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니엘학원 사태
1. 브니엘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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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금정구 구서동에 위치한 사립학교의 집합체로,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1] 개신교 계열 교단에서 설립였는데, 전국적으로도 보수 개신교 성향이 매우 강한 곳이다. 현재는 그 후신인 정선학원으로 이어져, 정선학원은 브니엘고등학교, 브니엘여자고등학교, 브니엘국제예술고등학교, 브니엘국제예술중학교로 구성된다.[2] 이중에서 브니엘국제예고나 브니엘국제예중은 후술한 대로 전국적으로도 유일무이한 사례를 꽤 많이 만들어내서 마치 가공의 교육기관을 방불케 할 정도이다. 부산에서 단기간에 재단이 가장 많이 교체되어(6번) 비리사학의 대명사ㆍ사학비리 제조공장 같은 불명예스러운 수식어가 붙는 등, 이 학교법인은 어떤 면에서는 그 유명한 상문고를 능가한다.[3] 사건이 완전히 종결된 상문고가 차라리 낫게 보인다.[4] 그리고 사학분쟁조정위원회가 2003년 8월 출범한 이후 처음으로 다루었고,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사학분쟁조정위원회에 상정 중인 사학이다.
정의당 정진후 의원이 공개한, 2013년에 법정전입금을 재단에서 단 한푼도 내지 않는 전국 사립고 28개교 중 브니엘 계열 학교 3개교가 모두 포함되는 불명예를 얻기도 했다.# 게다가 부산에서 법정전입금을 내지 않은 사립고가 고작(?) 3개교밖에 나오지 않았는데, 모두 브니엘 계열이라 더욱 더 불명예스럽다. 참고로 2013년이면 관선이사가 파견된 시기도 아니고 '''수천억대의 자산[5] 을 가졌다고 주장하는 모기업이 엄연히 존재하던 시기'''인데도 저랬다.
2018년 11~12월 KBS가 지목한 비리사학 80선 중에서 브니엘학원이 포함되었다. 어찌보면 지극히 당연할지도 모르겠지만... # 더군다나 부산지역 고등학교중에서는 브니엘 계열 고등학교들이 유일하게 포함되었다는 불명예를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었다. 비리사학 리스트
2. 1999년 브니엘학원 부도 사태
2.1. 리즈 시절 및 사태의 발단
브니엘 학원은 1958년에 미국 중아선교회에서 전후 복구를 돕고자 한국에 파견한 젊은 선교사 박성기[6] 가 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빈민들을 위해 중학교 과정 고등공민학교 브니엘 야학을 세운 데에서 시작한다. 하지만 이는 설립자의 주장이며 학교법인의 이후 행적을 보면 진짜 그런 의도가 맞았는지 과연 의문이다.[7] 1963년 산업교육진흥법을 시행하자 이에 따라 1964년에 정식 학교법인으로 인가를 받고 그 해 경상남도 동래군 북면 구서리(현 금정구 구서동)에 브니엘고등학교의 전신인 브니엘 실업고등학교를 개교, 1966년에 고등공민학교 브니엘야학을 전신으로 하는 브니엘중학교(1998년 폐교)를 개교하면서 본격적으로 출범하며 승승장구했다.
1968년에는 브니엘중고등학교 여자 테니스부를 만들어서 본격적으로 학원 스포츠에 진출했으며, 1972년 연말에는 고등학교 본관 건물을 새로 만들었다. 본래 브니엘고는 남녀공학이었다. 하지만 1974년 부산직할시[8] 고등학교 평준화 제도로 근처에 이사벨여고가 일반계 여고로 지정되는 바람에 브니엘고가 일반계 남고로 바뀌었다.[9] 일반계 남고가 되면 브니엘고 여자 테니스부와 여자 무용부를 해체해야 하기 때문에, 여자 테니스부와 여자 무용부를 계속 유지하고자 동래구의 주경야독 근로청소년들과 고교 여자 테니스 선수들 등을 모아서 1975년부터 야간제 특수지 여자반을 따로 운영하였다. 그렇게 브니엘중고교 여자 테니스부는 일단 위기를 면하고 부산 최고의 테니스 명문으로 떠올랐다.
물론 일반계가 된 브니엘고도 1974년 고교 평준화로 그 동안은 평생동안 붙어볼 기회가 없다고 생각되던 (1970년대까지 부산 3대 명문인) 동래고와 계급장 떼고 정면승부할 기회가 찾아왔다. 동시에 동래구 일대에 사직 주공아파트ㆍ시영아파트ㆍ삼익아파트ㆍ한양아파트 등 대규모 아파트 단지는 물론이고 경남아파트ㆍ현대 아파트, 심지어 남천 삼익비치의 라이벌로 군림하던 '''동래 럭키아파트''' , 1988년 부산지역 아파트 분양의 최대 핫이슈 였던 복천동 '''우성베스토피아'''[10] 아파트 같은 최고급 아파트도 많이 들어와서 부유층 집안[11] 의 우수 학생들이 동래고, 동인고뿐만 아니라 브니엘고로도 대거 입학하여 일대에서 치맛바람이 가장 강한 고등학교로 자리잡았다. 특히 '''동래 럭키아파트'''는 굉장히 의미가 큰 아파트인데 부산 뿐만 아니라 지방에서 당대 최고 분양가를 자랑한것은 기본이고, 지금은 자이 브랜드로 유명한 GS건설(당시 럭키개발)이 주택사업 진출 극초창기에 만든 아파트 중에 하나로 럭키금성그룹 차원에서 성공적인 주택사업 안착을 위해 전폭적으로 지원하여 정말로 작정하고 심혈을 기울여서 만든 역작이었는데#, 이런 아파트에서 우수한 학생들이 대거 유입된 것이었다. 1986년에는 혁신적인 설계의 고급 주공아파트이자 지금도 대한민국에서 혁신적인 아파트 하면 순위권에 드는 '''망미주공아파트'''도 연산동 내에 완공되어 입주하기도 하였다. 불과 수년 사이에 학군 내에 역대급 명작 아파트가 둘이나 들어온것. 이러한 주변 환경의 기하급수적인 변화로 브니엘고는 1980년대 들어 주간반만 36학급으로 증편되면서 규모 면에서도 부산 4학군 최대의 고등학교로 자리잡게 되었다. 행정상으로는 같은 학교였던 18학급 야간제 브니엘여고 까지 합하면 무려 54학급에 3000명을 가뿐히 넘길 정도. 30학급 브니엘중학교 까지도 포함하면 최고 절정기에는 84학급에 5000명대에 달하는 정원을 자랑하는 학생수 만큼은 메가톤급인 사학법인으로 자리잡았다. 5000명대면 당시 기준으로는 학생수 만큼은 어지간한 중형 대학교 수준으로 일대 상권을 쥐락펴락 할 수 있을 정도.[12]
이러한 천재일우의 기회를 제대로 잡고 철저히 스파르타식 교육으로 학생들을 독하게 공부시킨 결과, 1979년애는 서울대에 30명의 입학자를 배출하면서 경남고의 36명에 이어 부산 제2위의 실적을 기록하여 역사상 가장 뛰어난 실적을 보였다. 1988년에도 서울대에 28명을 보내면서# 수많은 학생들을 SKY대 같은 명문대와 의치한으로 진학시키는 등 70~80년대에 걸쳐 브니엘 학원은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고, 브니엘고는 일대 부유층 학부모들을 제대로 사로잡았으며 한때는 동래 럭키아파트의 학부모들이 가장 선호하는 고등학교가 되었다. 이 시절에 들어온 학생 중 부산 3대 부자 이자 설립자 박씨의 절친이던 장성만의 장남 장제국[13] 도 있었으니, 당시의 성세를 두고 더 중언부언할 필요가 없다. 여담이지만 지금은 폐교된 브니엘중은 2018년 기준으로 부산의 3대 건설업체인 협성건설의 김청룡 대표[14] 가 이 무렵에 재학했다. 그 외에도 브니엘고등학교는 아니지만 브니엘중학교 출신인 정성태씨가 1988 학력고사 전체 수석을 하게 되면서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는 바람에 브니엘학원은 전국적으로 명성을 떨치며 주가가 크게 오르게 되었다. # 지금으로 비유하자면 대구광역시 수성구의 경신교육재단 정도의 위상이었다.
더군다나 당시 4학군 일대 주거지 개발로 학생 수가 폭증하는데도 고등학교 수는 턱없이 부족해서 계속 지어도 지어도 모자랐다. 이러니 브니엘고가 명문으로 떠오르지 않았다면 오히려 더 이상했을 것이다. 속칭 부산판 8학군으로 불리우던 부산 4학군의 명문 이미지가 만들어진 때도 이 시점이었다. 1980년대 후반을 넘겨 부산 4학군에 고등학교가 많이 늘어나자, 한때는 대구광역시 수성구와도 직접적으로 경쟁이 붙었던 적도 있었다. 최고 전성기였던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대구 경신고, 덕원고와 부산 대표/대구 대표 고등학교의 자존심을 걸고 치열하게 접전을 벌이기도 했었고, 부산이 대구보다 고교 평준화가 6년이나 빨랐던 만큼 1970년대 말~1980년대 초반에는 SKY대 진학 데이터와 의치한 진학 데이터를 6년 먼저 확보한 브니엘고가 경신고나 덕원고보다 유리했는데, 지금의 경신고와 브니엘고의 위상을 생각하면 격세지감일 따름.
브니엘학원의 구 연산동 부지(현 연산반도유보라아파트)는 36번이나 29번 같은 부산시 인기 버스 노선들이 경유하였고, 1985년에 부산 도시철도 1호선이 개통하여 접근성이 정말 좋았지만 부지면적이 4천 평에 불과하여 당시 2개 학교를 수용하기에는 다소 비좁았다. 교통의 요지라는 점이 양날의 칼이 되어 소음 문제가 있었으나 학교나 재단 차원에서는 방음 대책도 없었다. #, 날림공사 때문에 1960년대 중반에 만들어서 30년도 채 되지 않은 중학교 건물이 1980년대 후반부터 기울어졌다.[15]
건물이 기울어지기 전인 1978년부터 브니엘학원은 학교 이전 및 확장을 계획하였다. 국가기록원에 따르면 당초에는 그런대로 접근성이 무난한 연제구 연산9동(토곡)으로 이전하려고 부지 매입을 추진했으나 재단 문제 때문에 무산되었다. 해당 부지는 이후 부산시 교육청이 매입해서 1980년대에 부산광역시 과학연수원이, 그리고 1991년에 부산과학고[16] 가 되었다.]가 들어섰고 2003년에는 장영실과학고가 이 자리에서 개교했으나 부산과학고로 교명을 바꾸고 2011년에 교사를 옮겼다.[17] 하여튼 2018년 지금 기준으로 보면 이는 브니엘고나 브니엘중 입장에서는 땅을 치고 후회할 일이 되어버린 것......
2.2. 몰락
삼성종합건설이 당국의 허가 없이 자연녹지를 불법매각하여 잡음이 약간 있었는데 이것이 비극의 서막이었다.#
2015년 지금의 시점으로 보면 차라리 부산정보고등학교(구 영남상고)가 있는 부산교육청 뒤쪽 부지나 양동여중이 있는 물만골 근처 부지로 이전을 추진하는 편이 훨씬 나았을 것이다. 이 부지들은 학교가 들어서기 이전, 임야였던 1990년대에 박영학원(신라대, 신라중 재단)이 부일여중(현 신라중) 이전 부지로 인수하려고 간보다가 재정난으로 무산된 적이 있었다. 그때 브니엘학원이 구서동 부지 대신 이 부지들을 노렸다면 충분히 인수할 수 있었고, 교통편이나 주변환경도 상당히 준수하며, 부산교육청도 중학교 부지로도 적합하다고 제안할 정도였다. 이 부지로 이전했다면 브니엘중이 폐교될 일은 절대 없었을 것이다.
영남상고(부산정보고) 이전 추진(1992년)은 브니엘학원 이전 추진(1989년)보다 늦게 이루어졌고, 양동여중 부지는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인수 기회가 있었을 정도. 물론 면적당 가격은 브니엘학원이 매입한 구서동 부지보다 당연히 비싸지만, 이왕 학교 이전을 추진할 생각이면 어설픈 부지에 이전하여 온갖 병크를 저지르거나 교육청에게 혼쭐이 나기보다는 돈 더 주고 제대로 된 부지를 인수해서 이전하는 편이 장기적으로 이득이다. 총소유비용(Total cost of ownership, TCO) 같은 개념이 괜히 나온게 아니다. 그리고 이 당시에는 해운대구 일대나 화명동 일대도 땅값이 무척 쌌는데 특히 화명동 일대는 지금은 화명신시가지로 개발이 오래 전에 완료 되었지만, 이때는 그냥 쓰레기 매립장으로나 쓰던 형편없는 땅으로 진짜 땅값이 엄청 쌌었다. 저 답없는 부지를 살 돈으로 그 당시에 해운대 신시가지 일대의 땅은 충분히 살 수 있었고, 가격이 더 싼 땅을 원한다면 화명동 일대의 땅을 사는것도 가능했었다. 하다못해 화명신시가지만 해도 지금의 구서동이나 부곡3동 보다는 학령인구가 훨씬 많다보니, 지금 시점으로 보면 브니엘 구재단은 그냥 삼성종합건설에게 제대로 바가지 쓴 꼴이다. 1989년 화명동 하다못해 화명동에 땅을 헐값에 사서 화명 신시가지로 이전했어도 지금쯤 실패한 학교 이전 사업이 아닌 신의 한 수가 되었을 일이다.
게다가 연산동 시절 브니엘고나 현 대연고ㆍ지산고ㆍ예문여고처럼 학부모들이 많이 선호하는 일반고에서 알 수 있듯, 교지면적이 넓다고 학교가 우수한 것은 절대 아니다. 특히 대구광역시 수성구의 경신고도 경신중과 같이 있지만 교지 면적이 그다지 넓은 편은 아니고, 시설은 이사벨 중고교나 예전 연산동 시절 브니엘중고교와 거의 비슷한 수준으로 시설도 썩 좋은 편은 아니지만, 특유의 스파르타식 교육과 뛰어난 SKY대와 의치한 진학률 덕분에 대구광역시 수성구의 부유층 학부모들 사이에서는 최고의 인기 고등학교로 명성이 자자하며 경신고와 인접한 24평 아파트가 8억 7천만 원에 거래되기도 할 정도로 수성구 학군 과열의 원인으로 지목되기도 한다.
여담이지만 삼성은 이후에 자립형 사립고 전환을 노리고 부도난 브니엘학원 인수에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2000년대 초반 서울교육청은 고교평준화 유지를 위해서 자사고 전환을 안 해주겠다고 못 박은 상황이라 삼성이 인수했던 중동고등학교도 그때는 자사고 전환을 못했으나, 부산교육청은 서울교육청이 자사고 전환을 안 하겠다고 못 박은 틈을 타서 어떻게든 자사고를 유치하여 최초 특성화중학교ㆍ최초 특성화고등학교ㆍ최초 국제 중고교ㆍ최초 과학영재학교에 이어 최초 자사고 타이틀까지 얻으려고 혈안이 되었다.[18] 그때 구 재단이 브니엘학원을 포기했으면 브니엘고는 하마터면 대한민국 최초의 자립형 사립고가 될 뻔했다.
1992년부터 학교 이전을 승인받아 본격적으로 브니엘학원 이전을 추진하였다. 1993년 국정감사에 제출된 자료에 의하면 이때 브니엘학원은 한번 더 잡음을 일으키고 말았다. 사전승인 없이 학교 이전을 추진한 뒤 사후동의를 받았던 것이다. 이 때문에 부산시 사학 관리감독 문제가 지적받기도 했다. # 1992년 국정감사에서도 학교 이름을 대놓고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지적받기는 매한가지.# 당시 해당 부지가 접근성 문제가 심각한데다가 여러 가지 문제로 도시계획상 학교를 위치하기에 부적합했기 때문에, 당초에는 부산시에서 이전을 불허하다가 나중에야 당시 부시장이 겨우 승인해주는 바람에 이렇게 되었다고 한다. 학교 이전이 승인되었던 시절이 노태우 정부인 1992년 상반기 인데, 1992년이면 금융실명제 이전이고, 아직까지도 하나회 같은 군사독재정권의 잔재들이 버젓히 실세 노릇을 하던 시절이다보니 이에 대해서는 온갖 추측들이 존재한다.[19]
학교가 생기면 차량통행량이 늘어날 것임을 감안해 당시 협소한 험로였던 동래여고-브니엘고간 진입로 600 m 가량을 학교법인에서 돈을 부담하여 도로 폭을 4~6 m에서 15 m로 확장, 포장하여 기부체납하라는 핵심적인 조건과, 통학거리나 교통 같은 문제는 부산시가 해결해줄 수 없으니 학교가 자체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조건을 다는 등 우여곡절 끝에 이전 승인을 받고 1994년부터 구서1동 현 부지에 학교 캠퍼스 건설을 착공하였다.
학교에서 시내버스를 연장해달라고 계속 부산시에 청원하자, 부산시가 옛다 하며 준 버스가 회동동~서동방향으로 가는 178번이였다. 이전한 지 11년만에 처음으로 겨우 버스 노선이 들어왔지만, 1대 운행에 90분 간격.. 이뭐병... 36번이나 100번 등 구서동에서 회차하고 배차가 좋은 버스를 원하던 재단은 부산시로부터 제대로 엿을 먹었다. 이런 식으로 운영해놓고는 이용자가 없다고 폐선하고 이후에도 버스 노선을 연장하지 않는 명분도 제대로 마련해버리고 말았다. 이는 현재도 계속 이어진다. 2013년 하반기 개편으로 금정구청까지 노선단축된 148-1번을 브니엘고교로 연장해달라고 브니엘고 교장과 구의원까지 청원하였고, 학원을 방문한 운행업체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여 저주(?)가 풀리는 듯했으나, 부산시는 브니엘고 앞도로에서 회차는 교통안전상 위험하고 반경 내 수요가 저조하며, 배차간격 24분 노선으로는 통학시간대 수요를 감당할 수 없다는 이유로 거부하였다...[20]
하지만 금정구에는 일반계 중학교가 남아도는데다가, 앞서 말한대로 하필이면 이전 대상 부지가 워낙 교통편이나 접근성이 엉망이고 등하교거리가 워낙 길어지는 곳이라 일반계 중학교가 위치하기에는 매우 부적합했다. 일반계 브니엘중은 이전 과정에서 수요예측이나 교통편 고려에 실패하고 건물을 과잉건설했는데, 금정구로 이전이 불허되자 건물을 완성하기 직전인 1995년에 학생 수가 1500명이나 되는 멀쩡한 학교인데도 폐교의 갈림길에 놓이고 말았다. 그렇다고 브니엘중을 연산동 부지에 계속 남겨두자니 재단의 예산문제 때문에 이미 그 자리에 아파트를 짓기로 결정해버린 뒤였다. 결국 브니엘중을 폐교조치하고, 대신 중학교 과정 자립형 각종학교인 브니엘 예술학교를 신설하기로 교육청과 합의하였다. 그리고 교육청으로부터 더 이상 재정지원과 중학생 배정을 받지 않기로 하였는데 역시나 나중에 수많은 골치 아픈 사건들의 원흉이 되어버리고 만다. 그것과 동시에 야간제 고교 여자반이 학교장 전형 일반고인 브니엘여고로 분리개교하였다.
이전하기 전부터 우려된 대로 접근성과 교통편이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워낙 막장이 되어버렸는데, 연산동 시절 브니엘 학원 통학을 책임지던 부산 도시철도 1호선이라든가 29번 버스, 36번 버스를 모두 잃고 대신 등하교시에는 좁아서 미어 터지는 데다가 평시에는 '''배차간격 1시간'''인 마을버스들과, 별로 타고 싶지 않은 고물 스쿨버스들이 대신 찾아온다. 이러한 개판 접근성 문제는 브니엘고를 포함한 브니엘 학원 전체가 몰락한 가장 큰 이유이며, 지금도 브니엘고가 비선호학교인 요소이다. 단순히 등하교시 불편함만이 아니라 히치하이킹을 비롯한 교통사고 위험이나, 외진 지역이라 치안 문제도 있어서 금정구민 학부모들에게는 큰 걱정거리이다.
이전 과정에서도 다시 한번 파행이 일어났다. 앞서 말한 대로 부산시는 학교 이전 조건으로 진입로 600 m의 폭을 넓히고 포장하여 기부채납하는 핵심사항을 못 박았고 당시에는 학교법인에서도 전적으로 그 조건에 동의하였다. 그러나 이전 후 브니엘학원은 뒤통수를 치면서 별개사업이라 주장하거나 경영난으로 시행할 수 없다고 배짱을 부리며 갑인 부산시와 금정구청, 부산교육청에 어그로를 끌었고 결국 큰 화를 사고 말았다. # 이 파행은 2년 후인 1998년에도 그대로였지만 교통사고가 여러 건 발생하자 뒤늦게 금정체육공원 개장을 앞두고 체육공원로라는 명목으로 진입로를 확장했다고 한다.# 분명 이것은 부산시에서 제시한 이전조건이었고 구 재단에서도 이전하기 전에는 이의 없이 승락했지만 지금도 구 재단 측에서는 여전히 부산시의 행정폭거라고 우기며 관청들에게 어그로를 끌고 있다. 하지만 학교용지 지정해제 같은 토지 지목ㆍ형질변경은 토지 가치를 크게 변화시킬 수 있는 만큼 상당한 특혜 논란을 불러올 수 있는 사안인데 구 재단은 이러한 것을 특혜가 아닌 당연히 해줘야 하는 것 정도로 여기는듯....
1998년에는 재단이 재정난에 빠졌고 저출산으로 학생 수가 줄어드는 데다가, 나라 전체가 IMF 사태로 신음하는 와중인데도 시대상황을 읽지 못하고, 예술중학교 학생들의 심화교육을 위하여 추가로 브니엘예고를 특성화 고교도 아니고 (정부의 재정지원을 받지 못하는) 자립형 특목고 형태로 추가설립하며 학교법인을 확장했다. , 안 그래도 침몰 중인 학교법인이 일종의 괘씸죄로 제대로 헤드샷을 맞는 짓이었다. 금정구청 세무과 입장에서는 브니엘학원이 수년째 지방세를 거액으로 체납하고, 진입로를 개설하겠다 해놓고도 재정난 드립을 치며 약속을 지키지 않아서 제대로 빡쳤는데, 재정난이라던 재단이 난데없이 고등학교를 신설한다고 하니 어이가 없었을 것이다.[21]
이미 학교 진입로 문제로 제대로 뿔난 부산시와 금정구에서는 학교법인을 정상화하라고 요구하는데, 학교법인은 정상화할 생각도 없고 계속 미네랄 멀티들만 만들어대니 누가 그런 행위를 좋게 볼지... 브니엘예고 신설로 인하여 금정구민들 사이에서도 온 국민들이 IMF 사태로 신음하고 많은 이들이 실직되거나 신용불량자가 되어 거리로 내몰린 와중에, 등록금 비싼 그들만의 사립학교를 뭐하러 만드냐면서 재단이 정말로 눈치 없다는 목소리가 많이 나왔다.[22] 그리고 부산의 두번째 예술고도 원래는 서부산권인 사하구에 신설하려 했었는데 브니엘학원 때문에 금정구에만 인접해서 2개가 생긴데다가, 부산에 예술고가 필요 이상으로 과잉공급되어 이후에 서부산에 예술고 추가설립마저 무산되자, 서부산(사하구, 사상구, 북구, 강서구)의 예술고 진학을 희망하는 학생들은 금정구 까지 먼 거리를 달려와야 하는 불편함 까지 겪게 되었다.
더구나 인근에는 부산예고가 있어서 진입로를 공유하였다. 부산예고 측은 IMF 여파로 학생 수가 급감하는 판에 자기네(부산예고)와 가까운 곳에 추가로 예고를 설립하면 공멸한다고 크게 반발했다. 하지만 브니엘예고는 당시 대학설립준칙주의와 함께 시행된 학교설립준칙주의[23] 덕분에 어이없을 정도로 순조롭게 설립되었다. 일설에 의하면 산업체 부설학교였던 태광여자상업고등학교 보다도 인가가 더 쉽게 나왔다고 한다.[24] 그 결과 부산예고 재단인 동래학원과 출혈경쟁이자 치킨게임이 열리고 말았다. [25] 그 이전인 1997년에도 전년도에 시행된 대학설립준칙주의를 이용해서 추가로 신학대학원 대학 설립 인가까지 받아내었다. 재단이 심각한 경영난에 빠졌는데도 무작정 학교법인 확장에만 치중했으니, 경영이 무모하고 방만했으며 최소한의 방어노력도 없었다고 볼 수 밖에 없다. 브니엘예고가 학교장 전형 고교 시절 브니엘 여고의 위상을 대체하자 브니엘 재단 내 비평준화 고등학교가 되었고, 그 대신 브니엘 여고가 (학생들이 강제배정되는) 평준화 일반고로 전환되어 또 다른 문제가 생겼다.
사실 연산동에서 구서동으로 이전하는 과정에서 연산동과 연제구에서도 논란이 심했다. 유흥가 상인들은 학교정화구역 해제 때문에 이전을 반겼으나, 연산동, 거제동 같은 연제구의 실거주민들은 대부분 이전을 반대했다.# 당시 브니엘학원 부지가 좀 좁기는 했어도 학교 운영에는 아무 지장이 없었다. 브니엘중도 평판이 안 좋기는 했어도, 운영에 별 문제가 없었으므로 계속 연산동에 남았다면 생명연장에는 아무 지장이 없었다.
브니엘고 건물이 노후화되었다는 명분으로 이전했지만, 1973년에 완공된 건물이라 1990년대 초반 기준으로는 노후화되었다고 말하긴 힘들었고, 4학군 내에 이보다 오래된 건물을 쓰는 학교들도 지금도 여전히 많다. 브니엘중 건물이 기울어지는 문제는 보강공사, 또는 개축으로 해결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연산교차로 인근의 소음 문제도 학교법인 자체적으로 이중창 설치 등으로 해결하려는 노력을 찾을 수 없었다. 브니엘중 건물은 대로변에 접했으나 폐교 및 철거 직전까지도 방음벽도 제대로 없었고, 창틀도 하이샤시 같은 이중창으로 교체하기는커녕 1960년대 후반의 밀어서 여는 창틀 그대로 1996년 철거 때 까지 사용하였다. (...) 대한민국에 하이샤시가 처음 등장한게 1976년 인데, 하이샤시가 국내에 소개된지 20년 가까이 된 1996년 까지도 끝까지 하이샤시를 전혀 적용하지 않았던 것이었다.[26] 이것도 저것도 해보다가 학생 수가 너무 줄어서 도저히 안 되겠다 싶을 때 쓰는 방법이 학교 이전인데, 브니엘학원이 연산동 시절에 보인 행적을 보면 결코 그렇지 않다. 정작 소음 문제 또한 학교가 이전한 이후에 도리어 같은 재단에 예중, 예고를 우겨넣는 식으로 설립한 탓에 그 후로는 악기 소음 문제로 학교간 마찰이 생겼다는 점으로 반박할 수 있다.
근처에 유흥가 문제가 있었지만, 브니엘학원이 연산동에 존재하던 시절에는 학교환경위생정화구역이 지정되어서 어느 정도 완충제 역할을 하였고 그 덕분에 그때 까지만 해도 그렇게 퇴폐적인 수준도 아니었고 유흥가 치고는 조용한 편이었다. 오히려 브니엘고 수요를 노리고 학원가나 재수학원 같은 사교육 상권도 존재하는 등, 지금의 명륜 1번가 정도 수준이었던 것. 그런데 학교가 이전하자 당연히 학교환경위생정화구역 지정이 해제되고, 예전 브니엘학원이 있던 지역 근처까지 온갖 유흥업소들이 밀고 들어와버렸다. 브니엘고가 이전한 시기가 1996년인데, 1997~1998년 쯔음에 학교용지가 지정해제되어 연산로타리 일대의 학교환경위생정화구역이 풀리게 되었고, 정말 시기가 절묘하게도 이 시기에 중앙동에 있던 부산광역시청이 연제구로 이전하면서 시기가 제대로 겹치는 바람에 부산광역시청 이전 수요를 노린 유흥업소들이 학교환경위생정화구역이 해제된 틈을 타서 대거 들어왔다.# 그 사이에 어느 정도 텀도 없이 그냥 곧바로 밀고 들어와버린 것. 브니엘고가 이 자리에 계속 남었더라면 연산로타리는 지금의 명륜 1번가 수준 정도로 계속 남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결정적으로 예전 연산동 브니엘학원과 입지나 시설이, 면적이 굉장히 비슷한 (심지어 건물 완공시기도 같은) 부산중앙여고는 2018년 현재도 아무런 문제 없이 운영되며 학생들의 만족도 또한 높은 편이다. 게다가 중앙여고 바로 옆에는 동래중도 있다. 물론 중앙여고와 동래중도 10차선의 중앙대로 및 도시철도 소음이나 최근 급부상한 명륜 1번가 유흥업소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편리한 교통을 누릴 수 있는 그 자리에 계속 있는 편이 이전하기보다 더 메리트가 크다고 판단한 것이고, 실제로도 실수요자들 사이에서는 편리한 교통이라는 이점이 크게 다가온다.
이는 2010년 동래여고 자사고 지정 당시에 구서동 일대에서 교통이 불편한 브니엘여고를 거르고, 도시철도 덕분에 교통이 편한 중앙여고로 1지망을 많이 써서 학생들이 대거 입학한 사례에서도 알 수 있다.[27] 오히려 명륜 1번가는 중앙여고와 동래중이 근처에 있어서 학교환경위생정화구역이 주변에 있다보니 이들 학교들이 명륜 1번가의 유흥업소들의 팽창이나 퇴폐업소들의 창궐을 계속 막아주고 있으며 근처의 상권도 중앙여고나 동래중의 눈치를 많이 보고 있다. 동래중도 근처 유흥가 문제가 제기 되기는 했었지만 수년전에 시설 노후화로 D등급 판정을 받았을 당시에 이전 대신에 그냥 그 자리에서 새 건물을 개축하는 방향으로 갔었다.
연산동 시절 브니엘학원은 설립자 입장에서는 땅값이 올라 빨리 처분하고 신학대학 밑천으로 써야 했기에 빨리 이전하고 싶어 안달이었으나, 막상 실수요자들인 학생들은 등하교가 편리한 우수한 입지조건, 뛰어난 교통 때문에 그런 면에서 만족도가 높았다고 한다 (...) 남들은 죄다 산 중턱에 있는 학교로 등산하듯 등하교하는데, 브니엘고 학생들은 도시철도[28] 와 버스로 편하게 평지 학교를 등하교했으니까. 애초부터 학교법인이 사학의 공공성은 뒷전인 채 사유재산이라는 측면을 강조했음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구 재단은 학교 이전 사업 당시에 교육환경 개선이라는 핑계를 하였으나, 정작 학교가 이전한 이후에 연제구 일대는 교육환경이 나빠지면서 학군 수요가 증발해 버리고, 한때 대구 수성구와 비교되었던 연제구 학군은 하루 아침에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연산동ㆍ연제구 주민들과 연제구 의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브니엘고가 이전하자 연제구에는 갈 만한 일반계 고등학교가 부족해졌는데, 금정구에는 일반계 고등학교가 남아도는 웃지 못할 상황이 되었다. 아니 브니엘학원 자체가 중복의 집합이 되어버렸다.[29] 금정구는 골치덩어리를 떠안은 반면 연제구는 (동래구 시절 기준으로는) 상당히 우수한 학교를 빼앗겨서 자존심이 상했으므로 주민들이 바로 집단행동에 들어갔다. 1990년대 중후반부터 연제구 주민들이 의해 브니엘고를 대체할 일반계 고등학교 설립 추진 위원회를 결성하여 부산시에 연제구 일반고 설립을 요구했고, 연제구 국회의원 선거공약에서도 한동안 케케묵은 떡밥으로 등장하곤 했다.
브니엘학원 이전 당시에 부산시 교육청에 연제구 일반계 고등학교 부족 문제에 대한 대책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당초에는 (연동초 혹은 동명초 등) 예전 연산동 브니엘고 근처 초등학교 하나를 폐교하고 그 시설과 부지를 활용하여 공립 일반계 고등학교를 설립하는 계획을 세웠으나, 멀쩡한 학교를 폐교하려 했기에 해당 초등학교 학부모들이 반발하여 무산되었다. 게다가 이들 학교들 역시도 건물 년식은 예전 연산동 브니엘고와 거의 비슷했으며 심지어 어느 초등학교는 1960년대 초반에 만들어진 건물이었는데, 그걸 폐교하고 건물을 재활용하는 어처구니 없는 제안도 있었다.(당시 IMF 사태였다는걸 감안하자) 그렇다고 다른 중학교를 폐교할수도 없는게 이미 1500명 규모의 브니엘중이 갑자기 폐교되면서 연제구 일대의 중학교로 정원 분배가 다 된 상황에서 중학교를 하나 더 폐교하면 연제구 일대에는 헬게이트가 열릴 수 밖에 없었다. 대신 연제구 내 사립학교를 이용하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고 이사벨고를 2001년부터 남녀공학으로 전환하여 급한 대로 연제구 내 남고생들을 수용하고, 추가로 계성여상을 남녀공학 일반계 고등학교인 계성고[30] 로 전환해서 연제구의 일반계 고등학교 수요를 충당하려고 했으나..... 부산시내 1~4위에서 놀던 최상위권 일반고이자 연산동의 자존심이었던 브니엘고를 빼앗긴 것으로도 모자라 부산과학고(현 KAIST 부설 한국과학영재학교)까지도 빼앗긴 연제구 입장에서, 당시로서는 평판도 썩 좋지 않고 연산동 시절 브니엘고보다 3년 먼저 완공되어 노후화가 진행 중이고 시설도 안 좋은 데다, 동해남부선 열차 소음ㆍ진동 문제도 있는 등 입지조건도 더 나쁜 계성여상을 남녀공학 일반고로 전환하여 충당하려 한다는 사실은 열이 뻗칠 만한 일이었다. 결국 연제구민들이 격렬하게 반발하여 역시 무산. 연제구민들은 연제구에 공립 일반계 고등학교를 완전한 신축건물로 신설하라고 요구하였다. 시설년식이 연산동 시절 브니엘고와 크게 차이 안나거나 거의 비슷하거나 심지어 훨씬 오래된 초등학교를 폐교하교 그 부지와 건물을 재활용하는 안도 그렇고, 시설년식이 더 오래된 계성여상을 대체수단으로 제시한 시점에서도 브니엘학원 이전이 건물 노후화 문제와는 관계 없다고 교육청 차원에서 인정한 꼴이 되어버렸다.
결국 연제구민들의 노력이 결실을 맺어, 2006년에 공립 연제고가 이례적으로 구도심화된 지역에서 신설학교로 개교하여 연산동 브니엘고를 대체했지만 그 10년이라는 간극은.... 2018년 현재도 연제구에서는 브니엘고나 브니엘중이 등하교가 편리하고 진학률이 우수했다며 그리워하는 이들이 종종 보인다고 한다. 그 외에 연제구 전역이 한때 투기 조정대상지역으로 지정될 정도로 폭풍 재개발 중이라 세대수가 어마어마한 아파트가 공급될 예정이고, 심지어 거제동에는 매머드급 아파트인 거제 래미안(4295세대)이 분양될 예정이다. 브니엘고 이전은 학교재단 입장에서도 땅을 칠 만한 최악의 선택이었던 것. 브니엘학원이 이전해간 구서동은 2016년에 입주한 구서 SK뷰를 끝으로 이제는 더 이상 대규모 재개발 떡밥이 없고, 연제구 연산동ㆍ거제동 일대와 달리 래미안이나 자이급 브랜드 아파트가 들어올 계획도 당분간은 없는 상황. 연제구에 계속 남았으면 앞으로는 일대 고급 아파트 단지 학생수요를 전성기 때처럼 다시 한번 싹쓸이할 일만 남았을 텐데...
브니엘중이 연산동에 계속 남았다면 21세기 넘어서도 생명연장이 가능하기는 했지만, 2010년대를 넘으면 연산동 일대 중학교의 학교당 학생 수가 현재 기준으로도 일반적으로 400~500명 내외고 연산동 주변에 중학교가 남아도는 상황이라, 결국 억지로 유지되는 학교가 될 가능성도 높다. 차라리 2010년대 중반까지 연명하다가 인센티브를 받고 연산중이나 연제중과 통폐합하고, 통폐합 인센티브로 받았을 수십억 원을 연산동에 잔류한 브니엘고의 교육환경 개선이나 시설 개축, 보수에 썼어도 좋았을 것이다. 이런 시나리오를 따랐다면 부산중앙여고와 시설수준이나 규모, 운동장 면적이 비슷해질 수 있었다. 하지만 또 다른 시나리오도 있는데 브니엘고가 연산동에 계속 남아서 페이스를 유지하여 지금도 준수한 진학 실적을 내주고, 연산동 일대의 유흥업소도 교육환경보호구역을 위시하여 사상구의 포푸라마치 처럼 성공적으로 소탕하는 상황을 가정한다면 연산동의 위상도 지금보다는 높았을테고, 그렇게 되면 브니엘중고교의 명성에 편승해서 브니엘중고교 주변 같은 연산동 일대에도 유흥업소 대신에 고급 마천루 아파트(예를 들어 아이파크 라던가, 아크로 라던가, 디 에이치 라던가, 두산 위브 더 제니스 라던가..)들이 많이 들어오게 되니 브니엘중 또한 고급 마천루 아파트에서 학생들이 유입하여 학생 수가 늘어났을 상황을 가정할수도 있다. 물론 고급 마천루 아파트 광고에 학군 소개라고 브니엘중고교가 나오는 건 덤. 당장 대구 수성구만 해도 경신중고교 같은 명문 학교 학군에 편승한 고급 브랜드 아파트들이나 고급 마천루 아파트들이 많은데#, 경신중고교는 수십 년 전에는 브니엘중고교와 비교했다.
2.3. 부도
결국 곪았던 것이 크게 터지고 말았다. 지방세 8억 원을 장기채납하여 1999년 3월에 금정구청에 국고보조금을 전액 압류당하더니, 4월에는 브니엘학원이 브니엘예고를 신설하는 등 무리한 확장 때문에 생긴 재정난 때문에 13억 7천여만 원을 결재하지 못하고 중등교육기관 학교법인으로서는 매우 드물게 최종부도처리를 당하였다. # 부도처리 당시 학교법인의 부채는 무려 27억 원 + 200억대 이상이었는데, 부산의 중등교육기관 부채 중에서는 가장 규모가 컸다. 그 외에 시공사였던 유창건업 및 한신공영도 부도난 것, 학교법인과 시공사간 어음 관계가 복잡한 것도 학교법인 부도처리에 한몫을 하고 말았다. #
유창건업이 부도난 사정은 이러하다. 부산시 도시개발위원회가 앞서 말한 진입로 건설에 대한 문제로 빡친 나머지 구서동 신축건물 준공승인을 해주지 않고, 이전 연산동 부지도 학교용지 지정해제를 계속 미루었다. 이러니 유창건업과 한신공영은 연산동 부지가 학교용지에서 지정해제되면 그 자리에 한신 아파트를 건립할 계획이었으나 계속 미룰 수밖에 없었다. 그 와중에 유창건업이 연산 한신아파트 분양으로 돈을 걷을 수 없자 자금압박이 심해져서 부도가 난 것. 게다가 한신공영도 같은 시기에 도미노처럼 부도가 나버렸다. 결국 한신공영 그룹이 부도나서 워크아웃되는 과정에서 150억~190억#짜리였던 연산동 기존 학교부지는 1998년 4월에 경매로 감정가 190억의 절반도 안 되는 90억 헐값으로 부산의 건실한 중견 건설업체인 반도건설[31] 손으로 넘어갔으니 죽 쒀서 개 준 꼴이었다.# # 지금시세로 치면 무려 '''400억원 상당의 손실'''(1998년과 2019년의 부동산 가치를 기준으로 환산했을시)[32] 을 입었다고 보면 된다. (반도건설은 이때 경매로 반값도 안되는 가격에 부지를 구입하여 아파트를 분양했는데, 불경기에도 불구하고 부산의 노른자위 땅에 역세권이라는 이점이 크게 작용하여, 이례적으로 조기 완판이라는 초대박을 쳐서 다시 화제가 되었다.) 부도 당시에 발생한 부채의 상당수도 브니엘학원과 한신공영간 복잡한 어음 관계 때문에 한신공영이 망하자 브니엘학원이 고스란히 떠안았다.
부산시 교육청은 부도난 브니엘학원을 특별감사하면서 파행운영으로 감독관청의 허가 없이 차입금 197억 원이 발생했고[33] 교비 등 공금 수십억 원을 학교법인으로 불법전용했으며, 직원 임금을 체불하는 등 여러 가지 문제가 있다는 이유를 들어 학교설립자를 포함한 이사 7명을 전원 해임하고 관선이사를 파견하였다. 그 후 2002년까지 3년간 1기, 2기 관선이사 체제로 학교를 운영하였다. # 이 사태 때문에 브니엘 학원 계열 학교들은 그 병크를 언론이 한동안 떡밥으로 물고 보도하는 바람에, 한때는 동래 럭키아파트 학부모들이 가장 선호할 정도로 부산 4학군 내에서 가장 인기 있었던 학교가 고작 수년만에 4학군 내에서 가장 인기 없는 중고교이자 언론의 떡밥제조공장으로 순식간에 추락하고 말았다. 이는 2018년 현재까지도 이어진다.
안 그래도 부산 4학군에 동래고 같은 걸출한 고등학교가 많은 데다가, 근처에는 동래학원 계열인 동래여고ㆍ부산예술중고교, 성모학원 계열인 지산고, 부산의 유일한 국립 일반고인 부산사범대부설고, 신흥명문인 공립 남산고 등 강력한 경쟁자들이 이미 자리 잡고 있었으니 들어올 때는 마음대로였겠지만 나갈 때는 아니란다. 그야말로 브니엘 학원 계열 4개교의 앞날은 사면초가이자 진퇴양난이 되고 말았고, 심지어 이 무렵 브니엘 여고 테니스부는 흔적 하나도 남기지 못하고 완전히 해체되어, 35년 이상 쌓아온 수많은 영예들이 이슬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그런데 이 시기가 굉장히 중요한 즈음이었다. 1996년을 전후하여 해운대 신시가지가 조성되면서 입주가 시작되었고 얼마 되지 않아 부흥 중고교, 신도 중고교, 양운 중고교 같은 시설과 교육환경이 브니엘학원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좋은 신설 공립학교들이 대거 완공되어 해운대 학군이 순식간에 급부상했다. 하필이면 브니엘학원이 금정구의 영 좋지 못한 위치로 이전해서 폭망한 시기가 1996년이니 타이밍이 안좋아도 너무 안좋았다. 특히 해운대 신시가지의 신설 공립학교들은 브니엘학원의 금정구 신축 건물과 년식 차이는 불과 1~2년 정도인데도 불구하고 정순택 교육감 시절에 학교건축에 혁신을 일으킬 신설계 학교들이라고 정말로 작정하고 만들다보니 건물 설계라던가 내, 외장재 면에서는 상당히 진일보 하였고, 아파트 단지 한복판의 편리하고 안전한 도보통학 학군이었으며, 브니엘 계열 학교들이 원가절감에 치중한 나머지 급식실이나 강당, 운동장은 물론이고 심지어 지하 기계실 까지도 공유하는 설계인것과 달리 해운대 신시가지의 신설 공립학교들은 각 학교별로 편의 시설을 따로 따로 갖추고 있을 정도로 시설, 교육환경, 안전, 안정성 에서 비교가 안되었다. 게다가 이들 학교들은 공립이라서 운영상 잡음도 거의 없었다.
설상가상 격으로 2001년에는 '''용호동 LG메트로시티''' 아파트 입주가 시작하면서 2004년까지 총 7,374세대가 입주하여, 안그래도 남천 삼익비치 아파트를 비롯한 삼익시리즈의 버프를 받던 대연고ㆍ 예문여고와 신설 분포중ㆍ 고등학교를 위시한 남구-수영구 학군이 확 튀어 올라왔다. 이런 시기에 한쪽으로 구심점을 몰아주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브니엘 학원 재단은 학교설립준칙주의 정책을 틈타서 예중ㆍ여고ㆍ예고 신설 같은 무계획적인 학교신설 삽질만 하다가 학교 정상화 의지가 없음을 인증하여 부산시를 뿔나게 하고 재단까지 부도를 맞았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그렇게 잘 나가던 학교가 순식간에 이처럼 엉망진창이 되었음을 보면 참으로 씁쓸하다. 1996년이면 본격적인 계획도시의 시대인데도.....
2.3.1. 왜 그런 부지를 선택했을까?
브니엘학원의 모체가 되는 브니엘 교회는 1986년에 기존 소속 교단 이었던 대한예수교장로회(고신)에서 몇몇 교회를 이끌고 '대한예수교장로회(브니엘)'이라는 새로운 교단으로 독립하였다.[34] 브니엘학원도 한때는 고신대학교와 같은 교단 계열이었으나 교단이 독립하면서 남남이 되었는데[35] , 교단이 독립한 이상 고신대학교와는 다른 '''신학대학교'''를 설립해야 목회자를 자체적으로 양성하여 교세를 확장할 수 있었다. 당시에는 대학설립준칙주의 이전의 대학설립 준거주의라서 어느정도 부지와 수익용 자산 규모를 갖추어야 대학설립 인가를 받을 수 있었는데, 정규 신학대를 설립하려면 4년제 학과까지 갖춰야 했다. 목회자 양성을 위해서는 4년제 학부과정(예과)은 상관없이 3년제 신학대학원(본과) 과정만 있으면 되었으나, 1980년대 후반~1990년대 초중반 기준으로 사립대 관련 법률상 대학원을 설립하려면 그 이전에 4년제 학부 과정을 필수로 요구했었다. 심지어 비정규학교지만 교육부 인가 학교로 4년제 학사학력이 인정되는 각종학교를 설립하려고 해도 상당히 까다로웠다. 해도 예나 지금이나 미인가 신학교와 정규 인가 신학교는 위상 차이가 크며, 정규 신학대 또는 신학대로부터 발전한 종합대학을 갖추었는가 여부는 교단의 위상을 상징하는 척도이기도 하다. 물론 대학설립준칙주의 이전이기는 했으나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 노태우 전 대통령은 후보시절 사립대를 추가로 설립인가를 내주겠다고 공약했고, 후보 시절 3당 합당 이전 김영삼의 야도로 유명한 부산권의 민심도 잡기 위해 부산권에도 사립대 인가를 여러 개 내주겠다고 공언했다. 그러므로 브니엘학원 또한 4년제 정규 신학대학 설립을 노려볼 만했다. 실제로도 노태우 정부는 부산 지역에 임기 내내 사립대 인가를 꽤나 내줬었으나, 부산가대, 동서대, 부산예대 정도만 실제로 개교할 수 있었다.
브니엘 구 재단 입장에서는 한때는 한 가족이었던 고신대학교가 신학대학에서 출발하여 1970년대에 종합대학으로 성장하였고 1980년대에는 신학대학에서 출발한 대학으로써는 이례적으로 의과대학도 유치하는 크나큰 성공에 힘을 입어서 대학 설립에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으나, 정규 신학대학을 설립하려면 그에 걸맞는 부지 면적을 갖춰야 하는데, 토곡, 사직동, 양정동 같은 기존 후보 부지들은 브니엘 중고교를 운영하기에는 정말 좋았지만, 정규 대학 인가를 받기에는 턱없이 좁았다. 또한 부산 4학군도 포기하기 싫었으나, 그렇다고 구서2동을 택하자니 부산외대처럼 금정산 그린벨트 크리티컬을 당할 수도 있었다. 그러므로 연산동 브니엘학원을 이전하며 마련한 차액으로 정규 4년제 신학대학과 신학대학원을 설립하고, 그린벨트를 어느 정도 피하면서 4학군에 남으려면 결국 현 구서동 부지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북구 화명동 같은 서부산에서라면 넓은 부지를 확보할 수 있지만 당시 화명동은 쓰레기 매립장으로 쓰이던 지역으로 학군이 썩 좋지 못했고 게다가 서부산이던 사상구 분구 이전의 북구는 설립자 박성기의 절친이던 장성만[36] 의 정치적 기반이었던 만큼 '''브니엘신학대학'''이 장성만의 '''경남전문대학'''과 '''동서대학교'''와 직접적으로 경합을 붙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브니엘학원이 심심하면 지산간호전문대학[37] 과, 부산가톨릭대학교, 지산고등학교를 저격하고 헐뜯으려 해도 경남정보대학교와 동서대학교 만큼은 좋게 소개해주고, 브니엘예술고등학교의 적지 않은 학생들을 동서대학교로 입학을 추천해주는 것 또한 그런 이유였다. 당시에는 땅값이 싼 해운대구를 선택할 수도 있었으나 1980년대 후반~1990년대 초반만 해도 해운대구가 허허벌판이었으므로 지금처럼 발전하리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으며 해운대에 군사시설인 '''제53보병사단'''이 자리잡고 있다보니 군부대 문제로도 브니엘신학대학 설립을 위한 대규모 부지 확보에 제약이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구서동을 비롯한 지금의 금정구 일대는 당시로써는 동래구에서 이제서야 막 분구된 지역으로 민정당 지지율이 높은 데다가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노태우 표도 많이 나온 동네이고 3당 합당 이전에 유일하게 민정당 국회의원(김진재)이 당선된 적도 있다보니 대학설립을 위해서는 이런 면에서도 유리한 점이 있었다. 결국 4학군과 정규 신학대학을 둘 다 노릴 수 있는데가 정치적으로도 매우 유리한 현 구서동 부지를 택하고, 대학설립준칙주의 시절 이전에 4년제 정규대학 설립허가를 받을 수 있는 11 헥타르 부지를[38] 삼성종합물산으로부터 매입해여 일단 브니엘중과 브니엘고를 먼저 이전하고 이후 신학대학을 설립하려 계획한 듯하다.[39] 그러나 계획을 실행하는 과정에서 계산을 잘못한 나머지 진입로 문제로 이것저것 말썽이 생겨 시행사ㆍ시공사 보증[40] 을 서야 하는 처지가 되었고, 브니엘중은 구서동과 부곡3동 주민들이라는 복병을 만나 폐교당했으며, 어찌어찌 설립한 브니엘예중도 신통찮고, 재단도 재정난에 빠진 그 와중에 대학설립 준칙주의가 시행되어 4년제 학부과정 없이 신학대학원만 축소 설립인가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재정난에 빠진 브니엘학원은 관련법이 개정되어 대학설립 준칙주의가 시행되면서 일단 4년제 정규 학부과정을 포기하고 신학대학원만 건지려고 교육부로 부터 1996년에 대학원대학교설립인가를 받아냈지만#[41] , 그 와중에 브니엘학원은 부도가 나고 2004년 구니카 시절 정상화 과정에서 브니엘 신학대학원 대학교는 정부의 부실대학 정리 정책에 의해 미개교 상태에서 인가가 취소되었다.[43] 구체적인 공인된 내용은 아직도 미궁 속에 빠졌지만 1990년 삼성종합건설로부터 11 헥타르에 달하는 현 학교용지를 매입하고, 교단 연혁에 따르면 같은 해(1990)에 예장 브니엘 총회에서 신학대 설립을 결의하였으므로[44] 결국 학교 이전의 주된 목적은 학교 이전사업에서 얻는 차익으로 신학대 설립을 노렸음이 가장 유력해 보인다.
실제로 브니엘학원의 먼 친척뻘 되는 마산 창신 중고교를 운영하는 창신학원도 브니엘학원과 비슷한 시기에 이러한 방법으로 학교 이전사업에서 차익을 얻어 1990년대 초반에 창신대를 설립했다.[45] 그 외에도 당시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학재단들이 중고교를 먼저 설립해서 실적을 만든 다음에 추가로 학교설립 자금을 마련하거나 중고교를 이전한 차익으로 대학을 설립하였음을 생각한다면... 당시에는 이게 사립학교 재단 성장 테크트리의 정석이었다. 1980년대 후반~1990년대 초반에는 대학 수요가 폭증한데다가 1971년생 기준으로는 한해에 100만명 정도가 고등학교를 졸업했으나 대학 입학 정원은 20만 명에 불과했을 정도로 대학진학 경쟁률이 치열하던 시절이라 대학교 사업이 유망사업으로 평가받았다. 오히려 이당시에는 대학 입시에 실패한 재수 낭인이 사회적으로 크나큰 문제가 되었을 정도였다. 브니엘학원 측에서는 이후에 간호학과ㆍ사회복지학과ㆍ예체능 계열 학과ㆍCCM학과 등 다른 학과를 설립하여 4년제 종합대학으로 승격하는 개신교 미션스쿨의 정석 테크트리를 타면 학교 이전 사업의 수지타산을 맞출 수 있다고 판단했거나, 대학이 생기면 일대에 상권이 형성되고 시내버스 노선이 딸려와서 중고교의 등하교 문제도 같이 해결할 수 있으리라고 판단했을 가능성도 높다.
근처에 있는 부산가대와 지산고 역시 동일한 방법은 아니지만, 1990년대 초반 가톨릭 신학대학으로 4년제 대학을 시작하고, 1990년대 중반 신학대학원을 설립하고, 1990년대 후반에 기존의 2년제 지산간호전문대학을 통폐합하여 4년제 종합대학으로 승격하는 비슷한 과정을 밟았다. 지산고도 신설학교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영도에 있던 대양중 이전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중학교보다는 고등학교 운영이 더 낫다고 판단하여, 대양중을 폐교하고 지산고를 신설하는 우회적인 방법을 썼다. 다만 이쪽은 기반이 튼실한 가톨릭 재단이라 이전 과정에서 차익을 크게 따질 이유도 없었고, 당연히 귀찮게 꼼수를 부리기보다는 1980년대의 FM대로 학교 이전(지산간호전문대학, 대양중→지산고)을 추진하였다. 재단이 튼실하고 FM을 밟으니 아무런 말썽 없이 굉장히 매끄럽게 완료되었던 것이다.
브니엘학원이 이전을 계획하던 1980년대 후반 복천동에 있던 동래학원(동래여중ㆍ여고)이 이전하면서 그 자리에 복천동 우성 베스토피아 아파트가 들어섰는데, 복천동 우성 베스토피아 아파트의 분양가는 당시 부산시내에서 꽤나 고가에 속하였으며 성공적으로 분양되었다. 동래학원 재단도 학교 이전사업으로 돈방석에 앉은건 덤. 브니엘학원 입장에서는 동래학원 이전사업의 성공을 보면서 제대로 배가 아팠을 것이다.
여담이지만 브니엘재단이 계획한 신학대학은 부산에서 마지막으로 개교하는 사립대가 될 뻔했다고 한다. 부산에서 4년제 대학 개교는 1992년 동서대가 마지막이었고, 2년제 전문대학 개교는 1994년 부산예대가 마지막이었다. 1996년 동명정보대학이 개교하기는 했으나 이 학교는 기존의 동명전문대학이라는 전문대를 기반으로 추가로 4년제 대학을 설립하였고, 이후에 동명대로 통폐합하여 도로 1979년 개교가 되었다. 1999년 이후 정규 대학으로 개교 예정이었던 브니엘 신학 대학은 부산지역 2년제 전문대학, 4년제 대학교, 대학원대학교 모두 통틀어 부산 최후 타이틀을 딸 수밖에 없었다. 또한 브니엘 신학대학 개교 시도가 무산된 이후로는 IMF 사태로 부경대 같은 등록금이 저렴한 국립대가 크게 각광 받으면서, 부산지역에서 사립대학에 대한 선호도가 급추락 하고 입결도 많이 내려가면서 부산에서 다른 사립대학 설립 시도가 전무하다.
2013년에 대학설립 준칙주의도 폐지되었으므로, 브니엘 신학대가 정규 대학교로 설립될 일은 이제는 없을 것이다. 교육부가 이홍하 계열 대학 사태, 대학 통폐합 문제로도 골머리를 앓으니 더 이상 대학 설립 인가를 내줄지.... 오히려 지금 교육부는 퇴출할 대학을 찾으러 다닌다고 혈안이 된 판이다.
2018년에 나온 기사에 따르면 브니엘중고교는 브니엘 신학대학을 설립하기 위한 밑천이자 준비단계였으며, 브니엘학원 이전은 브니엘 신학대 설립인가를 위한 요건을 마련하려는 목적이었음이 밝혀졌다. #이 기사에서 "신학교 설립을 위해 막대한 비용을 준비(대학설립 준거주의)하는 단계에서 교단이 형성(1986년)되었다", "신학교는 많은 것을 갖추고(대학설립 준거주의) 시작하려다 보니 늦어졌다" 라고 설명하는 구절에서 브니엘학원 이전을 추진한 이유를 알 수 있다. 또한 1970년대 후반 브니엘중고교가 토곡의 예전 부산과학고 부지로 이전을 추진했다가 무산된 이유와 1988~89년 노태우 대통령이 취임한 이후 지금의 답이 없는 부지로 위치를 바꾼 이유도 엿볼 수 있다. 교단이 형성되기 이전부터 브니엘 신학대학을 설립을 추진했으므로, 브니엘 신학대학 설립은 아무리 늦어도 1986년 이전부터 추진되었다는 사실도 이 시가에서 알 수 있다.
국가기록원에 있는 자료에 따르면 1978년부터 중고교 이전을 추진했으므로, 1978-86년 사이에 신학대학 설립을 추진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재단의 최종목표는 신학대 설립이었다.''' 최근에는 브니엘 총회 홈페이지에서도 브니엘학원 이전 사업과 브니엘 신학대학 설립 사업을 연계해서 표현하는것만 봐도 확인 사살이다. 브니엘 구 재단이 이전과정에서 폐교될 처지에 놓인 브니엘중학교를 아무렇지 않게 폐교한 것도 진짜 목적은 신학대였기 때문이다. 연산동이나 거제동 일대는 일반계 고등학교가 부족하지만 금정구에는 일반계가 남아돌므로 금정구로 학교를 이전한다니 일반적인 상식을 크게 벗어났으며, 인근에 지산고ㆍ남산고ㆍ부산사범대부설고ㆍ용인고 같은 만만치 않은 상대가 있는 만큼 학교 이전 과정에서 자칫하면 동래고, 동인고와 형성된 삼파전 구도를 깨뜨리고 명문으로 성장한 브니엘고를 망칠 수 있음을 충분히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브니엘 신학대 설립만 성공하면 그런 것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브니엘 신학대 설립만 성사되면 부산가대처럼 이후에 4년제 신학대학에서 4년제 종합대학으로 성장하고 가능성이 있었을지는 모르겠지만 추가로 고신대 처럼 의치한이나 약학대학까지 유치해서 재단의 지갑 노릇을 한다면, 브니엘고를 비롯한 형제 학교들을 먹여 살려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고 판단했을지도 모른다. 그네들이 금정구로 이전한 이후에는 전통적인 라이벌인 동인고나 동래고가 아니라, 지산고, 지산간호보건전문대, 부산가대 같은 성모학원 계열 학교들을 계속 저격했음으로 미루어보건대, 학교 자체는 고신대학교를 벤치마킹 하면서도 경쟁 타겟을 성모학원 계열로 잡은 듯하다. (두 학교는 2000년을 전후하여 통폐합된다.)
브니엘 구 재단은 2018년 들어 인가받지 못한 브니엘 신학교를 이전하여 인가받은 브니엘 신학대를 다시 설립하려는 듯하다. 정규대학은 2013년 이후 대학설립 준칙주의가 폐지된 만큼 대통령과 교육부장관이 설립 승인을 해줄지는 의문이다. 학부과정을 제외한 대학원대학교를 설립하려고 해도 정부가 2013년 말에 수익용 자산 기준을 40억에서 100억으로 2배 이상 상향하여, 어지간한 자금력으로는 설립인가를 받을 생각 따위는 꿈도 꾸지 말라고 표방한 셈이므로, 안 그래도 재정적 여유가 없는 브니엘 구 재단이 정규 신학대 인가를 받을 가능성은....[46] 그리고 어찌어찌하여 자금을 마련한다고 해도 학교경영계획이나 교육과정, 재정운영 계획 등 정성적인 측면도 엄격하게 평가를 받아야 하고, 결정적으로 대통령과 교육부장관이 설립을 불허하면 그걸로 끝이다. 그리고 지금 대통령과 교육부장관이 누군지를 생각하면 설립인가가 나올 가능성은 0%에 수렴하고 있다. 물론 대한민국의 대다수 사학재단이 중고교를 먼저 설립하고 성장하면 그것을 바탕으로 대학을 설립하는 테크트리가 정석이지만.... 단적으로 동의대만 해도 학교법인의 뿌리는 동의중과 동의공고이며, 경성대는 뿌리가 남성여중과 남성여고, 부산외대는 뿌리가 성지고등기술학교(현 성지고), 영산대는 뿌리가 성심여자상업고(현 성심보건고)이다.
결론을 요약하자. 브니엘 교단[47] 입장에서는 불가피한 선택이었고 당시 3저호황과 노태우 정부의 대학증설 분위기를 타고 미션스쿨 확장의 정석 테크트리를 타고 싶어했으나, 그 과정에서 꼼수를 잘못 써서 진입로 등 문제가 생겼고, 몽니를 부리다가 부산시가 빡치는 바람에 이전 사업을 깔끔하게 마무리하기는커녕 거하게 역관광을 당했고, 그 와중에 IMF 사태까지 겹치자 카운터를 맞아서 부도가 나버린데다가, 해운대 신시가지 학군의 급부상과 LG메트로시티를 앞세워 급부상한 남구 학군에도 제대로 얻어 맞았고, 그 와중에 지방 최강 학군으로 부산 동래3구(동래구, 금정구, 연제구) 4학군이 대구광역시 수성구에 추월을 당하면서 최강자 자리를 내주고, 수요예측 및 이전사업 소요비용 계산도 실패하여 교단 산하의 멀쩡히 잘 돌아가거나 잘 나가던 학교들까지도 하루아침에 요단강을 건너거나 망쳐버렸다.
3. 구 재단과 신 재단과의 소유권 분쟁사태
3.1. 신 재단의 구성
관선이사가 들어선 지 3년이 훌쩍 지난 2002년 12월, 이단을 믿는다는 논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원식 前 국무총리가 이사장으로 취임하여 정식 이사회를 구성했지만, 지방세 체납과 식중독 사태는 물론 빚도 38억대로 누적되는 등 파행이 계속되었다. 그리하여 정원식 이사장도 오래가지 못하고 오히려 정상화에 큰 걸림돌이 되는 오점을 남겼다.
지방세를 계속 체납하자 금정구청은 제대로 뿔이 나서 이사진더러 무능하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수년전인 1994년에 삼성이 관선이사를 통해 서울 중동 중고교를 인수했다. 당시 이사진들은 몇몇 대기업[48][49] 과 권력자들이 삼성과 유사하게 브니엘학원을 인수하지 못하도록 견제하고, 관선이사들을 조기에 철수시킬 목적으로 구 재단이 직접 끌고온 백기사였기 때문에, 학교법인 정상화와 거리가 사람들이었다. 정상화가 목적이었다면 차라리 기독교 건학이념에 더 가깝고 한때 일대 지역구를 담당하여 지역사정에 능통하고, 부산 4학군을 명문학군으로 만드는 데 공헌한 전직 국회의원 겸 정치거물인 이기택을 이사장으로 데려오는 편이 합리적이었을 것이다.[50]
결국 1년도 채 되지 않은 2003년 가을에는 동창회 임원들이 보다 못해 모교를 살리겠다고 부도난 브니엘 학원을 인수하고, 동문이 운영하는 중견 완구제조업체 구니카 계열로 편입시켰다. 한동안은 딱히 큰 문제도 없이 잘 돌아갔고 학교 상수도 개통ㆍ운동장 우레탄 코팅ㆍ도서관 완공ㆍ기숙사 착공ㆍ급식실 현대화 사업 착공 등 현대화 작업을 여럿 동시에 진행하며 의욕적으로 정상화를 추진하였다. 상황은 순조로웠고 학내 민주화도 코 앞까지 찾아왔다. 하지만 여기도 구 재단의 일부 이사진/설립자와 이념/소유권을 두고 법정공방을 계속하여 오래 가지 못했다. 판사가 사립학교의 공공성을 인정하여 인수 과정에서 생긴 흠결을 보완하여 인수하라는 취지로 갔다면 인수가 성사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해당 판사는 사립학교의 공공성보다는 사유재산에 중점을 두고, 사학의 정체성은 정관이 아닌 인적 연속성에 있다고 인정하고 원점으로 되돌려버렸다. (상지대 김황식 판결 역시 같은 맥락이다.) 사실 구니카 재단이 낙마한 결정적인 이유가 있었는데, 2004년 노무현 정부는 부실대학 정리 차원에서 미개교 대학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는데, 브니엘학원 이전사업의 최종적인 목적이던 인가만 받아놓고 미개교 상태로 장기 방치중이던 '''브니엘신학대학원대학교''' 역시도 정리 대상이 되자, 고등학교 운영에 전념하려던 구니카 재단 이사장은 '''브니엘신학대학원대학교'''의 인가 취소를 이의 없이 받아들였고, 이것이 구재단 설립자 박모씨의 역린을 제대로 건드린 것이었다.
2005년 초에는 구 재단이 단독으로 학교법인을 되찾을 기회가 주어졌으나 구 재단은 아직까지도 40억 상당의 감사처분이행금을 마련하지 못했다. 결국 건축기사 학원을 경영하던 김모 이사장이 구 재단으로부터 추천받아 학교를 인수하고 취임했다. 그러나 김모 이사장은 사립학교를 경영한 경험도 전무했고 학교법인을 인수하여 운영하기에는 능력이 부족한데다가 감사처분이행금을 사재 출연이 아닌 은행 대출로 겨우 마련할 정도로 부적절한 인사라는 논란이 불거져, 브니엘고 동창회가 삭발시위까지 하였다. '''한마디로 새우가 고래를 삼키겠다는 꼴이었다.''' 당시 경쟁자로 예장통합 계열이 부산장신대를 앞세워서 나타나 인수 직전까지 갔지만, 학교를 완전히 장악할 만한 재력과, 실력, 인력이 있는 예장통합에게 구 재단이 곱게 학교를 넘겨줄 리가 없었다. 예상대로 구 재단이 반발하여 예장통합이 아닌, 개인에 불과한 김모 이사장이 구 재단의 추천을 받아 이사장으로 들어왔다.[51]
당시 김모 이사장은 구 재단을 속여서 학교포기각서를 쓰게 하면서, 학교가 정상화된다면 다시 돌려주겠다고 구두로 계약하여 설립자의 추천을 받았다고 한다.[52] 그러나 김모 이사장은 뭐하러 인수했는지 몰라도 구 재단을 뒤통수 치고, 우려대로 1년만에 지인인 정근 이사장에게 되팔이하였다. # 학교법인을 인수하여 운영하기에는 능력이 부족하여 부적합하다는 논란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구 재단을 속여 유망 있는 재정기여자를 물리치고 구 재단에게 추천받아 학교법인 인수를 성사시켰으니 그 결과는 뻔했다. 재정기여자 선정도 거의 졸속이었는데 다른 사립학교들 처럼 공모 형식이 아닌 구성원들도 모를 정도로 밀실 협약이 이루어졌고 이는 애초부터 정상적으로 재정기여자를 모집해서 정상화 하려는 의지도 없었으며 그냥 구 재단의 경영권 지키기 그 이상 이하도 아니었다.
결국 사건이 또 터지고 말았다. 2005년 말 - 2006년 초에 걸쳐 학교법인 소속 통학버스 지입차[53] 기사들이 차량관리비 및 유류비를 포함한 체불임금을 요구하며 파업하고 시위를 벌였다. 심지어 2006년 입학식날에도 시위했으므로 학교 분위기는 매우 어수선했다.# 이 체불임금은 1996년부터 2000년까지 대부분 부도 이전 구 재단이 체불한 금액이었다. 여러 번 이사진이 교체되면서 결국 직접적으로 관련없는 이사진들이 떠맡게되었다고 항변했으나, 기타 우발부채를 포함한 모든 부채를 떠안는다는 조건으로 학교재단을 인수하였으므로 이런 문제도 당연히 감내해야 했다. 이런 문제에서도 김모 이사장이 무능했다고 볼 수 있다. 같은 시기에 브니엘예고 편입학 비리 의혹까지 터져나오자# 문제의 재단은 헤드샷을 맞고 고작 1년만에 브니엘학원을 포기하였으므로, 2006년 5월부로 브니엘학원은 우려대로 또다시 팔려나가는 신세가 되었다. 이후 정선재단에 넘기는 과정이 이상할 정도로 재빨랐기 때문에 정선재단 대리인이라는 의혹도 있었지만 진실은 저 너머에...
3.2. 신 재단의 정착
2006년 5월, 김모 이사장과 친분이 있는 사람인 정근 이사장이 브니엘 학원을 인수하여 정선재단 체제가 되었다. 정선재단은 학교법인 지입차 기사 임금체불 시위를 해결하고 지입기사들의 면허를 자가용 면허에서 관광면허로 바꾸어 학교법인에서 별개 업체로 완전히 분사했으며, 고물 통학버스들도 어느 정도 정리하였다. 그러나 1라운드 부도사태에 이어 2라운드 소유권 분쟁사태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정선재단 체제에서도 초반에 문제가 여러 건 일어났다. 새 이사장 아들이 위장 편입학하여 학생 생활기록부를 거짓으로 기록했다가 들통나서 관련자들은 부산지검에 고발되었고 집행유예로 마무리되었다. 브니엘 학원은 급식이 심각하게 안 좋아 평소에도 학생들이 여럿 반발하였는데, 2007년 연말에는 학생들이 급식을 거부하는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 당시 재학생의 증언 브니엘 예술중학교의 이름을 당초에는 브니엘 영재 중학교로 변경하려고 했으나, 영재교육진흥법상 영재라는 용어를 함부로 쓸 수가 없어서 결국 브니엘 국제 예술중학교로 바꾸는 일도 있었다.
구 재단은 이러한 사건들을 보고 더욱 반발하여 소유권 분쟁에 제대로 기름을 끼얹었다. 2008년 초반부터 구 재단 관계자들이 여러 차례 소송을 걸어 소유권 법정공방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2008년 5월에는 학교법인명을 정선학원으로 바꾸어 브니엘학원이라는 법인명이 44년만에 사라진 것을 계기로 소유권 분쟁사태는 더욱 가속화되었다. 대광여고와 서남대를 설립한 홍복재단을 벤치마킹해서 이사장 내외의 이름을 따서 개명했었는데, 신 재단 이사장이 밝힌 개명사유가 참으로 가관이었다. 브니엘 이라는 이름이 부정적이라서 학교법인 명칭을 개명했다는데 이를 믿을 사람은 없었다. 일반인들은 학교 이름만 알지 학교법인의 이름은 잘 모르기 때문이며, 학교 이름은 4개 모두 여전히 브니엘이었기 때문이다. 브니엘 이라는 이름이 부정적이라면 당시만 해도 구서동 학군의 명성이 제법 높았기 때문에 차라리 학교의 이름을 개교가 무산되어 공석으로 남아있는 '''구서중학교''','''구서고등학교'''로 바꾸거나 학교법인명을 강원도 정선군을 연상케 하는 정선학원 보다는 차라리 구서동 학군의 명성을 빌려서 부산에서 네임밸류가 훨씬 높은 '''구서학원'''으로 바꾸는게 맞았을 것이다. 심지어 신 재단이 나중에 설립한 종합병원 법인명이 '''의료법인 브니엘 의료재단'''이라서 보는 사람들이 어리둥절하기도... [54][55] 학교법인 개명에 반발한 구 재단과 구 재단을 지지하는 일부 동창회에서 플랜카드를 걸고 천막 농성을 벌였는데, 신 재단을 지지하는 예술중학교 학부모들과 몸싸움도 일어났고 스피커 소음 때문에 학생들 공부에 방해가 되었기 때문에, 도리어 구 재단이 신 재단에게 제대로 꼬투리를 잡혀 제대로 역풍을 맞았다. 결국 구 재단이나 동창회에 대한 여론도 함께 나빠졌다.
구 재단은 학교포기각서를 법원에 2002년, 2004년에 총 2회 제출하였다. 법원에서도 서면계약인 각서만 인정하고 구두계약은 인정하지 않아서 신 재단이 계속 승소하였다. 이 때까지만 해도 소유권 분쟁에서 최종적으로 신 재단이 승리할 듯 보였다. 그러나 신 재단의 병크 때문인지 2010년 10월 29일에 판결이 한번 뒤집어졌다. 2007년 상지대 판례에 근거하여, 임시이사가 정이사를 선임할 권리가 없기 때문에, 2002년 12월 이후 선임된 정선재단의 정원식과 그 후의 정이사들은 무효라는 것이었다. 결국 2011년 2월 10일에 구 재단이 승소하여 소유권 분쟁사태는 사학분쟁조정위원회(이하 사분위)로 넘어갔다. 법원은 서면계약인 각서와 이후에 학교를 돌려받는다는 구두계약을 인정한 것으로 보인다.[56] 그러나 법원 판결과는 달리 사분위에서는 2011년 5월, 이사진 12명 중 신 재단 인사를 8명으로 하는 등 신 재단의 손을 들어주어 소유권 분쟁이 다시 일어났다. 동년 6월, 선임을 유보하고 법적 문제를 재검토하기로 하였다. 동년 7월, 임시이사진 파견이 결정되었으나, 사분위가 일관성이 없다는 지적이 나왔다. 동년 9월에는 지역 자치단체를 넘어 국정감사라는 도마에도 올랐다. # 이 와중에도 임시이사 파견을 놓고 신 재단을 지지하는 국제예술중학교 학부모들이 임시이사 파견 결정에 격렬하게 반발하여 서울에 있는 교육부 건물까지 찾아가 임시이사 파견 반대 농성을 하기도 했다. 실질적으로 브니엘국제예중은 신 재단이 만든 완전 신설학교이니......
결국 2012년 3월, 사분위는 이사진 12명 중 과반인 7명을 신 재단 인사로 구성하되, 부산시 교육청이 추천한 인사 3명과 구 재단 인사 2명을 넣기로 하였다. 신 재단이 이사진의 과반수를 확보하였으므로 신 재단이 학교법인을 사실상 차지하였고, 소유권 분쟁 사태는 이대로 종결되는 듯 보였다. 브니엘학원이 사실상 계열분리되었으므로 구 재단 손에는 브니엘 교회와 브니엘 유치원, 이로 인하여 정규 대학으로의 개교가 좌절되고 무인가 신학교로 남아버린 브니엘 신학만 남은 것이다.
4. 신 재단 패소 및 관선이사 재파송
4.1. 2014년 새로운 분쟁 국면
2014년 6월 20일, 소유권 분쟁 사태가 제대로 뒤엎어졌다. 상지대 임시이사가 정이사를 선임할 권리가 없다는 판례에 근거한 2011년 2월의 판결에 근거하여, 법원이 다시 한번 구 재단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구 재단은 부산교육청을 상대로 정선학원 현 이사회 전체 12인 이사진에 대한 이사선임취소 소송을 제기하여 승소하였다.
이번에는 2014년 4~5월에 브니엘국제예고의 자사고식 편법 국제반 운영 및 시설 이용 차별에 대한 반발 사태[57] 가 터져 한동안 여러 언론에 보도되었다. 신 재단은 그 전까지만 해도 폐교 위기에 처한 학교를 구한 구세주인 양 알려졌으나 알고보니 악질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한때는 신 재단이 완전히 학교법인을 차지했다고 여겼으나, 신 재단이 온갖 병크 때문에 판결 하루 전인 2014년 6월 19일에도 이사장에 대한 이사선임 취소 조치를 받는 등 정당성을 잃어버렸기에 판결이 뒤집어진 듯하다. 판결문에도 신 재단이 문제가 심각해서 고육지책으로 구 재단을 승소시키는 쪽을 택한 판사의 고뇌를 엿볼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 재단 측에서는 판사가 적폐라고 우기는 상황.
교육청은 검찰의 지휘로 신 재단 이사진을 대신해 2014년 7월 9일에 항소하여 신 재단의 효력이 연장될 뻔했다. 그러나 동년 동월 21일, 구 재단 설립자 측이 법원으로부터 신 재단 이사진 직무정지 결정을 받아내어 학교법인 이사진은 공백이 되었고, 한동안 학교에 관선이사를 파견하여 운영하였다. 최종적으로 설립자가 승소하여 복귀한다면 정선학원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브니엘 학원으로 16년만에 환원된다.[58]
동년 10월 27일, 사분위는 15년만에 장기 관선이사진 파견을 확정하였다. 하지만 이견 과정에도 알력다툼이 발생하여 4개월 이상 공백이 생겼고, 2014년 국정감사에서도 지적이 나왔다..# 국정감사 질의자료 참고
2015년에 정선학원 소유 비교육용 자산들이 경매로 나왔다. #, # 참고로 연산동 1644-1 부지는 브니엘학원 및 (지금은 폐교된) 브니엘 중학교의 전신인 브니엘 야간중학원(고등공민학교)가 있던 자리이다.
4.2. 2017년
2017년 1월 16일 사분위는 정선재단을 재정기여자로 인정하기 어렵다고 판단하면서, 11년 만에 정선재단과 사실상 결별하였으며 구 재단 단독으로 남으면서 경영권 분쟁은 완전히 종결되었다. 물론 학교 내에 여기저기에 정선재단이 심어놓은 인사들이 많이 남아있지만 관선이사 체제 하에서는 계속 남아있을 것이다.
학교 상황은 2017년에도 많이 꼬였다.
1. 임시이사가 파견되었지만 학교법인의 현상유지 및 최소한의 관리만 할 수 있기 때문에 권한이 상당히 제한적이다.
2. 구 재단은 학교법인이 떠안은 천문학적인 부채(676억 상당)[59] 를 변제하지 못하면 복귀할 수가 없다.[60] 사분위가 어지간해서는 다른 사립학교들의 구 재단에 우호적인데도 불구하고, 괜히 브니엘 구 재단에게는 까칠하게 나온 게 아니다. 게다가 문제의 사분위 위원들은 박근혜 정부가 선임하여 상당수가 친박계[61] 인사인데도 불구하고 복귀를 쉽사리 허락하지 않을 정도면 말은 다했다. 게다가 676억이면 괜찮은 사립 중고교를 아예 신설할 수 있는 금액이라 아무리 브니엘고가 과거 부산에서 서울대 진학률 1위, 의치한 진학률 1위를 기록하거나 동문라인이 빵빵하더라도 676억을 다 내는것은 부담이 너무나도 컸다.
그래서 구 재단은 머리를 썼다. 사분위는 부채를 변제하라고 요구하지만, 돈이 없어서 학교를 되찾지 못하는 구 재단은 학교 소유의 교육용 기본자산인 여유부지를 매각해서 부채를 변제하는 꼼수를 생각했다. 한마디로 사람으로 비유하자면 '''장기를 팔아서 빚을 갚으려는 꼴'''이다. 하지만 사분위는 이러한 묘수를 계속 반려했고 구 재단에게 직접 현금으로 부채를 변제하라고 압박하였다. 학교 소유 부지는 교육청 허가 없이는 마음대로 처분이 불가능한데다가 지목ㆍ형질변경을 해야 하며, 교통편 문제도 있으며, 일부 부지는 진입로 문제도 상당해서 그나마 수익을 낼 수 있는 아파트 건설 용도로 사용하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 부지를 거금을 들여서 따로 매입할 업체가 있을지도 미지수다. 특히 지목ㆍ형질변경 문제는 굉장히 복잡한 문제인데 엘시티 게이트의 여파로 부산시에서는 토지 지목ㆍ형질변경에 있어서는 정말로 까다로워졌으며, 특히 멀지 않은 곳에 있던 침례병원도 토지 형질변경을 통해 병원 부지를 아파트 부지로 용도변경해 매각하고 병원을 축소이전하여 부채를 해결하려다가 토지 지목ㆍ형질변경이 엘시티 게이트의 여파로계속 불허되는 바람에 결국은 부채를 해결 못하고 파산하였다. 부산외대 또한 금정구 남산동으로 이전한 이후 기존 남구 우암동 캠퍼스의 토지 지목ㆍ형질변경 문제를 놓고 부산시와 상당한 이견 차이가 있었는데, 형평성 문제로 부산시가 브니엘학원의 토지 지목ㆍ형질변경을 쉽사리 내줄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자칫했다가는 특혜 논란이 생길 수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부지 자체는 그린벨트에 해당되지 않더라도 주변이 그린벨트로 묶여있다보니 여러가지 제약(고도제한, 용적률제한 등등..,)이 걸릴수도 있는 등 비싼 돈을 주고 땅을 사더라도 개발도 못하고 땅을 썩혀야 할 가능성이 매우 높고, 개발한다고 해도 또다른 사립학교를 짓는 용도 외에는 딱히 사용처가 안보인다. 학령인구가 급감하는 상황에서 땅을 사서 학교를 더 만들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 지방에서 그나마 의대나 치대, 한의대 등을 유치한다면 써먹을 수는 있겠지만, 보건의료계열 특수학과를 부산에서 추가로 유치할 가능성도 희박하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박근혜 정부가 무너지고, 새로 집권한 문재인 정부가 사학비리 척결을 내세우자 사분위도 구 재단도 진퇴양난이 되어버렸다. 게다가 구 재단이 제안한 묘수가 서남대 사태에서 서남대 구 재단이 제안한 묘수와 거의 유사한데[62] , 서남대 경우는 교육부에서 구 재단의 복귀를 원천 차단하겠다는 입장인데, 형평성 문제를 생각해서라도 교육부가 브니엘 구 재단더러 복귀하라고 허락할 가능성은 별로 없다. 그리고 학교법인의 교육용 자산이나 수익용 자산을 매각해서 재단의 채무를 변제하는것은 불법으로 사립학교법에 저촉되는 일인데 #, 구재단의 묘수는 아마도 교육용 자산인 학교 부지를 매각하려 했던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문제의 학교 부지를 팔아봤자 부채를 완전히 해소할 정도의 액수가 나오기도 힘들어 보인다. 결정적으로 교육용자산이나 수익용자산은 교육청의 승인이 있어야 매각이 가능한데 교육청에서 매각 승인을 하지 않으면 말짱 도루묵이다. 구재단의 묘수를 사학분쟁조정위원회에서 괜히 반려한게 아니다. 그리고 이 구재단이 생각해낸 묘수는 사학분쟁조정위원회 뿐만 아니라 채권단에서도 보기 좋게 거부 했다고 한다.
사립학교법인은 특정 개인이 설립한 사유자산이지만 또한 사회에 출연된 공익자산이기도 하다. 사립학교에 적지 않은 '''혈세'''가 지원되고 브니엘고와 브니엘여고가 평준화 일반계 고등학교로 다른 공립 일반계들과 완전히 동일하게 학생 배정이 이루어지는 근거이기도 하다. 게다가 학교법인에 재산을 주는 것은 출연(出捐)이라고 하지 출자(出資)라고는 하지 않는다. 브니엘 계열 학교의 자산은 설립자의 출연뿐만 아니라 학생과 교직원들의 노력과 헌신과, 정부가 수십 년 동안 지원한 막대한 보조금에도 기여받아 형성되었다. 또한 20년간 정상화(...) 과정에서 적지 않은 부산 시민들의 '''혈세'''가 투입되었으므로 무작정 부채를 안 갚겠다는 구 재단에게 돌려줌도 부조리하다. 그렇게 사유재산으로써의 설립자의 권리를 주장하고 싶으면, 차라리 사재로 학교법인을 설립하지 말고 공장을 차렸거나 하다못해 학력인정 평생교육시설을 설립했다면 차라리 이치에 맞다. 이들은 학교를 무슨 공장 정도로 여기고 있는듯 하다.
결국 관선이사 파견은 장기화되었다. 2016년 4월에는 오랫동안 관선이사가 파견된 사하구 건국 중고교에도 관선이사가 철수하고 정이사 파견으로 정상화가 진행되었으므로, 2018년 현재 브니엘 계열 학교들만이 부산에서 유일하게 관선이사가 파견된 중고교라는 불명예를 떠안았다. 관선이사가 파견되었음은 학교법인의 비리가 심하다거나 이사진의 갈등이 심하다거나 하는 이유로 정상적인 운영이 힘들다고 정부에서 공인한 것이다. 그러한 디메리트로 인하여 브니엘 계열 학교... 아니 구서동 학군 자체를 사람들이 꺼리게 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되었다. 학교알리미라는 교육부에서 운영하는 객관적인 도구를 통해서 구서동 일대 고등학교와 같은 4학군인 사직동 일대 고등학교의 인원수를 비교해도 한눈에 상황이 어떠한지 알 수 있다. 파견된 관선이사 중에는 공인회계사도 2명이나 있는데, 이는 학교법인의 재정이 심각해도 보통 심각한 게 아님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 재단은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학교를 넘기지 않으려고 몽니를 부리는 상황.[63] 그 유명한 정선재단도 구 재단이 몽니를 부리며 명망 있는 재정기여자를 걷어차버린 것 때문에 들어왔고 결국 신나게 구 재단 뒤통수를 쳤다.
결국 2017년 신입생 배정에서 브니엘고는 179명(...), 더욱 심각하게 브니엘여고는 118명(...)[64] 이라는 무슨 중소도시나 부산 구도심에서나 볼 법한 인원수가 되었고, 학급당 학생 수가 20명도 안 되는 경우가 나올 지경이 되었다. 2018년에는 브니엘고는 신입생이 156명에 불과하여 오히려 브니엘예고보다도 신입생이 적은 상황이 되어버렸다. 2003년생 부터는 빠른생일이 없어서 2002년 2월~12월생만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장전동 래미안 아파트, 서희 스타힐스 아파트, 퀸즈W 아파트가 2017년부터 입주해서 금정구에 인구가 유입되었다는걸 감안하면 학생 수가 많이 줄어들었다는걸 알 수 있다. 반면 브니엘예고는 180명 정원을 다 채우지는 못했으나 그래도 175명으로 크게 선방하였는데 지난 10여년간 예술고등학교들의 수가 늘었음에도 불구하고 10년전 신입생수 210명과 비교해도 30~35명 정도의 차이에 불과하였다. 이는 한류열풍으로 인하여 음악, 무용 계통의 수요가 이전 보다는 다소 늘어난데다가, 지금의 학부모들이 학생 시절이던 1980~1990년대 대학정원 증설의 시류를 타고 의치한약수 또한 정원이 늘어났고 변호사 수도 꾸준히 늘었고 다른 전문직 직군들도 그 수가 꾸준히 늘어나면서 학령인구 수는 10년전에 비하면 많이 줄었으나 학부모들 중에서 자녀들을 예고에 보낼만한 계층의 비율은 줄어들기는 커녕 일정하게 늘었기 때문. 그 외에 2001년에 금정구 노포동으로 부산종합버스터미널이 이전해오면서 아주 오래전부터 자녀 학자금이 지원이 되는 경남버스 같은 시외버스나 고속버스 업체들이 브니엘학원이 있는 금정구 북부로 대거 따라온데다가, 2007년에 부산시내버스 준공영제가 시행되면서 일대에 삼신교통, 세진여객, 화신여객 같은 시내버스 회사들이 많은 금정구 북부 지역 특성상 자녀 학자금 지원이 되는 경우가 이전보다 더 많아진것도 한몫 하였다.
갈수록 대입에서 내신 비중이 높아지는 상황에서 이렇게 학생 수가 적으면 백분위식 내신 산출에서 불리하기 때문에[65] 일대 학부모들 사이에서 비상이 걸렸다. 심지어 부산지역 맘카페와 부동산 동호회에서 몇몇 학부모들은 브니엘 시리즈를 피하기 위해 위장전입[66] 을 하겠다고 하거나, 브니엘 시리즈 학교에 걸리면 웃돈 주고 이사를 가버리겠다고 노골적으로 불만을 나타내는등 장기화된 상황에 제대로 뿔이난 상황. 사실 그 이전에도 일반인들 사이에서는 걸리면 엉엉 운다거나 전학 간다는 말이 공공연히 돌았다고 한다.# 2017년 9월 들어서는 구서동 일대 학생은 브니엘 학교에 높은 확률로 걸린다는 소문이 계속 돌아, 그 시기에 진행된 구서동 모 아파트 분양에 찬물을 끼얹었다고 한다. 사태가 장기화되면 학부모들이 수년 내로 집단행동을 할 우려도 있다.[67][68] 금정구에 몰려든 아파트 투기꾼들을 제대로 골탕 먹인다는 의도치 않은 선효과도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부산광역시 교육청에서는 2017년 3월부터 적정규모학교 육성추진단이라는 학교통폐합 태스크포스를 발족하면서, 공립 초중학교뿐만 아니라 사립학교와 고등학교까지도 통폐합하겠다고 선언하였다. 그나마 전국단위 모집인 브니엘 예중과 예고는 프로듀스 101의 강다니엘 출신고교로 매스컴을 타거나, 아이돌 오디션 열풍이라는 때아닌 호재도 있어 상황이 그나마 나을지도 모른다.[69] 하지만 브니엘여고는 학군유출로 학생 수가 급감하여 전교생이 354명에 불과하고, 앞으로도 줄어들 상황이라 발등에 불이 떨어졌지만, 관선이사는 권한이 제한적이라 학교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사실상 없으므로 학교가 죽어가는 것을 그저 지켜봐야 하는 상황이다.
결국 현재로서는 재정기여자 선정으로 가야 하지만 교육청에서도 관선이사 파견이 장기화되어는데도 재정기여자 공모를 추진할 의지가 없고[70] , 2014년 가을에 재정기여자로 나서서 인수를 추진하여 구세주가 될 뻔한 유명 건설업체이자 모 사학재단의 경우는 인수가 무산된 이후로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아서 앞날이 어떻게 될 지는 아무도 모른다.
만약 670억이라는 부채를 통 크게 대신 상환해서 인수하겠다는 재정기여자가 나오면 단군 이래 최대금액으로 중고교를 인수하는 사례가 될 수 있겠으나, 이런 금액을 단지 인수라는 조건만 보고 내려면 대기업급 재단은 되어야 수지타산이 맞는다. 한마디로 670억이라는 천문학적인 금액을 사실상 기부하라는 뜻이기에 지방 중소기업이나 중견기업에 인수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나설 대기업이 얼마나 될지 미지수이고, 신성고ㆍ선덕고ㆍ서울예고처럼 설립자와 한동안 법적다툼을 해야 하는 리스크도 정말로 크지만, 과거에 부산을 기반으로 성장하여 현재는 글로벌 기업이 된 대기업들이 제법 있는 데다가 잘 하면 부산에서 기업이 사립고(기업 홍보 목적, 프로 야구단을 운영하는 기업의 고교야구 진출 등등...)를 인수할 마지막 기회가 될 수도 있고, 기업 입장에서도 인수하여 정상화에 성공만 하면 기업 이미지 홍보 효과로 670억 이상의 가치를 한다고 판단할지도 모르므로 속단하기는 아직은 이르다. 실제로 예원학교와 서울예고를 인수하여 정상화에 성공한 사례의 경우도, 모기업이 학교를 인수하여 정상화한 덕분에 기업 인지도를 많이 올렸다고 한다. # 그러나 사학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의과대학이 있지 않는 이상 지방 사립 대학을 500억 주고 사는것도 바보 같은 짓이라고 하는데#, 지방의 사립대학교도 아닌 사립 중, 고등학교... 그것도 희소성이 있는 외국어고등학교 혹은 자율형사립고등학교도 아니고 희소성이 낮은 일반계 고등학교나 준칙주의로 설립된 지방 예술 중,고등학교를 670억대의 막대한 부채를 변제하는 조건으로 인수하려는 회사는 어지간히 돈이 썩어나지 않는 유명 대기업 아닌 이상 없을것으로 보인다. 670억대의 부채를 변제할 능력이 되는 유명 대기업이라고 한들 학교 인수 추진 하려다가 주주 총회에서 채산성이 없다고 부결될 가능성이 굉장히 높을것이다. 물론 이 670억도 사실상 최소 비용으로 노후화된 학교 건물을 수리 하거나 이전하던지 내진보강 하던지 편의 시설을 확충하던지, 브니엘학원이 수익용 기본 자산 마저도 부실한 만큼 제대로된 수익용 기본 자산 까지도 새로 마련해야 하고 기타 정상화 비용이나 학교발전기금을 출연하는것 까지 다 합치면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날 수 밖에 없으며 정상화 비용이 1000억대에 다다를 가능성도 높다. 더군다나 설립자가 학교 경영권을 포기하려고 하지 않는 상황이라서 설립자와 법적 다툼을 해야 하는 만큼 추가적으로 로펌을 쓰는 비용도 적지 않게 지출될 것이며 그 외에도 적지 않은 액수의 비용이 지출될 것이다. 2018년 기준으로 학교총량제로 인하여 사립 중, 고등학교의 추가적인 설립은 사실상 막혀있지만 학교 총량제 이전에 사립학교가 신설 가능하던 시절 기준으로 수익용 기본자산을 제외한 단순 교육용 기본자산만 쳐도 오히려 학교 새로 설립하는게 더 싸게 먹힌다고 봐야 한다. (학교 건물 신축비용이 공립학교 기준으로 190~210억 정도이며, 학교 부지의 경우 교육용으로 쓸 목적으로 불하받는 경우 생각외로 싼 편이다. 그 190~210억도 내진설계 다 되어있고 다목적 강당이나 기타 편의시설 다 포함한 가격이 이정도다. 그렇게 크고 멋있게 지어놓은 부곡초등학교 신축 건물도 새로 짓는 비용이 190~200억 정도였다.)
2017년 11월 17일, 교육부에서는 사립학교법 시행령을 개정하여 사분위 정상화 심의원칙을 법령으로 마련하고, 사학비리로 임시이사가 파견된 사학법인에 비리로 퇴출된 구 재단의 이사 추천권을 절반 이하로 제한하여 복귀를 차단하거나 복귀하더라도 영향력을 제한하려고 하였다. # 문재인 정부의 교육 관련 주요 공약 중 비리 사학재단 복귀 차단이란 부분이 있으므로 예상보다 빨리 공약을 지킨 것. 빠르면 올해 연말부터 적용 예정이라고 하니 브니엘 학원으로 복귀를 노리는 구 재단 입장에서는 이번에도 크나큰 암초를 만난 것. 중등교육기관 법인 중 학교법인을 부도로 몰고 간 경우는 대한민국 역사에도 정말 드물고, 브니엘 학원 사태 이전에 더러 중등교육기관급 학교법인이 부도난 경우에도, 종전이사들이 복귀에 성공한 사례는 사학법인 재산 지켜주기에 급급하던 1980-90년대에도 전무했음을 생각한다면.... 하지만 개발독재 시기에는 사립학교 법인이 부도나면 대부분 인수로 가닥 잡고 심지어 인수 대상자가 정권 차원에서 이미 내정되어 있었다는 말이 있었다. 차라리 이런면에서는 브니엘학원 사태가 대구 정화여고 사태 처럼 개발독재 시대에 터져서 박정희나 전두환 정권에 의해 강제로 설립자를 몰아내버리는게 나았을지도 모른다.(대구 정화여고 설립자의 주장에 따르면 전두환 정권에 찍혀서 학교를 부도처리 해버리는 식으로 빼앗겼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진실은 저 너머에....) 그당시에는 설립자나 이사장이 사태가 이정도로 되어도 학교에서 계속 버티려고 했다가는 검은 지프차가 찾아와서 보기좋게 남산으로 끌려가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과연 차후에 정이사 선임이 이루어진다면 어떻게 선임될지 현재로서는 한치 앞도 알 수 없다. 3년 전에 인수를 노렸다가 종전이사들의 반발로 이내 포기했던 모 건설회사가 재등장할 가능성도 있다.
2017년 11월 21일, 부산광역시 금정구 의회가 브니엘 학원 문제를 다루면서 #, '''금정구에서 늘 학교를 옮겨온 지가 20년이 훌쩍 넘었는데도 불구하고 늘 아직까지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는데''' 라고 언급하여 브니엘학원 이전 사업이 실패했음을 시인하였다. 일반적으로 사립학교가 이전해서 10년정도면 지역사회에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는데, 20년이나 지나도 계속 이미지가 부정적이라면 누가 봐도 실패한 사례임이 분명하다. 학교뿐만 아니라 이전사업에 연관된 기업들도 하나같이 어느 한곳도 곱게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구 재단 인사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은 실패했다고 보는 것이 중론이다.
2017년 11월 27일, 사분위는 임기가 2018년 1월 14일까지였던 관선이사진을 2019년 1월 14일까지로 연기하였다. 브니엘학원 사태 20주기까지 임시이사 체제로 운영할 듯하고, 구 재단 복귀는 일단은 물건너 갔다고 봐야 할 것이다. 브니엘학원 채권단이 무지무지 독함을 잘 보여주기도 하다. 게다가 교육부에서 서남대 구 재단 복귀를 막기 위해 서남대를 아예 폐교한 상황에서, 브니엘학원 구 재단 복귀를 허용하면 형평성에 맞지 않는다. 아니, 막판에 서남대와 브니엘학원 사태의 주역 중 하나인 정선재단과도 엮여 브니엘학원 사태도 그냥은 넘어가지 않을 가능성이 높아져버렸다.
2017년 12월 13일, 부산광역시 금정구 의회가 브니엘학원의 체납 문제를 다루면서 '''재산정리''', '''폐교''' 같은 극단적인 조치까지도 언급하였다. 금정구 의회에서도 브니엘 학원을 사실상 내놓은 자식으로 취급하며 학교법인 해산이나 폐교 등도 가정하는 모양이다. # (...) 남원시와 서남대의 사례와 달리, 금정구 입장에서는 학령인구는 계속 감소하는데도 지산고ㆍ동래여고ㆍ부산사범대부설고ㆍ내성고ㆍ금정여고ㆍ남산고 같은 일반계 고등학교가 남아돌고, 부산예고ㆍ부산예중도 있는 만큼, 브니엘 학원이 폐쇄조치되어도 교직원 2백여 명의 실직 문제만 제외하면 그다지 신경 쓸 이유가 없다.
게다가 금정구는 지역 유일의 종합병원인 침례병원이 파산하여 폐쇄되고 직원 수백 명이 실직해서 하루아침에 거리로 내몰려도 그저 멀뚱멀뚱 쳐다만 보던 전적이 있는 만큼, 지역에서 남아도는 미니 중고교 몇 곳이 없어지고 교직원들이 실직한다고 대수롭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최근 들어서 내신 따기 어렵다는 이유로 미니학교 기피현상이 심화되는 만큼, 금정구로서는 오랜 골칫거리를 치운다고 반길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당장 브니엘 학원 주변에 있는 건 공장ㆍ폐기물 처리장ㆍ자동차 정비소ㆍ대형 트럭 주차장 같은 중고교와는 전혀 상관없는 것들... 아니 어지간하면 교육환경이나 안전문제로 인하여 중고교 주변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것들만 있고, 서점, 편의점, 문구점, 분식집, 교복사 같은 일반적인 중고교 앞에는 십중팔구 있는 중고교 수요를 노린 상권은 아예 형성도 안 되었다. 이런 광경은 전국적으로도 매우 드물다. 한마디로 주변 상인들도 이 학교는 답이 없다는걸 인정한 꼴이다. 설령 학교가 없어진다고 해도 주변 상권에는 아무 타격이 없을 것이다. 다른 정상적인 학교들이라면 학교 주변에 저런 게 들어온다고 하면 격렬하게 반발하는데, 브니엘 학원은 들어오든 말든 아예 신경도 안 쓴 것 같다.
4.3. 2018년
구 재단 측은 2017년 안으로 학교법인을 되찾겠다고, 관선이사의 임기가 2018년 1월 14일까지니까 늦어도 2018년 1월 14일 전까지는 되찾겠다고 호언장담하였다. 그러나 임시이사진의 임기가 만료되고 임기가 연장된 상황에서 구 재단이 복귀하기는 고사하고 사분위가 정이사를 선임할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사분위에서 정상화 추진실적 평가조차도 못하였으므로, 아직도 학교법인의 상태는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다. 현재로써 막대한 부채를 합법적으로 해결할 방법은 그냥 막대한 현금을 출연해서 다 갚던지 아니면 아예 학교법인이 청산되던지 그 외에는 선택지가 없는 상황이다.
2014년 브니엘예고 국제반 사태 때 인수하려 했던 그 건설회사가 2018년 들어 다시 나타나고 인수 관련 떡밥이 슬슬 풀렸다.[71] 이 건설회사는 통영에서 시설이 상당히 좋고 평판이 꽤나 좋은 사립 중고교를 운영하고 있고, 양산에서 전문대학을 운영하는 만큼 구 재단 보다는 사학 경영 능력이 훨씬 좋다고 볼 수 있다. 이 회사는 과거에도 부산에서 여러 공립, 사립학교 건물을 시공하거나 대수선을 한 경력이 있고, 몇몇 학교들의 이전사업을 담당하기도 했는데 학교 건물의 퀄리티도 괜찮았다는 평이었고, 대부분 큰 잡음 없이 마무리되어서 사실상 이 회사가 브니엘학원을 구원할 수 있는 마지막 주자로 보인다. 그 외에도 한국외국어대학교 서울캠퍼스 본관 증축, 리모델링을 담당한 적도 있었고 한국외국어대학교 서울캠퍼스의 지하캠퍼스를 조성을 담당한 적도 있었던 만큼,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2회에 걸쳐서 해당 건설회사에 발주를 했던걸로 봐서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도 이 건설회사의 기술력과 시공능력을 어느정도 인정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해당 건설회사로 인수되는지에 따라 운명이 결정될 듯. 특히 이 회사는 정말 이례적으로 부산에서 사립 중학교도 같이 운영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인수가 성공한다면 현재는 그로기 상태가 된 브니엘예중 대신에 1998년에 폐교된 브니엘중이 다시 부활할 가능성을 점칠 수도 있다. 이 회사는 계열사로 저축은행도 있는데, 브니엘학원 채권단은 저축은행이 상당수이므로 저축은행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알고 있을듯한 이 회사가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다. 물론 인수가 성사된다면 구 재단과 부기총은 학교 이권을 모두 내놓아야 하므로 격렬히 반발할 것이다.
구 재단에 우호적인 부기총도 2018년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때 보수인사가 교육감이 되도록 교육감 후보 단일화를 추진하려 하므로, 6.13 지방선거가 브니엘학원 사태의 변수가 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부기총이 현 김석준 부산교육감과 갈등 중이라 6.13 지방선거를 노리는 듯한 정황이 보인다. # 보수 단일화 후보가 발표되기는 했는데, 태극기 집회에 참여하는등 사실상 친박 계열로 보이며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이후 친박에 대한 인식이 썩 좋지 않다는걸 보면 보수 교육감이 다시 부산을 접수할 수 있을지도 현재는 미지수다. 결국 그들이 밀어줬던 보수 교육감 후보는 낙선하고 말았다.
교내의 일부 구 재단 인사들이나 부산의 일부 극우 기독교 세력을 제외하면, 부산시민 대부분은 구 재단에 대해 별로 감정이 좋지 않다. 얼마나 오죽했으면 그당시 부산시 의회나 금정구 의회의 보수 성향 한나라당(현 자유한국당) 인사들 조차도 브니엘 구재단을 격렬하게 비난했었다.# 부산시내 정치판에서 구 재단을 지지함은 당선되기 싫다고 공언하는 것과 다름없을 정도. 비리사학에 대한 면죄부 논란이 심했던 이명박 정권이나 박근혜 정권 때에도 브니엘 구 재단은 결국 복귀하지 못했는데, 하물며 문재인 정권에서 구 재단이 복귀할 수 있을지는 의문.
선거 이전인 5월에 사분위 구성진들이 대거 물갈이될 예정이라 위원회에 남은 친박계 인사들도 물러날 가능성이 높다. 현재로서는 대한애국당 같은 극우정당이 집권하는 수준의 어지간히 예상치 못할 사태가 벌어지지 않는 이상, 수백억 대의 비리를 저지르고도 돈을 갚지 않는 구 재단이 복귀할 가능성은 한없이 낮아 보인다. 브니엘 계열 학교처럼 관선이사가 파견된 비슷한 처지의 부산의 사립 동부산대는 구 재단을 복귀시키기보다는 재정기여자를 공모하는 쪽으로 방향을 정하였다.[72]
2018년 4월 18일. 문재인정부는 5개년 반부패종합계획을 공개하면서 사립학교법 개정을 통해 '''사학비리 당사자는 학교경영에 확실히 손 떼게 하겠다'''고 하였다.# 전술한 모 건설회사가 최근들어서 다시 브니엘학원 인수를 간보고 있는 상황이기도 하다보니, 구 재단은 이번에도 크나큰 암초를 만났다. 하지만 학교법인의 부채가 가히 천문학적인 수준인데다가 부산지역 부동산 경기가 2018년 이후 급격히 나빠지면서 해당 건설업체가 인수를 포기할 가능성도 높다.
예상대로 2018년 5월 중으로 사분위 구성원들이 대부분 물갈이된다고 한다.# 박근혜 정부가 심어놓은 인사들은 진작에 임기만료로 나갔고, 이제는 사분위 구성원들은 친문계 인사들이 들어올 가능성이 높다. 만일 친문계 인사들로 사분위가 구성된다면 구 재단의 복귀는 문재인 정부 임기 내에서는 가망이 없을 것이다.
2018년 6월 11일 정대화 상지대 총장 직무대행이 사학분쟁조정위원회 위원으로 영입되었다. # 정대화 상지대 총장 직무대행은 상지대 구재단과의 투쟁을 주도했던 인물로, 2016년에 상지대 구재단 복귀를 패소시킨 주역이기도 했던 만큼 상지대 구재단 판결을 통한 브니엘 구재단의 복귀 가능성은 한없이 낮아지게 되었다. 물론 법무법인 바른 같은 보수계 인사들도 남아있지만 상황이 상황이라서 지난 보수정권처럼 함부로 행동할 가능성은 낮을듯 하다. 더군다나 2018년 6월 13일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보수 정당이 유래없는 참패를 당하게 되었고, 특히 금정구는 지방선거에서 완전히 민주당이 접수하였다. 현재 분위기로써는 2017년에 계고하였던 사립학교법 시행령의 개정 가능성도 높아지면서 브니엘 구재단의 복귀를 합법적으로 차단하거나 제한할 가능성이 높아진 만큼, 브니엘 계열 학교들은 정상화가 된다면 대구 정화여자고등학교나 서울 중동고등학교와 비슷한 방식으로 이루어질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6월 19일 국무회의에서 작년에 예고했던 사립학교법 시행령 개정을 의결하였다. # 결국 '''합법적으로 브니엘 구재단의 복귀를 차단하거나 복귀하더라도 영향력을 제한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구 재단 측에서는 한때 한 가족이었던 고신대가 2003년에 최종부도처리되었다가 5년 만인 2008년에 고신 교단이 다시 되찾은 것을 보고 자신감이 생겨서 브니엘학원으로 복귀하려는 듯하지만, 고신대 부도 사태는 최소한 브니엘학원 사태와는 확연히 달랐었다. 고신대 부도의 경우도 사실은 고신대 병원의 방만경영에 대한 경고 차원으로 5억 6천만원에 불과한 금액을 가지고 부도 처리 했다는것이 정설이고, 고신대가 가진 200억대의 부채를 탕감하는데 고신 교단은 모금운동을 하는 등 적극적으로 협조하면서 정상화에 임하였기에 단기간에 부채를 털어내고 학교를 되찾을 수 있었으며 이후에 대학구조개혁평가에서 B등급, 대학기본역량진단에서 자율개선대학이라는 괜찮은 성적을 달성하기도 하는 등 객관적 지표에서만큼은 완전 정상화를 선언할 수 있었다. 최소한 학교 정상화에 소극적인 브니엘 구재단과 달리 고신 교단은 학교 정상화에 굉장히 적극적으로 협조했고, 부도 액수나 부채 규모도 의대와 부속병원을 보유한 대학교임에도 불구하고 고신대의 부도 규모가 브니엘 학원보다 현저히 적었다. 2003년에 고신대 부채가 200억으로 추산 되었는데 같은 시기인 2003년에 브니엘학원 부채가 370억으로 발표되었다는 사실만 봐도 차이가 현저하였다. 중고교를 운영하면서 나오는 수익은 그리 크지 않지만, 대학병원을 운영하면서 나오는 수익은 중고교 보다는 확실히 많음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최소한 브니엘 구재단이 고신 교단 처럼 협조적인 모습을 보였다면 고신 교단이 고신대를 되찾은것 처럼 브니엘 학원을 되찾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들이 여태까지 보인 행보는 고신 교단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고신 교단이 고신대 부채를 다 털어내는 데 5년밖에 안 걸렸지만, 부산에서 비리 사학에 관선이사가 파견되었다가 도로 비리 구재단이 복귀한 사례로 문현여상의 사례가 있는데, 이쪽의 경우도 비리를 저지른 이사장이 실형을 선고 받기는 했지만 학교법인임원취임승인취소 시점으로 부터 5년이 경과하여 당시로써는 합법적으로 복귀 가능한 시점에서 이사장이 횡령금을 변상을 완료하면서 복귀하였으며 비리를 저지른 액수도 그리 많지 않았는데, 브니엘 구재단의 경우는 금액도 금액이지만 학교 재단에 끼친 피해 금액을 변상하려는 의지가 없다는 차이점이 있다. 사실 브니엘 구재단도 모금 운동을 하고 있기는 한데, 학교법인을 되찾아서 브니엘 계열 중 고등학교를 정상화 하려는 의도 보다는 브니엘학원 내에서 설립이 중단되었던 신학대학의 설립 추진을 재개 하려는것이 주요 목적이라는 사실. 주변의 부산외국어대학교가 1985년 이전 사업에 착수한지 29년만인 2014년에 이전에 성공한 것을 보고 근자감을 얻어서 그런건지는 몰라도, 브니엘 신학대학 설립 의결이 1990년인데 30년 가까이 지난 시점에서도 포기를 안하는걸 보면 브니엘신학대학교에 대한 집착 하나는 정말 대단할 따름이다.
2018년 8월 들어서도 2014년 가을 부터 인수 떡밥이 나돌던 건설회사 재단이 이번에도 학교 이름은 정확히 밝히지 않았지만 부산에서 사립 고등학교 인수를 추진중이라고 재차 밝혔다.# 이 건설회사 재단은 부산시내의 다른 사립 중, 고등학교를 인수할수도 있다. 정이사 체제의 사학재단들은 암암리에 경영권이 매매되는 시세가 생각외로 상당히 낮게 형성되어 있다. 다른것도 아니고 부채가 거의 없고 건실하게 잘 돌아가는 사립 학교가 그저 인서울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고작 수십억 정도에 경영권이 거래된 사례도 많다. 해당 학교의 상태는 브니엘 계열 학교와는 비교가 안될정도로 좋았었는데도 말이다. 그리고 몇몇 사립학교 중에는 건물이 1970년대 초중반에 만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관리를 잘 해서 브니엘 계열 학교 보다도 건물 상태가 훨씬 좋은 경우도 더러 있었다. 부산서 브니엘 계열 이외의 다른 사립 중, 고등학교들은 모두 정이사 체제라서 정이사들과 협상만 잘하면 당장 1주일 안에도 인수 가능한데도 불구하고 이상할정도로 4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인수를 질질 끌고 있다는 점이고, 이 건설회사가 처음으로 사립 중, 고등학교 인수 의사를 밝힌 시기가 2014년 가을인데 공교롭게도 이 무렵에 브니엘 계열 학교에 관선이사 파견이 확정되었다는걸 생각하면... 참고로 사학분쟁조정위원회에서 브니엘 계열 학교에 관선이사 파견을 심의한 시점이 2014년 8월 25일 인데 이 회사가 부산지역에서 사립학교 인수 의사를 처음으로 밝힌 보도자료가 2014년 8월 29일에 나왔지만 울산쪽의 사립고등학교를 인수하기로확정되었다. 2주일 후에 이 건설사 재단의 학교와 신재단이었던 정선재단이 협약 형태로 서로 대화가 오고 간걸로 봐서# 구재단과 정선재단 양쪽 다 협의가 오고 갔을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게다가 학교 건물 신축을 이야기 하면서 신축비용을 500억으로 건물 하나당 190억 정도로 가정할시 추산한걸로 봐서 2개교 이상을 인수해서 신축 이전을 하려는 것임을 암시할 수 있는다.[73] 2018년 9월 27일에도 학교 인수를 암시하는 떡밥이 나왔다. # 하지만 아직도 학교 이름은 언급되지 않았다. 부산지역 건설업 경기가 2018년 이후로 급격히 악화된 만큼 이 회사로의 인수가 성사될지도 과연 미지수이며, 건설업 경기 악화로 포기할 가능성도 있는 상황이다. 부채 규모가 부채 규모이다보니 자칫 잘못 인수했다가는 중견기업 수준인 해당 회사의 경영 상황을 크게 악화시킬 수도 있을 정도로 독이든 성배 수준이다. 이 건설회사는 2019년 6월에 갑작스럽게 울산의 어느 고등학교를 인수하는것으로 결정하면서 브니엘학원이 이 회사로 인수되는건 물 건너갔다. 아마도 도중에 울산쪽 사학 재단에서 조건이 훨씬 좋은 고등학교를 인수하라고 해당 건설사에 인수 제안이 왔던것으로 보이며, 이 건설회사는 불과 2019년 4월 29일 까지만 해도 부산시내의 재정난에 빠지고 마땅한 경영자가 없는 사립 중고등학교를 같이 인수하겠다고 했다가, 갑자기 울산쪽에서 상당히 좋은 조건이 제시되면서 갑작스럽게 결정을 한것으로 보인다.
4.4. 2019년
브니엘학원 사태 20주기인 2019년이 찾아왔으나 학교법인의 정상화는 막대한 부채로 인하여 힘들어 보이며, '''파산 검토''' 라는 극단적인 언급까지 나온 상황이다. 학교법인이 파산되면 산하의 학교들도 목적 달성이 불가능해지는 만큼 자동적으로 폐교 수순을 밟게 된다. 실제로 파산 신청이 받아들여질지는 알 수 없지만 부산교육청이라던가 교직원들이나 총동창회 측에서 특채나 공립전환 같은 이야기도 오고 갔다는 이야기가 있는 만큼 최악의 상황인 파산 인용 가능성도 열어둔것으로 보인다. 댓글 참고
하지만 브니엘 계열 학교들의 자산 가치를 생각한다면 파산 신청이 된다고 침례병원의 전례를 생각했을시 오히려 채권자들에 돌아가는게 별로 없어서 채권자들이 손해를 볼 수 도 있다. 브니엘 계열 학교의 자산 보다 활용가치가 넘사벽으로 높은 침례병원의 부지와 시설도 계속 유찰 되어 반값으로 떨어져버렸는데, 학령인구 감소가 극심한 금정구의 지역 사정에다가 위치가 영 좋지 않고 건물 상태가 그다지 좋지 못한 브니엘 계열 학교의 자산이면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것이다.[74] 왠만하면 경영이 보장되는 사학이 저렇게 된것은 거의 유례없는 사례다. 참고로 그 동안 최종부도 처리된 사학은 극소수가 존재했지만 이들 모두 3자 인수를 통하여 사태는 조기에 진화되었었다.
참고로 1970년 5월 11일에 서울 경일 중고등학교가 개교한지 2년만에 파산으로 폐교된 사례 이후로는 49년간 국내에서 사립 중고등학교 재단이 파산까지 사례는 아직은 전무하며[75] , 경일중고등학교의 사례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학교가 파산으로 폐교되어도 학생들의 학습권을 보장하기 위해 학생들은 재배정 혹은 특별 편입이 이루어 지는 재학생 구제책이 49년전에도 이미 있었다
그나마 1981년 11월 23일에 제정된 사립학교 교원의 국・공립학교 교원 특채제도 덕분에 근속 3년 이상의 정교사들은 국공립 중등교원 특채 대상이 되지만[76] 그외 기간제 교사[77] , 예고 강사, 행정실 직원, 급식실 직원, 영선반 직원 과 같은 경우는 모두 실직하게 되는 만큼 이로 인한 파장이 어마어마 할 것이다. 더군다나 비리나 부실로 폐교되어 실직한 사학 교직원들은 다시 취업시장에 쏟아져 나와도 재취업이 매우 힘들다.
그리고 위의 경일 중고등학교와 달리 브니엘예중, 브니엘예고의 경우는 특수목적 학교인 만큼 특별편입이 과연 이루어질지도 의문이고, 부산예술고등학교가 근처에 있다지만 이 학교의 경우는 학생수가 굉장히 많고 충원률이 높은 과밀 학교라 남는 자리가 거의 없는데다가 결정적으로 브니엘예고와 부산예고는 사이가 썩 좋지 않기 때문에 특별 편입을 거부할 가능성이 높으며 이렇게 되면 브니엘예술중고 재학생들은 브니엘고, 브니엘여고 재학생들[78] 과는 달리 구제가 힘들 것이다.
2019년 현재로써 브니엘 계열 학교 중에서 학생수가 가장 많은 학교는 다름아닌 브니엘예술고등학교다보니 학부모들 중에서 브니엘예술중고등학교 쪽의 목소리가 가장 클 수 밖에 없기에 브니엘예술중고등학교 학부모들의 반발이 가장 클 것이다. 최악의 경우는 사실상 입결이 비슷한 대진전자통신고등학교나 부산정보관광고등학교, 금정전자고등학교 같은 특수목적고등학교가 아닌 특성화고등학교로 특별편입을 해야 할 처지에 놓일수도 있다. (실제로 2014년 브니엘예고 국제반 사태때 전학간 학생들 중에 특성화고등학교로 전편입한 사례도 적지 않았다는걸 생각하면.. 이들은 부산예술고등학교에 특별 전편입을 요구했으나 부산예술고등학교 측에서는 아예 신경도 안썼었다...)
앞에서 상술한대로 2017년경 부터 금정구 의회에서는 사실상 정상화를 포기하고 폐교, 재산정리 같은 극단적인 어휘들이 나올 지경이었다. 제1금융권도 아닌 제2~3금융권에서 차입한 돈인 만큼 이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면서 부채규모는 겊잡을수 없이 커졌고 여기에 새로 들어온 정선재단은 사태 해결은 커녕 방치하면서 문제는 더 커지고 있었다. 이후 법원 판결로 관선이사진이 들어오면서 이 문제를 처리하기 힘들었을것이다. 워낙 충격적인 수치기에 이 사실이 외부로 알려지게 되면 당연히 큰 파문이 일어나는 지라 관계당국도 결국 덮어두고 있었다고 보는게 맞을것이다. 사실, 교육 문제가 부동산 시세에도 영향을 미치는 대한민국의 특성상 금정구 내 부동산 시세에도 영향을 미칠테고 이에 따라 학부모들의 반발도 당연히 예상되었을테니 그랬겠지만 결국, 곪아썩어가는 상처를 더욱 키운 상황이 되고 말았다.
이 사실이 외부로 누설되지 않게 덮어두고 있었는데 2019년 2월 25일자 기사로 이러한 실상이 외부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제는 더 이상 덮어놓고 싶어도 덮어놓지 못할 상황이 되어버렸다.#기사 사실 670억이라는 부채 액수는 2017년 경 관선이사진에 의해 파악은 된 상태였다. 어떤면에서 부산시 교육청과 관선이사진도 직무유기를 한셈이기도 하다. 물론, 답은 없었겠지만.. 그렇다고 정선재단이 있었다면 더 문제가 심각했을지도 모른다.
이쯤 되면 학교법인 자체의 신용도는 그냥 없다고 봐도 무방하고 제1금융권 거래도 불가능하다. 한때는 부산지역 정/관/재계 유명 인사들의 자제들이 많이 다녔었던 명문 재단이 파산 검토라는 극단적인 언급까지 나올 지경인걸 보면 그저 눈물이 앞을 가릴 따름이다. 이쯤되면 자력으로는 재기가 힘들어 보이는 상황이다. 그리고, 이전부터 인수설이 나돌던 건설사의 경우도 2019년 현재 부산지역의 침체된 건설업 및 부동산 경기 탓인지 더이상 인수설 자체가 나오고 있지 않다.
사실 2003년 노무현 정부때의 사학분쟁조정위원회에서도 막대한 부채(당시 370억)로 인하여 학교 운영에 지장이 갈 정도라는 언급이 있었다는걸 생각하면 어떻게 보면 생각외로 오래 버텼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학생들이야 구제가 가능한다 쳐도 특채 대상이 아닌 교직원들의 대량 실직이 우려되었기 때문에 그동안 봐줬다고 보는 것이 정설이다. 더욱 만만치 않은 사실은 그동안은 드러나지 않은 사실인데 브니엘학원의 채권단 또한 상당한 강성으로 '''아예 브니엘학원의 채권을 관리 및 추심하기 위한 법인을 따로 만든건 기본에''' 이 거액의 부채를 수십년째 계속 '''소멸시효를 연장'''하면서 질질 끌고 있다. 아예 대놓고 따로 법인을 만든 만큼 그들은 계속 소멸시효를 끝까지 연장하려 들 것이고, 부채 액수에 관해서도 '''협상을 거부'''하는 상황이다. 이쯤 되면 자력회생도 구재단의 복귀도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볼 수 있으며 현재로써 학교가 정상화 되는 길은 3자 인수[79] 로 670억~840억 이라는 천문학적인 거금을 일시불 현찰로 퉁칠 수 있는 유명 대기업 재단에 인수되는것 외에는 더 이상의 방법도 없다. 어쩌면 P&A방식으로 부채는 남겨둔채 자산만 기존 혹은 신규 학교법인으로 이전하는 방식도 생각해 볼수 있으나 이런 방식은 부실기업을 정리할때나 쓰이는 방식이지 비영리법인인 학교법인에 적용된 사례는 없다. 솔직히 저런 방식은 말도 안되는 방식이기도 하다. 그리고, 채권단이 저걸 허락할리가..
3월 25일 사학분쟁조정위원회 심의 안건에 브니엘학원이 상정되었다. 교육부 사분위지원팀으로 하여금 정상화 추진실적 등에 대해 현장조사를 실시하고, 이전 회의 결과에 '현재 제출된 학교부채해결방안(부지 매각)만으로는 정상화 추진이 어렵다고 판단되므로 차기회의시(‘17.5.29. 예정)까지 학교부채 해결방안을 보완하여 다시 제출하도록 하다.' 했으나 이후 보완이 없었음으로 다시 한번 부채 해결방안을 보완해서 제출할것을 재촉구한다 결과를 도출했다. 한마디로 사학분쟁조정위원회도 2년 동안 브니엘학원 사태를 방치한것으로 과연 해결 의지가 있는지도 의문인 수준이고(물론 이쯤 되면 사학분쟁조정위원회 차원에서 할 수 있는건 없을 정도지만...), 구재단 역시도 2년이라는 시간을 추가로 더 줬음에도 불구하고 정상화 의지가 없다는 것만 보여준 꼴이다. 구재단에게는 일단 2019년 5월 말 까지 데드라인이 주어졌다고 한다. 그리고 파산 우려가 있는 명지학원 역시도 교육부에서 학교법인 자산을 처분하여 부채를 변제하는건 절대로 불가 하다고 했던 만큼, 브니엘학원의 부채를 해결하기 위해 학교법인 자산 매각 같은 방안을 불허할 가능성은 100%에 수렴하고 있다. #
4월 25일 사학분쟁조정위원회가 지루한 브니엘학원 사태를 정상화 하기 위한 현장실사를 한다는 기사가 올라왔다.# 사분위는 학원에 대한 현장 조사를 실시하고 이사 7명과 임시이사 대표, 브니엘고-여고-예고-예중의 학교운영위원장 및 학부모 대표, 학교장, 총동창회(브니엘고 총동창회)[80] 관계자 등을 대상으로 면담을 진행했다. 하지만 정선재단 측에서도 학교로 복귀를 포기한건지 심각한 자본 잠식 상태의 학교법인 자체가 정상화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한건지는 몰라도 2006년에 그들이 대신 갚아줬던 감사처분 이행금(구재단의 교비횡령금과 교직원 체불임금) 40억에, 브니엘국제예술중학교 신축 비용 24~30억 상당의 출연금에다가 13년간의 이자를 붙여서 몰염치하게도 무려 170억이라는 채권을 청구(...)하게 되면서 브니엘학원의 총 부채는 840억으로 늘어날 처지에 놓여버렸다. 학교 자산 가치가 476억이라는걸 감안하면 부채가 364억이나 초과한 심각한 자본잠식 상태라고 볼 수 있다. 사실상 학교 자체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거나 다른 건실한 사학재단이나 기업에 인수되어 기사회생 하게 되는 갈림길에 놓이고 말았다.
2019년 6월 들어서 재학생 숫자들이 집계 되었는데, 브니엘고가 481명, 브니엘예고가 478명(편제는 540명)으로 500명대 밑으로 떨어진데다가, 브니엘여고는 309명으로 폐교 대상인 300명을 아슬아슬하게 넘긴 수준이라 4학군내에서 가장 학생수가 적은 고등학교들이라는 불명예를 나란히 차지하였다. 1995년 까지만 해도 4학군 최대 정원을 자랑했었던 브니엘고 입장에서 481명의 정원은 가히 굴욕 수준인데다가, 브니엘예고의 경우는 2019년 3월 당시에는 510명을 넘기면서 선방 하였으나 파산설이 돌면서 중간에 적지 않은 학생들이 빠져나가버렸고 학교 특성상 정부의 재정지원을 받지 않고 학생 등록금 수입 비율이 크기 때문에 중간에 이정도로 학생수가 빠져나가면 타격이 클 것이다. 특히 현재의 학생수 감소 속도를 본다면 이 학교들의 미래는...... 학교가 새 재단을 만나서 신도시로 이전하는거 외에는 살아날 방법도 없어 보이지만, 이러한 최후의 방법 역시도 현재 학교 상황을 생각했을시 현실성이 없다는걸 생각하면.... 한마디로 브니엘학원은 거위(연산동 시절)의 배를 갈라버린 처지가 되어버렸다.
그나마 관선이사 체제에서 브니엘고가 과학중점학교가 되면서 간만에 호재가 일어나긴 했지만 시설은 낙후되었고 교통은 나쁘고 재단은 수백억대의 채무에 시달리는지라 여러모로 상황이 좋지는 못하다는게 문제.
5. 여담
이런 말도 안되는 학교 이전 사업을 수주한 시공사는 다름아닌 전국구 건설사인 '''한신공영'''(...)이다. 부산지역 공사립 학교 이전사업은 주로 지금은 사라진 자유건설이나, 동원개발ㆍ삼정ㆍ협성ㆍ경동 등 부산지역 향토 건설업체들이 전담했으므로 예외적인 사례이다. 전성기 한신공영의 명성을 아는 이들에게는 한신공영이 이런 이전사업을 수주했음이 상당히 놀라울 듯하다. 한신공영은 과거 강남개발의 주역 중 하나로, 신반포 한신 타운 등 철저한 계획 아래 1만 세대를 가뿐히 넘는 초대규모 아파트를 만든 최고급 아파트 브랜드였'''었'''다.[81] 신반포 한신 타운은 서울 8학군 명문 세화여중ㆍ세화여고ㆍ세화고를 키운 주역이기도 했다.
이름 높고 경력 짱짱한 한신공영이라면, 브니엘학원 이전사업을 수주했을 때 이 사업에 장래성이 없음을 인지했을 가능성도 높다. 한신공영이 올림픽선수기자촌 아파트를 지을 무렵, 일반 분양을 촉진하기 위해 보성중ㆍ고등학교와 창덕여고 등 괜찮은 학교를 아파트 단지 내로 이전하였다. 1987년 잠실 한신코아 아파트를 분양할때도 홍보자료에서 학군을 강조하기도 했었을 정도로 한신공영은 이미 학군의 중요성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던 회사였다.#
부산도 서울처럼 고교평준화제도 시행 중이었고 학군이 중요했다. 학교의 위상에는 학군이나 입지조건도 크게 작용하는데, 학군이 중요한 부산시에서 중고교를 신도시 아파트 단지 내로 이전한다면 모를까, 브니엘학원처럼 엉망인 땅으로 이전하고도 수익이 나오길 기대할 수 없었다. 역으로 아파트의 가치를 결정하는데도 학군이 크게 작용하고, 아무리 좋은 자재를 쓰고 좋은 설계를 했어도 학군이 별로라서 평가절하되는 아파트도 굉장히 많다. 그런데도 한신공영은 계획대로 일이 안 되자 학교법인에 어음 보증을 서달라고 철면피 행각을 하였고, 교사(敎舍) 시공수준도 한때 최고급 브랜드로 이름 날리던 건설회사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물론 실제로는 지역 하도급 업체들이 시공했겠지만) 특히 원가절감이 정말로 엽기적인 수준이었는데, 1960년대도 아니고 1990년대에 만들어진 학교 시설이 운동장 하나를 학교 3곳이 공유함은 기본이고, 심지어 공사기간 단축과 공사비용 절감 차원에서 지하 기계실을 1개 만들어서 학교 3곳이 공유하는 등 엽기적인 설계를 하였다. 이러한 기업은 신반포 한신 아파트 시리즈에서도 먼저 활용되었다가 최근들어서 재건축 과정에서 지분 분쟁으로 골머리를 앓게 만들기도 하였다. 건물 퀄리티나 완성도 면에서는 같은 동네에 8년 먼저 완공된 산업체 부설학교인 태광여상보다도 못했다고 한다. 당시 부산에서 가장 잘나가던 최대의 향토 건설업체였었던 자유건설도 이러한 학교 이전 사업 자체는 전혀 현실성이 없다고 판단하여 아예 관심을 안주다보니, 부산에 이제 막 진출한 한신공영이 부산 사정에 대해 잘 모른 나머지 멋모르고 덥석 물어버린듯 하다. 아니면 부곡동 경남 한신아파트 분양 촉진 차원에서 경남한신아파트가 속한 금정구 관내로 브니엘고등학교를 이전할 목적으로 수주했을 가능성도 높은데, 경남 한신아파트는 한신공영이 부산 진출 이후 처음으로 단독 발주 받은 아파트 건설 사업으로 한신공영이 정말로 공을 들였었던 프로젝트였고(그 이전에 삼정, 반도보라와 공동으로 발주받은 만덕 그린코아는 규모는 컸으나 입지조건과 학군 선호도가 낮아서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다), 1992년 수주 당시 경남 한신아파트가 속한 부산 4학군(동래학군) 지역은 부산 최고 학군에 속했는데 이 4학군에서도 1992년 당시 가장 인기가 높았던 학교가 브니엘고등학교(실제로 한신공영이 부산에서 처음으로 시공한 아파트인 만덕 그린코아에서도 위장전입 까지 해서라도 가려고 했었을 정도로 브니엘고의 인기가 높았다.) 였기 때문에 한신공영은 부산진출 이래 희대의 역작으로 예상되던 경남 한신아파트[82] 에 그 인접지역으로 브니엘고등학교가 이전하면 경남 한신아파트는 브니엘고등학교로 배정될 확률이 높아지기에 더더욱 인기를 끌 수 있겠다고 판단하고, 경남 한신아파트 분양 촉진 차원에서 브니엘고등학교 이전 사업을 덥석 물었을 가능성은 정말로 개연성이 높다. 물론 경남 한신아파트는 생각만큼 면적이 넓지는 않았던 경남합섬 공장 부지를 아파트로 재개발 하는거라서 신반포 한신아파트나 잠실 올림픽선수기자촌 과는 달리 아파트 단지내로 학교를 이전시킬수 없고 근처에도 학교용지로 쓸 수 있는 남는 부지가 없다보니 저런데 학교를 이전시켜도 무방하다고 판단 했을 것이다. 실제로 브니엘중학교도 원래는 경남 한신아파트 쪽에서도 일부 학생들을 어거지로 배정하려 계획 했었다가 경남 한신아파트 입주자들 사이에서도 가까이 있는 금정여자중학교(현 금양중학교)와 부곡중학교를 놔두고 왜 저 멀리있는 남녀공학 중학교로 학생들을 배정하려 한다고 반발이 생겨서 폐교되었다는걸 생각한다면, 단순 우연의 일치라 볼 수 없을 정도. 결정적으로 한신공영이 경남 한신아파트를 수주한 시기나 브니엘학원 이전을 수주한 시기나 둘 다 같은 1992년 하반기 라는 사실이고, 브니엘학원 이전 사업을 담당했던 시행사의 주소지가 경남 한신아파트 현장 쪽에 있었다는것.
1985년 이후로 90년대 초반까지 신반포에 신규 아파트 입주가 한동안 없었고, 1980년대 전반에 걸쳐 롯데ㆍ삼성ㆍ럭키(현 GS건설)ㆍ쌍용ㆍ대우ㆍ선경(현 SK) 등 대기업들도 주택사업에 진출하였다. 한신공영은 기존 경쟁자인 현대건설뿐만 아니라 신규 경쟁자인 대기업 건설사와도 부딪히느라 그 위상이 많이 흔들렸다. 신반포 한신타운 같은 성공적이고 철저한 강남개발은 (한신공영 창업주) 김형종의 사위 김의철[83] 이 추진했다.
브니엘학원 이전사업 무렵 한신공영은 창업주 김형종이 작고하고 김의철에 비하면 경영능력과 경험이 부족했던 젊은 2세 김태형이 회사를 세습하여 경영하였다. 부친 김형종이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김태형은 고작 27세에 한신공영을 물러받았다. 게다가 한신공영은 부산에 뒤늦게 진출한 관계로, 서울에서는 최고급 브랜드였지만 부산에서는 삼익ㆍ한양은 물론이고, 현대ㆍ롯데ㆍ럭키 등과 비교해도 브랜드 파워가 약했다. 이런 쟁쟁한 회사들에게 밀려 한동안 부산의 비선호지역에서 아파트를 분양하데다가 심지어 부산에 오래전부터 이미 소재하고 있던 중저가 연립주택, 아파트 건설사인 한신주택과 같은 회사로 오인될 정도로 입지가 좁았으므로, 한신공영은 부산 한복판 행정타운(부산시청, 경찰청) 및 법조타운(법원, 검찰청)이 될 연제구에 공무원과 법조인 수요를 노리고 브랜드 이미지를 일신할 447세대 규모의 최고급 아파트를 지을 만한 부지를 확보하고자, 브니엘학원이 폭망하든 말든 물불을 안가렸을 것이다. 몰락 직전 한신공영이 얼마나 곪았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특히 브니엘학원 이전사업 시공과정에서도 한신공영은 말썽을 여러번 부렸으며#, 특히 브니엘학원 이전과정을 취재하러 온 기자들에게 폭언을 가하거나 폭행하고 고가의 전문가용 카메라를 빼앗는 등 최고급이라는 명성에 걸맞지 않는 행동을 보여 크게 망신을 당하였다. 부산 지역신문 기자들을 이런 식으로 대함은 '''부산에서 장사하기 싫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 # 물론 그 폭행을 가한 문제의 현장소장은 이후 한신공영 워크아웃 과정에서 채권단 혹은 새로운 주인에 의해서 실패한 사업에 연류된 패잔병이라고 부서째로 보기좋게 모가지 날아갔겠지만... 게다가 한신공영은 부도 직전에는 사실상 남의 돈(금융기관 대출)을 자기 돈처럼 막 썼을 정도로 차입 경영이 심해서 여러 차례 경영합리화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舊 재단 입장에서는 동래재단이 우성건설(학교 이적지에 우성 베스토피아 아파트 건설)과 손잡았으니 자기네들은 우성건설과 같은급에 속하는 한신공영과 손잡아야 겠다고 생각했겠지만, 한마디로 구 재단은 썩은 동아줄을 잡았던 것이고, 그 것이 브니엘학원이 망하는 시발점이 된 것이다.
결국 IMF 사태 때 브니엘학원이 망하자 한신공영도 곪을 대로 곪다가 같이 부도[84] 가 났다.
한신공영 또한 브니엘학원 사태의 또다른 주범으로 낙인 찍히자, 안 그래도 관계가 불편했던 부산 여러 지역신문사 기자들이 대대적으로 보도하여 크게 망신을 당했다. 설상가상으로 부도사태로 인한 서면 한신아파트 사후지원 문제로도 브랜드 이미지가 크게 실추되어 입주자들을 골치 아프게 만드는 바람에, 그 후 십수 년간 부산 아파트 시장에서 아웃당하는 굴욕을 맛봤다. 한신공영 입장에서 브니엘학원 사태로 망신을 당함은, 코끼리가 독개미에 쏘여 죽은 상황으로 비유할 만하다. 당시 순위 7위권이었던 건설업체가 부도가 나버린 만큼 후폭풍은 너무나도 컸었고 그 결과, 김태형 일당은 모든것을 자포자기한채 법정관리를 신청했고 채권단은 워크아웃을 하면서 사태의 주역이던 김태형 파벌에게서 경영권을 완전히 박탈하고 한신공영과 인연.. 아니 건설업과의 인연을 영원히 끊게 하였다. 그리하여 지금은 그네들의 행방도 알 수 없다. [85] 결국은 한신공영 입장에서도 브니엘학원 이전 사업을 수주한것은 독이 든 성배를 제대로 들이킨 것과 다름없었던 것이었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브니엘학원 이전 사업을 담당한 자들은 지금은 한신공영에 거의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당시 총책임자인 김태형 한신 회장과 그 일당은 이미 진작에 물러나서 호주로 탈주했고, 그 외에 관련자들도 실패한 사업으로 기업에 위기를 끼친 패잔병이라고 채권단 또는 새 주인에 의해서 기업 정상화 과정에서 보기 좋게 부서째로 해고했을 것은 뻔한 일이다. 동원개발, 삼정 같은 부산지역의 유명 향토기업들이 브니엘학원 이전 사업을 거들떠 보지 않았던게 괜히 그랬던 것이 아니었던것. 차라리 한신공영이 브니엘학원 이전 사업을 수주하지 않았어도 한신공영의 부산재진출은 수년이라도 앞당겨졌을 것이고, 한신공영이 경남한신아파트로 부산에서 처음으로 큰 성공을 맛보았던 금정구에 하다못해 지역주택조합 아파트 형태라도 재입성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시간이 지나 2010년대 이후에서야 한신공영이 삼성물산(舊 삼성종합건설)과 비슷한 시기에 부산에 재진출했지만, 삼성 래미안과 달리 딱히 대박을 내진 못한 듯하다.
만약에 부영그룹이 브니엘학원 이전사업 시공사였다면? 부영그룹 자체는 말이 많은 회사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교육사업에 대단히 열성적이고, 학교가 폐교되는 꼴을 그냥은 못 지켜보는 부영그룹이 브니엘중을 따로 데려가서 다른 곳에서 부지를 매입하고 교사를 신축해 살렸을지도 모른다. 브니엘중의 라이벌이었던 거성중만 해도 1990년대 초반에 계성여자상고 재단에서 분리되어서 독자적으로 살림을 차리게 되었고, 같은 학군의 동해중도 1988년에 대동병원, 대동간호전문대 재단에서 분리되어서 독자적으로 살림을 차렸었다. 최소한 브니엘중은 거성중이나 동해중보다 못한 학교가 절대 아니었다. 오히려 부산 최초 남녀공학 중학교였던 만큼 나름대로의 역사적 가치가 있었다. 만약 일이 이렇게 진행되었다면, 브니엘학원 사태가 이처럼 심각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설령 사태가 커진다 해도 부영건설이 도의적으로 책임을 느끼고 브니엘고나 브니엘여고에 학교 발전기금을 쾌척하거나, 우정학사 기숙사를 선물해서 학생 수를 늘리는 데 약간이나마 도움을 줄 수도 있다. 실제로 부영그룹은 동래고에 기숙사를 선물한 바도 있고.... 물론 그전에 안정적인 사업만 찾으려는 부영그룹이 애초부터 막장이었던 브니엘학원 이전 사업에 관심을 가졌을 확률은 한없이 낮았겠지만... 아쉬운 일이다. 하지만 부영건설은 아이러니하게도 2019년에 창신대학교를 인수하였다. 창신대학교가 계보상으로 따졌을시 브니엘학원과는 아예 남남이 아닌 먼 친척뻘이 된다는걸 생각하면 미묘할 따름이다.
여담이지만 이 사태로 굉장히 반사이익을 본 곳이 있는데 바로 동인고등학교다. 1995년까지만 해도 4학군 원탑은 브니엘고등학교였고 동인고등학교는 브니엘고등학교의 뒤에 가려진 신세였으나, 1996년 브니엘고등학교가 입지 좋은 연산동 한복판을 버리고 영 좋지 않은 곳으로 이전하는 것과 동시에 설상 가상으로 고교 배정 때 1, 2지망 개념이 도입되면서 이로 인하여 상대적으로 입지가 좋게 되었던 동인고등학교의 선호도가 높아짐과 동시에 기회를 제대로 잡아버리면서 드디어 22년 만에 완전한 역전을 하게 되었고, 결정적으로 1999년 브니엘학원 사태가 터지면서 언론의 집중 포화를 당하고 브니엘고등학교가 부산광역시 교육청의 징계 차원에서 36학급에서 30학급으로 난데없이 감축되는 바람에 동인고등학교와 브니엘고등학교의 간극은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로 벌어지게 되어 이는 20년 넘게 지난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물리적으로 입지조건도 입지지만 학급수에서도 간극이 벌어지고 말아버린 것. 한마디로 동인고등학교 입장에서 브니엘학원 사태는 천재일우의 기회가 되어버린 것이었다. 그 외에도 지산고등학교와 용인고등학교도 동인고등학교 만큼은 아니지만 굉장한 반사이익을 얻게 되었다. 특히 용인고등학교는 1995년 까지만 해도 4학군에서 가장 입지가 안 좋은 불명예를 안고 있어서 4학군 내에서 선호도가 낮았고 1996년 이전 까지만 해도 용인고등학교에 걸렸다면 영 좋지 못한 위치의 학교라고 우는 학생이 있었을 정도였다고 하지만[86] , 1996년에 브니엘고등학교가 더 좋지 못한 입지 조건으로 이전하는 바람에 그나마 그러한 불명예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게 되었고, 이 무렵에 좋은 실적을 내면서 4학군의 비선호 학교라는 굴레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되었다.
5.1. 서남대학교와의 인연
서남대의 중고교판이라 평가받는 브니엘 계열 학교들은 실제로도 서남대와 인연이 있다. 2017년 4월에 정근 이사장을 필두로 한 정선재단이 의대를 노리고 서남대 인수전에 뛰어들었다는 것이다. # 그러나 정선재단은 과거 브니엘 시리즈 학교들을 막장으로 운영하면서 골든아워를 놓쳤고, 교육청으로부터 온갖 징계를 받다가 결국 브니엘학원 정상화에 실패하고 관선이사가 다시 파견되는 상황이었다. 그리하여 서남대 인수전에 뛰어들었다가 브니엘학원 사태가 오래간만에 재조명되며, 오히려 구성원들에게 반감만 샀다. 브니엘 계열 학교를 운영할 때에는 재정난에 시달린다며 투자를 제대로 하지 않았고, 2010년대 정관신도시나 명지신도시 조성 당시에는 학교 이전 재배치 기회도 놓쳤으면서, 서남대를 인수하겠다고 할 때에는 재정이 탄탄하다고 말하며 서남대 시설을 새로 증개축하겠다고도 했지만, 이를 믿는 사람은 없었다.
결국 2017년 서남대 인수전에서 발목이 잡혀 가장 먼저 탈락하였다. 아무리 의대가 황금알을 낳는 거위라고 해도, 고등학교를 운영하는 난이도와 의대를 운영하는 난이도는 하늘과 땅 차이이며, 대학 건물, 그것도 의대 건물을 새로 짓는 비용은 고등학교 건물과는 비교가 안 되게 비싸다. 공립 초, 중, 고등학교 건물의 건축비용이 2018년 기준 190~210억 정도(24~30학급 규모)인데 대학교 건물 건축 비용은 그의 몇갑절은 된다. 2008년에 지은 동서대학교 도서관 건물만 해도 당시 액수로 500억에 달하였으며 비슷한 시기에 지은 동아대학교 부민캠퍼스 종합강의동 또한 500억 상당의 건축비용이 들었다. 고등학교도 제대로 운영 못해서 쫓겨난 재단이 의과대가 딸린 대학을 과연 제대로 운영할 수 있을까?
만약 정선재단이 브니엘 3총사 고등학교를 제대로 명문으로 키워 운영했거나, 증축이나 신도시 이전 재배치 사업 등등으로 시설, 교육환경을 크게 개선했더라면, 서남대 인수전에서 사학경영 실적 면에서 좋은 평가를 받아 인수에 성공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중에 대광여고와 서진여고도 서남대와 함께 한 식구로 들였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리고 결국 브니엘 학원 사태의 주역 중 한 축인 정선재단에겐 다시 한 번 기회가 왔었다. 서남대가 막판에 폐교 직전으로 몰리자 다시 정선재단을 끌고와서 매달리며 최후의 보루로 인수합병을 시도했다.
하지만 교육부는 서남대와 정선재단간 인수합병을 승인하지 않고 강제로 폐교 조치를 내렸다. 오히려 정선재단이 브니엘예중과 브니엘예고에서 저지른 악행이 여기저기 알려져서 심지어 경기도 교육청에도 조심하라는 공문이 갔을 정도로 너무 유명했다. 또한 브니엘 계열 학교들은 (서남대를 설립한) 홍복재단 계열 고교보다도 상태가 나빴기에, 교육부가 인수합병을 불허할 명분이 충분히 있었다. 오히려 교육부 입장에서는 서남대 폐교조치를 내리는 것에 대한 심적 부담만 덜어주는 꼴이었다. 결국 서남대는 이렇게 최후를 맞이하였다. 하지만 브니엘학원과 의대와 대학병원을 보유한 고신대가 1980년대에 한 가족인 적도 있었던 만큼, 정선재단이 서남대를 인수해서 브니엘 계열 학교들과 한 가족으로 들였다면 고신대 의대 입장에서는 많이 난처했을것이다.
[1] 구약성경 창세기 32, 23-32에서 야곱이 하나님과 밤새도록 씨름한 끝에 축복을 받은 뒤, "내가 하나님과 얼굴을 맞대고도 살아남았구나!" 하면서 그 자리를 브니엘(신의 얼굴)이라 지었다고 한다. 천주교 성경에서는 한글로 '프니엘'이라고 음역하였고, 영어권 성경에서는 Peniel이라 한다. 하지만 Pniel, 또는 Penuel이라 해야 정확하다는 이유로 그렇게 표기하는 영어 자료들도 있다.[2] 과거에는 브니엘중과 브니엘 학원 차량사업부인 (주)월드시스템도 자회사로 산하에 있었다. 브니엘중은 연산동 교사 철거 및 교육청의 학생 배정 중단 조치로 1998년에 최종 폐교, (주)월드시스템은 2007년 경에 신우고속관광에 흡수되는 형태로 청산 및 계열분리되었다.(잔류법인 신우고속관광, 청산법인 월드시스템)[3] 사실 객관적인 면에서 상문고 사태는 진작에 능가했다. 단순히 분규 기간만 따져도 상문고 사태는 1994년에 제대로 터지면서 사태가 완전하게 종결된 2012년까지 18년간 관선이사가 파견되었으나, 브니엘학원은 1999년 이래 20년이 지난 2019년 현재도 사태의 해결은 커녕 여전히 관선이사가 파견중인 상태다. 아무리 못해도 21~22년은 그냥 넘길 분위기다. 그리고 상문고는 서울 강남권인 서초구의 금싸라기땅에 위치한 사립학교로 자산가치는 브니엘학원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굉장히 높은데(서울 강남권이라 주변 아파트 거래 시세만 해도 최하 10억대에 육박한다.) 비해 부채는 매우 적은 편으로 부채보다는 이사진의 비리와 분쟁이 주요 원인이었으며 사태가 터진 시점에서도 학교 경영이 크게 위험해질 정도는 아니었으나, 브니엘학원은 이보다 더 골치 아픈 부채 문제가 1순위이며 자산 가치에 비하면 부채가 670억으로 지나치게 높은 수준이다. 그리고 상문고 사태는 1개 학교 규모지만 브니엘학원 사태는 4개 학교 규모로 4개 학교 각자가 이해관계가 너무나도 다르다보니 2019년 현재 시점에서는 오히려 상문고 사태보다도 일이 더 크게 꼬여버리고 말았다.[4] 상문고는 김영삼 대통령이 여당 인사들을 희생하더라도 끝까지 비리를 캐서 엄단하라고 직접 지시를 내렸기에 사건이 깔끔하게 종결될 수 있었다. 하지만 브니엘학원은 브니엘예술학교의 특성화중학교 승격 및 브니엘예고 설립 과정에서 당시 정권의 공약이었던 '사립학교 자유화'를 퇴색시킬 수 있다는 이유로, 학교설립준칙주의 완화 정책에 온갖 반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교육부 장관 이해찬이 덜컥 승인을 해줬다가 개교한 지 고작 1개월 지났을 무렵에 최종부도 처리되었다. 그래서 김대중 대통령 입장에서는 이해찬 같은 여당 인사들을 희생시키기 싫었기 때문에 그냥 넘어간 듯하다. 오히려 김대중 대통령은 준칙주의 완화 같은 사학의 자유를 표방하면서 사학을 탄압(?)하는 것을 군사독재 정권이나 하는 짓이라고 여겼다. 이런 이유로 인하여 이 사학재단은 특이하게도 더불어민주당 인사들과도 엮여있는 점이 많아서 2019년 현재도 더불어민주당 인사들도 쉽사리 못 건드리고 있는 실정이다. 설립자가 더불어민주당 인사들과의 관련성에 대해서 폭로하는 순간 더불어민주당도 난감해지기 때문이다.[5] 하지만 이는 당시 모기업이던 정선재단의 일방적인 주장일 뿐이며, 실제 재무재표 상에서는 2017년 12월 31일 기준 자산총계 약 760억, 자본총계 약 470억 정도이다. 적지 않은 액수의 자산을 가진 모기업이 맞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2017년 서남대 인수전에 뛰어들었던 당시에 주장하던 수천억대 수준은 절대 아니라는거. # 서남대는 고사하고 브니엘 계열 학교들을 정상화시키기에도 모기업의 자산규모는 여전히 부족한 수준이다.[6] 1930년생으로 당시 경상남도 최고의 명문인 진주공립고등보통학교(진주고등학교의 전신) 출신이며 진주공립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이후 미국의 대학교로 유학을 떠났었다. 1930년대에 태어난 사람들은 시대적 배경상 무학도 정말 많고(초등학교 의무교육은 1954년은 되어서야 시행되었다)) 지금의 중학교 과정 정도 되는 학교만 가도 가방끈이 길다는 소리 들을 정도인데다가 힘든 과정을 뚫고 명문대학교에 합격하고도 학비를 낼 수 없어서 가지 못하거나 중퇴 하는 일이 정말 흔했는데, 고등학교는 물론이고 미국 유학까지 떠났을 정도면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7] 브니엘학원 개교 초기인 1970년 10월 20일에 이런 일도 있었기 때문이다. # 이게 진짜 순수하게 빈민들을 돕기 위해서 만든 학교가 맞는지는 의문을 던져준다. 그리고 그로부터 수십년 후 강다니엘이 비싼 학비 문제로 브니엘예술고등학교를 자퇴해야 하는 아픔을 겪었던 것을 생각하면 의미심장하다.[8] 이 당시는 정부 직할 부산시. 부산직할시로의 개칭은 1981년의 일이다.[9] 이사벨고와 브니엘고의 관계는 어찌보면 애증의 관계에 가깝다. 브니엘고가 남녀공학에서 남고로 바뀜은 이사벨고가 당초에는 여고였기 때문이지만, 나중에 이사벨고가 남녀공학으로 변함도 브니엘고가 연제구를 떠나자 연제구에 남학생이 갈 수 있는 일반고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연제구민들이 지속적으로 이 문제로 민원을 제기하자 임시방편으로 2001년에 이사벨고를 남녀공학으로 전환했다. 그것으로도 부족해서 결국은 2005년에 구 브니엘고 인근에 연제고를 신설해서 구 브니엘고의 자리를 완전히 메꾸었다. 현 연제구 지역은 예나 지금이나 일반고가 부족해서 브니엘중고교가 꼭 필요했기에 계속 잡아두려고 했던 듯하나, 금정구는 일반중은 물론이고 일반고조차도 남아도는 데다가, 일반고가 부족하다고 해도 입지조건과 시설이 매우 좋았던 태광여상(강남 8학군 세화고, 세화여고와 재단이 같았음.)을 폐교하는 대신 설득하여 일반고로 전환해도도 충분했을 것이다.[10] 최하 32평에 당시로써는 정말 보기 힘들었던 80평 까지 있었던 최고급 아파트였다.[11] 1970~80년대 당시 아파트에 거주함은 최소 중산층 이상을 의미했다. 지금도 유명한 현대(現 현대산업개발 아이파크, 현대건설 힐스테이트), 럭키(現 GS건설 자이)뿐만 아니라, 한양, 삼익, 우성 같은 브랜드도 최고급 아파트 브랜드로 정말로 부의 상징이었다. 게다가 1980년대 초반 당시 동래 럭키아파트는 남천 삼익비치와 함께 부산은 물론이고 지방에서 가장 비싼 분양 가격을 자랑했으며, 서울 강남의 아파트 분양가와도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었다. 분양 당시 사회적 위화감을 조성한다는 지적은 덤.[12] 부산지역 버스 동호인들 사이에서는 舊29번노선의 몰락과 파행운영을 하게 된 것이 브니엘학원의 이전이 기폭제가 되었다는 소문이 있는데, 연산동 시절 당시 정원이 이정도면 이게 단순한 낭설이 아닌듯 하다.[13] 장제원 의원의 형. 여담이지만 설립자 박성기는 장성만과 사적으로 굉장히 친한 사이였었다고 한다. 둘 다 목사인데다가 사학재단을 운영했으며 나이대도 비슷했다 .[14] 덕분에 2012년 총선때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한 정선재단 이사장 정근에게 공세를 가하면서 브니엘학원 사태를 제대로 저격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협성건설이 차입경영을 그리 많이 하지 않는것도 아마 브니엘학원 사태 당시 전적으로 차입경영에 의존했던 한신공영이 부도난 것을 지켜봤던 영향으로 보인다.[15] 대한민국 초중고 건물 내구연한은 콘크리트 건물이 45년이다.[16] 1998년 당감동으로 이전, 현재는 한국과학영재학교[17] 구 재단 측 자료에 따르면 1980년대에 사직동 (지금의 사직한신아파트) 부지로 이전을 추진하려 했다고 한다. 하지만 학교 이전 추진에 관해서 올라온 공문도 없고 공인된 자료도 없으므로, 도중에 찔러본 것을 두고 이전을 추진했다고 표현한 듯하다. 그 외에도 양정동으로 이전하려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18] 정순택→설동근 교육감 체제의 부산 교육청은 이후에도 닥치는대로 최초 타이틀에 혈안이 된 나머지 심지어 최초의 혁신학교 타이틀까지 얻어낼 정도로 최초 타이틀에 집착했다.[19] 한가지 확실한건 금정구민들 사이에서는 정상적인 방법으로 이전 승인을 받은것은 절대 아니라는게 정설이라고... 1992년 5월 당시 부산일보에서도 학교 이전 승인 과정에서 석연찮은 점이 있었다고 보도하였다. #[20] 애초에 브니엘학원 자신들이 자초한 거다. 구.29번 이 막장화를 겪게 된 시초가 브니엘 이전으로 인하여 통학수요를 잃었고, 86번 87번 189/189-1번 등 연산교차로를 지나가는 다른 삼성여객 계열 노선도 통학수요를 잃었을 게 뻔하다. 99번은 당시 독립된 업체의 노선이라 논외 더욱이나 부산시가 권유한 토곡이 해당 업체의 본진인데, 회사 입장에서는 이가 갈리지 않겠는가?[21] 지산고를 운영하는 가톨릭계 성모학원 재단은 1989년에 대양중학교를 폐교하고 동시에 지산고를 설립하였다. 그 이후에도 저출산이나 IMF의 여파로 데레사여중을 폐교하는 등 1990년대에 걸쳐 부산시내 수많은 사립중학교들은 폐교의 길을 걸었다. 부산시내 사학들은 학교법인을 확장하느니 폐교하여 규모를 줄이더라도 IMF와 저출산 직격탄으로부터 학교법인을 방어하고(가능한 법인 전입금이 나갈곳을 줄이려고 하는등) 내실을 다지는 방향으로 갔다. 어느 선택이 더 현명한지는 각자의 판단에 맡긴다.[22] 이 무렵에 부산고속버스터미널과 시외버스터미널을 노포동으로 이전하는 부산종합버스터미널이 확정 되었는데, 이때 금정구 북부로 1군 업체 소속 고속버스 기사들이나 부울경에서 가장 복리후생이 좋은 경남버스 시외버스 기사들과 그 가족들이 금정구 북부로 대거 유입되는것이 예정된 만큼, 구재단에서는 어찌보면 고속버스 기사나 시외버스 기사 자녀들의 수요를 노리고 만들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실제로 금호고속 같은 1군 고속버스 업체 소속 고속버스 기사들은 운전직 중에서 가장 연봉이 높은 꿈의 직장으로 유명하고, 경남버스 또한 부울경 지역 시외버스 업체 중에서는 연봉이 최상급에 속하며 구매력도 일반적인 직장인 보다 훨씬 높은 편이다. 그리고 이들 업체는 오래전부터 당연히 자녀 학자금 지원도 하였기 때문에 예술고등학교를 보내는데 있어서도 일반적인 직장인보다 부담이 훨씬 적은데다가, 자녀가 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되는 40대 중반만 되면 호봉이 쌓이고 쌓이다 보니 기본적인 연봉만 해도 자녀들을 예체능 시키기에는 충분한 수준이 나온다. 더군다나 2002년학년도 부터 중학교 의무교육화가 확정 되면서 이들 업체들이 2002학년도 부터는 자녀 중학교 학자금 지원은 중단하기로 확정한 만큼 2002학년도 부터 브니엘예술중학교는 학자금 지원을 중단하는게 확정되는 바람에 브니엘예술중학교의 부진이 예상되었던것이 결정적인 이유로 보인다.[23] 최소한의 요건만 갖추면 사립학교 설립 인가를 내주는 것.[24] 당장 두 학교의 시설 수준만 비교해도 단순 루머라 치부하기 힘들 정도이다.[25] 한국에서 1개 지역구에 성격이 같은 예술고가 2곳이나 설립됨은 이 사례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김영삼 정권 말기에 대학설립 준칙주의에 이어 학교설립 준칙주의까지 실시되면서 준칙주의를 중고교에도 확대한데다가(일반계 중고교는 해당사항이 없었고, 특성화고, 특성화중, 일부 특수목적고가 준칙주의 대상이었다.), 김대중 정부의 공약이었던 사학설립 자유화 때문이었다. 당연히 출혈경쟁이라서 이와 비슷한 사례는 더 이상 발생하지 않았다. 게다가 이에 맞대응하기 위해 부산예고의 학교법인인 동래학원에서 방어목적으로 부산예중을 추가로 설립하여 브니엘예중 수요의 상당수를 가져감으로써, 브니엘예술중을 폐교 직전으로 몰아넣고 브니엘예고도 같이 발목이 잡혔다. 그래도 동래재단이 최소한의 연민은 느꼈던건지 무용과만큼은 까치밥 삼아 브니엘예중ㆍ고에 양보했다.[26] 반면 브니엘중의 라이벌인 거성중은 동해남부선 소음 문제를 조금이나마 완화 해보고자 1990년대 이후 하이샤시를 적용했다. 이사벨중고등학교 역시도 마찬가지의 이유로 하이샤시를 적용했었다.[27] 그 외에도 중앙여고, 동래중 옆에서 분양하던 모 아파트가 입지버프에다가, 학군버프도 작용하면서 청약 경쟁률이 평균 523:1 최고 862:1로 2016년 최고치를 찍으면서 엄청났다는것만 봐도...[28] 부산 지하철 1호선은 1985년 개통 당시부터 전차량 에어컨을 달고 나온 획기적인 교통수단이었다. 게다가 개통 당초부터 쵸퍼제어를 도입해서 차량의 발열을 획기적으로 줄였고 냉방기 성능도 상당히 좋아서 당시에 아시아권에서도 몇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굉장히 시원했고, 당시의 '''새마을호 특실'''에서도 쓰이던 쉐브론 고무 방식 에어서스펜션 도입으로 승차감도 새마을호 수준이었다. 그 시절 기준으로 에어컨은 사치품에 속하였고, 교통수단에서 에어컨은 무궁화호라던가 금수저들이 타는 새마을호 혹은 고속버스나 일부 장거리 시외버스, 관광버스에만 달려 나왔고, 대우 로얄이나 현대 그라나다 같은 고급승용차나 현대 스텔라 같은 중형차는 되어야 에어컨이 대쉬보드에 매립하여 달려나왔으며, 현대 포니2, 대우 맵시 같은 일반적인 승용차는 글로브 박스 밑에 추가로 달아야 했던 고급스러운 물건이었다. 심지어 일본 도쿄의 영단 지하철도 1988년은 되어서야 에어컨을 달았었다. 당시의 브니엘고 학생들은 이런 획기적인 교통수단을 개통과 동시에 누리는 호사를 누렸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다른 학교 학생들이 한여름에 땀 뻘뻘 흘리면서 등산을 할때, 브니엘고 학생들은 에어컨이 빵빵하게 나오고 승차감이 굉장히 좋은 교통수단으로 정말 편하게 등하교 했다는 사실.. 이러니 이 학교가 당시에 인기가 폭발하는것은 필연적인 현상이었다.[29] 지산고-브니엘고, 동래여고-브니엘여고, 부산예고-브니엘예고, 부산예중-브니엘예중[30] 물론 한번에 남녀공학 일반고로 전환하지는 않고, 중간에 계성정보산업고등학교, 계성정보고등학교로 교명을 변경하면서 실업고로 운영하되 일단은 남녀공학화 하고, 남녀공학이 된 이후에 일반계 고등학교인 계성고로 전하려 했으나, 잘 나가던 명문고를 빼앗겨서 안 그래도 자존심이 상한 연제구민들의 반발로 교명만 계성정보산업고, 계성정보고로 바뀐 채 학교 자체는 여전히 여자상고로 운영했다. 그 덕분에 대한민국에서 거의 처음으로 여고면서도 교명에 '''여자'''가 안들어가는 학교가 탄생했는데 무려 1998년의 일이었다. 그래도 이사벨여고는 건물년식은 오래되었으나(1972년 증축) 남녀공학 전환 이전에는 상당히 잘 나갔던 학교라서 연제구민들 사이에서는 큰 반발은 없었다. 오히려 남녀공학 전환 이후에 빛이 바래져버렸다.[31] 당시에 이렇게 좋은 땅을 이 정도 헐값에 사갈 수 있었던 이유는 IMF 사태로 이 정도 땅을 사갈 만한 재력을 갖춘 대형 건설업체들이 무리한 사업 확장 때문에 대부분 망한 것이었다. 부산 최대 건설업체였던 자유건설도 1998년 2월 11일에 최종부도 처리 되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고 그 외에 다른 부산지역의 중견 건설업체(남성종합건설, 화목건설, 화인건설 등등)들도 이 무렵에 대부분 망하여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으며#, 지금은 부산지역에서 잘나가는 동원개발이나 협성건설은 이당시에는 규모가 상당히 작은 회사였다가 21세기 이후에서야 몸집을 불렸다. 경쟁자들이 거의 사라지다시피 한 틈을 타고 그나마 지역에서 탄탄한 중견업체라고 평가받던 반도건설이 4번 유찰된 끝에 낮은 경쟁률로 말도 안되는 가격에 부지를 득템하였다.[32] 사실 1998년 당시 강남 은마아파트 31평이 1억 5천200만원 정도에 거래 되었는데, 지금은 17억 정도에 거래되고 있다. 강남 은마아파트 시세 기준으로 환산하면 무려 900억 이상의 손실이라고도 볼 수 있다.[33] 앞서 말한, 시공사들과의 복잡한 관계 때문에 발행했다.[34] 1998년에 '대한예수교장로회 브니엘 총회'라고 교단명을 바꾸고 조직을 재정비했다. 그리고 이 브니엘 총회의 초대 총회장이 브니엘학원의 설립자이자 당시 이사장이었던 박성기 목사였다.[35] 그래도 한때는 남남이 되면서 서먹서먹한 사이가 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한편으로는 한때는 한 가족이었던 정이 있었던것인지 서로 교류를 하기도 하였다.[36] 이 장성만도 본업은 목사였다. 교단이 다르긴 했지만 둘 다 목사 출신 사학재벌인 만큼 친분이 있었다.[37] 1998년에 지산대학으로 교명을 교체하더니 2000년 부산가톨릭대학교와 통합. 결과적으로 신학과가 없어지면서 지산대학을 부산가대 간판만 씌워 4년제 대학으로 승격시킨 모양새가 되었다.[38] 부산외대 남산동 캠퍼스와 면적이 비슷하다.[39] 중고교 면적을 제외해도 인서울대학 중에서 광운대, 한성대, 서경대 캠퍼스, 경기권의 차의과학대학교와 면적이 비슷하며, 동서대 디자인홀, 부산대 항공관, 계원예술대학교처럼 고등학교가 쓰던 건물을 대학이 전용할 수도 있다.[40] 성경에서도 보증 구절이 많이 나오는데, 결국 성경 대로 하면 아이러니하게도 이들은 결국 지각없는 자들이 될 수 밖에 없다. (지각없는 사람이 남의 보증을 선다. - 성경 잠언 17:18(공동번역성서)), (남의 보증을 서면 고생하지만 보증을 꺼리면 안전하다. - 성경 잠언 11:15(공동번역성서)) 결국 정통 보수 기독교 교단을 자처하는 이들이 성경에서도 금하는 행위를 한 꼴이 된 것이다.[41] 부산은 대학설립 규제 지역이 아니었기 때문에 일단 대학원대학교를 먼저 설립하고 추후에 4년제 학부를 설립하는것이 가능했다.[42] 설립자인 박성기 목사는 고신교단에서 나온 만큼 신학대를 만들고 싶어했고 결국 자신이 40년간 쌓아온 모든 것을 걸고 만드려고 한 학교인데 그것이 인가가 완전히 날아갔으니..[43] 지역내에서 들어오기로 했던 고등교육기관이 인가가 취소 되면 지방 농촌 지역에서는 120명 규모라고 해도 마을이 뒤집힐 정도로 정말로 난리가 날 일인데, 금정구에서는 기사 정도만 떴을뿐 금정구민들 대다수의 반응은 무관심이었다. 어차피 금정구 입장서는 당시 부산대학교도 있고 부산가톨릭대학교도 있고, 대동대학교도 있는 만큼 120명 규모의 소규모 신학대학원대학교 하나가 날아가는것에 대해 신경을 쓸 이유가 없었다. 그정도로 금정구민들 사이에서도 진짜 아오안 취급이었다. 그리고 이 브니엘신학대학원대학교 인가 취소를 구니카 재단 이사장이 이의 없이 받아들이면서 설립자의 역린[42] 을 제대로 건드렸고 구니카 재단 낙마의 원인이 된다.[44] 당연히 1990년은 대학설립 준칙주의 이전이었고, 4년제 학부과정 대학을 반드시 설립해야 대학원 설립인가가 나오던 시절이다. 학부 과정이 없는 대학원대학교는 못해도 1992년 11월 이후에서야 언급되었으며 1996년에서야 확정되었다.[45] 창신대는 원래는 창신 중고교와 같은 캠퍼스에 있다가 창신대가 성장하면서 기존 창신대 부지만 따로 팔고 2003년에 이전했다.[46] 경향교회가 운영하던 고려신학교→제네바신학대학원대학교(서울제일대학원대학교 인수)처럼 기존에 존재하던 대학을 인수하여 인가를 받는 우회적인 수단도 있다. 하지만 구 재단이 브니엘고를 운영하면서 보여준 모습과 이후에 브니엘고 정상화에 계속 발목을 잡던 모습을 생각하면, 과연 교육부와 사학분쟁조정위원회가 인수를 승인할지도 의문이다. 경향교회는 경복여상과 경복여고를 운영하면서 학교경영에 있어서는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일으킨 적이 없었다. 브니엘 구 재단이 우회적으로 대학 인수에 나선다면 한려대나 신경대가 물망에 오를 수는 있지만 교육부와 사학분쟁조정위원회를 통해야 하는 만큼 가능성은 낮다. 재미난 사실이지만 경향교회도 한때는 브니엘 학원 처럼 고신 교단에 소속되었다가 독자적인 교단으로 독립하였다.[47] 일단 브니엘학원의 설립자가 이 교단의 초대 총회장이었다.[48] IMF 사태로 인하여 부산지역에서 브니엘학원을 인수할만한 규모의 향토기업(자유건설 등등)은 사실상 전멸하였고, 지금은 잘나가는 동원개발이나 협성건설 같은 향토기업들은 당시에는 아직 기업규모가 그리 크지 않은 상황이다보니 삼성ㆍCJㆍ파라다이스가 인수를 타진한다는 말이 돌았는데, 내부자의 증언에 따르면 파라다이스는 실제로 관계자들이 인수를 검토하려고 실사를 왔다고 한다.[49] 파라다이스는 브니엘학원 인수가 무산되고, 이후에 정선재단이 브니엘학원을 인수하여 새로 브니엘국제예중을 만들어 잘 되자, 예술중학교 과정 각종학교인 계원예술학교를 설립했다. 계원예술학교도 초기 계획에서는 각종학교가 아닌 브니엘국제예중처럼 특성화중학교였고, 가칭이 계원'''국제'''예술중학교였다고....#[50] 정원식 전 총리는 브니엘학원과는 별 관련이 없다. 오히려 정원식이 문교부장관에 재임 중이던 1988년~1990년은 브니엘학원이 부적절한 부지로 이전한다면서 잡음을 일으켰고, 남산고ㆍ지산고 등 경쟁학교들이 대거 등장하여 학생들을 빼앗겨 몰락기로 접어든 시절이었다. 심지어 태광여상도 이 시절에 혜성처럼 나타나서 연산동 야간제 브니엘여고의 수요를 싹쓸어갔다. 하지만 이기택 前 의원은 1971-81년 당시 브니엘학원이 소재하던 동래구(연제구는 1995년 분구)를 담당했다. 이 시절에 브니엘고가 평준화와 동시에 동래구(사직동 아파트 대단지, 동래 한양아파트)와 연제구(한양아파트, 삼익아파트 등등...) 일대 주거지 개발 버프를 받자 하위권 상업고에서 부산 5대 사학으로 급상승하고, 덩달아 해당 지역구 학군인 부산 4학군이 신흥 명문학군으로 떠올랐다. 이기택은 브니엘학원이 성장하는 과정을 지켜보고 기여도 한 인물이다. 여담이지만 구 재단 설립자는 정치권 인맥이 굉장해서 당시에 장성만 전 국회 부의장과는 절친이었으며, 지역구 국회의원이었던 김진재와도 친했고, 심지어 박정희 전 대통령과도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고...이런 어마어마한 정계 인맥까지도 바탕으로 브니엘학원은 당시 초고속 성장을 하였던 것이었다.[51] 이런 말도 안되는 인수가 가능한 것이 악법인 사립학교법 때문이었다. 사립학교법상 학교에 크나큰 피해를 줘도 학교의 주인은 여전히 설립자로 보기 때문에, 설립자가 아무리 말도 안되는 짓을 했다고 해도, 설립자 동의 없이 학교를 마음대로 처분할 수가 없다. 사립학교 인수에서 1순위로 작용하는 것이 설립자의 의견이다. 서남대 사태 역시 이러한 문제 때문에 사태가 장기화되다가 지금은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52] 이 각서 때문에 한동안 구 재단이 구두계약을 인정받지 못하고 계속 패소했다. 이후 정선재단의 삽질이 심해지자 법원에서 구두계약을 인정하여 정선재단과, 비슷한 인맥인 김모 이사장 재단을 모두 무효화하고 구 재단의 손을 들어주었다.[53] 스쿨버스는 직영제가 원칙인데도 지입차로 굴림도 모자라 몇몇 차량은 (1996년 이전 시점으로도) 낡아빠진 폐차 직전 물건들을 중고로 구입했다. 차량관리도 전적으로 차량 소유주인 지입기사에 떠맡기는 바람에 엉망이었으니 학교 재정상태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제대로 보여주었다.[54] 연산동 시절 브니엘고는 부산에서 의대 진학률로도 정평이 나 있었으며, 연산동 시절 브니엘고 출신 의사들이 부산시내에 꽤나 많이 있다. 연산동 시절 브니엘고 덕분에 브니엘 이라는 이름 자체가 부산시내의 의사들 사이에서는 인지도가 상당히 커서 신 재단이 설립한 종합병원 법인을 브니엘 의료재단이라 명명했다. 부산지역의 의사 사회를 평정하려는 야망이 있던 정선재단도 이를 노려 당시 매물로 나온 건국중고교(개신교 미션스쿨로서 정통성은 이쪽이 브니엘학원보다 더 컸다.)나 재개교가 추진되다가 자금난으로 무산된 북부산고(법인 본부가 정선의료재단 종합병원 근처에 있었다.)를 거르고 의사 동문이 부산에서 가장 많은 편에 속하는 브니엘학원을 인수한 것이었다. 실제로도 연산동시절 브니엘고 출신의 몇몇 개원의들이 자신이 개원한 의원에 브니엘 이라는 이름을 쓰는 경우가 종종 있다.[55] 이런 양상은 정선재단이 이후에 만든(?) 브니엘 '''국제''' 시리즈 학교에서도 잘 드러나는데, 브니엘국제예술중과 브니엘국제예술고는 실은 의대 진학을 중점으로 했던 학교로, 애초부터 고액 등록금에다가 기본 타겟도 의사 같은 고소득 전문직 학부모들을 공략했었다. 이 세대의 학부모들은 1980년대에 중고교를 다니던 세대로 이당시는 브니엘고의 최전성기로 브니엘 세글자 하면 의대 잘 보내는 고등학교를 흔히 떠올리던 시절이다보니, 법원에게 호되게 당할 정도로 교명 가지고 그렇게 장난을 치면서도 브니엘 국제 시리즈 학교가 브니엘 이라는 교명만큼은 유지했던게 이러한 이유였다.[56] 정말 비슷한 방법으로 학교가 인수된 안양 신성중고교 재판에서는 이와 반대로 법원이 계속 신 재단의 손을 들어주어, 결국 구 재단이 원천봉쇄되어버렸다. 이쪽은 신 재단이 진짜로 전력투구하여 학내 비리를 해결하고 시설을 개선하여 신성중고교를 정상화하고 정말로 괜찮은 학교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당시 경기도 교육감이던 진보성향 김상곤도 정상화에 성공했다고 인정하여 모범 사립학교로 선정했을 정도.[57] 이러한 편법운영은 그야말로 초중등교육법을 정면으로 위반한 것이다. 이를 방치하면 초중등교육법에서 규정한 특성화중학교 및 자사고/특수목적고등학교의 구분이 붕괴하여, 학교장은 학생 선발권이 있으면서도 상대적으로 취득이 쉽고 모집지역 제한이 없는 예술중고교 인가를 받아 편법으로 국제중이나 자사고처럼 운영하는 것이 확산되어 헬게이트가 열릴 수 있었다. 국제중이나 자사고 인가는 정부 및 교육부와 협의가 필요한 데다가, 입시과열 문제로 국제중은 정부에서 그 수를 엄격하게 통제하기 때문에 인가 취득이 매우 어렵다. 현재로서는 추가로 사립국제중 인가를 내줄 리 없어 보이고, 전국단위 자사고는 20% 법정전입금을 부담해야 하는등 인가 기준이 상당히 까다롭다. 운전면허증으로 비유하자면 1~2종 보통 면허만 가지고 대형 트레일러를 운전하려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58] 판례가 된 상지대 구 재단이 승소한 소유권 분쟁이 최근에 격하게 역풍을 맞기 때문에 아직은 속단하기 이르다.[59] 시효만료 부채를 제외해도 637억 정도이다. 학교 이전과정에서 설립자가 진입로 문제를 가지고 몽니를 부리다가 부산시에게 역관광 당하자 시행사, 시공사도 덩달아 자금 압박을 받아 어음 보증을 학교법인에 요구했다. 그래서 보증 서줬다가 시행사와 시공사가 망하는 바람에 학교법인이 부채를 떠안았고, 이자가 20년 넘게 연체되어 엄청나게 불어났다고 한다. 원금이 330억 정도(시효만료 부채 제외하면 293억 정도)인데, 가압류 현황을 보면 부채의 출처도 굉장히 다양하다. 그 무렵 설립자가 보증을 서놓고는 오리발 내밀며 부채가 없다고 우기자 채권단이 제대로 빡쳐서 철저하게 증거자료를 가져오는 등 엄청 독하게 나왔다는 일화도 있는데, 채권단이 독해도 보통 독한 놈들이 아닌 듯하다. 참고로 시행사 대표였던 사람은 2000년대 중반에 근황이 알려졌는데 전재산은 모두 압류되어 경매되는 바람에 모조리 다 날려버리고, 결국은 전포동의 다 쓰러져가는 40년도 더 된 낡고 협소한 단독주택에 세들어 살고 있었다고 한다(...) 워낙 거액의 부도(1990년대 당시 200억이면...)에 연류되었고 그로 인하여 거액의 세금을 장기간 채납했었던 사람인 만큼 신용등급이 바닥을 찍을 수 밖에 없었기에 그 이후로 정상적인 금융활동은 무리였을 것이고 정상적인 기업에 정직원으로 취업하는것도 어려웠을듯... 그 이후로는 아마도 일용직을 전전했을것으로 보인다.[60] 인플레이션을 감안하면 1994년 삼성그룹이 부채 상환을 조건으로 강남 중동 중고교를 인수한 금액(당시 150억대로 부채상환 100억, 학교발전기금 50억)과 비슷한 부채 규모이다. 중동 중고교는 중고교 중에서는 대한민국 역사상 최상급 금액으로 인수되었다. 1994년에 부곡SK 아파트 24평이 8천 6백만 원선에 분양되었는데, 2018년 현재 4배 가량 뛴 3억 4천만 원 내외로 거래됨을 생각하면.. 참고로 대교가 경기외고를 인수하는 데 드는 비용이 2008년 기준 150억 정도였다.[61] 물론 친박계 인사들이 어디 안 간다고 일부 사분위 위원들은 현재로서는 구 재단만이 인수할 권환이 있다고 말했는데, 이게 사분위 전체의 의견인지 일부 개인의 일탈적인 발언인지는 알 수 없다.[62] 재산출연 없이 학교자산을 팔아서 부채를 해결한다는 제살 깎아먹기식 발상.#[63] 학교재단 부도사태 때 구 재단 설립자의 지인들도 차라리 명망 있는 기업에 학교를 넘리라고 권했고, 금정구 학군이 나름대로 명성이 있던 때라 부산시 교육청에서는 민사고 같은 자립형 사립고를 유치하겠다고 하면서 몇몇 대기업들도 이를 노리고 인수를 타진하기도 했으나, 구 재단은 절대로 학교를 포기 안 하려고 했다. 그 과정에서 구 재단은 관선이사를 통하여 인수를 검토하던 대기업이나 동일고무벨트 김진재를 견제하기 위해 정원식을 백기사로 끌고 왔다.[64] 이는 부산시내 평준화고에서 가장 학생 수가 적다고 한다. 같은 금정구 구서동에서 폐교된 태광여상은 마지막 졸업생이 111명이지만, 이쪽은 멀쩡한 학교를 재단에서 폐교 결정하면서 도중에 학생들이 왕창 빠져나간 경우. 입학생 기준이라면 2001년의 태광여상 마지막 입학생이 브니엘여고 2017년 신입생 보다 많았었다.[65] 특히 심각하게 규모가 작은 학교는 전교 1등이 내신 1등급이 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66] 최근 들어서 위장전입 때문에 지산고와 동래여고도 그렇게 좋은 구서 롯데캐슬 같은 구서동 대단지 아파트 학군을 끼고도 타격을 입었다고... 특히 지산고는 재단이 튼실한 모범 사학인데도 말이다. 구서동 일대 중학교와 고등학교 학생 수를 비교하면 학군 범위가 좁은(동 단위) 중학교 학생 수와 학군범위가 넓은(금정구 전역, 동래구 일부) 고등학교 학생 수가 별반 차이 없거나 심지어 더 적은 경우를 볼 수 있다.[67] 1990년대 초중반 구서동 주공아파트, 선경아파트, 부곡3동 경남한신아파트 일대에서 브니엘중 이전 반대 집단행동이 있었고, 그로 인하여 브니엘중이 폐교되었으며, 1995년에는 장전동에서 대진전자통신고 개교반대 집단행동을 한 적도 있다. 브니엘중은 단지 위치가 안 좋고 남녀공학(...)이라는 지금 기준으로 보면 좀 그러한 이유로 폐교되었다. 이 정도면 구서동에서도 브니엘고ㆍ브니엘여고 문제로 많이 참았다고 봐야 할지도... 그 외에 경기도 의왕에서는 정원고 배정반대 집단행동으로 폐교시켜버린 전례도 있으며 2017년에는 명지국제신도시에서 그저 시설이 노후화 되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신도시 개발로 유입된 학부모들이 지역내에 오래전부터 있던 경일중학교를 폐교하려 한적도 있었다. 그나마 경일중학교는 폐교 추진에 반발하던 동문들과의 협상 끝에 공립으로 재개교 하기로 합의하였다.[68] 현재 고교에 진학예정인 자녀를 둔 학부모들은 대개 1970년을 전후해서 태어난 세대이다. 이들 세대 중에는 1980년대 학교 이전 잡음이나 구 재단의 독재적 경영, 연산동 시절 브니엘중, 브니엘여고를 잘 돌보지 않고 사실상 방치했던 문제를 직접 경험하며 브니엘학원에 감정이 좋지 않고 FM대로 운영하는 공립 중고교에 환상이 있다. 특히 1990년대 최전성기 당시 연산동시절 브니엘고에 재학했던 누군가의 말을 빌리자면 학교 자체의 진학실적은 이견이 없을 정도로 뛰어났으나 학교 자체가 모든걸 다 포기하고 진학률에만 몰빵하다보니 결국은 그게 전부였고, 진학률 외의 요소인 학교 경영 면에서는 워낙 독재적이고 비민주적이며 재단 관련 구설수도 많은데다가 당시 부산에서 가장 체벌이 심한 학교라는 수식어가 붙을정도로 학생들을 비인격적으로 대하면서 그냥 진학률 만드는 기계 정도로 여기다보니 전체적인 분위기 자체는 험악했던 만큼(하지만 당시의 학부모들은 오히려 이런 분위기를 선호했고 한술 더 떠서 자기 자식이 말 안들으면 더 패달라고 하거나 아예 교사에게 사랑의 매를 전해주는 학부모들도 심심찮게 있었다. 그리고 당시의 부산에서 진학률로 유명한 다른 사립고들 또한 크게 다를건 없었다. 딱 80~90년대 당시의 전형적인 사립학교였다. 물론 지금의 학부모 세대들은 80~90년대 자신이 학생시절에 겪었던 그러한 것들에 대해 반감이나 트라우마가 있는 경우가 부지기수인 만큼 이런것을 싫어하는 경우가 많지만....) 자기 아들은 그런 학교에 보내기는 싫다고 했을 정도. 그들이 직접적으로 경험한 사실을 여기저기 전파했으므로 학교법인 입장에서는 안심할 수 없다. 참고로 그 유명한 브니엘고의 죠스바 교복과 브니엘여고의 시금치 교복을 처음 받은 세대이기도 하다.[69] 이마저도 안심할 수 없다. 2018년 이후로 세종ㆍ전남 광양ㆍ경남 창원(혹은 김해) 같은 타 지역에 공립예술고 두세 곳이 추가로 개교하여 수요를 빼앗을 우려가 있다. 예술중학교도 2018년 이후로 2~3곳 정도가 대구 달성군ㆍ전남 함평군 등지에 공립ㆍ사립 형태로 추가설립될 예정이라 잠재적 경쟁자들이 갑자기 늘어났다.[70] 오히려 부산교육청은 2015년 이후 시행된 학교총량제나 통폐합 실적 때문에 이제는 적정규모학교육성추진단이라는 저승사자 같은 태스크포스를 만들어 눈에 불을 켜고 통폐합할 학교를 찾으러 다닌다. 일반계 고등학교를 2021년까지 2개 통폐합할 예정이라고... 그 외에도 2019년 9월 들면서 해당 태스크포스는 특성화중학교 운영평가, 지정 같은 문제를 다루려고 하는데 아마도 부산국제중이나 브니엘 예중이 타겟으로 보인다. 한마디로 브니엘학원에 이제는 부산시교육청이 보낸 저승사자가 다가오는 상황(...) 2000년대 초중반과 달리 학령인구가 빠른 속도로 급감하는 상황에서 만약에 정이사가 선임된다면, 그 이후로는 재정기여자의 능력이 크게 작용할 것이다.[71] 부산지역 사립중고교 운영진출 의사를 포기했다가 수 년만에 다시 하겠다고 밝혔다.#[72] 동부산대 인수 의향자가 브니엘 구재단 최측근 인사이다. 물론 교육부에서 이 사실을 알고 있다면 승인해줄 가능성은 낮을것이다.[73] 데레사여고와 같이 있던 데레사여중, 남성여고와 같이 있던 남성여중이나 동성고와 같이 있던 동성중, 성지고와 같이 있던 성지중, 배정고와 같이 있던 배정중은 이미 진작에 폐교되었고, 금성고과 같이 있는 금성중도 2020년 폐교 예정이다. 건국중, 건국고가 한때 매물로 나왔는데 그때는 이 건설회사 재단이 아예 거들떠 보지 않았다. 그 외에 동아고, 동아중, 대동중, 대동고, 해운대고, 해운대중의 경우는 잘 나가는 학교라서 재단이 바뀔 가능성도 없는데다가 딱히 학교가 이전할 이유도 없고, 부산동고, 부산동중, 동래여고, 동래여중, 이사벨고, 이사벨중, 학산여고, 학산여중, 혜화여고, 혜화여중도 재단이 바뀔 가능성은 아직은 없어보인다. 물론 브니엘고와 같이 있던 브니엘중도 폐교 되기는 했으나, 대신에 브니엘예중은 아직 남아있고 이 학교를 특성화 중학교 지정취소 하고 적당한 위치로 신축이전해서 일반계 중학교로 전환해서 브니엘중학교의 연혁을 복원하는 방법이 있기는 하다.[74] 침례병원 까지 가지 않아도 당장 예전 연산동 브니엘중고등학교 부지만 해도 경매로 넘어갔지만 자산가치가 1998년 당시 190~200억 이상(지금 시세로 치면 800억 이상)으로 평가될 정도로 굉장히 높았음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안습한 시대적 배경 때문에 유찰을 거듭하다가 정말로 말도 안되는 가격인 고작 90억원(지금 시세로 치면 360억~400억 상당의)에 팔리는 바람에 브니엘학원과 경매를 신청한 채권단은 당시 시세로 100~110억원, 지금시세로 따지면 '''무려 400억원 이상''' 되는 무지막지한 액수의 손실을 입었다. 1998년 당시 기준으로 100~110억원 정도면 시설과 입지조건이 상당히 훌륭한 사립고등학교를 하나 만들수 있는 돈이었다. 만약에 파산이 인용된다 해도 경매에서 결국 유찰을 거듭하다가 정말로 말도 안되는 가격으로 떨어질 확률이 매우 높으니 채권단의 손해가 막심할것이다.[75] 경일 중고등학교의 사례 이후로는 학교법인이 부도나거나 파산 직전으로 가도 어지간하면 다른 사학재단이나 기업 같은 재정기여자가 인수하게끔 교육청 차원에서 중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그 이후로는 중 고등학교가 파산으로 폐교된 사례가 거의 없다. 게다가 이들 학교의 경우는 개발독재 시절이다보니 학교를 망친 설립자나 구재단이 끝까지 계속 버틸수도 없다보니 교육청에 의해 쉽게 퇴출되기도 했었고...[76] 위에 예로 든 서울 경일중고등학교는 개교한지 2년만에 폐교되었고 당시에는 국공립 특채 법적근거 조차도 없다보니 정교사들도 모두 실직하였다. 물론 당시는 교사가 별로 인기있는 직종이 아니었기 때문에 당사자들도 큰 불만은 없었을듯.... 저 당시는 교생실습 나온 학생에게 졸업후 정교사로 와달라고 읍소하던 시절이었다. [77] 사립의 특성상 이들의 비중이 적지않다.[78] 이쪽의 경우는 학생수도 많이 줄어든 편이고 인근에 지산고, 동래여고, 사대부고, 남산고, 내성고, 금정여고, 용인고 같은 일반계 고등학교가 많기 때문에 재배정이 가능하기는 하며 실제로 이러한 시나리오 역시도 고려했었다고.... 오히려 몇몇 학부모들은 지산고, 용인고, 사대부고나 동래여고, 중앙여고 재배정을 노리고 차라리 폐교하라는 말도 나왔었다고 한다(...)[79] 서울 중동학원이나 대구 정화교육재단 같은 브니엘학원과 비슷한 처지였던 다른 중고등학교급 사학들도 모두 3자 인수로 해결되었으며 이외의 방법으로 해결된 사례는 사실상 '''없다'''[80] 브니엘중은 1998년에 폐교 되면서 총동창회가 존재했었음에도 불구하고 배제되었다.[81] 한신공영은 1988 서울 올림픽 때 선수와 기자단용으로 지었다가 일반에 분양한 고급 아파트 올림픽선수기자촌을 시공한 경력도 있다.[82] 실제로 경남 한신아파트는 한신공영이 부산에서 여태까지 건설한 아파트 중에서 가장 크게 흥행했던 아파트로 부산에서 한신공영이 처음으로 큰 성공을 맛보았던 아파트였다. 한신공영이 자사 최초로 부산시내 인기학군에서 분양한 아파트로, 금정구에서는 처음으로 20층을 돌파한 아파트인데다가, 부산시내에서도 거의 초기에 20층을 돌파한 아파트였고, 부산시내에서 드물게 평지 역세권의 1408세대 대단지라는 점에서도 1992년 분양 당시 큰 화제를 모았으며 2000년대 초반 까지 금정구 대장 아파트로 군림했다. 지금은 경남 한신아파트가 입주한지도 23년이나 되어서 어느정도 노후화 된데다가 한신공영의 브랜드 이미지가 그시절에 비하면 많이 추락해서 의아할수도 있겠지만 분양 당시에는 고급 아파트로 기획되었었다. 1995년 입주 당시 경남 한신아파트의 금정구 내에서의 위상은 지금의 장전 래미안 수준이었을 정도로 부산시내에서 한신공영의 인지도를 크게 높일뻔 했었다. 그정도의 포트폴리오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신공영은 브니엘학원 사태로 금정구 뿐만 아니라 동래구, 연제구에도 제대로 미운털이 박혀서 아직까지도 소위 말하는 4학군 지역으로 복귀를 못하고 있다. 한신공영이 부산에 다시 재진출 했을때도 부산시민들 사이에서 비교적 인지도가 높았던 경남 한신아파트 대신에 신반포 한신 아파트를 내세운것만 봐도 확인사살. 신반포 한신 아파트는 서울에서는 인지도가 굉장히 높으나 부산에서는 알고 있는 사람들이 생각만큼은 많지 않다.[83] 이후 뉴코아 그룹으로 떨어져 나갔다가 IMF 때 나란히 망했다.[84] 한신공영 최종 부도 당시 210억을 내지 못해서 부도처리되었다고 한다. 당시 한신공영이 공사대금으로 받은 브니엘학원 연산동 부지가 200억 상당이었는데, 구서동 브니엘학원 진입로 문제 때문에 괘씸죄로 학교용지 지정이 해제되지 않아 한동안 쓰지 못했다. 어찌 보면 브니엘학원 사태도 한신공영 부도에 한 몫한 셈. 물론 그 부지는 한신공영 워크아웃 때 경매로 헐값에 팔렸다(...)[85] 한신공영은 워크아웃을 거친 후 코암시앤시개발이 인수하여 현재는 이름만 같을 뿐 완전히 다른 회사가 되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86] 이러한 면에서도 브니엘 구재단 측에서는 브니엘고 이전의 실패 가능성을 충분히 암시했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브니엘중학교는 남학생들 한정으로 용인고등학교에도 학생들을 많이 배정되었는데, 1996년 이전만 해도 브니엘중학교의 남학생들 사이에서도 대부분은 용인고등학교가 위치가 영 좋지 않다고 기피하는 분위기가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