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봉
劉封
(? ~ 220)
1. 개요
후한 말과 삼국시대 촉나라의 장수. 유비의 양자.
2. 정사
본래 성은 구(寇)씨였지만 유비의 양자로 입적 뒤[1] 성이 유씨가 되었다. 다만 유봉이 완전히 유씨와 무관한 것은 아니며, 장사(長沙) 유씨(劉氏)의 (외)조카라는 기록도 병기되어 있다. 즉, 유봉 역시 모계로는 유씨의 혈통을 이은 것으로 보이며 당시는 외가에 들어가서 씨를 잇는 것 역시 드문 일은 아니었으므로 유비가 양자로 들여 유씨로 삼은 근거가 있었던 것이다. 또한 장사 유씨는 광무제, 경시제를 배출한 가문이므로 혈통적으로는 전한계 황족의 후예인 유비보다 후한계 왕족, 즉 헌제 등 당시의 황족에 더 가까울 가능성이 있다.
참고로 유봉의 이름인 봉(封)은 유비의 친자 유선의 선(禪)과 더불어 봉선(封禪). [2] 봉선은 천자(황제)의 제사였는데 여기서 두 아들의 이름을 이렇게 지은 유비의 야심을 알 수 있다는 이야기가 있다. 물론 유비가 정말 봉선에서 이름을 지었다는 근거는 없다. 사실 유봉은 양자 출신이므로 애초에 봉은 유비가 지어준 이름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정사에서는 유봉이 먼저 양자로 들어온 뒤 유선이 출생하였으나, 연의에서는 순서가 바뀐 것도 미묘한 일이라며 유비가 개인적인 야심으로 아들의 이름을 지어줬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연의에서 순서를 바꾸었다고 주장하는 자도 있으나 역시 근거는 없다. 애초에 유비는 이미 어린 시절에 황제가 되고 싶다는 포부를 내비친 적이 있으므로 새삼스럽게 이걸로 깔 필요가 있을가 싶다.[3]
유비의 입촉 당시 20여 세의 나이로 가는 곳마다 승리를 이끄는 등 여러 가지로 군공을 세웠고 맹달과 함께 상용을 점령하고 수비하게 된다. 이때 유비의 행동이 유봉에게 군공을 주기위한 뜻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유비가 맹달이 혼자 힘으로 상용을 점령하지 못할 것을 걱정하여 유봉을 보낸 것이다.
하지만 맹달과 화합하지 못해 서로 다투었고 이로 인해 관우를 제대로 지원하지 못하는 원인이 된다. 결국 맹달의 군악대를 몰수하고 또 자치통감에 따르면 유봉이 맹달을 침해하고 능멸하니 맹달이 부곡 4천가(家)을 들고 위나라에 투항하게 되고 상용을 공격하는데, 맹달은 유봉과의 불화로 위에 투항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유봉을 회유하려 들었다.[4] 유봉은 일단 맹달을 공격하려 했지만 신의가 배반하여 전세가 기울어짐을 감당해내지 못하고 도망쳤다.
성도로 도망쳐온 유봉은 맹달을 욕보인 것을 문책당했으며 또 과거에 관우가 위기에 처했을 때 원군요청을 거절한 것도 문책당했다. 또한 제갈량은 유비가 죽은 후 유봉이 강맹(剛猛)[5] 하여 제어하기 어려운 인물이라 보고 후환이 될 것을 걱정했고 유봉을 제거할 것을 권한다. 결국 유비는 유봉을 자결케 한다. 유봉은 죽을 때 맹달의 말을 듣지 않았던 것을 한스러워 했다 한다.
부연하면 관우가 상용에게 원군을 요청한 시점은 우금의 번성 7군 수몰 직후고 서황에게 패배했을때도 아직 면수를 경계로 양양을 굳건히 포위하면서 수군으로 위나라의 도하를 막고 있던 시점이었다. 당시 상용 동쪽인 남향군은 관우에게 태수가 사로잡혀 행정적 공백기 상황이었고 따라서 전군을 보내지 않더라도 병력을 어느 정도 보냈다면 관우에게 도움이 되었을것이다.[6] 서황과의 전투를 보면 서황이 물량도 없고 병력도 신병이라 관우 상대로 싸우지 못하다가 조조가 주개, 은서등 12영의 병력을 몰아주고 나서야 싸웠는데 이때 급하게 동원한 관우의 병력은 불과 보기 5천 명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면수를 장악하고 있다는 이점이 있어서 양양성은 번성포위 와해 이후에 오히려 완전히 관우가 포위해 외부와 소식이 끊겼고 육손이 촉의 병력을 차단한 지점은 형남 지역이지 상용지역이 아니다. 애당초 육손이 상용까지 갔다는 기록도 없고 거기까지 갈 수도 없다. 당시 육손은 형주 남부의 촉나라 세력을 정리하는데도 바빴다. 즉 번성 7군 수몰 단계에서 아직 위나라 병력이 완전히 충원되지 못한 시점에 추가 병력이 왔다면 관우의 생사는 모른다...가 내놓을수 있는 답변인 셈.[7]
유비는 유봉이 죽었을 때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유비와 유봉은 입양관계긴 해도 부자지간이었는데, 상식적으로 마음에 들지도 않는 젊은이를 자신의 양자로 삼을 사람은 없을 것이므로 유비 역시 유봉을 양자로 삼을 당시에는 유봉을 상당히 전망있게 보고 호감을 가졌을 것이고 유봉이 주변인과 반목하는 사납고 굳센 성격을 가지고 있어도 자신을 배신하지는 않았다는 것도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한 때는 그렇게 마음에 들어해서 자신이 아들로 삼은 자가 자신의 양자라는 자리가 정치적으로 작용해 목숨을 잃어버리는 원인이 되었으니 실로 씁쓸했을 것이다.
유봉의 아들 유림은 촉에서 아문장군까지 지내며 멸망때까지 살아남았는데 그 후 하동 지방으로 이주했다. 참고로 맹달의 아들 맹흥도 동시에 부풍으로 이주한다.
3. 평가
최후를 보건대 유봉으로서는 유비의 양자로 들어온 것이 결과적으로 불행이 되었다. 물론 상용을 잃고 관우를 지원하지 않아 전사하게 만든 책임은 있었지만 후계자 문제가 얽히면서 죽음에 이르렀으니....[8]
진수의 평가는 매우 짜다. 팽양, 위연, 양의, 이엄 등과 한 권으로 묶어놓고, 자신들이 화를 초래했다는 공통된 평을 내린다.
연의에서는 양자 시점이 유선이 태어나는 장면보다 늦게 기술되어서 순수한 의리와 인연으로 맺어지는 형태이지만 실제로는 유선 탄생보다 이른 시기이다. 정황상 후계자로 영입되었다가 유선이 태어나면서 새 된 케이스로 볼 수도 있다. 이 때문에 이후 유봉의 입지는 굉장히 애매해진다. 정식 후계자가 태어나기 이전에 입적한 양자. 유선이 후계로 서기 위해서는 꼬투리를 잡아서라도 정리를 해야하는 위치였다.[9]
다만 이것이 전적으로 유비의 잘못이나 실수라고 보기는 어렵다. 유봉을 양자로 들인 207년 무렵 당시 유비는 이미 40대 중반으로 나이가 많아 아들을 다시 얻는다는 보장이 없었고, 설사 얻는다해도 당시 유비의 세력이 유표의 지원으로 근근이 꾸려나가는 소규모 군벌 수준이라 성년까지 무사히 성장한다는 보장이 없었다.[10] 여러모로 어려웠던 사정을 생각하면 유봉을 양자로 들인 것은 보험으로 나쁘지 않은 선택일 수도 있었다. 문제는, 이후 유비의 새로 태어난 유선이 후계자로 낙점되면서 유봉의 입지가 사실상 제거존재가 되버린 것이다.
만약 유선에게 약점이 전혀 없었다면, 즉 유봉이 있더라도 유선이 왕위를 계승하는데 딱히 걸릴 것이 없었다면 양자라는 약점이 뚜렷한 유봉의 처지가 좀 나아졌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유선 역시 친아들이라곤 해도 적자(嫡子)가 아닌 서자(庶子)이며 나이가 어리다는 약점이 있었기 때문에 더 문제가 되었다.[11] 양자라고는 해도 이미 장성했고 개국과정에서 공적이 있는 유봉은 유선의 제위 계승에 방해물이 되었다.
하지만 유비 본인은 유봉을 충성심있는 부하로 여겼다. 유비는 유봉에게 상용을 맡기며 중용하였다. 상용은 땅 크기는 작지만 익주와 형주를 잇는 요충지이며, 독립하기는 어려워도 어느 정도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할 만한 곳이기 때문에 유봉에게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면 죽음은 면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유봉과 맹달의 마찰, 그리고 관우의 죽음과 상용의 상실이 연쇄적으로 일어나는 등의 책임이 매우 컸고 제갈량의 정치적공격에 덧붙여 유비의 아들이라는 특수한 신분 때문에 결국엔 죽음에 이르게 되어버렸다.
유능한 지휘관이지만 유연하지 못한 처신술 때문에 목숨을 잃은 케이스라고도 볼 수 있을것이다. 관우는 물론이요, 상용을 잃었다는건 용서하기 힘들다.[12] 상용을 잃은건 자신이 맹달과 신탐, 신의 등과 사이가 나빴기 때문이다. 여기에 후사문제까지 꼬이면서 반드시 죽여야 하는 인물 1위에 올라버렸다. 유봉 본인이 불러온 비극인건 맞다. 애초에 자기가 형주에 지원을 가지 못한 이유는 맹달과 사이가 나빴기 때문에, 신탐 형제를 잘 아우르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을 방치하고 갈 순 없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잘못한것을 처벌하는게 있어 공정성을 중시하던 유비-제갈량 정권에서 군주의 가까운 혈족이라고 하여 처벌하지 않는다는것은 법치를 어기는 일이었을 것이다. 당장 제갈량이 멀지 않은 미래에 크나큰 삽질을 저지른 본인 절친이자 촉한 개국공신의 아우를 죽인것만 봐도 그렇다. 거기다 유봉이 상용에서 저지른 삽질이 마속이 가정에서 저지른 삽질보다 덜하다고 하기도 어렵다.
유비가 인재를 회유하는 능력이 뛰어나다는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신탐이 성도로 가족을 볼모로 보내고 유비에 협력한 댓가로 받은 지위가 정북장군+상용태수+위향후 이다. 유비의 숙장인 조운이 몇 년 뒤인 223년에 받는 관직이 정남장군이다. 그해에 바로 진동장군으로 진급했고, 즉 상용의 터줏대감이었고 촉에서 핵심인물로 취급되어 대우받는 인물이란 것이다. 유봉이 엎드리는 한이 있어도 자기편으로 삼아야하는 인물이란것이다. 하지만 유봉은 이들을 잘 규합하지도 못하고 이탈하게 만들어 버렸다.
유봉의 상용에서의 지위는 맹달을 지원하는 포지션이었으나 오히려 유봉이 맹달의 군악대를 몰수하는 돌출행동을 보이는 등 악화일로를 걸었다는 것도 변호거린 안된다. 상용이 불안정해서 관우를 구할수 없다는 유봉+맹달의 핑계의 원인은 그 당사자들의 사이가 나빴다는게 근본적인 것이다. 토사구팽, 후계자 문제로 퉁치기에는 상용에서 싼 똥이 너무 컸다. 후계자 문제는 연쇄파급이고. 어쩌면 이전의 원담처럼 본인이 점점 쩌리화가 되가는 상황에서 이런 놈들한테까지 굽혀야 되나 하는 자존심이나 자신의 힘과 권위가 밑보이면 안된다는 불안감에 더 고자세를 취한 걸수도. 유봉이 억울해 보이는건 같은 위치에 있던 조창과 같은 처지였기 때문이기도 한데 조창이야 말로 잠깐 형과 왕위를 겨뤄보겠다는걸 표출했을 뿐 국가한테는 아무 잘못이 없다.
유봉을 제거를 권한 제갈량이 비판받는 부분이 있다. 제갈량의 법가적 태도가 드러나는 부분이라고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을정도. 하지만 이러한 결정을 내린 것은 나이많은 아들이 아닌 어린 아들을 후계자로 밀었다가 내분으로 망해버린 원소의 전례를 생각하면, 유봉을 내버려둘 경우 촉한은 유봉파와 유선파로 나뉘는 사태를 우려한 것으로 생각된다.[13] 전성기의 촉한보다도 오히려 컸던 세력인 원소도 후계 문제로 원담과 원상이 서로 대립하다가 세력 자체가 박살난 것을 보면 유봉을 죽인 것이 극단적인 결정을 했을지는 몰라도 국론분열은 최소한 막은 셈. 거기에 맹달의 말처럼 가뜩이나 유선이 태자에 올라 유봉의 처지가 위태로운 상황에서 형주, 상용 상실과 관우의 전사 등 유봉이 책임질 문제가 상당히 컸다. 어떻게 보면 뒤로 가면 후계자를 정해놓고도 애매한 태도를 취해서 난리통을 키워놓은 손권에 비하면 정말 양반이다.
하지만 유봉이 제위에 위협이 된다는 주장은 현실성이 없다. 비록 유선이 적자가 아니었다고는 하나 유비에게는 적자가 없었고, 이미 성년을 눈앞에 둔 시점이었는데다가, 유비가 당시 이미 나이가 많아 아이를 가지는데 불리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과부를 정실로 맞아들인 것을 보면, 유비의 후계 구도는 이시점에서 이미 확고했던 것으로 보인다.
설령 유선이 어떠한 이유에서든 후계를 낳지 못하고 요절한다 하더라도 유봉은 제위에 오를 수 없었다. 차남 유영과 유리가 있었기 때문. 중국사에 양자가 친자를 제치고 제위를 차지하는 일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대부분 삼국시대 이후, 즉 북방민족의 침입 후 그들의 영향을 받은 다음의 일이다. 당대 형제간의 분쟁으로 유명한 원씨 일가나 조조, 손견, 유표 등의 경우에도, 이는 어디까지나 친아들간의 대립이었지 양아들 따위가 끼어들 여지는 없었다. 하물며 정통성 즉 '우리는 유씨의 후손이 황제다'라는 것이 최대의 무기였던 촉한 왕조에서 이는 도저히 가능한 일이 아니다. 위나라에서 조예의 양자였던 조방이 제위에 오를 수 있었던 건 조예의 친아들들이 전부 요절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처럼 피치 못한 사정에도 불구하고 조방은 제위 기간 내내 정통성 문제에 시달렸다. 그래서 고평릉 사변이 발발하고 사마씨에게 권력을 몽땅 잃고 결국 폐위된다.
또한, 조식의 예에서 볼 수 있듯. 후계 문제에 관련된 숙청이라면 유봉을 지지하는 세력이 있고, 이들이 같이 처벌되는 것이 상식적인데, 유봉의 처형에서는 그러한 기록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결국 유봉의 속마음이 어쨌는지는 본인만이 알 것이나, 설령 역심을 품었다 할지라도 현실적으로는 도저히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제갈량이 걱정한 것은 아마도 좀 다른 문제였을 것으로 보인다. 전한시절 오초7국의 난 이후로 황제의 가까운 혈족들에게는 명예는 주되 실권을 주지 않는 방식으로 이를 회피하려 했고 또 그럭저럭 성공적이었지만,[14] 대신 이런 제약에 해당하지 않는 외척들의 발호는 피할 수 없는 문제였다. 기록에 의하면 제갈량과 유비가 외척의 발호에 대해 상당히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우려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훗날의 일이지만, 유선의 황후로 이미 사망한 장비의 딸들을 연달아 들여보낸 것을 보면 이런 부분에 대한 대책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런데 정작 유봉의 입지가 바로 외척과 유사하다는 것은 문제였다. 차기 황제의 웃어른이어서 섣불리 건드리지 못하면서도, 황위 계승권은 없어서 관직에 제약이 없다는 점은 확실히 위험요소이다. 이 위험성이 현실화된 경우가 바로 위나라의 조진, 조상 부자인데, 제갈량의 라이벌격인 사마의가 위에 언급된 고평릉 사변을 통해 제거하고는 오히려 위나라를 집어삼켰다는 것이 아이러니.
결과적으로 후대에서는 유선이 암군이었기에 나름대로 능력을 검증받고 커리어가 있는 유봉이 유비의 후계자였다면 어땠을까, 하는 얘기도 종종 나오지만 사실 유선은 말년을 제외하고는 '''40년'''을 유능한 신하들의 서포터 하에 무난히 정국을 이끌어 간 케이스이다. 무엇보다 유선은 성격 자체는 무난하고 유순한 편이었기에 강맹하다는 평가를 받은 유봉보다 유비와 제갈량이 확립한 '''한실 부흥의 이데올로기 하에 신권과 황권이 절묘하게 권력 균형을 달성'''한 촉한 특유의 정치 시스템에 훨씬 더 적합한 유형의 인물이다.
반면 유봉은 무예가 있고, 기력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났지만 익주와 형주를 연결하는 최요충지 상용을 진수하는 막중한 임무를 부여받고도 고작 군악대 따위를 두고 맹달과 반목을 겪다 관우 구원에 불응하고 맹달을 이탈하게 만들었으며, 결국엔 상용을 상실한 것만 보아도 지도자로서의 정치력이나 리더십, 성품에 하자가 없다고 보긴 힘들기 때문에,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유선보다 반드시 나았을 것이라고 보기도 어렵다.[15] 차라리 연의에서 묘사된 대로 유선을 지지하는 관우에게 보일 의리가 어딨냐는 맹달의 설득에 잠시 미혹돼 원군 요청을 거절한 것은 인간적인 측면에선 어느 정도 이해라도 갈 수 있지만 실제 역사상에선 걍 전적으로 유봉의 삽질이 맞다.
4. 연의
연의에서는 관우가 "왜 이미 자식이 있는데 또 (양)아들을 두십니까"라고 했지만[16] 유비는 개의치 않았다. 그리고 이것은 관우에게 있어 재앙의 불씨 중 하나가 되었다.
연의에서는 양아들이 되어 유비 밑으로 들어가는 것까진 동일하다. 하지만 한중 공방전에서 조조의 넷째 '''친아들'''인 조창, 일명 "황수아"[17] 와 라이벌 구도가 서게 된다. 다만 이 구도를 만든 건 조창이 아니라 조조다. 유봉이 선봉장으로 나오니까 "가짜 아들이 어디서 설쳐, 우리 황수아한테 발리기 전에 돌아가!"라고 모욕을 준 것.[18]
이후 그럭저럭 활약을 한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초반에는 관평과 주로 짝을 이뤄 활약했으나 후반에는 일시적으로 맹달과 짝을 이뤘다.
그러나 맥성에 고립된 관우의 구원 요청을 거부하는 바람에 자신의 운명도 갈리게 된다. 정확히는 요화가 밤낮을 달려 구원을 요청하러 오자 유봉은 꽤 고심을 했다. 하지만 맹달이 "네가 관우를 숙부로 본다고 해도 관우가 너를 조카로 봐 줄까? 네가 양아들로 들어가는 걸 거부했는데?"라며 꼬드기는 바람에 모호한 까닭을 대서 요화를 쫓아낸다. 결국 관우가 죽음을 맞이하자, 유비는 조조가 죽고 조비가 뒤를 이어 위나라가 혼란스러운 틈을 타 동오를 쳐서 관우의 복수를 하려고 한다. 이때까지는 유봉에게 목숨을 부지할 기회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허나 유봉은 별다른 행동을 보이지 않았고, 요화는 먼저 내부의 배신자인 유봉과 맹달을 처형하라고 간언했다. 그 때문에 유장 밑에 있던 시절부터 맹달과 한편이었던 팽양이 맹달에게 알리려다 실패하자,[19] 맹달은 먼저 위나라로 도망갔다. 맹달은 도망가자마자 유봉에게도 배반을 권유했지만 유봉은 맹달의 권유를 거절했다. 이 즈음에서 유비는 유봉부터 죽이려고 했지만, 제갈량은 "유봉에게 맹달을 잡아오라고 명령하세요. 실패하더라도 유봉을 죽일 수 있습니다."라고 간언했다. 하지만 유봉은 실패했고, 결국 그 노력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유비의 명령에 의해 사형당하게 된다. 사형이 언도된 후 내심 괴로워하는 유비에게 한 신하가 유봉이 실은 관우를 돕지 못한 것을 후회하고 있었고, 맹달의 배반 공작에도 넘어가지 않았다고 하며 용서해달라고 말하자 유봉의 사형 집행을 중지하라고 한다. 하지만 때는 이미 늦어 형이 집행된 후였다. 유비는 유봉에겐 큰 죄가 없고 실질적인 배신자는 맹달이라는 걸 뒤늦게 알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판본에 따라 다르지만 최후에 노력하다가 배신자란 오명을 씻지 못하고 죽는 것은 대부분 동일하다.
삼국지연의에서 관평을 양자로 설정한 것은 유봉과 대비를 이루기 위해서라는 설이 있다. 같은 양자임에도 결과적으로 의리를 지키지 못해 비참한 최후를 맞는 유봉과 대비시켜서 관평의 의리를 돋보이게 하려는 극적 장치라는 것.
5. 미디어 믹스
- 유봉/기타 창작물 항목 참조.
[1] 관평은 연의에서 관우의 양아들이라고 나왔지만 실제 정사에서는 친아들이었다. 그러나 유봉은 정사에서도 양아들이 확실하다.[2] 흙을 쌓아 올려 하늘에 지내는 제사를 봉(封), 땅을 깨끗이 하고 산천에 지내는 제사를 선(禪)이라 하는데 중국의 역대 제왕이 정치상의 성공을 천지에 보고하기 위해서 태산에서 행한 국가적 제전이다. 이 봉과 선은 원래 별개의 유래를 가지는 제사였다가 양자를 합쳐 봉선이라는 이름으로 같이 지냈다.[3] 사실 이런 사례는 장제스 일가에서도 찾을 수 있다. 장제스의 맏아들은 징궈(經國), 둘째 아들은 웨이궈(緯國)인데 經과 緯가 서로 통한다. 장징궈의 적자들은 이름이 샤오원(孝文)·샤오장(孝章)·샤오우(孝武)·샤오용(孝勇)인데 文-武, 文-章, 武-勇이 서로 통하며, 서자인 쌍둥이 형제의 이름은 샤오옌(孝嚴)·샤오츠(孝慈)인데 嚴과 慈도 서로 통한다.[4] '족하와 한중왕은 길에서 만난 사람일 뿐으로 혈육 관계도, 군신 관계도 아닌데 족하의 권세와 지위는 높습니다. 아두가 태자가 된 이래 식자들은 족하의 존재를 저어합니다. 사사로운 원한이나 감정들도 돌아보지 않을 수 없어 한중왕의 측근들은 틀림없이 험담을 할 것입니다. 그렇게 의심들은 증폭되어 족하는 위험에 처하게 됩니다. 지금이야 족하가 멀리 있어 잠시 안심할 수 있지만 우리 대군이 나아가면 땅을 잃고 귀환해야 합니다.(중략) 게다가 폐하께서는 선양을 받으신 후 덕으로써 거리낌 없이 인재를 들이므로 족하가 넘어오기만 한다면 300호를 받고 나국을 계승할 뿐만 아니라 더 큰 나라에 봉해질 것입니다.(중략) 서둘러 이 기회를 잡으시기 바랍니다.[5] '强猛'과 뜻이 같은데 '매우 굳세고 사납다'는 뜻이다.[6] 물론 유봉이 움직일 경우 위흥이나 주변 등지에서 가만히 보고있지는 않겠지만..[7] 서황이 처음 7군 수몰 이후 구원을 왔을때가 8월이었고 서황이 번성 내부 만총과 힘을 합쳐 번성포위를 푼게 10월이다. 상용에서 지원병력이 오기엔 충분한 시간적 여유는 된다. 설령 타이밍이 늦었다고 해도 관우의 번성 포위가 풀리고 면수까지 내주고 양양도 포위를 빼앗겼다면 모르겠는데 면수와 양양지역을 아직 장악하고 있었고 이때 지원군이 상용에서 왔다면 그 틈을 이용해 관우가 상용쪽으로 내빼는게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다. 형주자사와 남향군 태수가 지원을 왔다가 관우에게 잡혔다 죽었기 때문에 상용 동쪽은 공백지 상태였기 때문. 오히려 상용에서 지원을 오지 않았기 때문에 관우가 보급문제와 더불어서 속전으로 끝내지 못하고 장기전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보는 게 합당하다. 상용을 점령한지 얼마 안 되었다고는 하지만 그렇다면 상용 내부를 정리할 최소한의 병력만 남기고 유봉이든 맹달이든 둘 중 하나가 지원을 오고 나머지 한명이 내부 단속을 해도 상관이 없다. 애당초 유비가 유봉과 맹달을 동시에 파견한 것, 관우를 지원하지 않아 죽게 한 죄를 물은 건 애당초 여차하면 상용에서 이런 형태로 관우를 지원하라는 전제조건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실제 정사상의 유비의 군재와 통찰력을 생각하면 유비는 충분히 상용에서 지원이 가능했다고 봤기에 이런 인선을 한 것이겠고. 하지만 두 사람은 반목했고 이런 점을 고려하면 점령한 지 얼마 안 되었다는 것은 핑계에 불과하고 둘이 주도권 싸움을 벌이다가 일을 그르쳤다고 볼 수밖에 없다. 상용 자체가 맹달 본인이 지적했듯이 천혜의 요새지라 그렇게 쉽게 함락되는 곳은 아니다.[8] 맹달, 신의, 신탐과는 달리 촉을 배신하지 않고 성도로 돌아왔기 때문에 그가 유비의 양자로 후계자 문제와 얽혀있지 않았다면 중징계는 피하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목숨은 부지했을 확률이 높다.[9] 유선이 태자로 책봉되고 나서부터 꾸준히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았다기에는 기회도 받았고 공적을 세운것도 있었다, 한중왕 등극 이후에도 맹달이 상용을 공격하기 쉽지 않을 것 이라 생각하고 유봉을 지원군으로 공격하게 한 것을 보면 꾸준히 천덕꾸러기란 말은 성립되지 않는다.촉이 상용을 항상 중요 요충지로 생각했던 걸 감안하면 오히려 유봉의 입지가 불안해 졌음에도 믿고 맡긴 거라고 봐야한다.[10] 당장 당양 장판파에서 조조에게 쫒기는 와중에 두 딸을 잃었고 유선도 조운이 아니었으면 죽었을 것이다.[11] 유선의 어머니인 감부인은 유비가 떠돌아 다니며 아내를 여러 번 잃은 탓에 정부인 노릇을 했을 뿐 본래 첩이었고, 유선이 황제가 된 뒤에 아들의 신분을 따라 추존되었다.[12] 이때 관우는 번성에서 적들을 거의 몰아부치면서도 함락은 하지 못했는데 이때 상용에서 천군만마의 지원군이 갔으면 '''번성 함락에 유비가 황하 이남을 전부 먹어버릴 수도 있었던 촉한 역사상 최대의 기회였다!'''[13] 유표의 경우-유기파와 유종파-는 그나마 군권을 쥐고 있는 채모가 유종의 처가(정사에서 채모는 유종의 외삼촌이 아님)로써 만악의 근원이나 다름없었다는 점에서 옹호의 여지가 없지는 않다.[14] 실제로 삼국지를 보면 유비를 비롯해 황실의 후예들이 상당수 등장하지만, 모두 먼 친척이다. 물론 이는 후한 말기 황제들이 줄줄히 요절한 것도 원인이기는 하다.[15] 유선은 마지막 5년만 빼놓고 재상들에게 모든걸 전적으로 위임하던 군주였다. 하지만 유봉은 과연 이랬을까? [16] 정사에서는 유선이 태어나기 전 유봉을 양자로 삼았기에 성립되지 않는다.[17] '수염이 노란 아이'라는 뜻. 조조가 붙여준 별명이다.[18] 이건 조조 처지에서도 할 말이 있는 것이, 적이긴 하지만 그래도 오랜 옛 인연도 있고 해서 유비와 1:1로 대화를 해보기 위해 위공이자 총대장인 자신이 직접 나섰더니 정작 유비가 자신은 나가지도 않고 유봉을 내보내 자신을 모욕한거나 다름없게 돼서 제대로 빡친 것이다.[19] 연의던 정사던 팽양은 마초에게 이를 몰래 알려줬고, 마초는 거드는 척 하고서는 곧바로 유비에게 알리며 자신의 망명을 받아주고 대우까지 해준 유비에 대한 신의를 지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