어 사용하였다.

- 구당서 음악지

이러한 일이 일어난 이유는, 당시 상류 사회에서 유행했던 근체시가 형식이 너무 엄격하여 그것을 읊는 문인들이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데 한계가 있다고 느끼고, 곧 형식이 자유로운 사에 매료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당현종 이후 문인들의 사 창작이 본격화되어 백거이 등과 같은 당대 유명 시인들이 사를 함께 짓기 시작한다.
하지만 사를 하나의 문학 장르로 확정시킨 인물은 온정균(溫庭筠, 820년 ~ 870년?)이라는 대가로, 민간가요 특유의 서정성을 살리고 화려한 필치를 동원하여 사를 작성하였는데, 이후 온정균의 사를 바탕으로 오대십국시대에는 본격적인 사의 창작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송대에 이르러 장선(張先, 998년 ~ 1078년)과 유영(柳永, 990년? ~ 1050년?)이 기존의 1절(2~4구)뿐이었던 사를 2절 이상으로 늘리기 시작하여 만사(漫詞)를 만들어 낸다. 또 소동파에 의해 서민적이거나 여성적이었던 사의 정서에서 남성적, 서사적 정서가 추가되어 주제가 풍부해졌으며, 이 때부터 사에 부제가 붙기 시작했으나 대신 음악성이 떨어졌고, 주방언(周邦彦, 1057년 ~ 1121년) 등이 이를 사의 본래 성격과 맞지 않다 여겨 다시 음악성을 회복한다.
하지만 남송 말기에 유미주의적 가치관이 생겨나면서 형식주의에 치우쳐 쇠퇴하였고, 원나라 때부터 형식주의에 치우친 사를 대신할 새로운 민간예술로 곡(曲)이나 희곡이 등장하면서[3] 자취를 감추었다. 다행히 명나라청나라 때부터 송대의 사에 관심을 갖고 연구한 것이 있어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사가 몇 개 있는 상태이다.

2.2. 종류


크게 소사(小詞)와 만사(漫詞)로 나뉜다. 이들은 각각 단조체와 쌍조체라고도 불리는데 소사는 1절(2~4구)만 있고 만사는 2절 이상이 있다. 소사는 초기, 즉 당대와 오대십국시대에 주로 지어졌으며 만시는 위의 역사 문단에 서술되었다시피 송나라#s-3 때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다.
글의 주된 성격에 따라 분류할 수도 있는데, 온정균에 의해 처음 사가 생겨났을 때의 사는 여성적인 성격이었고 주제는 보통 남녀간의 사랑이별이었으나, 장선과 유영이 제시한 만사는 이전에 비해 도시적이고 일상적인 성격을 띄게 되었으며 기녀들 앞에서 지은 게 많아 거칠고 속된 표현도 자주 사용되었다. 반면 소식 이후 남성적인 어투가 사용되고 영물적, 서사적 성격을 띄며 주제가 풍부해지고 부제까지 붙어 저자의 감성을 더욱 세밀하게 드러낼 수 있으나 대신 음악성이 퇴화된 사가 많이 지어졌는데, 소식 이전의 여성적, 일상적 사는 완약파(婉約派)로 분류되며 온정균이 처음 제시한 장선, 유영 이전의 2절 이하의 사는 또 화간파(花間派)로 따로 분류된다. 그리고 소식 이후의 남성적, 영물적 사는 호방파(豪放派)이다. 그리고 주방언이 완성한, 음악성이 다시 회복된 사파는 격률사파(格律詞派) 혹은 한무제가 세운 한시를 관리하는 부서였던 악부(樂府)를 따서 악부사파(樂府詞派)라고 불린다.
[1] 주유의 자[2] 가사(歌詞)의 사(詞)가 이것이다.[3] 다만 원대에 중국에서 작성된 곡이나 창(唱, 희곡의 노래) 중에는 송사의 영향을 받은 것이 일부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