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르게이 유란
1. 개요
러시아의 축구 감독. 포르투갈과 우크라이나 시민권도 보유하고 있다. 현재는 FC SKA 하바롭스크의 감독직을 맡고 있다. 소련 말기와 러시아 초기에 선수로 활동하면서 좋은 드리블과 발기술, 재능으로 명성을 날렸다.
2. 유년기
우크라이나 SSR의 루한스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운전수로 일하셨고, 어머니는 학교에서 요리사로 일하셨다. 어렸을 때 유란의 집은 가난했다고 한다. 주로 형과 나무 장난감을 가지고 놀면서 유년기를 보냈다고 한다. 인터뷰에 따르면 어린 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부모님이 2년 동안 기다리던 검은색 장화를 마침내 사줬을 때라고 한다. 어렸을 때부터 유란은 마당에서 축구하는 것을 좋아했고, 축구에 너무 빠져서 학교를 땡땡이 치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유란의 어머니는 당연히 이를 싫어했지만, 유란은 계속해서 축구를 하였고, 6학년을 마친 후에 그는 체육학교에서 입학 제안을 받게 된다. 이 소식을 부모님에게 전했을 때, 아버지는 아무런 의견을 내지 않았으나, 어머니는 반대하였다고 한다. 결국 유란의 형이 몰래 입학 문서를 체육 학교에 전달하고 등하교를 시켰다고 한다. 결국 부모님은 유란의 결정에 따랐다고 한다. 이후, 유란은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당시에는 축구아니면 운전밖에 모르던 때라 그때 축구선수가 되지 못했더라면 아버지처럼 운전수를 했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3. 선수 경력
3.1. 클럽 경력
3.1.1. FC 조랴 보고실로브그라드
16살에 당시 소련 세컨드 리그에서 뛰고 있던 FC 조랴 보로실로브그라드에 입단한다. 당시 감독이던 알렉산드르 주라블레프는 팀을 다시 소련 퍼스트 리그로 승격시키기 위해 스쿼드를 젊고 유망한 선수들로 리빌딩을 하려 하였다. 이에 따라 유란을 포함한 많은 젊은 선수들이 스쿼드에 포함되었다. 1985년 9월 2일에는 자카르파티예 우즈고로드를 상대로 80분에 교체출장해 데뷔전을 치렀다. 당시 그의 나이는 16살 82일이었고, 이는 '''현재까지 FC 조랴 루한스크 소속 최연소 출장기록으로 남아있다.''' 1986년 8월 29일에는 FC 포돌리야 할메니츠키를 상대로 데뷔골을 넣었고, 이후 FC 오케안 케르치를 상대로 2골을 넣는다. 이 시즌에 조랴는 다시 퍼스트 리그로 복귀하게 된다. 이후 당시 소련을 통틀어 최강팀이던 디나모 키예프가 그에게 관심을 가졌으나, 유란은 당시 조랴의 감독이던 블라디슬라프 프로다네츠와 상담을 한 후, 많은 출장시간을 통해 경험을 쌓고 싶었기 때문에 디나모의 제안을 거절한다. 1986시즌 성적은 19경기 4골.
1987년 4월 4일에는 로코모티프 모스크바를 상대로 소련 퍼스트 리그 데뷔전을 치른다. 팀은 1대1 무승부를 거둔다. 이후 6월 6일에는 FC 니바 테르니폴리를 상대로 컵대회 데뷔전을 치른다. 유란은 이 경기에서 득점을 하였으나 팀은 3대2로 패배하였다. 1987시즌이 끝난 이후, 디나모 키예프가 그에게 다시 한번 관심을 보냈다. 이후 유란은 키예프로 이동하였다. PFC CSKA 모스크바도 그에게 관심을 보냈으나, 이미 유란이 키예프에 도착한 뒤였기 때문에 이적이 성사되지 못했다.
3.1.2. FC 디나모 키예프
당연히 당시 소련 최고의 팀인 디나모 키예프의 1군에 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1987시즌은 그래서 2군에서 주로 보냈다. 1988시즌 유스 리그에서도 6경기 7골의 경기력을 보여주면서 유스 리그를 씹어먹었따. 이후 1군에서 실력을 보여줄 기회를 잡았다. 4월 1일 디나모 민스크와의 컵대항전에서 출전하였지만 팀은 2대0으로 패하였다.
토르페도 리저브 팀과의 리저브리그 경기에서 유란의 커리어를 끝장낼 뻔한 일이 있었다. 1988년 4월 21일에 토르페도의 세르게이 시스티코프가 종아리를 그대로 걷어차면서 유란과 충돌하였다. 이후 유란은 발목뼈가 부러졌고, 의사의 소견으로는 다시 축구를 할 수 있는 확률이 천분의 일에 불과할 것이라고 하였다. 이후 두 차례의 큰 수술을 거친 뒤 1년이 다 되어서야 부상에서 회복하였다.
1988년 가을 유란은 아라라트 예레반과의 경기에서 복귀전을 치렀다. 팀은 4대3으로 승리하였다. 이후 훈련장에서 다시 한번 같은 무릎에 부상을 당하여 뼛조각이 생겼지만 다시 한번 회복에 성공하였다. 게다가, 디나모 키예프 의료진의 도움으로 유란은 전용 무릎 보호대를 차고 경기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유란은 디나모 2군에서도 처음에는 출전기회를 많이 잡지 못했으나, 점점 경기력이 좋아지면서 경기에 출전할 시간을 얻게 되었다. 하지만 이후 디나모 키예프 감독에 의해 정권 비판을 했다는 이유로 2달간 군대 캠프에 보내져 감자를 캐고 동료와 축구를 하는 일을 맞게 되었다. 이후 선배 축구선수들에 의해 디나모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후 디나모 훈련장에서 그의 별명인 바르시크를 획득하게 된다.
'''"키예프 훈련장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점심시간에 늦어서 식판에 채소가 하나도 없었어요. 그래서 급식아주머니에게 "아가씨, 채소좀 주세요. 제 바르시크한테 좋을거 같아서요."라고 했습니다. 그러더니 그분이 당황하셨어요. 다른 선수들도 그걸 듣고 계속 반복했어요."'''
1989년에도 계속해서 디나모 2군 소속으로 뛰면서 5골을 넣었고, 소련 연방 컵대회에서도 샤흐타르 도네츠크를 상대로 1골을 넣었따. 이후 피오렌티나를 상대로 12월 UEFA컵에도 출장하게 되었다.
1990년에는 디나모 키예프 1군 팀의 주요 선수가 되었다. 이후 올레크 살렌코와 친해졌고 경기장에서 좋은 파트너십을 보여주었다. 유란의 인터뷰에 따르면 디나모 키예프 시절 가장 인상적인 경기는 스파르타크 모스크바와의 경기였다고 한다. 1990년 9월 1일, 1대1 상황에서 유란이 역전골을 넣었고, 결국 디나모가 3대1로 승리하였다. 1990년에 디나모 키예프와 함께 유란은 소비에트 톱 리그와 컵을 우승하는 더블을 기록하였다. 이후 좋은 성적을 바탕으로 처음으로 소련 국가대표에 들어가게 되었다.
1991시즌에는 컵위너스 컵에서 FC 바르셀로나를 상대로 캄프 누에서의 2차전에서 선제골을 기록한 적이 있다. 결국 팀은 1대1로 비겼고 합계 점수에서도 3대4로 밀렸다. 하지만, 아직 20살로 젊었던 유란은 이적시장에서 다양한 해외 팀들의 이목을 끌었다. 당시 유란은 스파르타크 모스크바에도 역제안을 하였지만, 스파르타크는 우크라이나에 있는 친척들이 너가 우리 구단에 입단하면 안좋을거 같다는 이유로 거절하였다. 소련 이외의 해외 구단에서도 꾸준히 그의 소련 국가대표에서의 경기를 보면서 관심을 보내왔다. 이후 1991년에 벤피카에서 그에게 입단테스트를 신청하였고, 유란은 처음으로 프로 계약을 맺게 된다.
디나모 키예프 1군에서는 총 한시즌 반을 보냈지만, 유란은 인터뷰에서 당시 유스시절부터 있었던 감독들이 자신에게 가장 많은 가르침을 줬던 축구 선생님들이라고 말하였다.
3.1.3. SL 벤피카
1991년 9월 18일에 벤피카 소속으로 데뷔를 하게 된다. 유러피언 컵에서 몰타 구단인 함룬 스파르탄스를 상대로 4골을 기록하며 팀의 6대0 대승을 이끌었고, 이 경기에서 벤피카의 회장이 감탄하여 그날 급여를 5배 인상시켜줬다고 한다. 이후 유러피언 컵 조별리그에서 그는 디나모 키예프를 만났다. 키예프 원정에서는 1대0으로 패하였지만, 리스본에서의 홈 경기에서는 5대0 대승을 거뒀고, 이 경기에서 유란도 경기 마지막 10분동안 2골을 기록하였다. 하지만, 경기가 끝난 후에는 다시 소련으로 돌아가는 이전 동료들을 공항에서 배웅해줬다고 한다. 1991-92시즌 그는 유러피언 컵에서 장피에르 파팽과 함께 최다 득점자 상을 받았다. 이후, 당시 소련에서 벌어지던 정치적인 상황과 엮여 러시아 전차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스벤고란 에릭손 감독 하에서 많은 기회를 받았던 유란이지만 새 감독인 토미슬라브 이비치 감독하에서는 다른 구 소련 출신 선수들과 함께 제대로 된 기회를 받지 못하였다. 당시 함께 뛰던 쿨코프와 모스토보이는 공개적으로 감독을 비난하여 벌금을 받기도 했다. 또한, 당시 구단이 선수들의 급여를 제대로 지급하지 못하였다. 이후 뉴캐슬 유나이티드가 유란에 관심을 보였고, 유란도 관심이 있어 이적이 성사될 뻔 했으나 주급관련 협상에서 차질이 생기면서 성사되지 못하였다.
1993년 벤피카는 타사 드 포르투갈 결승에서 보아비스타를 누르고 우승컵을 차지하였으며, 그 다음시즌에도 포르투갈 프리메이라리가 우승을 거머쥔다. 이후 새로운 감독으로 부임한 아르투르 주르제 감독은 브라질 국적을 제외하고는 자국 선수들을 쓰는 것을 선호하였다. 이에따라 당시에 구 소련 출신 3명의 선수들은 포르투갈 선수들보다 자신들이 더 잘한다는 것을 경기장에서 보여주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였다. 이후 유란과 쿨코프는 결국 벤피카의 라이벌인 포르투로 이적하는데 합의하였다.
벤피카에서 유란은 이전과는 달리 단독 드리블보다는 패스플레이를 통한 전개를 더 자주 시도하였으며, 파울루 푸르테와의 호흡이 특히 좋았다.
3.1.4. FC 포르투
포르투에서 세르게이 유란은 바비 롭슨 경 하에서 축구를 하였다. 당시 통역가가 주제 무리뉴였다. 바비 롭슨은 당시 결과에 상관없이 90분 내내 경기장에서 왕성하게 뛰어 상대의 체력을 고갈시키고, 측면을 공략하는 축구를 하였다. 1994-95시즌은 유란에게 커리어하이라고 할 수 있는 시즌이었다. 포르투는 리그 우승을 거머쥐었고, 유란은 벤피카를 상대로 득점을 신고하였다. 다행히 벤피카의 팬들은 그에게 야유를 보내지 않고 오히려 박수를 쳐줬다. 경기는 1대1로 종료되었다.
이후 교통사고에 연루되었다. 포르투갈 법무부 장관의 친척이 술을 마신 상태로 있다가 그의 차량과 충돌한 것이다. 이후, 가해자는 가슴에 통증을 호소하며 구급차로 병원에 이송되던 중 사망하였다. 이후 재판에서 그가 무죄임이 밝혀졌으나, 당시 조사 과정에서 언론에 의해 큰 스캔들이 있었다고 보도되었다. 하지만 5년 뒤 사건이 재조사되며, 재판부는 그에게 집행유예 1년과 희생자의 가족에 15000달러의 돈을 지급하라고 명령하였다. 시즌 종료 후 그는 스파르타크 모스크바의 제안을 받고 포르투갈을 떠났다.
3.1.5. FC 스파르타크 모스크바
1995년 스파르타크 모스크바는 챔피언스리그 조별리그에서 블랙번, 레기아 바르샤바, 로젠보르그와 함께 편성되어 6연승을 달성하였다. 첫 2경기에서 1골을 기록하였다. 로젠보르그전에서는 파트너인 케치노프와 함께 출전한 유란은 전반전에 매우 부진했으나, 후반전에는 다시 2도움을 기록하면서 팀의 4대2 승리를 도왔다. 또한 처음으로 러시아 프리미어 리그에 출전하였다. 하지만, 시즌 종료 이후 구단 운영과 관련해서 안좋은 루머가 나오면서 유란은 스파르타크를 떠나기로 결심했고, 그의 여자친구관련 문제로 인해 잉글랜드에서 뛰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3.1.6. 밀월 FC
세르게이 유란은 결국 런던 연고의 밀월과의 계약에 성공하였다. 당시 유란은 열애중이였기 때문에 축구보다는 개인적인 일과 유흥에 빠져 살았따. 그럼에도 불구하고, 팬들은 그를 존중해주었다. 당시 홈 경기에서, 상대팀의 흑인 선수와 충돌이 있었는데 오히려 이게 팬들의 사랑을 받게 만들었다. 이후 13경기 1골의 성적에도 불구하고 유란을 최고의 선수로 대우해줬다. 하지만 밀월에서의 부진으로 그는 러시아 국가대표팀에 차출될 수 없었고, 밀월을 떠난 뒤에도 한동안 팀을 구하지 못하였다.'''"나는 미래의 아내와 사랑에 빠졌고 그는 잉글랜드에 살았어요. 류드밀라와 만나기 위해서 저는 2부리그 밀월로의 이적에 동의했습니다."'''
- 2001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3.1.7. 포르투나 뒤셀도르프
디나모 모스크바와 훈련하면서 새로운 구단을 찾고 있었다. 1996년 여름휴식기에 많은 독일 구단들이 유란에 관심이 있었고, 이 중 뒤셀도르프가 그에게 가장 큰 관심을 보임에 따라 아내와 함께 독일로 이사를 갔다.
뒤셀도르프에서 그는 유스시절 그와 함께한 이고리 도브로볼스키와 뛰게 되었다. 1997년에는 아들 아르툠을 득남하였다. 이후 분유버프인지 성적이 좋아지기 시작하였다. 16경기 5골의 성적을 기록한 뒤 분데스리가 승격팀 보훔의 코치였던 클라우스 토프묄러의 관심을 받게 되었고, 함부르크에서도 그에게 관심을 표하였다.
3.1.8. VfL 보훔
결국 그는 보훔과 4년계약을 맺었다.
1997-98시즌은 유란에겐 재도약의 시즌이었다. 보훔에서 좋은 모습을 보이며 다시한번 러시아 국가대표에 발탁되었고, 1998년 3월에는 프랑스 국가대표팀을 상대로 역전골을 넣기도 했다. 유럽대항전에도 다시 모습을 보이게 됐다. 1997년 9월 30일 트라브존스포르와의 UEFA컵 경기에서 2골을 넣으며 팀의 5대3 승리를 이끌었다. 다음 라운드에서도 클럽 브뤼헤와의 경기에서 팀이 합계스코어 4대1로 승리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이후 독일 경찰에게 음주운전 혐의로 잡혀 면허가 취소되었다. 이후, 국가대표팀에서의 제외는 물론 소속팀 감독과 마찰도 빚어 결국 계약이 해지되었다. 1998-99시즌 보훔은 분데스리가에서 강등되었다. 보훔의 강등 소식을 들은 유란은 자신의 계약을 해지한 토프묄러 감독에게 축하 전보를 보내기도 하였다.
3.1.9. FC 스파르타크 모스크바 (2기)
1999년에 유란은 스파르타크 모스크바로 복귀하였다. 하지만 이제 30살이 된 유란은 이전처럼 훈련을 소화하는데 어려움을 겪으며 1999시즌에 단 3골을 넣는데 그쳤다. 그래도 라커룸에서 팀의 리더로서 도움을 많이 줬다고 한다. 팬들은 그의 느린 속도와 퍼스트 터치에 불만을 표했다. 결국 여름에 올레크 로만체프 감독은 그를 팔기로 결정하였다. 이후에 유란은 러시아 국가대표팀에도 차출되지 못하였다. 이후 반년동안 스파르타크는 주급을 많이 받는 유란을 내보내기로 결정하였으나 겨울이 되어서야 오스트리아 구단인 슈투름 그라츠의 관심을 받는데 성공한다.
3.1.10. SK 슈투름 그라츠
슈투름 그라츠에서 그는 주전으로 나섰고 2000-01시즌 챔피언스리그 조별리그에서 갈라타사라이, 레인저스, AS 모나코와 함께 편성되어 조 1위를 기록하였다. LASK 린츠와의 리그 경기에서 공중볼 싸움을 하다가 상대 선수와 충돌하여 뼈가 조각나는 부상을 당하였다. 이 부상을 극복하기 위하여 여러 시도를 하였으나, 결국 2001년에 선수생활을 은퇴하기로 결정하였다.
3.2. 국가대표 경력
3.2.1. 소련, CIS 국가대표
1990년에 디나모 키예프의 주전으로 올라서면서 국가대표에 뽑히기 시작하였다. 소련 유스출신으로는 결승에서 유고슬라비아를 상대로 승리하면서 유러피언 U-21 선수권 대회 우승을 차지했다. 이후 소련 국가대표에 데뷔하였다. 데뷔전은 1990년 10월 9일 이스라엘 대표팀과의 친선경기였고, 여기서 2골을 기록하였다. 1990년 11월에는 소련 국가대표의 중앙 아메리카 투어에 참가하였다. 1991년에는 유로 예선에 참가하였다. 소련 국가대표로선 12경기 2골의 성적을 기록하였다.
소련이 해체된 이후 독립국가연합 국가대표로 나선 1992년 유로대회에선 아나톨리 비쇼베츠 감독 하에 뛰었다. 독일, 네덜란드, 스코틀랜드라는 힘든 조를 만난 독립국가연합은 2무1패라는 성적을 기록하며 유로에서 탈락하였고, 유란도 이 중 2경기에 출장하였지만 득점에는 실패하였다. 이후 잉글랜드와의 1992년 4월 29일 친선경기에도 뛰었지만 득점에 실패하였고, 독립국가연합 소속 3경기 무득점에 그쳤다.
3.2.2. 러시아 국가대표
우크라이나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우크라이나 국가대표를 선택할 수 있었지만, 유란은 계속해서 러시아 국가대표로 뛰길 원했다. 1992년 10월 14일, 아이슬란드와의 경기에서 러시아 국가대표로 데뷔해 팀의 결승골을 득점하였다.
1993년 11월 17일에는 그리스 원정 경기가 끝난 후 러시아 축구협회와 선수들간의 갈등이 발생해 유란을 포함한 몇몇 선수들이 경기 출전을 거부하였다. 이후 선수들은 자신들의 요구사항을 "14인의 편지"에 기록하였다. 하지만 파벨 사디린 감독은 몇몇 선수들을 설득해 내는데 성공하였고, 유란도 설득당해 요구사항을 철회하고 국가대표팀에 복귀하였다. 1994년 월드컵에도 참가해 브라질과의 경기에서 뛰었다. 유란의 말에 따르면, 유란은 사실 사디린 감독이 더이상 원하지 않았지만 이전에 문제를 제기했던 14인과의 갈등을 중재하기 위해 국가대표에 계속 발탁되었다고 한다. 이후 이 의도가 드러나면서 국가대표팀에서 빠지게 된다.
1994년 월드컵이 끝난 뒤 유란은 1년이 넘도록 국가대표에 차출되지 않았다. 1995년 말에 스파르타크 모스크바로 이적하였다. 이후 다시 러시아 국가대표팀에 발탁되기 시작했지만 이전과 같은 경기력을 보여주지 못하면서 96년 유로 대표팀에는 차출되지 못하였다. 이후 몇년동안은 계속 국가대표에 차출되었다. 국가대표로서의 마지막 골을 1998년 3월 25일 프랑스와의 친선 경기에서 넣었다. 국가대표로서의 마지막 경기는 1999년 3월 19일 툴라에서 열린 벨라루스와의 경기였다. 러시아 국가대표 소속 성적은 25경기 5골이다.
3팀의 국가대표에서 뛴 통산 성적은 40경기 7골.
3.3. 플레이 스타일
선수시절 드리블과 끈기, 득점 재능이 강점이었다. 선수시절 184cm에 83kg이라는 탄탄한 피지컬을 바탕으로 몸싸움을 즐겼다. 디나모 시절에는 압박형 포워드 내지 타겟맨으로 공을 받아내어 수비수들을 끌고 다니는 역할을 맡았으나, 포르투갈로 진출한 이후에는 개인플레이가 줄어든 대신에 다른 선수들과의 패스플레이를 통한 파트너십 플레이가 주를 이뤘다. 디나모 키예프 시절에는 올레크 살렌코, 벤피카 시절에는 파울루 푸르테와의 호흡이 좋았다. 유란은 공격수는 교활하고 가끔씩은 예술가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는 페널티킥을 얻기 위해 상대편의 페널티 구역에서 넘어지는 것을 포함했다.
'''"말하자면, 페널티킥을 얻어내는 것 또한 예술입니다."'''
4. 감독 경력
4.1. 러시아
유란은 항상 지도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비쳐왔다. 선수생활이 끝난 이후 유란은 모스크바로 돌아와 지도자 학교에서 공부를 시작하였다. 2002년 여름에는 스파르타크 모스크바 아카데미의 디렉터가 되었고, 이후 스파르타크 모스크바 2군으로 이동하였다. 2003년 6월에는 스파르타크 모스크바 1군에 안드레이 체르니쇼프 감독이 부임하자, 유란은 수석코치가 되었다. 하지만 성적 부진으로 인해 당해 9월 유란은 체르니쇼프 감독과 함께 경질되었다.'''"지도자는 항상 지식을 수양해야 합니다. 공부는 물론이고요."'''
2003년 겨울에 그는 주로 스파르타크 모스크바 아카데미 선수들로 구성된 러시아 4부리그 모스크바 지구의 아마추어 구단인 알마스 모스크바의 감독이 되었다.
2004년 3월에 그는 스타브로폴 주지사 알렉산드르 체르노고로프의 초청으로 PFC 디나모 스타브로폴의 감독이 되었다. 당시 스타브로폴의 목표는 러시아 풋볼 내셔널 리그 승격이었는데, 유란은 부임 첫 해에 지구 우승과 PFL컵 우승을 거머쥐었다. 하지만, 라이센스를 취득하는 과정에서 디나모 스타브로폴이 1600만 루블의 빚이 있음이 밝혀졌다. 따라서 1월 21일 구단은 프로구단 지위를 잃어버렸으며 이에 따라 유란을 포함한 많은 선수들이 구단을 떠나야 했다.
4.2. 발트해
라트비아 1부리그 승격팀인 FC 디톤의 감독을 2005년 1월부터 맡게 되었지만 5월달에 급료 지불관련 문제로 사임하였다. 당시 디톤의 순위는 3위였다. 결국 시즌 자체는 5위로 마치게 되었다. 이후 에스토니아의 구단인 TVMK로 이적하였다. 월급은 450만원 정도를 받았다고 한다. 2006년 7월부터 11월까지 지휘하면서 팀은 에스토니아 슈퍼컵에서 승부차기 혈투 끝에 플로라 탈린을 누르고 우승하였다.
4.3. 러시아 (2기)
2006년 11월 신니크 야로슬라블의 감독으로 부임하였다. 2007시즌 프리미어 리그 재승격을 목표로 하였다. 39라운드 FC SKA 로스토프나도누과 무승부를 거두고 1위를 차지하였다. 하지만 2008년 4월 30일에 성적 부진으로 경질당하고 만다. 말은 성적부진이었지만 성명서에 따르면 계약을 제대로 준수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유란의 주장에 따르면 구단이 계약 내용을 제대로 준수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 2008년 여름 유로 2008 휴식기에 FC 힘키의 감독을 맡아 팀을 잔류시키는 역할 맡았고, 14위로 시즌을 마감시키면서 이에 성공한다. 하지만 계약을 연장하지 않고 떠나게 된다. 유란에 따르면 원래는 잔류를 성공시킬 시 2년 연장계약이 있었다고 하지만, 러시아 프리미어 리그 측에 계약서를 제출할 때 그 부분이 빠져있었다고 한다.
4.4. 카자흐스탄, 아제르바이잔
2009년 1월부터 FC 아스타나에서 일하게 되나 개막 며칠 직전 갑자기 임시 감독으로 임명된다. 구단의 목표는 최소 2위 이상이었다. 악퇴베에 이은 2위를 달리며 유란은 목표를 달성하고 있었다. 하지만, 구단이 급료를 제때 지불하지 못하면서 2009년 9월 유란은 팀을 떠난다.
2011년 7월 아제르바이잔의 시무르그의 감독으로 임명되었다. 20라운드 현재 10위를 기록하면서 기대치에 못 미치는 성적을 거뒀다. 잔류권과는 4점차가 나고 있었다. 2012년 2월 27일에 유란은 구단과 상호해지를 하였다. 그와 함께 형제인 유리 유란과 이고리 유셴코 코치도 같이 계약을 상호해지하였다.
4.5. 러시아 (3기)
2012년 5월 6일 FC 시비리 노보시비르스크의 감독으로 임명되었다. 리그 25경기를 치르고 팀은 플레이오프 권에서 2점 뒤진 6위를 기록하고 있었다. 하지만 팀은 12-13시즌 전부터 재정적인 문제를 겪으면서 주축 선수들을 내보내야 했다. 유란도 결국 2013년 3월 16일이 계약을 상호해지 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유란이 예전부터 추춘제를 싫어했기 때문에 이와 관련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도 있다.
2014년 12월 29일에는 FC 발티카 칼리닌그라드와 2.5년 계약을 맺었다. 2014-15시즌 목표는 구단의 2부리그 잔류였다. 시즌을 15위로 마치면서 팀은 2부리그 잔류에 성공하였다. 2015년 6월 16일에 구단이 자금을 4분의1로 줄이면서 유란은 칼리닌그라드 감독직에서 사임하였다.
4.6. FC 미카
2016년 1월에는 아르메니아의 미카 FC 감독으로 부임하였다. 계약기간은 반년. 그는 미카에서 아르메니아 컵 준우승을 시켰으며, 결승전에서 패한 뒤 구단과 상호 계약 해지를 하였다.
4.7. 러시아 (4기)
2017년 6월에는 러시아 3부리그 중부지구의 조르키 크라스노고르스크의 감독을 맡았다.
2020년 1월 다시 한번 FC 힘키의 감독직을 맡게 되었다. 리그 경기는 코로나19로 인해 리그가 중단되며 단 2경기만을 진행했지만, 팀은 2위로 시즌을 마감하며 러시아 프리미어 리그 승격에 성공하게 되었다. 하지만, 팀은 러시아 컵에 계속 남아있었기 때문에 계속해서 경기를 치르게 되었다. 힘키는 여러 팀들을 단단한 수비와 함께 물리치면서 결승까지 도약하였고, 결승에서도 제니트를 상대로 1대0으로 아깝게 패하였다. 하지만, 2020년 8월 1일, 프리미어 리그 승격에 관한 구단 투자에 관해 보드진과의 갈등이 생기자 결국 경질당하고 만다.
2020년 10월 21일, SKA 하바롭스크의 감독으로 부임하였다. 부임 이후 중하위권에 처져있던 하바롭스크를 안정적인 중상위권 전력으로 다시 올려놨다. 스파르타크 모스크바의 오스톤 우루노프가 그의 나이를 속이고 있다고 말한 발언이 논란이 되면서 러시아 축구 연합으로부터 징계를 받았다.
5. 수상 경력
5.1. 선수 시절
'''소련 국가대표 소속'''
- 유러피언 U-21 축구 선수권 대회 - 1990
- 소비에트 톱 리그 우승 - 1990
- 소비에트 컵 우승 - 1990
'''FC 포르투 소속'''
- 프리메이라 리가 우승 - 1994-95
- 러시아 프리미어 리그 우승 - 1999
- 소비에트 스포츠 국제 마스터 - 1990
- 유르노스티 우크라이나 선정 우크라이나 최고의 축구선수 - 1990
- 유러피언 컵 득점왕 - 1991-92 (7골)
5.2. 감독 시절
'''FC 알마스 모스크바 소속'''
- 러시아 아마추어 풋볼 리그 우승 - 2003(모스크바)
- 러시아 프로페셔널 풋볼 리그 우승 - 2004(남부)
- PFL컵 우승 - 2004
- 에스토니아 슈퍼컵 우승 - 2006
- 러시아 풋볼 내셔널 리그 우승 - 2007
6. 여담
- 유란의 첫 부인은 디나모 키예프의 보드진의 딸인 일로나 추바로프였다. 하지만 결혼생활은 1년 남짓동안 이어지다 1991년에 끝났다. 두번째 부인은 포르투갈 사람이었는데, 이 또한 몇 달동안만 이어졌으나 유란이 포르투갈 시민권을 따는 기회가 되었다. 현재 유란은 러시아, 우크라이나, 포르투갈 시민권이 있다.
- 유란은 마치!풋볼 1 채널의 "네풋볼레 이스토리"라는 프로그램의 진행자를 맡고 있는 류드밀라라는 사람과 세번째 결혼을 하였다. 두 사람은 1991년 리스본에서 처음 만났다. 당시 류드밀라는 베레즈카 포크댄스단을 보기 위해 관광을 왔었다. 공연이 끝난 뒤 유란은 그녀를 저녁에 초대하였다. 당시 그녀는 영국에서 살기로 하고 거주 비자를 기다리던 중이었다. 유란은 그녀에게 엄청 빠져 매주 포르투와 런던을 왔다갔다 했다. 언론은 이를 오해해 그가 잉글랜드 구단으로 이적한다는 루머를 퍼뜨리기도 하였다. 결국, 그녀와의 사랑 때문에 밀월 FC로 이적하였고 같이 살게 되었다. 이후 독일로 이사를 가, 결혼을 하게 된다. 1997년에는 첫째 아들 아르툠, 2007년에는 둘째 아들 로만을 낳았다. 두 아들 다 축구를 하고 있다. 아르툠은 라트비아 2부리그의 디나모 리가에서 뛰고 있다. 로만은 현재 CSKA 모스크바의 유소년 팀에 있다.
- 2019년에는 드미트리 센니코프와 함께 "브네 이그리(Vne Igry)"라는 러시아 TV 시리즈의 시즌 2에 출연하였다.
[1] Барсик. 러시아에서 고양이 이름으로 흔히 쓰며, 고귀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