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문고등학교 비리재단 반대시위 사건

 



1. 개요
2. 전개
3. 참고 및 출처 자료
4. 영화 모티브로 등장


1. 개요


상문고등학교의 비리재단 관련 사건.
애초에 80년대도 아니고 2000년대 첫 해에 고등학생들이 주체적으로 시위에 나서게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흠좀무한 사태였다고 할 수 있다. 다만 그렇다고 고등학생이라고 사회투쟁에 나섰던 역사가 없는 것은 아니고, 1994년 청소년단체 '샘' 사건으로 사라지기 전까지만 해도 고등학생 운동권은 흔했다.[1] 아니 4.19 혁명으로만 거슬러 올라가도 언니, 누나, 형, 오빠들을 잡아가지 말라고 하면서 초등학생들이 당당히 투쟁에 나섰다.
세월이 지나 1990년 6월에는 경화여고 학우 김수경이 투신자살로, 9월에는 충주고 학우 심광보가, 1991년 분신정국 당시 보성고 학우인 김철수가 분신자살로 항의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사회적 분위기가 그에 맞는 의식을 형성하게 한다는 산 증거.

2. 전개


상문고 학생 인권 선언

우리 학생은 하나의 인격체로서 자신의 삶을 사랑하고 존중하도록 배울 권리가 있다. 십 수년간 배움의 과정은 우리가 서로를 같은 인간으로서 존중할 권리와 의무가 있음을 자각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지난 암울한 세월 불의한 세력으로부터 유린당한 인권을 되찾기 위하여 이 땅의 민주시민들이 보여준 용기와 희생의 역사는 그러한 가르침의 산실이었다. 그러나 민주화의 역사가 살아 숨쉬어야 할 학교에서는 여전히 강압적이고 비민주적인 통제가 행해지고 있고, 입시를 빌미로 한 이기심의 고취는 우리모두를 불행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고 있다. 이에 우리 학생들은 교육의 진정한 주체로서, 그리고 자신의 삶을 풍성히 가꾸어나갈 책임이 있는 독립된 인격체로서 지난 숭고한 역사의 가르침을 본받아 우리 자신의 인권을 되찾을 것을 선언한다.

양적인 교육대상의 확대만이 강조되어 온 근대부터 신민(臣民)들을 통제하기 위한 관료주의적 편의만이 강조된 일제와 군사독재 체제를 거쳐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우리 교육은 어떤 우를 범해 왔는가. 한국의 주변부적인 위상과 암울한 시대의 부산물인 획일화 교육은 학생들의 개성을 철저히 무시한 채, 인간이 가진 무한한 가능성의 싹을 뿌리뽑아 왔다. 학생 개개인이 마땅히 인간으로서 존중받아야 할 권리는 성적이라는 단 하나의 평가기준에 의해 여지없이 유린되었다.

'애들은 맞아야 한다'는 식의, 암울한 시대가 남긴 우민화 교육의 잔재는 학생들을 타율적으로 길들여 왔다. 학생과 교사 사이에 응당 보장되어야 할 평등한 인격체간의 의사소통의 권리가 짓밟힌 채, 기성 제도권의 감내할 수 없는 폭력이 학생이기 이전에 한 인간인 우리들 스스로에 대한 존중심을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비합리적인 인권의 억압은 대한민국의 학생들을 오로지 눈치만 발달한 타율적인 바보로 만들어 왔다. 이러한 비민주적 교육을 받고 자란 우리가 미래를 담당하게 된다면,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의 크나큰 손실과 도덕적인 위기를 초래할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이제 학생들은 독립된 인격체로서 천부적으로 부여받은 권리를 주장하고자 한다. 우리는 더 이상 '훈육'이라는 명목으로 우리들에게 가해지는 비인격적 대우에 순응하지 않을 것이다. 학생 통제의 편의만을 위한 강압적인 인권유린의 관행들은 반드시 시정되어야한다.

일부 교사들과 기성세대의 구태의연한 권위주의도 거부한다. 우리들은 더 이상 교권이 '힘의 권위'로서 학생을 짓누르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교권은 '사랑의 권위'여야 하며 교사의 직분에 부합할 때 부여되는 공적인 권리여야 한다. 이러한 민주적 의식의 각성 하에, 스승과 제자는 서로를 존중하고 상호간의 예의를 지켜야 한다.

이제 학생들은 우리 자신의 미래를 스스로 결정할 권리를 부모와 교사, 기성사회로부터 되찾을 것을 선언한다. 우리는 각자의 능력과 적성에 맞는 교육을 받을 권리를 가지고 있다. 더 나아가 모든 종류의 사회적 요구와 평가로부터 벗어나 한 인간으로서 자신을 존중하고 사랑하도록 가르침을 받을 권리를 갖고 있다. 각자의 재능과 소신에 따라 자신의 즐거운 인생을 살아가고 남을 사랑하고 존중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교육, 이제 우리 학생들은 그러한 교육을 요구한다.

학생들의 일은 학생들이 스스로 처리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민주 교육이요, 숭고한 역사의 열매인 민주주의에 대한 학습이다. 우리는 학교에서 학생과 관련하여 이루어지는 모든 의사결정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를 요구한다. 전반적으로 민주화되어 가는 우리 사회의 추이를 보아 이는 시대의 대세임이 분명하며, 민주사회의 주역으로 성장해 나갈 학생들에게 필수적인 '산 교육'이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러한 민주교육의 연장선상에서 우리는 학생의 본분인 학업에 열중하고 스스로를 방종으로부터 진정 자유롭게 할 것을 다짐한다.

오늘 우리는 학생들의 정당한 권리를 되찾을 것을 선언한다. 진정한 교육의 민주화와 학생들의 민주 시민의식 배양을 위하여, 이 땅의 올곧은 역사발전을 위하여 우리는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대한민국의 교육을 반석 위에 올려놓을 수 있도록 전력을 경주할 것이다. 학생의 인권이 보장되고 존중되는 학교, 학교의 주인인 학생이 진정한 주체가 되는 학교를 만들고자 하는 우리의 노력이 모일 때, 민주 교육의 이상은 현실로 다가올 것이다. 그 현실을 하루라도 앞당기기 위하여, 학우들아 일어서자.

2000년 3월 18일

상문고등학교 학생 일동

1994년에 재단과 교장의 비리와 횡포를 도저히 감내하지 못하고 일부 교사들이 양심선언을 하면서, 상춘식 교장 및 그의 아내 이우자 이사장의 학생부 성적조작 및 공금횡령 비리 사건[2]이 발각되었다[3]. 이 사건으로 이사장과 이사들이 구속, 수감되었고 재단이사의 해임 및 관선이사의 파견이 이루어졌으며 교육법이 개정되었다. 이 덕분(?)에, PD수첩이나 그것이 알고 싶다 등의 프로그램에 출연하게 되었다.
그러다 1999년 말 부터 비리재단이 학교 복귀를 노리고 꼼수를 부리던 정황이 포착되면서 학교가 술렁이기 시작했고, 2000년 1학기 말 즈음에는 본격적으로 시위에 돌입하여 학생회측에서 1학기 기말고사 거부를 하고[4], 2000년 7월 초에 아침 10시경에 고등학생 신분으로 서초동 법원, 검찰청 앞까지 진출한 전대미문의 시위를 하기도 하였다.
사실 이 시위는 계획된 시위가 전혀 아니었고, 학교 운동장에서 농성을 벌이다 누군가 법원으로 나가자는 즉흥적인 제안에 모두들 순식간에 동요되어 갑작스레 이루어진 시위였다.[5] 운동권에 뜻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단순히 비리재단 복귀를 반대한다는 일념하에 즉흥적으로 벌인 시위였기에, 일반적인 시위와는 달리 아는 운동권 노래도 전혀 없어서 교가와 애국가만 죽어라 부르긴 했다.
1,500여명 가까이 되는 전교생들이 갑작스레 일제히 거리로 쏟아져 나온 탓에 혼란이 있었다. 특히 서울고 사거리와 그 주변 골목에서 출동한 전경들과의 대치상태가 상당히 심각했다. 학생들이 더 이상 진출하는 것을 막고자 전의경들이 사거리 사방 길을 전경 차량을 활용하여 담을 만들어 전의경들이 방패를 형성하여 차단막을 형성하였다. 학생들은 아무런 무기도 없었고 폭력도 행사하지는 않았지만 1,500여명의 혈기왕성한 고등학생들이 힘으로 계속 밀어붙이는 것을 차단하기엔 역부족이다 보니 압사를 당할 생명의 위협을 느끼기 시작한 나머지 학생들보다 한참 형뻘인 전의경들은 서서히 미쳐가기 시작했고, 학생들의 진출을 막기 위해 압박할 수밖에 없었다. 차단 과정에서 학생들과 충돌도 발생하여 전경의 무자비한 곤봉과 군홧발, 방패 세례 등에 의해 팔골절 등의 부상을 입은 학생도 있었고, 시위과정에서 물리적인 충돌을 막기위해 학생들과 전경 사이에 방패처럼 서 있던 학부모가 누군가 던진 물체[6]에 맞아 부상을 당한 경우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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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10시 경에 학생들이 쏟아져 나온 서울고 앞 사거리 일대의 교통은 당연히 마비된 상태였는데, 사정이 급한건지 짜증이 난건지 어느 덤프트럭이 막무가내로 밀어붙여 전경 차단막이 뚫리는 바람에 학생시위대가 서초동 법원, 검찰청쪽으로 진출하는 길을 터주는 꼴이 되어 버렸다.[8] 서초동 서울지방법원과 검찰청 사이에 있는 대로변 막다른 길에 모인 학생들은 학생회장 및 학생회 임원들의 삭발식을 진행하고[9], 재단 반대 시위 구호와 교가를 부르며 계속 시위를 진행했으나, 시위 장소가 법원/검찰청이라는 워낙 국가 중요시설에 인접한 민감한 곳인지라 시위진압용 장갑차량까지 등장하여 해산방송을 하는 등 전경의 압박수위가 높아졌고, 점심시간이 가까워져 학생들의 전투력이 급감한 탓에 이내 자진 해산하였다. 그래서인지 다행히 연행된 학생들은 없지만. 오후에 이뤄진 자진 해산에는 당시 날씨의 영향도 있었다. 시위는 낮 최고기온이 무려 33.0℃에 구름 한 점 없는 날씨 속에서 한낮까지 진행되었다. 계획없이 급작스럽게 시작된 시위였던지라, 학생들은 날씨에 대한 그 어떠한 대책도 없이 교복 하복 차림으로 아스팔트 바닥에 앉아서 더위와 햇볕을 고스란히 받았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 더위에 탈진하거나 피부에 화상을 입은 학생이 나오는가 하면, 오랜 시간 아스팔트 바닥에 앉아있으면서 바지가 녹아 눌러붙었다는 이야기조차 나올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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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위 이후로 조금 사태가 잠잠해지는 듯 싶었지만 아직 근본적 해결책이 없었기에 불안한 상황속에서 학교가 운영되다, 이듬해 2001년에는 재학생들의 등교거부, 담임교사 이중 배정(교사들끼리 재단찬성파와 반대파로 나뉘어 각자 담임교사를 배정한 것이다. 그래서 2001년 3월 개학과 함께 각 반에 담임교사가 2명씩 와서 서로 실랑이를 벌여 학생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기도 했다.), 신입생들의 학교배정 거부와 당시 2학년 학생들의 집단 전학신청으로 인해 학교 자체가 완전히 붕괴될 뻔했다.
당시 1학년 신입생의 경우 기존 입학인원의 80% 이상이 입학거부 및 전학신청을 하였고, 2학년 학생들의 경우도 전체 인원 중 20% 가량 정도가 전학신청을 한 상태였다. 당시 복귀 재단측에서 교장으로 임명된 장방언(아래쪽 사진의 갈색 양복 입은 교사)이라는 사람은 이들을 진정시키거나 설득하는 노력도 없이 그냥 전학신청서에 도장만 쾅쾅 찍어대는 한심한 작태를 보여주기도 했다.
또한 당시 교육청의 신입생 재배정 조치에 대해, 기존 재학생들의 학부모들이 "학교를 정상화한다더니 폐교조치를 하는 것"이라면서 격렬히 반발하여, 서울 서초동에 위치해있던 유인종 당시 교육감의 자택앞에서 새벽 4시까지 밤샘 농성을 한데 이어 서범석 당시 부교육감과 간담회를 통해 이러한 대책을 유보시켰다. 결국 2001년 당시 신입생들의 80%는 다른 학교로 옮겼지만, 이후 신입생들이 배정되지 않는 사태를 막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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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들도 이 사태로 인해 파벌이 나뉘게 되는데, 재단복귀를 반대하는 쪽은 상대위('''상'''문고사태 '''대'''책 '''위'''원회)라는 이름으로 활동했고[10], 찬성하는 쪽은 상미교('''상'''문의 '''미'''래를 생각하는 '''교'''사들의 모임)로 그룹이 나눠지게 되었다. [11]
학생들 입장에서는 기본적으로 재단 복귀를 반대하였지만, 시위 등의 각종 운동이 맞물려 분위기가 상당히 고조 되고나서 학생회를 비롯한 일부 학생들은 상미교 측 교사들을 '''상'''춘식에 '''미'''친 '''교'''사들이라고 하며, 2000년 7월 시위 당시에 상미교 교사들 중 대표 교사들의 사진을 붙인 인형들을 불태우는 화형식을 하는가 하면, 상미교 교사의 차량을 일부러 파손하고 도망가거나, 상미교 교사들과 관련하여 사실무근의 악성루머까지 돌았다.
2002년에 대법원에서 전 이사장 상춘식에게 패소 판결을 내려, 2012년 봄까지 교육청에서 이사를 파견해서 운영하였다. 덤으로 이 사건으로 당시 이사장이던 상춘식은 상씨 종친회에서 제명까지 당했다(...관련기사). 덕분에 특이하게 '공립보다 더 공립스러운' 사립학교가 되었다. 과거 명문인 덕분에 동문회의 지원 등이 빵빵해서 사립같은 공립학교인 옆학교(서울고등학교)와는 정 반대되는 상황인 듯. 현재는 목천 상씨 문중에서 운영하고 있고, 학교법인 명칭도 동인학원에서 상문학원으로 환원하였다. 최근에 상춘식으로 대표되는 문제의 구재단이 학교 운영에 복귀하려고 소송을 걸었으나, 결국 패소하면서 구재단의 복귀는 차단되었다. #
2012년에 관선이사진의 철수 및 상채규 이사장을 필두로 한 정이사가 선임되면서 상문고등학교는 정상화 궤도에 오르게 되었고 상문고등학교 사태는 사실상 해피 엔딩으로 종결되었다. 그리고 2016년 5월 25일을 끝으로 상채규 이사장의 임기가 종료되었고 앞으로 차기 이사장이 선임될 것으로 보인다. 일단은 사학분쟁위원회가 상춘식 일당의 손을 들어주지 않는 이상 앞으로도 상문고등학교는 큰 문제없이 돌아갈 전망이다.
비슷한 사례로 부산에 위치한 브니엘학원 분쟁사태가 2016년 지금도 현재진행형이고 이쪽도 몸싸움 까지 발생할 정도로 격렬한 다툼이 있었지만[12], 이쪽은 구재단이 퇴출된 이후에 학교를 차지한 신재단도 상당한 비리재단 이다보니 나중에는 신재단의 횡포와 비리에 견디다 못한 이들이 오히려 과거에 부도사태를 불러온 비리재단인 구재단을 지지하는 웃지못할 상황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상문고등학교가 서울에 있는것에 비하면 브니엘학원은 저 멀리 부산에 있는데다가 아웃풋도 다소 부족하다보니 상대적으로 덜 조명받은 것. 그 외에도 유사 사례로 예원학교, 서울예술고등학교 구재단 복귀 시도 사례나, 안양시 신성중학교, 신성고등학교 구재단 복귀 시도 사례도 있었으나 이쪽은 상문고등학교의 경우 처럼 구재단이 소송에서 패소하면서(법원이 사학의 공공성을 우선시하여 판결하였다.) 구재단의 복귀가 차단되고 학교의 정상화가 이루어지면서 사실상 해피 엔딩으로 종결되었다.

3. 참고 및 출처 자료



4. 영화 모티브로 등장


  • 두사부일체 - 상춘고라는 이름으로 거의 동일한 사학비리를 다룸. 이사장 이름도 상춘만


[1] 한총련 4기 의장 강위원도 고등학생 운동가였다.[2] 당시 비리에 대한 이야기들 중 가장 유명한 두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학교 강당을 짓는다고 학생들에게 돈을 걷고 다음날 현재 상문고 옆에 있는 그 골프장이 올라갔다는 전설이 있다. 다른 하나는 대학 입학에 따라 촌지를 받았다고 한다. 서울대는 100만원부터 시작해서 연고대는 그보다 낮은 액수 등.[3] http://www.ziksir.com/ziksir/view/1613[4] 이로인해 기말고사는 2000년 여름방학 후로 미루어졌다.[5] 사실 상문고에서 서울지방법원과 검찰청이 위치한 서초동 법조단지까지는 거리가 한 두 블럭 정도로 상당히 가까운 편이어서 걸어서도 10분대로 접근 가능하기에 이런 즉흥적인 제안이 자연스레 먹혀 들어간 것이다.[6] 흉기나 무기 같은건 아니었고 누군가 들고 온 나무 의자였다고 한다.[7] 맨 앞의 삭발하는 학생은 당시 학생회장이었던 김영도(3학년)이다.[8] 물론 법원, 검찰청으로 진출할 때에는 전교생들 중에 많은 인원들이 이탈하여 인근 PC방으로 흩어지기도 하는 훈훈한 스토리도 있다.[9] 나름 비장한 분위기였지만 우습게도 바리깡 배터리 충전을 제대로 하지 않은 탓에 삭발 도중 바리깡이 작동을 멈춰버려 일부 학생회 임원들은 삭발을 하다 만 머리로 시위를 할 수밖에 없어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는 후문이 있다.[10] 아이러니 하게도 상춘식의 오른팔과 앞잪이 같던 교사들 일부가 상대위 소속이었다. 비리재단 척결의 불똥을 피하기 위한 갈아타기 인듯.[11] 아직도 명단이 인터넷 어딘가 돌아다닌다. 은퇴를 하지 않은 경우 나이가 좀 있는 교사들은 명단에 이름을 찾아볼 수 있다.[12] 그 이후인 2011년에는 구재단 복귀에 반대하는 이들이 부산시에서 차량으로 출발하여 먼 거리를 달려와서 서울시에 위치한 광화문 정부 청사 앞으로 진격한 적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