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표(삼국지)
1. 후한 말의 인물
曹豹
(? ~ 196년?)
1.1. 소개
도겸을 섬겨 194년에 도겸의 명령으로 단양병을 받은 유비와 함께 조조군을 담현 동쪽에서 요격했다가 격파되었다. 도겸이 서주를 유비에게 넘기자 조표도 유비의 막하에 들었다. 이후 유비와 원술이 서로 대립하며 한 달을 지나니, 여포가 틈을 노려 하비를 습격했는데 조표가 배반해, 몰래 여포를 영접했다. 여포가 유비의 처자식을 사로잡아, 유비는 옮겨 해서(海西)에 진을 쳤다.(선주전)
1.2. 조표의 정체
정사에선 도겸의 구장이라고 하고 유비와 함께 단양병을 이끌고 조조와 대적했고 그가 이끌던 여포와 내통한 반란의 무리도 단양병이라는 점에서 적어도 서주 외지 출신이거나 도겸의 단양출신 직속일 가능성이 높으며 서주의 호족인 진등이나 미축의 지지를 받은 유비세력과 대립했을 가능성이 높다.
당대의 1차 사료인 영웅기는 조표를 도겸의 구장이라는 식으로 평가한다. 즉 서주의 호족이라는 입장보단 도겸의 수하였다는 점을 더 강조하고 있다. 또 조표의 난 당시에 조표세력에 붙었던 단양병이라는 조직을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여기서 단양병들은 실제 유비가 처음 서주에 왔을때 도겸이 유비에게 직속으로 붙여준 병사들을 뜻한다.
이후의 행적을 보면, 유비는 조조의 공격을 방어하는데 담(郯)에서 유비는 조표와 함께 조조를 요격했으나 격파당했다 한다. 조인전에 따르면 조인이 비, 화, 즉묵, 개양에 종군하고, 도겸이 별장을 보내 여러 현들을 구원하자 조인이 기병으로 이를 격파했다고 한다. [1]
우선 도겸부터가 단양출신이다. 도겸이 중용한 인물이었던 착융의 기록을 보면 착융도 단양 출신인데 착융은 도겸에게 귀순할때 휘하의 병사 몇백명을 거느리고 도겸에게 바치면서 귀순했다. 당시 서주는 여러지역에서 전란이 일어났을때 식량이 풍부하여 유민들이 많이 들어왔는데 도겸은 이들 가운데 자신의 출신지인 단양인들을 따로 병사로 추려서 자기 직속인 단양병으로 만들었을 공산이 크다. 단양병은 조조도 모집한 적이 있었는데 흉포하고 용맹했다고 한다. 유비에게 단양병 4천을 금방 내릴수 있었던 것도 이들이 도겸의 직속부하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거기에 도겸전을 보면 도겸은 서주자사가 된 이후 조욱 같은 서주의 인사들을 멀리라고 조굉이나 착융같은 인물들을 등용했는데 착융의 출신지를 봐도 알 수 있지만 이들은 아무래도 도겸과 동향일 가능성이 크다. 그런 도겸의 직속병단, 도겸과 동향인들로 구성되었고 볼 수 있는 단양병을 이끌었다고 강하게 암시되는 조표를 과연 단순히 '서주의 호족'이라고 볼 수 있을까?
선주전을 보면 진등이나 미축같은 서주 토박이 출신들은 유비가 조조의 서주침공을 막아낸 이후 다들 앞 다투어 유비를 서주의 새로운 주인으로 삼고자 한다. 심지어 이들은 중앙에서 명성이 높았던 원술같은 인물도 거부하고 유비를 추대하는데 이는 굉장히 시사하는 점이 많다. 미축 같은 경우엔 서주인사들을 이끌고 유비에게 서주를 권하며 공융 같은 중앙의 명망높은 인사조차 이를 찬성한다. 도겸이 받아들여 세력을 구축한 태산 인근의 유력한 군벌 장패와 그 일당 역시 유비 치하에선 딱히 반란이나 소요를 보이지 않은 반면 여포치하에선 반발했던 것을 보면 도겸에서 유비로의 지배권 전환에 대해서 인정하고 넘어간 것으로 보인다. 즉, 서주와 서주인근의 유력한 인사들은 거의 유비의 손을 들어줬다고 할 수있는데 조조의 침공으로 단양으로 도망갈 생각까지 하면서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도겸의 서주지배력이 약화되었을테니 도겸이 다른 생각이 있었더라도 이렇게 인심이 쏠린 유비에게 서주를 넘겨주지 않았을리는 없다, 도겸 개인으로서도 유비를 마음에 들어했고 스스로가 조조의 침공 전후로 몸이 쇠약해진 것을 인지했다는 걸 감안해도 말이다.
이렇게 되면 서주에서 유비의 지배를 반대하는 세력은 없어보이지만 예외는 있는데 바로 도겸 휘하 단양 출신 인사들과 단양병들은 같은 출신지인 도겸이 죽고나면 연고가 없는 서주에서 끈 떨어진 두레박 신세가 된다는 것이다. 당장 착융이 조조의 침공때 도겸이 약해지자 도망가서 서주의 명망가인 조욱을 죽인 것에서도 볼 수 있듯이 토박이 서주인사들 입장에선 그동안 반발해온 외부출신 도겸 직속 인사들을 좋게 볼리가 만무하다. 어찌보면 유비를 새로 들인것도 이런 도겸 휘하 소위 '단양집단'에 대한 견제의 의미로서 새롭게 추대했다고 볼 수 있다. 미축같은 인물은 유비가 서주를 잃은 직후 바로 자신의 여동생을 유비에게 부인으로 바치고 지원하는 등 서주인사들과의 연결고리를 강화시키는 모습을 보인다. 한 마디로 유비를 들이면서 서주인사들에게 소원했던 도겸과 달리 유비를 서주와 공고히 연결하고자 하는 의지라고 볼 수 있다.
'단양집단'은 이런 상황에 대해서 여러모로 적개심을 가졌을것이다. 물론 당시 서주의 상황상 단양병들도 조조의 서주침공에 맞선 세력이니 만큼 대놓고 쫒아낼순 없었겠지만(이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 조표가 하비상인것만 봐도 그러하다) 유비 치세에 상대적으로 수세에 몰리고 소수에 가까운 입장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당장 조표의 반란 당시 여포 나름대로 서둘렀음에도 그가 도착했을 무렵엔 단양병은 성문 한쪽에만 몰려서 1천여명밖에 남지 않았고 그들을 이끌고 있던 것으로 보이는 조표는 여포의 원군이 도착하기도 전에 장비에게 살해되니까.
따라서 이들은 점차 자신들의 입지가 좁아지는 것을 두려워하고 적개하고 있었으며 이로인해 서주호족들과 결탁한 유비 직속 인원들과 적대했을 것으로 생각되며 이런 갈등이 표면적으로 드러난 것이 바로 조표와 장비의 갈등이다. 그리고 이들이 유비의 대안으로 생각했던 것이 바로 유비가 세력을 키울 목적으로 일종의 용병대장으로 들인 여포고 여포 역시 서주를 바로 얻을 생각이었기에 이들에게 호응했을 것이다. 단양병들이 수세에 몰린 상황에서 조표의 요청을 받은 여포의 구원으로 살았다고 하는 장면이 여포와 이들간의 유착을 보여주는 것이다. 여포가 이들과 손을 잡았기 때문에 진등, 미축 같은 서주 토박이들이 암암리에 여포에게 반발하고(진등의 내응, 미축이 유비가 서주를 빼앗기자 각종 지원을 한 점) 장패같이 유비의 지배를 묵인한 자들이 여포에게 반발했던 것도 원래 단양병 집단과 이들이 대립관계였음을 암시하고 있다.출처
요약하면 조표는 서주호족이라기 보단 도겸과 지연이 되었든 어쩌면 친인척이었거나 뭐가 되었든 직속으로 연결된 부하였을 공산이 크고 도겸의 출신지 병사들인 단양병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도겸이 죽고 연줄이 끊기자 이에 반발해 또 다른 외부세력인 여포와 연합하여 자신들의 입지를 확고히 하고자 했다고 추정할 수 있다.
1.3. 영웅기 기록 조합
『영웅기』에는 조표에 대해 다른 두 기록이 나온다. 첫 번째는 196년에 유비와 원술이 대치하고 있을 때 조표의 무리가 서주를 지키고 있던 중 유비를 배신하고 여포에게 하비성을 넘겨줬다고 나온다.
두 번째는 유비의 중랑장 단양 사람 허탐이 여포에게 가서 하비상(相)[2] 조표와 장비가 서로 다투다가 장비가 조표를 죽여 성 안이 혼란에 빠졌으니, 단양병이 성의 서문에 주둔하고 있는데 여포가 군을 이끌고 오면 내응할 것이라고 하고 여포는 그것을 따라 성을 빼앗았다고 한다.유비가 장비張飛를 남겨 하비를 지키게 하고, 병사를 이끌고 원술과 회음 석정石亭에서 싸우니, 교대로 이기고 졌다. 도겸의 옛 장수 조표가 하비에 있었는데, 장비가 그를 죽이고자 했다. 조표의 무리는 진영을 굳혀 스스로 지키며, 사람을 보내 여포를 불렀다. 여포가 하비를 취해, 장비는 패주했다. 유비가 이를 듣고, 병사를 이끌고 돌아와, 북으로 하비에 이르니, 병사가 흩어졌다. 흩어진 병사를 거둬 동으로 광릉을 취해, 원술과 싸우나, 다시 졌다.
「선주전」은 전자, 「여포전」에 후자의 내용을 인용했다. 그럼 『자치통감』에서는 어떻게 서술했을까?여포가 서주(徐州)에 들어왔을 때 원술에게 서신을 보냈다. 원술이 답서를 보내 말했다,
“지난 날 동탁이 난을 일으켜 왕실을 파괴하고 나의 문호(門戶)에까지 해를 입혔는데, 내가 관동에서 거병했으나 능히 동탁을 도열(屠裂-사지를 찢어 죽임)하지 못했소. 그런데 장군이 동탁을 주살하고 그 수급을 보내니 나를 위해 원수를 갚고 치욕을 쓸어 없앤 것이고 당세인 들에게 나의 면목을 세워주어 사생(死生-생사)에 부끄럽지 않게 했으니 그 공이 첫째요.
지난날 장수 김원휴(金元休-김상金尙)가 연주로 향하여 막 봉구(封丘)에 이르렀을 때 도리어 조조에게 격파되어 흩어져 달아나니 거의 멸망할 지경에 이르렀소. 장군이 연주를 격파해 멀고 가까운 곳 사람들에게 다시 내 면목을 세워주니 그 공이 두 번째요.
내가 태어난 이래 천하에 유비가 있다는 말을 듣지 못했는데, 유비가 거병해 나와 더불어 싸웠소. 내가 장군의 위령(威靈)에 힘입어 유비를 격파했으니 그 공이 세 번째요. 장군은 내게 이 세 가지 큰 공을 세워주었으니 내가 비록 불민(不敏)하지만 생사(生死)로 받들겠소. 장군은 여러 해 동안 싸우느라 군량이 부족해 고통스럽다 하여 이제 쌀 20만 곡을 보내니 도로에서 맞이해 주시오. 이것으로 그치지 않고 응당 다시 끊이지 않게 보낼 것이오. 만약 병기(兵器)와 전구(戰具-싸움도구)에 부족한 점이 있으면 크건 작건 오직 명하기 바라오.”
여포가 이 서신을 읽고 크게 기뻐하며 마침내 하비로 갔다.
여포가 물과 뭍으로 동쪽으로 내려와 하비 서쪽 40리 되는 곳에 도착했다. 유비의 중랑장 단양(丹楊)사람 허탐(許耽)은 밤을 틈타 사마 장광(章誑)을 여포에게로 보냈다. 그가 말했다,
“장익덕(張益德-장비)이 하비상 조표(曹豹)와 서로 다투어 익덕이 조표를 죽이니 성중에 대란이 일어 서로 믿지 못합니다. 단양병(丹楊兵) 천 명이 서쪽 백문성(白門城) 안에 주둔하고 있는데 장군께서 동쪽으로 왔다는 말을 듣고 모두 펄쩍 뛰며 다시 살아난 듯이 기뻐하고 있습니다.[3]
장군의 군사들이 성 서문(西門)으로 향하면 단양군(丹楊軍)이 즉시 성문을 열어 장군을 안으로 들여보낼 것입니다.”이에 여포는 밤중에 진격하여 새벽에 성 아래에 도착했다. 날이 밝자 단양병이 성문을 열어 여포의 군사들을 안으로 들여보냈다. 여포는 성문 위에 앉아 보병과 기병으로 불을 놓아 익덕의 군을 대파하고, 유비의 처자식과 군자(軍資-군자금), 부곡(部曲), 제장들의 가구(家口-가족)를 노획했다.
얼피보면 여포전 영웅기를 인용한것으로 보이나 자세히 살피면 실은 선주전 영웅기도 인용했음을 알 수 있다.袁術攻劉備以爭徐州,備使司馬張飛守下邳,自將拒術於盱眙、淮陰,相持經月,更有勝負。下邳相曹豹,陶謙故將也,與張飛相失,飛殺之,城中乖亂。袁術與呂布書,勸令襲下邳,許助以軍糧。布大喜,引軍水陸東下。備中郎將丹陽許耽開門迎之。張飛敗走,布虜備妻子及將吏家口。備聞之,引還,比至下邳,兵潰。備收餘兵東取廣陵, 備收餘兵與袁術戰,又敗,屯於海西。
원술이 유비를 공격해 서주에서 싸우니 유비가 사마 장비에게 하비를 수비하게 하고 자기의 장수에게 원술을 우이, 회음에서 막게하여 서로 대립하여 한달이 지나니 교대로 이기고 졌다. 하비상 조표는 도겸의 옛 장수인데 장비와 서로 다투어 장비가 그를 죽이니 성안이 어그러져 혼란하였다. 원술이 여포에게 서신을 보내 하비를 급습할것을 권고하며 군량을 보내 협조했다. 여포가 매우 기뻐하며 군대를 수륙으로 인솔해 동쪽으로 내려갔다. 유비의 중랑장 단양사람 허탐이 문을 열어 맞이하니 장비가 패주하였다. 여포는 유비의 처자와 장수, 관리들의 가족을 노획하였다. 유비가 이를 듣고 다시 돌아왔는데 하비에 이르러 병사들이 흩어졌다. 유비는 남은 병사들을 수습해 동으로 광릉을 취해, 원술과 싸우나, 다시 지고, 해서에 주둔했다.
우선 '원술이 유비를 공격해 서주에서 싸우니 유비가 사마 장비에게 하비를 수비하게 하고 자기의 장수에게 원술을 우이, 회음에서 막게하여 서로 대립하여 한달이 지나니 교대로 이기고 졌다. 하비상 조표는 도겸의 옛 장수...' 부분은 선주전과 선주전 주석 영웅기를 따온 부분이다. 특히 '교대로 이기고 졌다(更有勝負)'라는 표현은 선주전 영웅기 주석을 그대로 가져온 표현이다.. 그 나머지는 여포전 주석 영웅기의 기록을 따왔고 장비의 패주, 유비가 이를 듣고 회군하는 부분부턴 다시 선주전과 선주전 주석 영웅기의 기록을 가져 왔다. 특히 동으로 광릉을 취해, 원술과 싸우나, 다시 졌다(東取廣陵, 備收餘兵與袁術戰,又敗)부분은 선주전 주석 영웅기의 구절 그대로이다. 즉 자치통감에선 선주전과 여포전 영웅기 주석을 하나의 기록으로 취합했다는 것이다.
이에 자치통감에 따라서 한번 선주전, 여포전의 영웅기 기록을 재편성 해보자.
두 기록을 다르게 볼 것 없이 아주 딱 한 기록으로 맞아 떨어지는 걸 볼 수 있다. 이는 배송지가 원래 한 기록이었던 것을 두개로 나누어서 하나는 선주전에다가 붙이고 하나는 여포전에다가 붙인거라고 할 수 있는데 왜 배송지는 헷갈리게시리 같은 기록을 두개로 나누어 후세 사람, 지금의 현대인들에게까지 혼란을 준것일까? 생각컨데 당시까진 영웅기가 남아 있었으니 당대 사람들은 이 주석을 보고 본래의 책을 볼 수가 있어서 혼동되지 않았을것이다. 또 기본적으로 배송지의 주석은 삼국지 본전의 기록 보충용이었고 그래서 같은 기록을 두개로 나누어 하나는 유비쪽의 반응을 집중적으로 기록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여포쪽의 기록을 집중해서 기록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출처유비가 장비張飛를 남겨 하비를 지키게 하고, 병사를 이끌고 원술과 회음 석정石亭에서 싸우니, 교대로 이기고 졌다. 도겸의 옛 장수 조표가 하비에 있었는데, 장비가 그를 죽이고자 했다. 조표의 무리는 진영을 굳혀 스스로 지키며, 사람을 보내 여포를 불렀다. (선주전 영웅기)
(당초) 여포가 서주(徐州)에 들어왔을 때 원술에게 서신을 보냈다. 원술이 답서를 보내 말했다.(중략) 여포가 이 서신을 읽고 크게 기뻐하며 마침내 하비로 갔다. 여포가 물과 뭍으로 동쪽으로 내려와 하비 서쪽 40리 되는 곳에 도착했다. 유비의 중랑장 단양(丹楊)사람 허탐(許耽)은 밤을 틈타 사마 장광(章誑)을 여포에게로 보냈다. 그가 말했다.
“장익덕(張益德-장비)이 하비상 조표(曹豹)와 서로 다투어 익덕이 조표를 죽이니 성중에 대란이 일어 서로 믿지 못합니다. 단양병(丹楊兵) 천 명이 서쪽 백문성(白門城) 안에 주둔하고 있는데 장군께서 동쪽으로 왔다는 말을 듣고 모두 펄쩍 뛰며 다시 살아난 듯이 기뻐하고 있습니다. 장군의 군사들이 성 서문(西門)으로 향하면 단양군(丹楊軍)이 즉시 성문을 열어 장군을 안으로 들여보낼 것입니다.”
이에 여포는 밤중에 진격하여 새벽에 성 아래에 도착했다. 날이 밝자 단양병이 성문을 열어 여포의 군사들을 안으로 들여보냈다. 여포는 성문 위에 앉아 보병과 기병으로 불을 놓아 익덕의 군을 대파하고, 유비의 처자식과 군자(軍資-군자금), 부곡(部曲), 제장들의 가구(家口-가족)를 노획했다.(여포전 영웅기)
(이렇게) 여포가 하비를 취해, 장비는 패주했다. 유비가 이를 듣고, 병사를 이끌고 돌아와, 북으로 하비에 이르니, 병사가 흩어졌다. 흩어진 병사를 거둬 동으로 광릉을 취해, 원술과 싸우나, 다시 졌다. (선주전 영웅기)
선주전, 영웅기 기록을 종합하면 대략적으로 다음과 같은 정황이 포착된다. 도겸의 구장이자 도겸의 직속병사들인 단양병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조표는 서주호족들과 백성들, 공융같은 주변명사의 추대를 받고 서주를 차지한 유비가 들어오자 이들과 불편한 관계가 되었다. 그러던 중 유비가 원술과 싸우러 하비를 떠난사이 마침내 유비의 장수 장비와 서로 대립하여 성내에서 무기를 들고 싸우게 되었다. 이에 조표는 여포를 몰래 불러 영접하려 했고 때마침 여포 역시 유비와 한달간 싸우면서 승패를 가리지 못해 고전하던 원술이 유비의 뒤를 쳐주면 협조하겠다는 편지를 보낸것을 보고 기뻐하면서 하비로 이동했다. 하비로 이동하던 중 여포는 조표가 이미 장비에게 죽었고 남은 단양병들이 하비성 서쪽 백문성(白門城) 안으로 밀려 있다는 사실을 단양병들에게 듣게 된다. 수세에 몰려 있던 이들은 여포가 온 것을 알고 살았다며 환호한 다음 그 성문을 열고 여포를 맞이하였고 단양병 잔당들을 진압하던 장비는 이들과 여포군이 합세하여 공격하자 결국 패주하고 만다...정도가 될 수 있겠다.
1.4. 연의
『삼국지연의』에서는 조표의 딸이 여포의 둘째 부인으로 설정되어 있다.[4]
조조가 서주를 처음 침공할 때 등장, 하후돈과 맞서 싸웠으나 갑자기 바람이 크게 불고 모래가 날리는 바람에 무산되었다.
이후 서주성을 지키던 장비의 술 강요를 거절하다가 장비의 노여움을 사서 곤장형에 처해지고, 이에 "내 사위 여포의 체면을 봐서라도 용서해 주시오."라고 사정을 빌지만 오히려 장비는 "원래는 진짜로 때릴 맘이 없었는데 네놈이 여포를 들먹이면서 협박하니 때려야겠다! 네놈을 때리는게 여포를 때리는 거랑 같다!"이렇게 붙는 불에 부채질 하는 격이 되어 주사를 부리는 장비에게 채찍으로 실컷 얻어맞았다. 이에 앙심을 품은 조표는 장비가 술에 곯아 떨어진 틈을 타 사위인 여포를 성안으로 끌어들여 장비를 제거하려 했다. 난전 중에 도주하던 장비를 죽이려고 쫓아갔지만 한 창에 끔살당한다. 어찌되었던 연의상으로는 충분히 배신할만한 명분이 주어진 셈이라 소소하게 수혜를 받은 셈이다.
1.5. 미디어 믹스
1.5.1. 삼국지톡
1.5.2. 삼국지 시리즈
대대로 원작의 행위에 괘씸죄가 적용된 듯 처참한 능력치를 달고 나와 삼국지 1부터 삼국지 6까지 '''능력치 총합 최하위권'''을 달린다.
삼국지 2에서는 특이하게도 '''지력 13/무력 19/매력 15'''로 유일하게 '''모든 능력치가 10대'''를 기록하고 있어 일부 계층에서 '''컬트한 인기'''가 있었다. 그런 면에서는 백하팔인 기믹의 시초급. 어느 정도냐면, 조표를 등용하러 가는데 동탁조차 조표 등용하러 간다는 것에는 '''무조건 통과'''시켜준다. 동맹국 이외의 야망이 높은 제후인 동탁, 원술, 원소 같은 군웅들은 사신 체포에만 혈안이 되어 있어 거의 목숨 걸고 달려야 하는데, 조표 등용한다고 하면 아무도 안 막는다. 그리고 조표를 군주로 삼으면 휘하 장수들의 충성 관리가 전혀 안 돼 그 해 안에 모든 장수들이 떠나서 조표 홀로 남는 진풍경까지 연출된다. 당연하지만 조표를 군주로 삼았다가 전투에서 패하고 적에게 잡혀버리면 당연히...
사실 연의 내에서는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하후돈'''과도 맞장을 뜬 전력도 있는 인물이고[5] 『정사』에는 도겸군의 상장으로 기록된 인물인데 10대의 무력은 너무나 저평가된 느낌이 있었다. 그 때문인지 3부터는 '''무력만은''' 대폭 상향되기 시작해서 2000년대 이후의 시리즈에서는 무력 6~70대까지 찍고 있다. 다른 능력치도 상당히 상향되어(그래봤자 낮지만) '''오히려 눈에 띄지 않는 장수가 되어버렸다'''.
삼국지 3에서 무력이 52로 대폭 상승했지만 나머지 능력치는 전작과 비슷하다. 안습. 장개와 더불어 작적이 잘 걸리는 배신쟁이로 나온다. 구호탄랑을 발동시키면 열에 아홉은 통한다. 한바탕 깽판 지기고 튀는데 태수가 병력이 많은 상급에서는 큰 위력은 없고, 초급에 태수와 병력이 엇 비슷하면 가끔 구호탄랑이 걸려서 독립에 성공하는 경우도 있다. 도겸군에 무관이래봐야 차주, 장개, 조표 등 배신 잘 땡기는 무관들이라....
삼국지 8에서의 능력치는 무력 69/지력 36/정치력 28/매력 28. 특기는 꼴랑 도발만 있고, 전법은 LV 1 난격, LV 2 기습을 보유하고 있다.
삼국지 9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61/무력 73/지력 35/정치력 28. 병법도 돌파 하나 있는 쓰레기지만, 이래 봬도 도겸군에서는 무력 원탑이고 통솔력, 지력까지 고려해도 도겸군 무관 중에서 장패에 이은 2인자다.
삼국지 10에서는 주량이 '소량'으로 설정되어 있다. 웬만한 찌질이 무장들은 일도 못하는 주제에 술만 많이 먹는다는 의미인지 거의 주량이 대량인데, 조표는 장비와의 일 때문에 주량이 소량으로 설정된 것. 능력치는 통솔력 55/무력 70/지력 34/정치력 23/매력 26에 특기가 4개나 돼서(치안, 훈련, 반목, 반격) 초반의 삼국지 시리즈에서의 홀대에 비하면 괄목할 만한 발전을 했지만, 무력 의존 특기는 일기토 특기 1개고 나머지 능력치가 워낙 구린지라 특기는 있으나 마나.
삼국지 11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54/무력 69/지력 32/정치력 21/매력 26으로, 무력이 다시 70 미만으로 떨어졌다. 특기는 당연히 없다.
삼국지 12에서의 일러스트는 장비가 술을 권유하자 못 마신다고 손을 가로저으며 거절하는 모습으로 나온다.
삼국지 13에서의 능력치는 전작과 똑같으며 특기는 연전 1 단 하나. 전수특기도 당연히 연전이며 전법은 기동약화.
삼국지 14에서의 능력치는 통솔 55, 무력 69, 지력 32, 정치 21, 매력 26으로 통솔력이 전작에 비해 1 상승했다. 개성은 절감, 소심, 동요, 주의는 명리, 정책은 정령철저 Lv 2, 진형은 어린, 방원, 전법은 제사, 매성, 친애무장은 없고 혐오무장은 장비다.
1.5.3. 진삼국무쌍
PSP판 2nd Evolution에서 부장으로 출현하였는데, 통솔 요구치가 가장 낮은 1 무장으로 출현하지만 '''절륜한 성능비'''로 쓸만한, 아니 거의 필수요소급 부장으로 자리매김하였다. 그만큼 다른 1 무장들과 달리 키우는데 꽤 공을 들여야하며, 레벨 9까지는 아무런 능력치도 없어 뻥카드가 아닌가 의심스럽지만 레벨 10을 찍는 순간 대갈+[6] 와 난무강화[7] 가 붙어 나온다. 여기서만큼은 조표의 존재감은 꽤나 크다.
1.5.4. 화봉요원
진궁의 설득으로 도겸이 죽고 난 뒤에 서주를 여포에게 넘기려고 했으나 미축이 선수쳐서 도겸이 유비에게 서주를 넘기기로 했다고 발표하면서 실패했다. 서주가 유비에게 넘어간 이후로도 여포와 커넥션을 이어가며 첩자 역할을 한다. 결국 서주가 여포에게 넘어가지만 정작 조표는 난리통에 쥐도 새도 모르게 잔병에게 살해당한다.
1.5.5. 창천항로
그야말로 간지의 정반대를 달리는 안습 중의 안습으로 작중 킹 오브 안습, 조연 오브 조연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잠깐 등장했다가 바로 장비에게 죽는데, 장비가 멱살을 잡았는데 너무 세게 잡아서 죽었다. 그리고 진궁이 이걸 구실로 장비를 죄인으로 몰아붙여 장비는 도망치고 여포측에게 서주를 빼았긴다. 한마디로 배신이고 여포와 내통이고 뭐고 없이 그냥 장비가 너무 힘이 세서 재수없이 죽었을 뿐이다. 서영도 허무하게 죽기는 했지만 그래도 눈부신 활약은 하고 죽었는데 조표는 그저 안습일 뿐이다. 그의 딸도 나오는데 조원. 연의대로 여포에게 시집가 있다.
1.5.6. 삼국
[image]
배우는 조흠. 한국 더빙판 성우는 백승철.
15회에 등장하는데, 연의와 거의 같지만 여포의 장인이 아닌 사촌동생으로 나온다. 여포의 부인은 초선 밖에 등장하지 않기 때문에 설정을 바꾼 것으로 보인다.
1.5.7. 같은 꿈을 꾸다 in 삼국지
조조, 유비, 원소가 연합해 원술을 공격한다. 이때 조가의 힘을 줄이고 하비를 온전히 손에 넣기 위해 유비가 조표의 사병에 해당하는 단양병을 병사로 소집하는데, 진궁이 이를 이용해 전투 도중에 조표와 단양병과 내통하도록 만들고 조표는 허탐을 설득해 전투 도중에 유비를 사로잡도록 만든다.
1.5.8. 삼국전투기
단행본에서는 베르세르크의 감비노를 패러디한 캐릭터라고 밝혔지만 어째 생긴 것은 코르커스와 더 유사하다. 우이 전투 편에서 처음 등장하며 우이 전투 (5)편의 타이틀 컷을 차지했다.
우이 전투 (7)편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서주의 하이에나라고 자칭하며 호기롭게 장비에게 덤비며 반란을 일으켰지만 일합에 그대로 사망한 것으로 묘사된다. 안줏거리도 안 됐고 반란도 제대로 된 녀석이 해야 반란 같다는 장비의 평은 덤.
1.5.9. 요코야마 미츠테루 삼국지
[image]
게임에서의 이미지와는 달리 '''문관'''으로 나온다. 행적은 연의랑 동일하게 장비의 술주정을 말리다가 얻어맞고, 이에 앙심을 품고 여포를 서주성에 불러들였다가 장비한테 끔살당한다. 이때 여포가 사위라는 설정은 존재하지 않았다.
1.5.10. 카츠마타 토모하루 삼국지
술먹고 난동부리는 장비에게 채찍질을 당하게 되자 소패성의 여포를 선동하여 장비를 치게 한다. 원작에서는 여포가 단순히 장비를 혼내주려 한 것이었는데 여기에 진궁이 아예 서주성을 먹으라고 부추겨 여포가 서주 전체를 장악하게 된다. 여기에 조표는 복수를 하겠다고 장비를 쫓아가지만 술에 취한 장비에게도 상대가 되지 않아 목숨을 잃는다. 더빙판에서는 조표의 죽음이 편집되었다.
2. 삼국시대 위나라의 황족
2.1. 생애
曹彪
(195년 ~ 251년)
조조의 아들로 자는 주호(朱虎). 어머니는 손희(孫姬)이며, 동복 형제로 임읍상공자 조상(曹上), 강상공자 조근(曹勤)이 있었다.
216년에 수춘후로 봉해졌고 221년에 이복형 조비가 황제에 즉위하자 작위가 올라 여양공이 되었으며, 222년에 익양(弋陽)왕에 봉해졌으며 다시 오(吳)왕으로 옮겼다. 227년에 조예가 즉위하자 백마(白馬)왕으로 옮기고 231년 겨울에는 수도 낙양에 입조했다가 232년에 초왕으로 옮겼다.
그러나 당초에 입조했을 때 금령을 어겨 233년에 유사가 상주해 조서를 내려 3현, 1,500호를 깎았고 234년에 대사면 때 회복되었는데, 조곤도 금령을 어긴 것으로 인해 조표와 같은 해에 삭봉당했고 같은 해에 회복되었다. 239년에 5백 호가 늘어 3천 호가 되었다.
조방이 즉위하고 249년에 고평릉 사변이 일어난 뒤에 태위 왕릉과 연주자사 영호우가 모의해[8] 조표를 황제로 맞아들이고 수도를 허창으로 옮기려고 했다. 영호우는 장군 장식(張式)을 파견해 조표와 왕래했지만 모의가 발각되어 사마의는 왕릉을 토벌하러 친히 수춘으로 향했다. 이때 왕릉은 사마의에게 스스로 나아가 연행되어 가던 도중 항 땅에서 약을 먹고 자결했으며, 이미 죽은 영호우와 함께 시체가 전시되었다.
사마의는 수춘에 입성해 왕릉과 영호우의 삼족을 멸하고 일을 철저하게 규명해서 조표에게 죽음을 내렸다. 조표는 자결했고 조표의 왕비와 아들들은 서인으로 면직되어 평원으로 유배되었으며, 또 조표의 관속 이하 감국알자는 조표의 뜻을 알고서도 간언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모두 주살되었다.
이전에 주건평(朱建平)은 조비가 오관중랑장이 되었을 때 초청을 받아 여러 사람의 수명을 예언했는데, 이때 주건평은 조표에게 '당신은 번국에 웅거하다가 57세에 이르면 병란의 재앙을 당할 것이니 마땅히 이를 막아야 합니다.'라고 예언했다. 조표가 왕릉의 일에 연루되어 자결했을 때 나이가 57세였고 결국 예언이 적중했으며, 조모가 즉위하고 254년에 조서를 내려 조표의 세자 조가(曹嘉)를 상산진정왕(常山眞定王)에 봉했다.
2.2. 미디어 믹스
2.2.1. 삼국지 시리즈
삼국지 14부터 등장하며 능력치는 통솔 55, 무력 49, 지력 58, 정치 41, 매력 68이며 일러스트는 문관복으로 등장하면서 오른손을 허리에 댄 채 왼손을 펼치면서 이야기를 하려 하고 있다. 개성은 시상, 문화, 경솔, 주의는 패도, 정책은 방원강화 Lv 2, 진형은 방원, 전법은 혼란, 매성, 친애무장은 영호우, 조식, 혐오무장은 형 조비다. 그래서 아버지인 조조가 처형되고 조비가 군주가 될 경우 조조의 딸인 조절과 함께 섬기지 않고 하야해버린다.
2.2.2. 삼국전투기
기동전사 건담 AGE의 제하트 가레트로 패러디 되었다. 조조가 "누구냐 넌?"이라고 물으니까 아버지 아들이라고 뻘쭘하게 대답하는 연출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