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어인

 


'''Boer'''[1]
1. 개요
2. 역사
2.1. 초기 정착사
2.2. 영국과의 충돌
2.3. 남아프리카 연방 수립 이후
3. 기타
4. 보어인 인물


1. 개요


16세기부터 현재의 남아프리카 공화국 지역에 정착하고 아프리칸스어를 쓰는 백인 민족 집단으로, 혈통으로 따지면 네덜란드계가 다수이다. '''아프리카너'''(Afrikaner)라고도 하는데, 남아프리카 백인의 60%를 차지하며 남아공에 거주하는 보어인의 수는 약 320만 정도로 추산되고 나미비아나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등에 거주하는 보어인까지 합하면 350만명 정도이다.
이들이 '네덜란드인'이 아니라 '보어', '아프리카너'라고 따로 구별된 이유는 유럽의 네덜란드인과 다른 정체성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네덜란드계 이외의 다양한 백인계 민족들[2]아프리칸스어를 쓰면서 정착했기 때문이다.[3] 아프리카너는 아프리칸스어를 모어로 쓰는 남아공 백인 전부를 일컫는 것이고, 이 중에서 적지 않은 수는 네덜란드계가 아니라 프랑스 위그노나 독일에서 넘어온 사람들도 많다. 이들은 영국에서 건너와 영어를 쓰는 남아공 영국계와는 구분되는 민족집단이다. 제 2차 보어전쟁 당시 영국은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그야말로 무슨 짓이든지 다 했고 그 과정에서 아우슈비츠의 원형이 되었던 강제 수용소까지 만들어 남녀노소를 가릴 것 없이 모두 수용시키고 그 과정에서 적지 않은 수를 굶겨 죽이거나 불태워죽이는 만행을 저질렀기 때문에 100년이 넘게 지난 지금도 영국계와 나머지 아프리카너 간의 관계는 데면데면한 편이다.[4]
본래 케이프 아프리카너와 보어는 구별되어 쓰였으나 영국에 정복당한 뒤엔 구분없이 쓰인다. 보어라는 이름은 '농부'라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지금도 네덜란드어로는 농부란 뜻이고 가끔 성씨로 쓰이기도 하며 독일어의 바우어(Bauer)에 해당한다.
흑인들을 동부 지역으로 몰아내고 정착한데다가 아파르트헤이트를 통과시키시고 또한 아파르트헤이트를 주도한 정당인 국민당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경향을 보였기에[5] 아파르트헤이트 시절에 흑인들과의 관계는 크게 나빴으며, 덕택에 보어인을 쏴라(shoot the boer!)라는 노래도 흑인들에게 널리 애창되었을 정도였다. 1990년대 들어서는 상당수 보어인들이 인종차별 정책 폐지에 찬성표를 던졌고[6] ANC 집권후에 인종간 화합을 주요시책으로 삼으면서 관계가 많이 풀렸다고 하지만 여전히 빈부격차가 심한 상태라 현재도 흑인과의 관계가 썩 좋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아파르트헤이트가 폐지된 현대에 와서는 보어인이라는 말이 원래의 민족, 언어적 의미보다 미국의 화이트 트래시, 레드넥처럼 '''촌스럽고, 인종차별주의적이고, 광신도이며[7] 교육받지 못하고 사회에 대한 불만만 가득찬 백인 빈곤층'''을 의미하는 단어로 변질되었기 때문에 현대 들어와서 민족적 의미로 아프리칸스어 화자 백인을 일컫는 단어는 아프리카너로 교체 되었다. 그러나 사어가 된 것은 아니라 여전히 화자 자신이 아프리카너일 경우에 스스로를 '보어'라고 칭하는 경우는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편이다. 혹시 남아공에 연줄이 있거나 유학, 사업차 등으로 방문할 일이 있는 위키러들은 이들과 관계를 맺을 일이 있다면 본인들이 스스로 보어라 지칭하지 않는다면 아프리카너라고 부르는게 정중하지, 다른 인종 집단별 비칭 처럼 타인이 함부로 먼저 보어 보어 운운하는건 좋지 않다.
네덜란드계가 주류지만 역사적으로 네덜란드와의 관계는 썩 좋지 않았다. 이는 18세기 이후로 네덜란드 본토가 계몽주의자유주의의 영향을 크게 받은 반면, 남아프리카의 보어인 공동체들은 그렇지 않아 사고방식이 크게 달랐기 때문이다. 그나마 보어전쟁이 벌어지자 잠깐이나마 네덜란드 본국에서 관심을 가져주기도 했지만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을 본격화한 거물 지도자들 상당수가 오제바브란트바흐라는 친나치 단체에 가담한 이력 때문에 나치 독일의 폭압을 겪은 바 있는 네덜란드인들이 보어인을 곱게 볼 리 없었다. 그래서 2차대전 직후~1990년대까지 남아공과 가장 적대적인 나라들 중의 하나가 바로 네덜란드였다.

2. 역사



2.1. 초기 정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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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2년 동인도회사의 얀 판리베이크(Jan van Riebeeck)가 데리고 온 네덜란드 농부들로부터 시작해 칼뱅교도들과 프랑스계 위그노들, 그리고 주류 종교에 탄압받던 여러 개신교 성향의 백인들이 종교활동의 자유를 찾아 지금의 남아공 지역으로 옮겨간 것이 기원이다.
초기에는 현재의 웨스트-노던 케이프 지역에 모여살았고 현지 흑인들과 교류하거나 혹은 충돌하고 노예교역(...)도 하면서 그럭저럭 살았는데 나폴레옹 전쟁 이후 케이프 지역이 영국에 넘어가고 노예 해방정책을 펴자 농민들이 다수였던 보어인들이 대거 반발했고 영국은 이를 분쇄하는 정책을 폈다. 버틸 수가 없어진 보어인들은 포장마차와 가축들을 이끌고 강수량이 더 많은 곳을 찾아서 대거 북동쪽 내륙으로 이주했다. 당연히 이 과정에서 현지 흑인들과의 충돌이 일어났고 이 과정에서 우수한 기마술을 보유하고 소총을 보유한 보어인들에 의한 일방적인 원주민 학살이 일어났다. 이걸 이름하여 '그레이트 트렉(Great Trek)'[8]이라고 한다.
1799년 보어인들은 그레이트피시강을 따라 반투계 농경민들이 사는 지역에 도착했다. 이들은 크게 세 부류로 나뉘어 상대적으로 케이프 식민지에 가까운 오렌지 강 유역에 정착한 한 부류는 오렌지 자유국을, 더 북쪽으로 올라가 발 강 너머, 림포포 강 유역에 정착한 부류는 트란스발 공화국을, 동쪽 해안지대로 우회한 나머지 한 부류는 콰줄루[9] 일대에 정착해 나탈 공화국을 세웠다. 물론 이런 공화국들의 수립은 평화롭게 이루어지지 않았고 이른바 캬프르 전쟁[10]이 한 세기에 걸쳐 지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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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림은 우마차를 이끌고 가는 정착 초기의 보어인들의 모습이다. 미국과 달리 남아공의 '포장마차'는 말보다는 주로 황소가 끌었기 때문에 옥스왜건(Ox-wagon)혹은 오서바(Ossewa)라 불렸다[11]. 이 Ossewa는 구 남아공 국가이자 현 남아공 국가의 일부인 "Die Stem van Suid-Afrika"에도 언급된다.[12]
보어인들은 반투계 농경민에 비해 인구가 훨씬 적었지만 우수한 기마술과 우마차를 이용한 전술을 유기적으로 활용하여 줄루족에 대항해 여러차례 승리를 거두며 서서히 영토를 늘려나갔다. 이른바 피의 강 전투Battle of Blood River에서는 500여명의 기병과 우마차만으로 줄루족 전사 1만명을 일방적으로 학살하기도 했다. 줄루족 역시 기병을 도입하고 싶어했으나 전염성이 강한 가축 유행병 때문에 말을 키우고 기병을 육성하는데 어려움을 겪는 가운데 보어인들은 일부 산악 고지대를 제외한 남아공 내륙 지대를 평정하는데 성공했다.

2.2. 영국과의 충돌


케이프 식민지를 차지한 영국은 보어인의 그레이트 트렉을 막지 않고 방치해 사실상 보어인의 나라들의 독립을 인정한 상태였다. 그러나 19세기 중반에 이르자 케이프 식민지로는 만족하지 못한 영국이 점점 보어인이 살던 내륙으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결국 나탈 공화국은 버티지 못하고 케이프 식민지에 합병되었고 보어인이 세운 두 공화국은 영국의 이런 진출 야욕에 위협을 느끼기 시작했다. 하지만 영국은 이 두나라를 합병하지 않고 1852년의 샌드 강 협정, 1854년의 블룸폰테인 협정으로 보어인들의 독립을 인정했다.
그러던 중 남아프리카 내륙에서 금과 다이아몬드가 발견되자[13] 영국은 남아프리카 내륙에 진출하려 했고 그 과정에서 당연히 보어인들의 나라와 충돌하게 된다. 이 때 콰줄루의 줄루 왕국과 보어인의 트란스발 공화국 사이에 충돌이 벌어지고 이를 빌미로 1877년 영국은 트란스발 공화국을 병합한다. 보어인은 당연히 반발했지만 줄루 왕국의 위협이 지속되는 이상 그냥 참을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1879년 줄루 왕국이 영국령인 나탈을 공격하자 줄루 전쟁이 발발, 영국은 줄루 왕국을 멸망시키고 나탈에 합병시킨다.
줄루 전쟁이 끝나고 줄루 왕국의 위협이 사라지자 보어인들의 불만이 다시 터져 나오기 시작하는데 영국이 트란스발 일대에 군대 배치를 늘리자 결국 1880년 트란스발 공화국은 반란을 일으킨다(1차 보어 전쟁). 넓은 국토와 적은 수를 기반으로 보어인들은 유격전으로 영국군을 괴롭히고 된통 당한 영국은 1881년 트란스발 공화국의 독립을 인정한다. 하지만 1886년 트란스발의 비트바테르스란트 지역에서 거대한 금광이 발견되자 케이프 식민지의 영국인들이 트란스발로 이주하면서 그 수가 점점 불어나 트란스발 내에서 보어인과 영국인 간의 갈등이 커지게 된다. 이 때 당시 케이프 식민지의 총리 세실 로즈가 트란스발 내 영국인들의 대표 리앤더 제임슨을 획책해 1896년 쿠데타를 일으키게 만들면서(제임슨 습격사건) 빡친 트란스발은 영국인들에 대한 차별 대우 법안을 통과시킨다. 영국은 트란스발 내 영국인들을 평등하게 대우하라고 요구하나 트란스발은 이를 거부하고 모든 영국인에게 자국에서 나가라고 통보하여 사실상 선전포고를 했다. 그리하여 1899년 트란스발이 케이프 식민지를 공격하면서 영국과 무력충돌이 벌어지고 영국의 강압적인 행태에 불만을 품은 오렌지 자유국이 트란스발 측에 가담하면서 영국과 보어인 사이에 또다시 전쟁이 발발한다(2차 보어 전쟁).
당시 세계 최강이라 자부하던 영국군이 1, 2차 보어 전쟁기간 동안 상당히 고전하였는데, 보어인들은 창과 활로 무장하고 닥돌하는 원주민이 아니라 화약 무기에 익숙하였고 수렵에 매우 익숙했던 사람들이었다. 특히 넒은 남아프리카 땅에서 개척민으로 살다보니 말을 잘 타는 사람들이 많아 최후의 용기병이라 부를 법한 기마 척후/교란전에 능숙했다. 아직 참호전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기라 마우저 소총으로 은폐와 엄폐를 적절히 활용해 유격전을 펼치는 보어인들의 전략에 영국군은 크게 당황할 수밖에 없었고 위장이라는 개념도 없었던 시기라 가시성이 높은 영국군의 군복은 좋은 타겟이었다. 특히 수십명씩 조를 이루어 이동하는 보어군의 소부대를 뜻하는 코만도(Kommando)가 나중에 정예부대를 상징하는 단어가 될 정도였다. 게다가 당시 독일에서 수입해온 크루프의 야포나 맥심 기관총으로 무장할 정도로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하지만 영국군도 전략과 전술을 다듬어 이들에 대항하게 된다. 붉은색의 군복은 눈에 잘 띄지 않는 색으로 바뀌었고 대포처럼 운반거에 거치해 운용하던 기관총도 콤팩트한 삼각대 운용 방식으로 전환하게 된다. 또한 게릴라에 대한 지원을 끊기 위해 보어인 마을을 완전히 박살내고 민간인들을 지정한 수용소에 강제 수용시키는등 초토화 작전으로 보어인 게릴라에 대항한다.
결국 초토화 작전에 버티지 못한 보어인들이 협상을 요청해 1902년 4월 평화 협상이 시작되었고 5월 31일, 베레니깅 조약을 통해 2차 보어전쟁은 영국의 승리로 끝났다. 이 조약으로 보어인들의 두 나라, 트란스발 공화국과 오렌지 자유국은 케이프 식민지에 합병되었다.

2.3. 남아프리카 연방 수립 이후


하지만 보어 전쟁에서 큰 피해를 입은 보어인에 대해 동정적인 여론이 펼쳐지면서 보어인은 케이프 식민지의 주도권를 잡기 시작했고 1910년, 케이프 식민지는 오렌지 자유주, 트란스발, 나탈과 함께 자치령남아프리카 연방으로 전환, 영국으로부터 자치권을 획득하는데 성공했다. 이런 자치권을 바탕으로 보어인들은 자신들의 언어와 문화를 보존했다. 그리고 영국계에 비해 쪽수가 상대적으로 많았던 보어인들이 주축이 된 국민당이 창설되었고 이들이 집권하면서 전체 인구에서 소수였던 백인들의 이익을 위해서 여러 인종차별적인 법안을 통과시켰다. 그나마 초기엔 (국민당에 비해서) 덜 인종차별적이었던 영국계 중심의 연합당(초기엔 남아공당)도 집권하는 양당체제여서 인종차별이 극단적인 수준까지는 가지않았지만[14] 1948년 총선에서 국민당이 70석을 얻어 65석을 확보하는데 그친 연합당에게 승리를 거둔 뒤에[15] 유색인종의 투표권을 완전히 박탈하는 법을 통과시켜 일당 우위체제를 구축하는데 성공하고 아파르트헤이트라는 정책을 펼치며 흑인과 유대인, 인도인 등 유색인종을 철저하게 탄압하였다. 이런 짓거리는 80년대 후반까지도 이어졌다가 90년대 초반이 되어서야 그만두게 된다.
현재는 쪽수에서부터 밀리기 때문에 주류정치권에서 완전히 밀렸으며, 이들이 지지하는 정당도 국민당에서 민주연맹으로 바뀌었다.[16] 사실 도시 지역이야 몰라도 시골지역에선 보수적인 이들이 많다고 하지만, 쪽수에서부터 밀리기 때문에 그나마 세가 되는 민주동맹을 지지하는 것. 물론 극우파[17]의 경우에는 따로 극우정당을 차리기는 하지만 지지하는 사람은 소수다. 간혹가다 노던 케이프 주 남부지역과 웨스턴 케이프 주 일부 지역을 합쳐서 보어인 자치구를 만들자는 얘기가 나오고는 있지만 호응하는 사람이 적어서 중앙정부에서 그냥 흘러가는 소리 정도로 취급하고 있다.
주요도시와 근교지역에 살고있는 보어인들의 경우에는 그럭저럭 잘먹고 잘살고 있지만[18] 농민들의 경우에는 그 동안 흑인들이나 컬러드들을 값싸게 부려먹거나 비하하거나 돈 대신 생산하고 남은 포도주를 지급하는 식의 차별을 가해왔기 때문에 흑인과 컬러드 노동자와의 원한관계가 깊은데다가[19] 아파르트헤이트 이후에도 흑인과 컬러드 노동자들을 저임금으로 부려먹는 경우가 많기에 빈민층을 대상으로 재산 몰수여론도 왕왕 일어서 상당한 위험에 처해있다는 후문도 있다고. 그러다보니 간혹 이러한 보어인들은 강도 및 여러 중범죄에 휘말리는 경우가 많다.[20] 대다수 남아공 흑인 경찰들도 자업자득이라고 생각하면서 이들에 대해서 대충 수사한다든지하는 문제도 많아서[21], 사설경호업체를 고용하는 경우도 많고 그러다보니 경제적 어려움과 안전 문제로 남아공을 떠나는 이들도 많다.
이런 이들 중에 남아공 밖으로의 이주가 사실상 불가능한 빈민층도 점차 늘어가고 있는데, 이들을 '화이트 스콰터'(white squatter)라고 부르면서 남아공 사회의 문제로 거론되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남아공 흑인들의 보어인들에 대한 증오가 아직도 극심하기 때문에, 링크된 글에 첨부된 사진에 나오는 자선단체 소속의 흑인 사회운동가들이 이들을 대상으로 봉사활동을 하는 경우가 아니라면[22], 대부분의 흑인들은 이런 사실을 부인하면서 무시하는 상황이다[23]. 사실 보어인에 대한 억하심정이라고 말할것도 없는것이 아무리 백인 빈민층이 늘어났네 뭐네 해도 현실적으로 흑인들의 대다수는 여전히 빈곤과 실업에 시달리고 있는 빈곤층이고, 기껏 취직해봐도 한국돈으로 월 20~30만원 정도 받고 입에 풀칠하는 경우가 상당수이며, 그나마 이런 일자리도 없어서 길거리를 전전거리는 실업자들도 많다.[24] 이러한 상황 속에서 대다수 흑인들에게는 보어인 빈민층을 걱정하는것은 사실 배부른 소리나 마찬가지나 여겨질수밖에 없기도 하다. 즉, 백인 빈민층이 늘어나는 것 자체는 사실이고 이들이 공기업에 취직하거나 공무원이 되는데 있어서 불이익을 받는 것은 맞기는 하나 근본적으로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흑인 빈곤, 실업문제가 너무도 심각하고, 이들이 백인에 비해 특별히 혜택을 입는 것은 더더욱 아니기 때문에'''' [25] 이들의 문제는 뒷전으로 밀려날수밖에 없는것이다

3. 기타


트란스발 공화국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전신이 되었으며, 오렌지 자유국도 이에 합병되어 지금은 자유주(Free State)라는 특별독립구가 되었다. 더불어 줄루제국도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일부로 편입되어 현재의 대국이 되었다. 더 자세한 사항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역사에서 찾아보도록 하자.
이들은 거주지를 옮겨 다녔던 많은 아프리카의 부족들과는 달리 한 곳에 오래 정착했기 때문에 이들의 짬밥은 의외로 엄청나다. 남아공의 원주민인 여러 흑인 부족들보다도 한 곳에서 오래 살았는데, 남아공에서 가장 큰 민족 중 하나인 줄루족이나 코사족보다도 오래 살았다.[26] 보어인들의 별명으로는 '''아프리카의 하얀 부족'''이라는 말이 있는데, 짬밥을 생각해보면 과장은 아닌 셈.
비록 강력한 중앙정부는 없었으나 보어인들의 전투력은 일찍부터 강력했으며, 주위의 흑인 부족들은 당연히 상대가 안 되었고 심지어 당대 최강의 세력을 자랑하여 중부지역의 흑인 부족들을 서부로 몰아내거나 흡수하던 줄루 왕국도 이들에게 밀렸을 정도다. 보어인 500명이 흑인 수만 명을 쓸어버리고 보어인은 단 3명만 부상, 흑인은 3천 명 이상 죽은(...) 피의 강 전투(Battle of Blood River, 1838년)에서 이미 시작된 것으로, 영국군이 들어오기 전에 이미 수십만 제곱킬로미터의 영토(현재의 남아프리카 공화국 내륙지방)및 거주하던 흑인을 모두 지배하에 넣은 상태였다.
프리토리아에 '보어트레커 기념관'(Voortrekker Monument)'이 있다.

4. 보어인 인물



[1] 네덜란드어/아프리칸스어식 발음은 '''부르'''이다. 이에 대해서는 네덜란드어 항목 참조.[2] 라틴계 백인, 슬라브계 백인 등[3] 그래서인지 남아공 백인의 평균신장은 게르만계 백인인 네덜란드인보다 상대적으로 작게 나온다.[4] 특히 노년층으로 갈수록 부모나 조부모가 2차 보어 전쟁 당시 당했던 고통을 듣고 자란 경우가 많아서 이들이 영국에 대해 갖는 감정은 미군 2차대전 참전용사들이 나치 독일이나 일본 제국에 대해 갖는 감정과 비슷한 수준이다.[5] 일부 보어인의 경우에는 인종차별 정책에 부끄러움을 느끼며 선거에서 아파르트헤이트 반대 야당을 찍거나 아파르트헤이트 반대운동에 동참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경우가 보어 전쟁 당시 보어측의 지도자 중 하나였던 아브라함 피스허르의 손자로서 아프리카너 성골 중 성골임에도 불구하고 기득권 다 때려치고 공산당원으로서 넬슨 만델라를 변호했던 브람 피스허르, 그리고 현대 아프리카너 문학의 거장 작가들인 브레이튼 브레이튼바흐나 안드레 브링크도 보어인이면서 아파르트헤이트 체제에 반대했던 유명인사들이다.[6] 피터르 빌럼 보타의 정치가 보어인들마저도 실망할 만큼 극악무도했던 점이 한 몫 했다. 자세한 건 피터르 빌럼 보타 문서 참고.[7] 아파르트헤이트 시절 주류 종교였던 아프리카너 개혁교회는 반근대주의, 근본주의적 노선을 상당히 깊게 받아들였으며,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의 주된 종교였고, 교회 자체로는 반성하고 바꾸려고 하는 교회들도 많지만 이걸 자유주의니 뭐니 하면서 비난하고 자기들만의 수구적인 교단을 만들어 믿는 양반들도 존재한다.[8] 아프리칸스어로는 흐로트 트렉(Groot Trek).[9] 응구니족의 일파인 줄루족이 줄루 왕국을 세운 곳으로 현재 콰줄루-나탈이란 이름으로 옛 나탈 주의 이름에 붙어있다.[10] 아랍인 노예상인들이 반투계 흑인들을 아랍어로 불신자라는 뜻의 카피르Kaffir라는 멸칭으로 부른 것에서 기원함.[11] 물론 미국가 끄는 마차가 없었던 건 아니다. 구피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단편 애니인 Californy'er Bust (1945)의 극 초반에 이런 마차가 나온다. 다만, 이런 마차는 농부들이 같은 주 내에서 '비교적' 가까운 곳을 이동할 때 주로 썼고, 아예 타 주로 이동하는 경우라면 우마차가지고는 택도 없었다. 남아공은 미국에 비하면 땅 크기도 작은 편이라서, 이런 우마차가 꽤 유용했던 것이다.[12] 영어로는 "The Call of South Africa", '남아프리카의 외침'이란 뜻이다. 가사는 남아공의 자연과 보어인들의 삶 등의 내용이다.[13] 19세기 말 남아프리카 킴벌리 지역의 다이아몬드 생산량은 그 당시 전세계 다이아몬드 생산량의 '''약 95%'''를 차지했다. 현재 세계 최대의 다이아몬드 생산 기업인 드 비어스(De Beers)가 생긴 것도 이 때.[14] 그래도 상당수 인종차별 법안이 이 시기에 통과되었다. 예를 들면 백인들이 대부분의 토지를 차지할수 있게 한다던가, 광산업에 있어서 백인들이 유색인종이나 흑인들보다 무조건 급여를 많이 받아야 된다던가 등, 등 다만 이 시기엔 이런 법안을 무시하거나, 위반하는 일이 잦았기는 했다.[15] 참고로 득표율은 연합당이 49.2%로 과반에 가까운 득표를 했으나 인구가 적은 농촌선거구에서 국민당이 우세를 보이며 집권할수 있었다.[16] 민주당과 국민당의 합당으로 설립된 정당이기는 하다. 국민당계 당원들이 따로 탈당했다가 선거에서 완전히 밀려서 ANC로 통합되어버린고로 일단 계보상으로는 남아공당의 후신으로 친다. 1934년부터 1976년까지 남아공의 주요정당이었던 연합당도 국민당과 남아공당의 합당으로 결성된 정당이지만 1940년대 이후로는 남아공당원이 주류를 차지했기 때문에 보통 남아프리카당에서 이어진것으로 치는것과 비슷한 맥락.[17]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이들이 창당한 정당인 보수당이 상당한 세를 얻기도 했다. 그렇지만 1994년에 다인종 선거가 치러지면서 완전히 몰락한다.[18] 경제력에서 영국계 백인에게 밀렸다고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얘기고 그 동안 쌓아놓은게 있기 때문에 일반 흑인에 비하면 잘살고 대도시 지역의 치안이 좋지 않다고는 하지만 안전한 신도시(... 물론 흑인이나 컬러드 중산층들도 이사와서 살기는 한다. 흑인들이나 컬러드들도 돈 없는 사람들이 태반이라 빈민촌에서 사는 사람이 많은거지, 돈 좀 만져본 흑인이나 컬러드들은 당연히 안전한 신도시에서 살고 싶어한다.)로 이주할만한 여력이 있는 사람들의 비율이 크게 높은건 사실인지라 그나마 잘먹고 잘사는 축이기는 하다. 흑인 중산층들이 지속적으로 늘어나고 있다지만 전체 흑인의 20%도 안되는 수치이니...[19] 보어계 농민들은 국민당에게 몰표를 줌으로써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을 공약으로 내걸던 국민당을 집권시켰고 덕택에 아파르트헤이트 시대를 개막시켜 흑인들과 컬러드들을 강제로 오지로 내쫓게 만든 주역이기도 했다.(...)[20] 특히 백인 농장주가 살해당하는 사건은 잊을 만하면 뉴스에 오를 정도.[21] 보어인을 대상으로 하는 범죄를 아파르트헤이트에 대한 복수로 여기는 여론이 많아서, 범죄 피해자들이 억울함을 호소할 길이 없다. 경찰들 입장에서도 자기 조상님들이나, 혹은 본인들이 당했던 차별 때문에 서러웠던 판국에 피해자라면서 보어인들이 도움을 청하는 게 고깝게 보이는데다, 아파르트헤이트 폐지 이후에 남아공고관대작으로 앉은 사람들도 죄다 흑인들이니, 눈치가 보여서 백인들의 일에 대해 아오안 취급이다.[22] 그나마도 자선단체의 특성 상, 흑인이건 백인이건 간에 그냥 가난하면 경제적 지원을 해주는 것일 뿐이므로, 특별히 노리고서 이들을 지원해주는 건 아니다.[23] 이 점은 역시 백인들에게 타 인종들이 착취당한 역사가 있는 하와이도 마찬가지다. 여기는 아예 백인들이 사회적, 경제적 기득권을 모조리 박탈당하고 하층민으로 전락했으며, 남아공보다도 더 노골적으로 인종차별을 당하는 상황이다.[24] 실제 남아공의 실업률은 아프리카 수위권의 경제대국이라는 타이틀을 단것과 정반대로 무려 20%대에 달하며, 청년실업률은 일반실업률의 두배를 넘어 무려 40%대에 달하는 수준이다. 즉, 청년층은 메이드일이나 저임금 알바직이라도 구하면 상위 50% 안에 든다는 얘기이다.(...)[25] 물론 기초적인 복지혜택을 받기는 하고, 가산점도 받기는 하지만 가산점을 받을 정도로 출세한 사람은 흑인 가운데서도 소수에 불과한데다가, 복지혜택이라고 해봐야 서유럽이나 북유럽 국가 수준의 복지정책을 생각하면 곤란하고 딱 죽지 않고 먹고 살정도의 돈이다. 거기에다가 교육수준은 백인에 비해서 평균적으로 매우 낮은 수준인지라 평균적으로 중졸 수준이고 대졸자의 비율은 적다.[26] 물론 지금도 흑인보다 혼혈인이 많은 남아공 서부 지역에 한정. 남아공 동부 지역은 내부에선 여러 부족 간의 전쟁과 이동이 있었지만 유럽인이 도착하기 이전에 이미 반투계 흑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가장 늦은 시기인 18-19세기에 확장해 일대에 민족 대이동을 야기한 줄루 왕국도 완전히 아프리카 북쪽에서 남하한 것이 아닌 현 남아공 최동단 지역에서 출발한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