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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孫夫人
(? ~ 223년 4월?)
1. 개요
2. 정사
3. 연의
4. 평가
5. 미디어 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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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한 말의 인물. 손견의 딸, 손권의 여동생, 유비의 아내. 이름은 불명.
손상향(孫尙香)이라는 이름이 유명하지만 이는 후대 경극에서 사용한 창작명으로 실제 역사와는 무관하다.

2. 정사


손권의 여동생 손부인은 재주가 날래고 성품이 굳세며 사나워서 여러 오라버니들의 풍모를 갖추고 있었다.(법정전) 유표의 아들 유기가 병사하고 유비가 형주목으로 추대되자 손권은 유비를 두려워해서 여동생을 유비에게 바쳐서 동맹을 강화했다. (선주전) 손부인이 유비와 결혼한 시기는 209년 12월이었다. (자치통감) 손부인의 나이는 나와있지 않지만 아버지 손견이 191년에 죽었고 오빠 손권이 182년에 태어났으니 손부인은 당시 17~26세였다. 그리고 손부인의 남편이 되는 유비는 무려 49세였다. 이에 대해 삼국지집해의 편저자 노필은 건안 14년에, 유비의 나이는 49세고, 손권은 29세, 그의 여동생은 대략 20여 세니, 거의 50의 늙은이에게 시집간 것으로[1], 사서의 글에선 "여동생을 바쳐 우호를 굳혔다."(進妹固好)라 했으니, 네 글자로 크게 희롱할 만했다고 했다. 손권이 세력이 커진 유비가 두려운 나머지 꽃다운 나이의 여동생을 바쳤다며 비꼰 것이다.
정사에서 유비는 손부인과 결혼하기 위해서 손권군까지 다녀오지 않았고 손부인이 유비군으로 보내졌다. 유비는 형주 석수현 서남쪽의 수림산에서 손부인을 아내로 맞이했다. 비단막이 숲 같아서, 이름지어졌다, 또한 유랑포(劉郎浦)는 석수현 서북쪽에 있으니, 일명 유랑복(劉郎洑)이다. (삼국지집해 선주전 인용 일통지) 석수현의 나루터에 유랑포가 있으니, 촉선주가 오의 여인에게 장가든 곳이다.(자치통감 호삼성주) 유비는 손부인과 결혼한 후, 손권에게 형주를 대여하기 위해서 경구에 다녀왔다. (자치통감) 당시 주유는 손권에게 유비를 붙잡아두라는 계책을 진언했다. (주유전) 그러니까 정사에서는 유비가 손부인과 결혼했던 시기와 주유유비를 붙잡아두려는 계책을 진언했던 시기가 다르다.
손부인은 시녀 백여 명으로 하여금 무기를 들게 하여 늘 자신의 주변에서 시립하고 있게 했고 유비는 내실로 들어갈 때마다 늘 마음 속으로 두려움을 가졌다. (법정전) 유비도 침소에서는 무방비 상태일 수밖에 없으니, 손부인이 마음만 먹는다면 그에게 암살당할 수도 있어서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사실상 손부인은 혼인 후에도 무장한 시녀들을 사병처럼 대동하며 '나는 유비를 존중하는 시늉도 안 할 것이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그를 죽일 수 있다'고 무력 시위를 한 셈이었다.
손부인은 교만하고 횡포해서 오나라에서 데려온 관리와 병사들을 거느리고 마구 법을 위반했다. (조운전 주석 조운별전) 제갈량이 말하길 유비는 공안에 있을 당시 손부인이 곁에서 변고를 일으킬까 겁내했다. (법정전) 법정은 유비에게 손부인을 오로 돌려보내라고 권유하기도 했다. (화양국지 유선주지) 손부인은 잔릉현의 고성을 보수했다. (삼국지집해 선주전 인용 역주) 손부인은 유비와 서로 믿지 않아서 잔릉현성 동쪽 5리에 손부인성을 쌓아 따로 여기에서 거주했다. (삼국지집해 선주전 인용 원화지) 당시 유비의 본거지가 공안이었고 손부인성은 공안현 서쪽에 있었다. (삼국지집해 선주전 인용 일통지) 말이 부부지, 손부인이 오나라의 병사와 관리를 동원해 유비를 감시하는 수준이었다.
유비는 익주로 들어가면서 손부인이 혹시 깽판을 칠까 봐 걱정했지만 조운을 신뢰했기 때문에 조운에게 내부의 일을 담당하게 하고나서 익주로 떠났다. (조운전 주석 조운별전) 유비가 입촉하던 시기에 손권은 손부인에게 사자를 보내 다시 오로 돌아오도록 했다. (목황후전 주석 한진춘추) 정사에서 손권은 손부인에게 어머니가 위중하다는 거짓 편지 같은 것은 보내지도 않았다. 손부인은 그냥 손권이 오로 돌아오라고 배를 보내자 곧장 유비를 떠났다. (조운전 주석 조운별전) 손부인은 오로 돌아가면서 유비의 아들 유선도 같이 데리고 가려고 했다. 정사에서는 손부인이 유선을 오나라로 데려가려 했던 이유에 대해서 나와있지 않다. 제갈량은 조운에 명해 장강을 봉쇄해서 유선을 구출하게 했다. (목황후전 주석 한진춘추) 조운은 장비와 함께 군사를 데리고 가서 강을 가로막아 유선을 구출해서 돌아왔다. (조운전 주석 조운별전) 손부인이 유비와 결혼한 시기는 209년 12월, 유비가 입촉한 시기는 211년이다. (자치통감) 그러니까 손부인과 유비의 결혼 기간은 겨우 2년도 채우지 못한 것이다. 유비는 익주를 평정하고 나서 손부인이 오나라로 돌아갔기 때문에 신하들의 권유로 목황후와 재혼했다. 유비는 목황후와의 재혼을 고민하면서 목황후의 죽은 전남편 유모가 자신과 동족이라는 것만 고려했고 손부인의 존재는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목황후전)
정사 삼국지에서는 손부인이 오로 돌아간 후의 행적이 나와있지 않지만 삼국지집해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후 유비이릉대전에서 패배했고 다시 오와 화친을 하게 되었다. 이에 손권은 여동생 손부인을 다시 촉으로 돌아가게 했다. 손부인이 아직 촉한에 도착하지 못하고 난강에 이르렀는데 유비가 죽어버렸다. 이에 손부인은 강에 뛰어들어 자결했고 토박이가 손부인을 불쌍하게 여겨 교기에 제사를 지내주었다. (삼국지집해 선주전 인용 자치통감보) 사람들 사이에서는 교기의 영택부인사(靈澤夫人祠)가 손부인을 장사지내준 곳이라고 대대로 전해졌다. (삼국지집해 선주전 인용 일통지) 손부인은 과거에 유비와 금슬이 좋지 못했는데 유비가 죽자 따라서 죽었다는 내용이기에 후세의 학자들이 손부인의 죽음에 대한 신빙성을 진지하게 논의하기도 했다. (삼국지집해 선주전)
다만, '유비와의 정 때문에 그를 따라 죽은' 게 아니라 자신의 절망적인 처지를 비관하여 자살했을 가능성이 있다. 손부인이 처음 유비와 결혼한 것은 표면상으로는 화친을 위해서였으나 실상은 유비군을 견제 또는 염탐하기 위해서였으며, 실제로 그 역할을 충실히 다한 뒤 귀국했다. 그런데 이릉대전 이후 양국 재화친을 위해 다시 촉으로 보내졌으니 사람이 아니라 공물 비슷한 취급을 당한 꼴이다. 이번에는 동오로 돌아올 기약도 없었던데다 안 그래도 양국 간 악감정은 여전히 남아있는데, 손부인은 과거 유선을 납치한 전과가 있으므로 더욱더 미움받을 입장이었다. 유비가 여전히 홀아비면 모를까, 이미 목황후 오씨가 있어서 이제는 유비의 정실부인 대우도 기대할 수 없었다. 이 막막한 상황에 그나마 걸어 볼 만한 건 유비가 약간의 호의를 베풀어 줄지도 모른다는, 그다지 높지도 않은 가능성뿐이었는데, 그마저도 손부인이 도착하기 전에 유비가 죽으면서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이에 자신이 막막한 처지에 놓일 것을 예상하고 절망하여 삶의 의지를 상실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2]
이외에 다른 가문에 재가했다는 설도 있으나, 확인할 근거는 없다.

3. 연의


삼국지연의에서는 손부인의 이미지가 정사와 다르게 유비를 진심으로 사랑한 여인으로 변경되었다. 연의에서는 손부인의 이름이 손인(孫仁)이라고 나오지만 사실 정사에서는 손권의 이복동생 손랑의 별명이 손인이었다. 연의에서 착각한 듯하다. 정사에서 무열황후 오씨는 아들 4명과 딸 1명을 낳았는데 무열황후가 낳은 딸이 손부인인지는 불명이다. 연의에서 손부인은 무열황후의 동생 오국태의 소생으로 설정되었기 때문에 손책, 손권과 배다른 남매가 되었다.
주유는 유비의 감부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유비를 손부인과의 결혼을 핑계로 오나라로 데려와서 죽이거나 억류하려고 했다.[3] 유비와 조운이 오로 향하기 전, 제갈량은 조운에게 주머니 3개를 건네주며 중요할 때마다 펼쳐보라고 말했고, 이 중 첫 번째는 동오에 도착하자마자 열었더니 먼저 교공(교국로)를 포섭하고, 성안에 널리 소문을 퍼트리라는 내용이었다. 이를 따른 결과 교공이 유비에 대해 온갖 칭찬을 함으로써 오국태의 호감을 산 데다, 이미 혼인에 대한 소문이 널리 퍼져서 계책대로 유비를 죽이면 손부인은 청상과부가 되고 손권은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어버릴 상황이 만들어진다. 결국 감로사에서 오국태와 유비와 상견례를 하고, 오국태가 유비의 태도를 마음에 들어했기에 혼담은 성사된다. 자세한 내막은 교공오국태 참고.[4]
이후 결혼식이 끝나고 유비를 신방으로 초대하는데, 어려서부터 무술을 좋아한 데다 시녀들에게 항상 검술을 시키다 보니 신방까지도 병장기가 가득해 전쟁터의 막사 같았다고 한다. 이에 유비가 질색하며 병장기란 여자가 가까이할 것이 못 된다며 치우라 하자, '평생을 싸움터에서 보내신 분이 병장기를 싫어하시다니'라고 웃으면서도 시키는 대로 무장을 해제시킨다. 그리고 매우 금슬이 좋았다는 식으로 짧게 언급되고 자세한 에피소드는 나오지 않는데, 어쨌든 정말로 둘이서 잘 지낸 모양이다.[5]
한편 손권과 주유는 트러블을 일으켜 유비를 곤란하게 만들어 형주를 넘겨받는다는 계획과 달리, 자신들을 제외한 모두가 만만세(…)하는 황당한 상황으로 흘러가자 임시 대책으로 유비를 동오에 붙잡아두고 향락에 빠지게 하여 본국과 사이가 멀어지게 하자고 한다. 예상대로 유비는 어려서부터 접한 적이 없는 미녀와 유흥에 취해 서서히 맛이 가며 동오에 눌러앉으려 했고, 이를 염려한 조운이 제갈량의 두 번째 주머니를 열어보자 '형주에 난리가 났다고 뻥을 쳐서 유비가 돌아오게 하라'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조운은 이를 실행에 옮기지만 정작 향락에 취한 유비는 손부인과 상의해 보겠다며 풀어진 모습을 보인다. 이에 조운은 손부인이 알게 되면 당연히 반대하지 않겠냐며 말하지 말라고 하고 손부인은 손부인대로 그 얘기를 엿듣고 있었지만, '지아비 가는 길에 내가 안 갈 수가 없지'라며 따라나서는 것은 물론 유비가 손권의 추격을 두려워하자 유비의 선친에게 제사를 지낸다는 핑계로 다같이 도망을 가자는 계책까지 짜내는 모습을 보인다.
이에 손권이 진상을 깨닫고 서성, 정봉, 진무, 반장 등을 보내 그들을 잡으려 한다. 하지만 제갈량의 마지막 주머니를 통해 계책을 받은 유비는 손부인에게 사실 결혼이고 뭐고 전부 다 형주를 뺏어먹으려고 네 오빠와 주유가 꾸민 일이라는 사실을 털어놓고, 이에 완전히 화가 난 손부인은 그 장수들을 몸소 막아서서 언변으로 쫓아버리는 여장부다운 모습을 보인다. 임기응변을 제대로 활용한 호통도 상당했지만, 그것보다는 그 계책을 실행한 주유보다 높고 손권의 동생이라는 입장이 가장 강력했다. 결국 서성을 비롯한 장수들로서는 이러나저러나 아랫사람이겠다, 설령 손권의 말을 들어도 오국태에게 혼날테니 조용히 물러가는 편을 택한다.
그러자 손권은 자신의 검까지 뽑아서 장흠주태에게 주고는 '이 검으로 손부인도 죽여라'라며 패륜까지 감수하고 최후의 카드를 사용하지만, 손부인이 앞의 네 장수를 물리치고 앞서 도망친데다 제갈량이 먼저 장사꾼으로 위장한 형주 군사들을 숨겨두었기에 유비와 손부인은 제갈량의 호위를 받으며 무사히 형주로 돌아간다. 이렇게 손권은 여동생만 넘겨준 꼴이 되고 주유는 금창이 터진다. 이후 한동안 등장이 없지만, 손권이나 주유가 형주를 공격하려 할 때마다 오국태가 "내 딸을 죽일 셈이냐"라며 반대하는 식으로 가끔 언급이 된다.
이후 오랜 시간이 흘러 유비가 입촉하여 형주를 점거할 권리(?)의 시효가 만료되자,[6] 이번엔 손부인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인질의 형태가 되어버린다. 이에 손권은 저번처럼 오국태가 반대하는 일이 없도록 손부인을 먼저 빼내기 위해, 주선을 잠입시켜 오국태가 아프니 얼른 와달라는 거짓 편지를 전한다. 다만 이때 '죽기 전에 아두(유선)를 보고 싶어하시니 데려와라'라는 말을 덧붙였기에, 손부인은 오랜 파촉 생활로 어머니를 뵙지 못해 경황이 없었던지라 아두를 데리고 주선을 따라 배에 올라탄다. 판본에 따라선 이 경황이 없는 문제에 더해서 손부인이 아두도 친아들처럼 매우 사랑하고 아두 역시 손부인을 잘 따른다는 묘사를 추가해서 함께 가는 것이 어색하지 않도록 설정하기도 한다.
하지만 마침 순시를 돌고 있었던 조운이 재빨리 배를 타고 쫓아가고, 단신으로 선박에 뛰어들더니 손부인에게 '말도 없이 가시는 것은 도리가 아니며, 아두는 절대 넘겨줄 수 없다'고 말하고 손부인은 손부인대로 '네가 신하된 입장으로 주군의 아내에게 대드는 것이냐'라며 팽팽하게 맞선다.[7] 이에 조운은 무턱대고 손부인의 품에서 아두를 빼앗아 탈출하려고 했지만, 검술을 배운 시녀들이 막아서는 데다[8] 주선이 이대로 도망칠 생각으로 배를 빨리 몰았기 때문에 꼼짝없이 동오로 끌려갈 위기에 처한다.
그 순간 장비도 10여 척의 배를 이끌고 따라와 손부인의 배에 올라타고, 막아서는 주선을 냅다 베고는 그 목을 손부인에게 던져(!) 밥상 뒤집기를 시전한다. 손부인은 '형수한테 뭐하는 짓이냐'라고 대경실색했지만 장비는 '그럼 형수는 형수 노릇을 안 하고 어딜 도망가슈?'라고 정곡을 찌르고, 손부인이 당황하면서도 '어머니가 위독하셔서 그런 것이니 계속 방해할 거면 차라리 강물에 몸을 던져버리겠다'고 자신의 목숨을 담보삼아 위협하자 이에 조운&장비는 아두만 데려가고 손부인은 동오로 가도록 허락한다. 손부인은 홀로 오나라에 도착해서 손권과 재회하고, 손권은 주선이 죽고 아두는 데려오지 못했단 말을 듣자 거리낄 것이 없어져 형주 침공을 계획한다. 이 뒤로 손부인은 등장하지 않는다.[9] 이후 삼국지집해의 기록과 비슷하게 유비가 이릉대전에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자 장강에 투신자살했고, 후세 사람들이 사당을 세워 그녀의 혼을 위로했다며 완전히 언급이 사라진다.

4. 평가


많은 창작물에서 연의의 이미지를 따라, '꽃다운 나이에 중년의 유비와 정략결혼을 했지만 그의 영웅적인 면모에 진심으로 반한 말괄량이 아가씨'로 묘사한다. 그러나 실상은 '수동적인 정략결혼 대상자'라든지 '순진한 말괄량이'와는 거리가 매우 멀었다. 선주전과 조운전(+별전) 등의, '손부인이 장수와 관리, 병사들과 무장한 시녀들을 데려왔다'거나 '손부인이 교만하고 위세를 부려 그 무리가 거침없이 법을 어겼다'거나 하는 기록들을 보면, 손부인은 사실상 강동 출신 무장집단들을 사병처럼 대동하면서 유비의 권위를 노골적으로 비웃고 무력 시위를 일삼은 것이다. 사실상 형주에서 세력을 키운 유비를 감시하기 위해 파견된 손오의 첨병, 현지 별동대장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손부인의 존재가 가장 두드러지는 부분인 유선 납치 미수 사건은 어떻게 보아도 가벼운 해프닝이 아니라 매우 중대한 비상사태였다. 당시 공안성의 관리체계는 군사중랑장 제갈량과 편장군 영계양태수 유영사마 조운이 투탑 체제를 구성하고 있었는데, 제갈량이 비록 문관이긴 했어도 어쨌든 군직에 있었는데도 조운에게 유영사마를 줬다는 건 이미 제갈량 혼자 힘으로 수습이 안 되는 일이 몇 차례 터졌으리라는 반증이 된다. 이런 마당에 강동에서 시집 온 유비의 아내가, 유비의 하나뿐인 친자를 동오로 데려가려는 시도를 했다? 장비에게 급히 연락을 취해서, 관우를 제외한 유비군 최고참 두 명이 강가까지 따라나서서야 겨우 유선을 되찾았다? 이는 다음과 같은 의미다.

1. 유비의 부재를 틈타

2. 독자적 명령체계를 가진 강동 출신 군사집단이

3. 강동과 사전연락을 취한 뒤 행동을 개시해 유비의 친생자를 납치했으며

4. 1차 방어선인 제갈량과 조운이 이를 막지 못했다.

이런 어마어마한 일의 발단이 고작 '어머니가 중병에 걸렸는데 딸의 의붓아들을 보고 싶어한다고 해서, 의심 한 번 안 하고 아이를 데려갔다'일 수는 없다. 이건 손부인이 현지 작전사령관이 되어 주도한, 유비의 후계자를 납치해 유비군을 뒤흔들어 놓는 작전이었다고 봐야 맞는 것이다. 실제로 유비 세력에는 입촉 전 최대의 위기였다. 연의에서처럼 제갈량이 미소를 지으며 장비와 조운의 공을 칭찬하고 끝날 일이 아니라, 만약 유선이 잘못됐으면 정말로 제갈량이 목을 내놔야 했을 일이었다. 결과적으로 무사했으니 다행이지만 감독 소홀의 책임을 피할 순 없었을 것. 게다가 손부인이 아예 공안성 옆에 따로 성을 짓고 지내면서 거기에 강동에서 데려온 관리와 군사들을 주둔시켰을 테니, 당시 유비군 본거지였던 공안의 사상자도 많았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말하면, 연의에서 손부인과 유비의 관계를 억지로 우호 관계로 바꾸는 과정에서 손부인을 참 여러 모로 많이도 너프시켰다.

5. 미디어 믹스



[1] 참고로 유비는 손권 및 손부인의 아버지인 손견과 겨우 6살밖에 차이나지 않는다. 즉 손부인에게 유비는 거의 삼촌뻘 아저씨라는 셈.[2] 손부인이 촉한으로 돌려보내지면 얼마나 막막한 처지에 놓일지는 딱 보면 보이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슨 공물 진상하듯 보내졌다는 건, 동오에서 버림받았기 때문일 가능성도 있다. 그렇다면 촉한에선 의지할 데가 없는데 동오의 가족들은 자신을 버리고 외면할 테니 두 배로 절망적이었을 것이다.[3] 참고로 정사에서는 유비가 감부인이 죽기 전에 손부인과 결혼했다.[4] 참고로 정사에서 감로사는 유비와 손부인이 결혼하던 시기에 존재하지 않았고 나중에 건축되었으며, 정사에서 손권의 어머니는 진작 죽었기 때문에 유비와 손부인의 결혼에 간섭할 수 없어서 연의에서는 무열황후의 동생 오국태를 새로이 창작했다. 연의에서 유비와 손권이 취중에 각자 소원을 빌며 칼로 내려쳤다는 시검석도 당연히 창작이지만 웃기게도 현재 감로사 초입에는 유비와 손권의 시검석이 현존하고 있다. 당연히 낙봉파처럼 나중에 만들고 갖다 붙였을 것이다.[5] 다만 이 묘사는 저서마다 다르다. 유비와 손부인은 엄연한 정략결혼이고, 유비가 손부인의 괄괄함이나 병장기를 모으는 것을 싫어했기에 결혼 후기에야 몰라도 결혼 초창기엔 정사처럼 부부생활이 순탄치 않았다고 묘사한 책도 종종 보인다. [6] 애초에 위의 혼담도 제갈량이 '파촉을 점령하여 발 붙일 곳이 생기면 형주를 넘겨주겠다'며 배째라를 시전했기 때문에 나온 계책이었다.[7] 만약에 시키는 대로 아두를 넘겨줬다면 이번엔 거꾸로 아두가 인질이 되어 형주를 바쳐야 하는 상황이 될 수도 있었다.[8] 조운도 장수라 당연히 검술을 펼치긴 하지만 여자라서 그런지 시녀들을 참살하는 장면은 없고 그냥 몸싸움 수준이다. 혹은 그들이 동오의 군사라서 전쟁의 불씨를 만들지 않기 위해 자제했다는 말도 있다. [9] 판본에 따라 손권에게 오국태가 건강하시단 말을 듣고 퇴장하거나, 그 말도 없이 퇴장한다. 어느 쪽이든 유비와 금슬이 좋은 것으로 묘사되었던 손부인이 자신을 데려오려는 계책의 진상을 깨닫고 어떤 생각을 품었을지 상상해보는 것도 포인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