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카
1. 인물
(1781년? ~ 1828년 9월 22일)
'''아프리카의 나폴레옹'''
줄루 왕국의 시조.
1.1. 생애
6세일 때 어머니는 남편에게 쫓겨나면서 어머니를 따라 어머니의 부족이었던 랑게니족에 들어갔는데, 그 부족에서 쫓겨났고 1802년에 음테트와족의 방계인 들레트셰니족에서 보내다가 샤카는 자라서 줄루족으로 돌아가 아버지를 따르던 자들을 모두 죽였다. 또한 어머니의 부족을 공격해 어머니를 놀렸던 사람들을 찾아내 죽였으며, 10여 년간 전쟁을 벌여 인근 지역을 정복해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고 그는 줄루족의 왕이 되었다.
샤카는 줄루족의 창인 아세가이 투창이 접근전에 불리하자, 새로운 찌르기 위한 짧은 창인 이클와를 고안해냈고, 방패의 크기를 키우거나 포위망을 위한 대형을 사용하는 등 군사적인 방면에서 활약했다. 샤카줄루라는 드라마에는 신분이 높은 대장장이에게 이클와와 새로운 방패의 모양을 설명하고 대가를 치루는 장면이 나오는데, 전설의 무기가 만들어지는 듯한 연출이 사용된다. 그만큼 이 무기는 당시 아프리카의 전투에서 샤카의 부대가 승리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치세에는 35살 이하의 남자 2만 명은 미혼으로 영구적으로 군대에 복무했다. 이로 인해 아이를 낳는 시기가 늦어져 줄루족의 인구가 감소하게 되었는데, 이는 인구 과잉으로 가축의 목초지가 부족해 줄루 왕국의 인구를 통제하기 위해 내린 조치였다.
영국 상인이 줄루 왕국을 방문하자 그들에게 무역항을 짓는 것을 허가했을 정도로 서양인에게 비교적 우호적인 정책을 펼쳤고, 이는 다른 아프리카 소왕국 지도자들과 달리 널리 알려진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 샤카는 재위에 오른 후 10여년 동안 주변 부족들을 정복하며 줄루족에 동화해나가며 일개 소왕국의 족장에서 거대한 제국의 국왕이 되었다. 그러나 말년에는 어머니가 죽은 뒤, 정신병이 심해져 폭군이 되었다. 샤카의 포악함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고 폭정을 일삼다가[1] 결국 1828년에 신변의 위협을 느낀 이복동생 딩가네에게 살해당했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 영국이나 유럽에서는 악랄한 지배자로 왜곡했고 잔악한 지배자한테 지배받으니 아프리카는 미개하는 식의 교육을 시켰다가 아프리카 나라들이 독립한 뒤로는 줄루 족의 후손들에게 줄루 족의 강력한 지배자로 추앙받고 있다.
무엇보다도 유럽도 샤카를 깔 입장이 못되었다. 이쪽도 악랄하기 짝이 없던건 마찬가지였다. 현대적인 전시국제법이 탄생하기 이전에는 포로를 남겨두지 않고 모두 죽이거나, 적 진영의 민간인에게 악랄한 학살행위를 자행하는 일들은 빈번했고 때로는 그것이 오히려 용감한 지도자의 미덕으로 여겨지기까지도 했다. 샤카가 말년에 유독 폭군이라는 평가를 받은 것은 그의 정신질환이 심해지면서 자기 가족이나 후궁의 목숨까지도 파리 목숨처럼 가벼이 여겼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부 지역에 거주하는 코사족이나 소토족 등에게는 그리 좋지 못한 평을 받고 있는데 이들 종족은 줄루가 한창 강성해졌을때 샌드위치 신세였기 때문이었다. 줄루족과 보어인, 대영제국과의 대립에서 코사족이나 소토족을 비롯한 중부지역의 흑인 종족들이 샌드위치에 끼이듯 밀렸고 그 과정에서 큰 피해를 입었다.
1.2. 그 외
문명 5를 포함한 문명 시리즈에도 참전. 호전적인 줄루족의 지도자로 등장한다. 해당 문서 참고.
2. 제스처
The shaka sign. 손의 중간 세 손가락을 구부리고 엄지와 소지만 펴서 하는 손인사.[2]
하와이에서 유래되었으며 서퍼들이 주로 사용한다. 축구선수인 호나우지뉴나 프란체스코 카푸토도 골 셀러브레이션으로 자주 보이곤 했다.
[1] 1년동안 어느 땅에도 곡물을 심지 말라고 했고, 임신한 여자는 남편과 함께 모두 죽였으며, 젖소에게서 우유를 짜지 말라고 하였다. 또한 7천명의 사람들을 슬퍼하지 않는다며 모두 죽였다.[2] 보는 사람에 따라 한국의 '전화해'와 서구권의 '술 마시기' 제스처와도 흡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