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제(유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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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중국 남북조시대 유송(劉宋)의 제2대 황제. 폐위가 되어서 묘호와 시호는 없다. 휘는 유의부(劉義符). 흔히 소황제, 혹은 소제(少帝)라고 부르며, 그가 즉위한 지 2년 만에 폐위되었다.
2. 생애
동진 의희 2년(406년), 경구에서 유유와 무경황후 장애친(臧愛親)[1]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명은 거병(車兵)으로 아버지가 송왕(宋王)이 되자 세자로 책봉되었으며, 아버지가 황제가 되자 황태자가 되었다. 유유가 5월에 죽자 사공 서선지, 중서감 부량, 영군장군 사회의 보좌를 받으며 즉위했다. 유유는 자식들을 늦게 봤기 때문에 그가 59세로 죽었을 때 맏아들 유의부는 '''겨우 15세였다.''' 약간 어린 나이였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자질이 있으면 명군이 될 수 있었을 텐데 유의부가 그렇지 않았다는 게 문제였다. 그나마 유유의 3남 유의륭이 나은 편이었지만 당시에는 그의 나이가 좀 어렸다.
영초 3년(422년), 유의부가 즉위하자 북위의 명원제 탁발사가 침입하여 낙양, 활대, 허창 등을 잃는다. 다만 산동은 사수하는 데 성공했다.
유의부는 남보다 힘이 장사였고,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했으며 음악을 좋아했다. 그러나 그런 속성의 사람이 으레 그렇듯 놀기를 좋아해서 문제였다. 그는 즉위한 후 정사를 보지 않고 '''친히 채찍을 잡고 무고한 사람을 때리는 것을 재미로 삼았으며 후원인 화림원에서 주막을 열고 술 장사를 했다. 또 연못과 누각을 오전에 짓게 했다가 오후에 허물게 했다.''' 거기에 천연지라는 연못에서 좌우 시종들과 함께 소리를 지르며 배를 끌어오는 것을 즐기다가 피곤하면 그 배에서 그대로 잠들어 버리는 등 여러 삽질과 뻘짓을 하며 인력과 재력을 고갈시켰다.
경평 2년(424년) 5월, 결국 후사를 맡았던 고명대신 서선지(徐羨之)는 남연주 자사 단도제(檀道濟), 강주 자사 왕홍(王弘), 사회(謝晦)와 함께 유의부를 몰아내기로 했다. 이에 단도제와 사회가 군대를 이끌고 서선지가 뒤를 따르며 황궁으로 돌진했다. 그날도 유의부는 '''화림원에서 주막을 열고 직접 술을 팔면서 놀고 있었는데''' 군사들은 2명의 환관을 죽이고, 유의부에게 칼을 댔다가 손가락을 다치게 했다. 그들은 일단 유의부를 잡아 동각으로 부축하였고 옥새와 인장을 거두며 폐위시켰다. 그들은 유의부를 영양왕(營陽王)에 봉하고 오군(吳郡)에 있는 금창정(金昌亭)에 연금했다. 6월 서선지는 중서사인 형안태(邢安泰)를 보내 유의부를 죽이게 했는데 힘이 장사였던 유의부는 여러 사람을 뿌리치고 달아나다가 결국에는 잡혀 죽음을 당했다. 향년 18세. 안습.
소제 유의부의 황후였던 사마무영(司馬茂英)은 동진의 마지막 황제 공제 사마덕문의 딸로 해염공주였으며 남편이 사망한 후에도 15년 더 살았다. 유의부와의 사이에서 소생은 없었으며 원가 15년(439년) 4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3. 둘러보기(계보)
[1] 유의부 외에 소생으로 서규지(徐逵之)의 아내가 된 회계장공주 유흥제(劉興弟)가 있었다. 유흥제의 아들이 상서복야 서담지(徐湛之)로 문제 유의륭과 함께 유의륭의 장남 유소에게 피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