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열황후 감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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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한 말의 인물. 유비의 아내, 유선의 어머니. 패현 사람. 본명은 감매(甘梅),[1] 통칭은 감부인(甘夫人), 시호는 소열황후(昭烈皇后).
2. 정사
유비는 감부인이나 미부인과 결혼하기 전에 앞서 맞이한 처자가 여럿 있었다. 197년, 유비가 원술을 치러 간 사이 조표가 끌어들인 여포가 하비를 빼앗고 유비의 처자식을 붙잡았다. 이에 미축은 유비에게 자신의 여동생 미부인을 시집보냈다. (미축전) 이후 유비가 여포에게 화친을 구해서 자신의 처자를 도로 되찾았다. 유비와 여포의 사이가 다시 나빠지자 여포는 고순을 보내 유비를 격파했고 또 유비의 처자를 사로잡았다. 붙잡힌 유비의 처자는 여포가 격파되고나서 다시 유비의 품으로 돌아갔다. (선주전) 유비가 예주에 부임하던 시기[2] 에 감부인을 새로이 첩으로 맞이했다. (감황후전) 이후 조조가 관우가 지키던 서주를 빼앗으면서 유비의 처자는 또 붙잡히게 되었다. (선주전) 여기서 감부인은 유비의 곁에 있었던 덕분에 조조에게 잡히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감부인도 조조에게 사로잡혔지만 관우가 조조군에서 유비에게로 돌아올 때 같이 데리고 와준 것인지 나와있지 않아서 알 수 없다.[3]
유비는 본처를 여러 차례 잃었기 때문에 감부인이 항상 집안일을 관리했다. (감황후전) 이 구절은 유비에게 감부인, 미부인 뿐만 아니라 이전에 처자가 여럿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감부인은 유비를 따라 형주까지 가게 되었고 거기서 유선을 낳았다. 유비군은 장판파에서 조조군에게 추격당하게 되었는데 유비는 위급한 나머지 감부인과 유선까지 매정하게 버리고 떠났다. 하지만 조운이 감부인과 유선을 구출해준 덕분에 무사할 수 있었다. (감황후전) 209년, 유비가 손권의 여동생인 손부인을 아내로 맞이했고, 210년, 유비군이 남군을 얻었다. (자치통감) 감부인은 죽고나서 남군에 매장되었다. (감황후전) 유비는 감부인이 살아있는 상태에서 손부인과 결혼한 것으로 보인다. 감부인은 유비군이 남군을 얻은 이후에 죽어서 남군에 매장되었기 때문이다. 관우가 패배하여 형주를 상실한 이후, 222년, 감부인의 시호를 황사부인(皇思夫人)으로 추증했고 감부인의 영구를 촉으로 이장하던 도중 유비가 병사했다. 제갈량은 상서를 올려 유선의 허락을 받아 감부인을 소열황후(昭烈皇后)로 추증하고 유비와 성도의 혜릉에 합장시켰다. (감황후전)
3. 연의
삼국지연의에서는 감부인과 미부인 둘 다 유비의 정실로 그려지고 있다.[4] 유비의 다른 처자들이 모두 생략되고 감부인과 미부인 둘 다 진작부터 유비의 부인인 상태로 나와서 여포에게 붙잡히는 역할을 대신해준다. 조조가 관우를 사로잡으면서 두 부인도 같이 사로잡히지만 조조가 관우의 항복을 받으며 두 부인의 안전을 보장해주었기 때문에 관우가 유비에게 돌아가면서 두 부인을 데리고 같이 돌아간다. 참고로 정사에는 관우가 유비의 아내들을 잘 돌봐주었다거나 유비에게 돌아오면서 유비의 아내들을 데리고 와주었다거나 하는 것은 나오지 않는다.
조운이 장판파에서 감부인을 구출하는데 감부인은 유선을 데리고 있지 않았고 미부인이 유선을 데리고 있었다. 정사에서는 장판파에서 감부인과 유선이 동시에 언급되기 때문에 감부인이 유선을 데리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감부인이 유선의 생모라는 점을 고려하면, 정사 쪽이 자연스럽다. 정사와 다르게 감부인이 죽은 다음에야 유비가 손부인과 결혼한다. 훗날 유선이 제위를 계승하자 감부인을 소열황후로 추서하고, 미부인도 황후로 추서한다. 정사에서는 감부인만 황후로 추증되었고 미부인은 황후로 추증되지 못했다.
4. 기타
감부인의 이름은 정사에는 기록되어있지 않지만 명나라 시대의 야사《기주부지(夔州府志)》에 따르면 감부인의 이름은 감매(甘梅)이다.
감부인의 신분이 첩이었기 때문에 감부인의 아들 유선이 유비의 장자이긴 했지만 온전한 적장자라고는 하기 어려웠다. 감부인의 신분은 첩이었고 유비가 황제가 되기 이전에 사망했다. 황제국 촉한이 건국되고나서 황후와 태후는 오의의 누이 목황후였으며, 유비의 다른 아들인 유영과 유리도 있었다. 이렇게 놓고 보면 유선이 스무스하게 후계자가 된 것은 생각보다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유비가 유봉이 죽는 것을 원치 않았음에도 유봉이 스스로 목숨을 내놓아야 했던 데에는 지은 죄가 큰 것도 있지만 이런 복잡한 사정도 작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습유기에 따르면 선주의 감 황후는 패 사람으로 미천하게 태어났다. 그곳의 관상가가 말하길 "이 여자아이는 훗날 귀해져 궁액宮掖에 이를 것이다."하였다. 나중에 장성하니, 자태가 특이했고 18살이 되자 피부는 옥처럼 부드러웠으며 자태와 용모가 아름다웠다. 선주가 비단 휘장綃帳 속으로 불러들이니 밖에서 바라보는 자들이 달 아래 눈이 내려 쌓이는듯 하였다. 하남(河南)에서 바친 옥 인형玉人은 높이가 3척이었는데, 옥 인형을 감 황후 곁에 두고는 낮에는 군모(軍謀)를 강설(講說)하고 밤에는 황후를 끼고 옥인형을 감상했다. 일찍이 칭하길 옥을 귀히 여기고 그 덕을 군자와 비교하였는데, 하물며 사람의 형상을 하였으니 감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황후와 옥 인형 모두 맑고 희고 윤이 나니 보는 이들은 대개 어지러이 미혹됐다. 애첩(嬖寵)들은 감 황후를 미워하고 시샘하였고 또한 옥 인형도 시기하였다. 감 황후는 늘 옥인형을 부숴서 망가뜨리고자 선주에게 경고하기를 "옛날 자한子罕은 옥을 보배로 여기지 않은 점을 《춘추春秋》에서 아름답다 하였습니다. 지금 오나라와 위나라가 멸하지도 않았는데 어찌 요사스러운 감상품에 목을 매며 품에 안으십니까. 무릇 음란함에 현혹되면 의혹을 낳는 법이니, 저 물건을 다시는 들이지 마십시오!" 하였다. 선주가 이에 옥인형을 치우자 애첩들이 모두 물러났다. 당시 군자들이 의논하길 감 황후는 신이한 지혜를 가진 부인이라 하였다.
다만, 태평광기나 세설신어 같은데도 싣지않고, 후대에도 소개되지 않은채 습유기에만 나오는 걸로 봐서 당시에나 후대에나 말도 안되는 카더라 정도로 인식됐던 것 같다. 사실 본문만 봐도 말이 안 되는데 감부인은 위나라와 오나라가 세워지기도 전에 죽었으며, 유비는 이 때 떠돌이 신세로 옥인형 같은 걸 끼고 살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다.
5. 미디어 믹스
- 감부인/기타 창작물 문서 참조.
6. 둘러보기
[1] 출처: 기주부지[2] 도겸에게 예주자사로 천거받은 시점으로 볼 수도 있다. 시점이 명확히 드러나지 않은 탓에 정확히 언제 혼인했는지 알 수 없다.[3] 다만 유비가 조조군과 교전한 후에 곧장 북으로 튀었고 유비의 처자들이 다 잡혔다는 걸 생각하면 후자쪽에 가까울듯 하다.[4] 현대 관점에서는 얄짤없이 중혼이지만, 이 시기 동아시아에선 왕이나 세력 좀 있다 하는 사람들이 정실을 둘 이상 두는 게 아예 없는 일은 아니었다. 삼국지 시기 한참 후를 배경으로 한 서유기에서는 '삼궁 황후와 육원 비빈'이라고 해서 왕은 정실 셋에 후궁 여섯을 둘 수 있음을 뜻하는 말이 나오고, 한반도의 고려 태조 왕건이 호족을 포섭하기 위한 결혼동맹으로 아내를 스무 명 넘게 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당장 조선 후기에 지어진 구운몽 안에서의 설정도 양소유가 2처 6첩을 거느린 것으로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