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제(유송)

 


'''유송 초대 황제'''
'''高祖 武皇帝 | 고조 무황제'''
'''묘호'''
'''고조(高祖)'''
'''시호'''
무황제(武皇帝)
'''연호'''
영초(永初, 420년 6월 ~ 422년)
''''''
유(劉)
''''''
유(裕)
''''''
덕여(德輿)
'''부황'''
효목제(孝穆帝)
'''모후'''
효목황후(孝穆皇后)
'''생몰 기간'''
363년 4월 16일 ~ 422년 6월 26일 (59세)
'''재위 기간'''
420년 7월 10일 ~ 422년 6월 26일 (1년 11개월)
'''능호'''
초녕릉(初寧陵)
1. 개요
2. 생애
2.1. 출생과 초년기
2.2. 두각을 나타내다
2.3. 동진의 권력자
2.4. 남연 정벌
2.5. 동진 평정
2.6. 북벌
2.7. 북벌의 실패
2.8. 마침내 황제가 되다
2.9. 사망과 후일담
3. 평가
4. 둘러보기(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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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진(東晉)의 무장이자, 위진남북조시대 유송(劉宋)의 건국자. 묘호는 고조(高祖). 시호는 무황제(武皇帝). 휘는 유유(劉裕). 자는 덕여(德輿). 연호는 영초(永初)로 재위한 2년간 쓰고, 송소제가 7개월을 더 썼으며 다음해 정월에 개원했다.
특이하게도 유유의 생몰 기간이 59년으로 그가 건국한 유송의 존속 기간과 일치한다.

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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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출생과 초년기


동진 흥녕 원년(363년) 3월, 유교(劉翹)[1]와 조안종(趙安宗)[2]의 외아들[3]로 태어났다. 그는 평민 출신으로 자는 덕여(德輿), 아명은 기노(寄奴)였다. 유유는 한고조 유방의 동생 초원왕(楚元王) 유교의 21대손이라고 한다.[4] 본적은 중원 지역인 서주 팽성이었으나,[5] 영가의 난으로 증조부 유혼이 장강을 건너 경구에 살게 되었다.
유유는 태어나자마자 모친 조씨를 여의고 집이 가난하여 하급 서기관이었던 '''아버지 유교가 여러 번 버리려고 했지만''' 같은 마을에 사는 이복 누이, 즉 유유의 고모가 젖을 물리고 그를 키워 주웠다. 유유는 키가 당시 기준으로는 큰 7척 6촌(약 174cm)으로 용감하고 건장했으며 큰 뜻이 있었으나, 출신이 미천한 한문(寒門)이었고[6] 독서를 게을리하여 글자만 겨우 깨우쳤다.
집안이 이런 탓에 어릴 때부터 농사를 짓고 땅을 파며 풀을 베고 물고기를 잡았다. 거기에 부업으로 짚신을 엮어 팔았으며 자라서는 도박을 즐겼다. 한번은 조규라는 사람에게 빚진 3만 냥을 갚지 못해 을 매어놓는 말뚝에 묶여 있었는데 평소 유유를 눈여겨 보던 낭야 사람 왕밀이 대신 갚아주었다. 왕밀은 이런 유유를 걱정했으나, 유유는 유비도 원래 돗자리 장수였다며 대수롭지 않게 웃으면서 말했다. 훗날 과연 그렇게 되었다.

2.2. 두각을 나타내다


유유는 군대에 들어가 손무종의 사마로 있었다. 그러다가 융안 3년(399년) 10월, 손은(孫恩)의 난이 일어나자 북부군의 수장 유뢰지(劉牢之)의 휘하 참군으로 들어갔다. 유유는 부하 10명을 데리고 정찰하러 갔다가 손은의 군사 수천명을 만났는데 부하들은 모두 죽고 유유는 강언덕 아래로 뛰어내렸다. 적들이 아래로 내려오자 '''유유는 큰 소리를 지르며 여러 명을 베고 수천 명에 달하던 손은 군을 혼자서 돌파하였다.''' 이에 손은 군은 감히 덤비지 못하고 물러났으며 유유를 찾으러 온 유경선과 북부군은 유유의 무예를 보고 감탄했다. 유유의 기세에 눌린 데다 유경선까지 합세하자 적들이 달아났는데 유유가 추격을 가해 격파했다. 그 후에도 손은의 군사들을 여러 번 격파했다.
융안 4년(400년) 11월에는 손은을 해염까지 추격하여 10,000여 명의 포로와 사상자를 내게 했다.
융안 5년(401년), 유유에게 패한 손은은 해염으로 진격했다. 손은의 동선을 파악했던 유유는 손은보다 먼저 해염에 도착한 뒤, 매복작전으로 손은을 격파했다. 손은이 유유에게 격파되었지만 군사 수가 많아 유유를 다시 공격했다. 이때 해염의 현령이었던 포루(鮑陋)는 아들 포사지(鮑嗣之)를 보내 유유를 지원했다. 유유는 포사지의 군대가 지쳐있으니 전투력이 약할 것이라 판단하여 후방에 있으라고 충고했으나 포사지는 이를 듣지않고 선봉장이 되었다.
전투가 벌어지자 후방에 있던 유유는 진을 넓게 펼쳐 지원군이 온 것처럼 보이게 했다. 손은은 유유의 계책에 넘어가 후퇴했다. 이때 포사지가 손은을 추격하다 전사했다. 포사지가 죽자 손은은 반격을 시도했다. 그러나 유유가 전사자의 시신을 수습하는 모습을 보이자 손은은 유유가 다시 매복 작전을 쓴게 아닌가 의심이 들어 머뭇거렸다. 유유가 즉시 공격하여 손은을 격퇴했다.
6월에 손은은 10만의 대군을 이끌고 수도 건강으로 진격하였고 사마원현이 이를 막지 못했다. 유유는 신속히 단도에 도달했다. '''유유의 군사는 겨우 1,000명인데다 지쳐있었지만 수만 명에 달하는 손은의 대군을 쳐부수었다.''' 당시 손은의 군사들은 유유에게 격파되어 절벽이나 강으로 뛰어내리는 사람이 많았다. 손은이 다시 건강으로 진격하자 사마원현 등이 막지 못했다. 유유가 추격하여 손은을 격파하고 10,000여 명을 포로로 잡았다. 손은은 물러나고 후에 임해의 태수 신경(辛昺)에게 섬멸된다. 결국 손은은 임해에서 투신 자살했다.
이 전공으로 하급 군관에 불과한 유유는 세상에 이름을 알리게 된다.

2.3. 동진의 권력자


당시 동진은 황제의 친척인 사마도자, 사마원현 부자의 전횡으로 형주와 경구에서 반란이 일어난 군웅할거 시대였다. 게다가 손은의 대란까지 일어났으니 답이 없는 상황이었다.[7] 당시 경구의 '''북부군'''은 왕공이 지휘했고, 형주의 '''서부군'''은 은중감(殷仲堪)이 통솔했다. 왕공은 은중감, 환현(桓玄)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으나 부하였던 유뢰지에게 제거되었고, 반란은 흐지부지되어 군벌끼리 서로 견제하게 되었다.[8][9] 그런데 환온의 아들이었던 환현(桓玄)이 은중감과 양전기(楊佺期)를 격파하고 형주의 서부군을 장악했다.
원흥 원년(402년)에 환현이 수도 건강(현재의 난징)을 점령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이어 사마도자 부자를 제거하고, 일부 사마씨 황족을 숙청했다. 이때 유뢰지는 환현을 따르려 했으나 유유는 말렸다. 유뢰지는 이를 듣지 않고 환현을 따라 사마원현을 축출했으나 환현이 본인을 지방으로 좌천시키자 유유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유뢰지는 결국 광릉에서 반란군을 모집했으나 그를 따르는 사람이 없어 자살했다.[10] 유유는 일전에 유뢰지의 패망을 예견하고 경구로 떠났다.
환현은 죽은 유뢰지의 관을 열어 수급을 베어 길가에 효수하고, 반격을 개시하여 유뢰지의 고급 참모들과 막료들을 모두 주살했다. 하지만 아직 손은과 노순의 잔당이 남아있었기 때문에 하급 장교들은 우선 살려주었다. 그래서 '''참군에 불과했던 유유는 살아남았다.'''
환현은 제위에 오르기 전에 유유에게 환겸을 보내 본인이 황제에 즉위하는 것이 어떤지 물었다. 유유는 환현의 황제 즉위에 찬성함을 밝혔으나 실제로는 이를 명분삼아 거병을 준비하고 있었다.
원흥 2년(403년) 11월, 환현은 당시 황제였던 안제 사마덕종을 협박하여 선양받고, 12월에는 초나라 황제를 칭했다. 이 때가 사실상 동진의 멸망이었다. 환현은 토목 공사를 자주하여 국가 재정을 파탄내고, 사소한 것에 지나치게 신경을 쓰는 병크를 저질렀다. 사실상 독립한 것이나 다름없는 익주의 모거는 환현에 반기를 들고, 사방에 격문을 뿌렸다. 환현이 뻘짓을 계속 벌이자 유유는 유의 등과 모의해 환현 축출을 준비했다. 유유를 두려워하던 환현의 황후 유씨는 남편에게 유유를 축출하라고 요구했으나 환현은 북벌을 실시해야 하는데 유유 같은 영웅은 남겨두어야 한다며 거절했다.
원흥 3년(404년) 2월, 유유는 경구에서 광무장군 하무기(何無忌) 등 27명과 환현 토벌을 밀모하고 맹주로 추대되었다.
유유는 안제 사마덕종의 밀조를 받아 환현을 토벌한다고 거짓 선언을 하며 경구를 점령했다. 유유는 몸소 선두에 서서 진군한 끝에 환현의 장수 오보지를 격파했다. 그러나 반군을 이끌던 단빙지는 환현의 장수 황보부(皇甫敷)에게 패해 전사했다. 곧이어 유유와 황보부의 전투가 벌어졌다. 황보부가 창을 들고 유유에게 달려들자 '''유유가 직접 화살을 쏘아 황보부를 명중시켰다.'''[11] 유유는 1,700여 명을 이끌고 남은 식량은 다 버리며 가벼운 차림으로 건강 인근 복주산에 이르러 약하고 늙은 군사들에게 깃발을 들게 해서 의병(儗兵)으로 삼았다. 환현은 환겸에게 20,000명을 주어 유유를 막게 했으나 유유는 이마저도 격파하였다. 환현은 놀라 안제 사마덕종을 데리고 자신의 본거지인 강릉으로 도망갔다. 환현은 유유에게 반격을 시도했으나 하무기와 유의에게 패했다. 동년 5월 환현이 익주 자사 모거와의 난전 중에 죽임을 당했다.
의희 원년(405년) 3월, 그렇게 안제 사마덕종은 건강으로 돌아와서 복위했고 대권은 유유가 장악하게 되었다.[12] 손은의 난을 진압했다지만 일개 장교에 불과했던 유유는 환현을 무찌르고 동진의 최고 권력자로 부상한다.
유유는 시중, 양주자사, 도독중외제군사를 맡아 조정의 권한을 완전히 장악하고, 당시 문란했던 동진의 정치와 질서, 규율을 바로잡고 호족을 단속했다.[13] 또 유유는 이전에 손은의 난과 환현 토벌전에서 전사한 장졸들을 위로하여 전사자를 안장하고 재물로 부조했다. 전사자의 시체가 귀환하지 못한 경우에는 시체를 찾아 고향에 안장시켰고, 토단법을 실시하여 현재 거주지에 호적을 올리게 했다. 원래 동진 초기에 중원에서 이주해 온 귀족들과 호족들은 강남으로 이주하고도 여전히 원래 중원에서 살때 사용하던 호적을 사용했으나, 통일적으로 호적을 맞추고 납세와 부역을 하도록 규정했다. 유유는 자기의 지위를 공고히 하고, 위신을 높이기 위해 몸소 군대를 이끌고 여러 차례 북벌을 단행하고 국내 할거 세력을 모두 소탕했다.[14] 유유는 이들을 토벌하고 동진을 완전히 통합한다.

2.4. 남연 정벌


유유는 북조에서 가장 넓은 세력권을 가진 강족의 후진에 사자를 보냈다.[15] 그 내용은 평화의 대가로 낙양 동쪽 12개 군을 내놓을 것을 요구한 것이었다. 그런데 후진의 황제 요흥(姚興)은 흔쾌히 이 조건을 수락한다.[16]
의희 5년(409년) 4월, 유유는 여러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북벌에 나서 모용선비족의 남연을 공격했다. 당시 유유의 부장들은 남연군이 대현산의 험준함을 이용해 청야작전을 펼칠 것을 우려했다. 그러나 유유는 이렇게 말했다.
"나도 이를 생각해보았으나 선비족은 탐욕스러워 원대한 계책을 세우지 못하니 걱정할 게 없소"
유유의 예측대로 남연의 황제 모용초는 청야작전을 펼치자는 공손오루의 말을 씹어버렸다. 동진군은 대현산을 지나도 남연군의 공격을 받지 않았다. 유유는 임구 남쪽에서 모용초와 전투를 벌였고, 승부가 나지 않자 배후의 임구성을 점령했다. 임구성이 무너지자 남연군은 사기가 떨어져 격퇴되었다. 모용초는 남연의 수도인 광고로 달아났다. 동년 6월 유유가 광고의 외성을 함락시키자 모용초가 내성으로 도주했다. 이때 유유는 남연군에 회유책을 써 많은 남연 인사들의 항복을 받아냈다.
의희 6년(410년) 2월에는 광고의 내성을 함락시키고 청주를 수복했다. 이 때 남연의 동맹국이었던 후진의 문환제 요흥은 남연을 구원하려고 멀리서 사신을 보내 엄포를 놓았는데 부하들은 후진이 참전하면 불리할거라고 했지만 유유는 '''만약 요흥이 남연을 도우려고 했다면 즉시 출병했을 것이지 그렇게 1,000리 밖에서 말만 늘어놓지 않았을 것이오.'''라면서 계속 남연을 공격했다.
결국 남연을 멸하고 황제 모용초를 사로잡아 많은 보물 및 기물들과 함께 건강으로 옮겼으며 모용초를 건강에서 참수했다. 모용초는 일찍이 후진과 우호를 맺기 위해 문명의 상징인 악공들을 후진에 보냈다. 이게 아까워서 동진에게서 뺏으려고 동진을 공격한 것이 빌미가 되어 이렇게 비참하게 죽고 말았던 것이다.
서진이 멸망한지 약 100년만에 산동은 동진의 품으로 돌아오게 된다. 특히 유송 시대에도 산동은 화북에서 가장 오랫동안 남조의 영토로 존속했다.

2.5. 동진 평정


의희 6년(410년), 손은의 잔당 노순(盧循)과 서도복(徐道覆)이 거병하여 하무기를 전사시키고, 유의를 대패시켰다. 유유가 즉시 남하하여 건강에서 10만 명에 달하는 노순군과 대적했다. 혼란을 틈타 환현의 잔당 환겸이 형주에서 거병했으나 단도제(檀道濟)[17]와 유도규에게 토벌되었다. 12월 유유는 화공을 써 노순을 공격했다. 이때 유유 진영에서 대장기가 부러졌는데 군사들이 동요하자 유유는 태연했다.
"과거 환현을 공격할 때도 깃대가 부러졌는데 지금도 그러하니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
화공을 받은 노순과 서도복은 격파되었고, 모든 세력을 상실하며 제거되었다.
의희 8년(412년) 형주에 부임한 유의[18]는 유유에게 적대감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유유는 자신보다 군재만 뛰어났고 다른 분야에서는 자신이 유유보다 나았으면 나았지 떨어지지는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유유의 명망이 자신을 훨씬 능가하자 열등감이 생긴 것이다. 유유는 유의가 열폭을 해도 평소대로 대우해 주었다. 그러나 유의는 유유가 이럴수록 열폭질을 더 심하게 했다. 10월, 유의는 모반을 일으키려고 군사를 모았다. 소식을 들은 유유는 유의의 사촌인 유번과 유의와 친했던 사혼(謝混)[19]을 죽이고 왕진악(王鎭惡)[20]과 괴은에게 유의를 토벌하게 했다. 유의는 유번이 죽은 지 몰랐다. 따라서 왕진악은 형주의 수비대에게 자신이 이끄는 군대가 죽은 유번의 군대라 속이며 신속하게 강릉 일대를 통과할 수 있었다. 왕진악이 공격해오자 뒤늦게 유번이 죽은 줄 안 유의는 도주했고, 병이 도지자 자살했다.
곧이어 또 다른 군벌 제갈장민[21]이 반란을 일으키려다 결단하지 못하자 유유에게 모반이 누설되었다. 유유는 신속하게 건강에 진격하여 제갈장민을 제거했다. 이어 그 잔당을 격파했다.
의희 9년(413년) 7월, 을 정복하려고, 서양 태수 주령석을 익주 자사로 보냈다. 주령석이 유유가 보낸 계책에 따라 성도를 점령하자 할거 세력이었던 초종(譙縱)은 목을 매고 자살했다.[22]
의희 11년(415년)에 형주 군벌 사마휴지[23]의 아들 사마문사가 사람을 죽이자 유유가 사마휴지에게 사마문사를 처벌하게 했다. 그러나 사마휴지가 사마문사를 살려두자 유유는 사마휴지를 토벌하려고 형주를 향해 진격했다. 단도제와 주초석은 양양으로, 사위 서규지는 강하로 보냈는데 서규지가 패하고 전사했다. 마두에 주둔하던 유유는 격분하여 직접 군사를 이끌고 장강을 건넜다. 사마휴지는 절벽에 의지하여 진을 치고 있었는데 '''유유는 절벽에 칼을 박아 계단을 만들며 절벽을 올랐다.''' 유유가 절벽을 오르자 이를 생각조차 못한 사마휴지는 유유의 공세를 당해내지 못하고 후진으로 망명했다. 이로써 왕공 이후 생성된 동진의 모든 군벌이 없어졌다. 또한 사마휴지의 후진 망명은 유유의 북벌에 좋은 명분이 되었다.

2.6. 북벌


의희 12년(416년), 이렇게 하여 내실을 공고히 다진 유유는 왕진악, 단도제, 심전자 등과 함께 수륙 다섯 갈래로 나누어 후진을 공격했다.[24]
유유가 북벌하자 자국을 공격할 것을 염려한 북위의 명원제 탁발사는 장손숭에게 10만 명을 이끌고 북벌을 저지하게 했다. 최호는 유유를 공격하지 말자고 했으나 탁발사는 듣지 않았다. 유유는 북위의 기병을 막기 위해 군사 700명과 전차 100승으로 초승달 모양의 각월진을 구축했다. 유유는 한 전차에 병사 7명을 배치하고, 중간에 흰 깃발을 세웠다. 유유는 주초석에게 각 전차에 20명씩 오르게 한 뒤에 노, 방패, 징, 북 등을 매달게 했다. 그리고 전차 뒤에 창병을 배치했다. 장손숭이 기병 30,000기를 이끌며 진격했고 유유는 노를 발사했다. '''유유의 창병들은 돌격하였고 전차만 보이던 북위 기병들은 예상치 못한 유유의 노병이 사격하고 창병이 공격하자 격파되었다.''' 유유는 1,000명을 포로로 잡고 기주자사 아박간을 전사시켰다.
한편 왕진악과 단도제가 낙양으로 진격하자 요홍은 숙부 요소를 총사령관에 임명했다. 단도제는 요원, 석무휘, 조현, 요광 등을 차례로 격파하고 허창, 낙양 등을 수복했다. 요소는 단도제에게 격퇴되었고, 심임자는 요소가 보낸 요란, 요찬을 무찔렀다.
의희 13년(417년) 8월, 심전자는 고작 1,000명으로 수만명의 요홍군을 쳐부수고 10,000명을 전사시켰다. 유유는 왕진악, 단도제, 심전자와 합류하여 장안에 총공격을 가했다. 왕진악은 선봉에 서서 후진군을 쳐부수고 장안을 함락시켰다. 유유의 동진군이 100년 동안 타국에게 속해 있던 장안을 동진의 영토로 탈환한 것이다. 유유는 황제 요홍[25]을 생포하고 건강으로 압송하여 죽였다. 이때 유유는 후진을 멸하고 요흥의 조카딸을 얻어 그녀를 총애하느라 정사를 돌보지 못했는데 이에 태위주부 사회가 관언을 올리자 유유는 즉시 그녀를 내보냈다.
이렇게 영토 회복과 옛 수도의 수복 등을 이루어 낸 유유는 구석상국, 송(宋)공의 작위를 모두 거절하고, 황족 사마회지를 낙양에 보내 파괴되었던 서진 황릉들[26]을 수리하고 제사를 지내게 해서 정치적인 식견을 보여주었다. 유유는 황하 이남 지역을 거의 대부분 수복하고, 동진 역사상 최대의 영토를 개척했다. 이로써 동진은 멸망하기 2년 전에 남조 역사상 최대의 영토를 보유하게 되었다. 유유는 이제 남은 서량 지역과 황하 이북을 점령해서 천하 통일을 완성하려고 장안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2.7. 북벌의 실패


우선 유유는 서량부터 점령하려고 했는데 마침 내정을 맡긴 유목지(劉穆之)가 급사하고 말았다.[27] 유목지는 유유를 도와 안으로는 정사를 관장하고, 밖으로는 보급을 원활하게 하여 일을 지연시키지 않았던 터라, 그 죽음으로 자신의 정권 장악력이 약화될까봐 유유는 불안해 했다. 이에 유유는 더 이상의 북벌을 하지 못하고, 장안에서 대군을 철수시켜 건강으로 회군하려고 했다. 이 때 장안의 부로들이 울며, 장안에 있는 전한 시대 황릉과 동진의 성은을 이야기하며 떠나지 말라고 말렸다.[28] 그래도 유유는 좋은 말로 이들을 달래고 자기의 차남 유의진을 총사령관으로 삼고 왕진악과 심전자로 하여금 보좌하게 한 다음 일부 수비군만 남기고 자신은 나머지 대군을 이끌어 그대로 철수했다.
의희 14년(418년), 초반부터 수비군 사이에 내분이 생겼는데 이것은 원래 유유가 단결이 되어 있으면 혹시 반란을 꾀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사이가 나쁜 왕진악과 심전자를 배치하여 일부러 인선을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이 두 사람 사이의 갈등을 조정하고, 통제해야 할 총사령관 유의진이 '''겨우 12살'''에 불과한 초딩이었다는 것이다. 왕진악을 싫어하던 심전자가 왕진악을 죽이고, 그 심전자를 왕진악의 친척 왕수가 죽이고, 왕수는 유의진에게 죽임을 당하는 한심한 사태가 일어난다.[29] 거기다 유의진은 개초딩을 넘어 막장이라 함부로 약탈하고 가렴주구를 일삼았으며 수하들이나 백성들을 죽이는 등 온갖 악행을 일삼았다. 이에 동진의 군대가 장안을 약탈하자 고토를 수복해서 좋아하던 관중 백성들은 반발하기 시작했다.
결국 11월, 이 때를 노리고 있던 북하혁련발발계획대로 일이 돌아간다고 생각하고, 장안에 쳐들어와 장안과 관중 지방을 모두 점령해 버렸다. 결국 장안 부로들의 불길함이 맞아 떨어졌던 것이다. 이 때 유의진의 수비대는 완전히 박살났으며, 유의진은 장작더미에 숨어 있다가 주령석의 등에 업혀 간신히 탈출해서 건강으로 돌아왔고, 유유는 후회의 눈물을 흘려야 했다. 포악한 혁련발발은 생포한 수뇌들과 병사들을 시체들과 함께 모두 참수하여 대를 쌓고 '''촉루대'''라고 이름붙였다. 이때 주령석, 주초석 형제 및 부홍지, 괴은 등의 많은 장수들이 전사했다.

2.8. 마침내 황제가 되다


이 쯤되자 유유는 후회와 더불어 공포가 엄습했다. 지금까지는 군사적 승리가 그의 권력을 강화시켰지만 장안에서의 대패로 권력이 흔들리게 된 것이었다. 이에 유유는 이전에 표면상 거부했던 구석, 상국, 송공 임명을 단번에 받아들였고 ,12월에는 그대로 송왕에 임명되었다. 이렇게 성망이 날이 갈수록 높아지고 점점 권력이 불안해지자 스스로 황제가 되고 싶은 욕망이 커져갔다. 그래서 유유는 '''창명(昌明) 이후에는 두 가 있다'''라는 참언을 날조했는데 여기서 이 참언을 해석하면 창명은 동진 효무제 사마요의 다. 그리고 그의 두 황제는 그의 뒤를 이은 두 아들 안제(사마덕종)와 공제(사마덕문)을 말하는 것으로 한마디로 말해 황제를 갈아치우겠다는 이야기였던 것이다. 유유는 백치였던 사마덕종을 그의 아우 낭야왕 사마덕문이 워낙 열심히 보좌해서 기회를 잡지 못하다가 마침 사마덕문이 병으로 앓아 눕자 거사를 했다. 그는 중서시랑 왕소지를 시켜 사마덕종을 건강 동당에서 살해하고, 그의 아우 사마덕문을 황제로 세웠는데 그가 바로 동진의 마지막 황제인 공제였다.
원래 서진 혜제 사마충보다 훨씬 심각한 정신박약이었던 사마덕종은 '''추위와 더위를 구별하지 못했으며 식사와 세면 등 모든 생활을 스스로 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사마덕문은 형인 사마덕종을 정성스럽게 모셔서 좋은 평판을 얻고 있었다. 대부분 그랬듯이 마지막 황제는 도리어 제법 자질이 있어서 개고생을 하는 것이다.
원희 2년(420년) 정월, 유유는 황제가 되고 싶었지만 대놓고 말하기는 그랬는지 주연을 열어 여러 대신들을 청하며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그는 술이 돌자 '''환현이 제위를 찬탈한 후 동진의 운명은 이미 기울었소. 나는 제일 먼저 정의를 세워 황실을 부흥시키고, 남정북벌하며 사해를 평정하여 공업을 빛냈으며 마침내 구석을 하사받았소이다. 이제 황혼기에 접어든 나는 이만큼 높이 올라선 것에 만족하고, 세상 만사를 위해 이 자리에 오래 머물러 있을 수 없으니 이제 관직과 군대를 반납하고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이오.'''라고 말했다. 대신들은 그의 진심을 파악하지 못하고, 의아해하거나 퇴직을 말렸지만 중서령 부량은 퇴직과 그 이후의 혼란을 미끼로 황제 자리를 받겠다는 그의 깊은 뜻을 깨닫고 6월 사마덕문에게 유유의 뜻을 알렸다.
사마덕문은 '''진씨(사마씨)의 천하는 이미 환현 때 멸망했지만 유공(劉公)에 의하여 20여년이나 연장되었다. 그래서 짐은 오늘의 일을 달갑게 여기노라'''라고 말하며 흔쾌히 붉은 종이에다 양위 조서를 썼다. 유유는 선양받은 후 남교에서 즉위하여 국호를 송으로 하고 수도를 건강에 정했다. 사마덕문은 영릉왕에 봉해져 영릉에서 거주했는데 유유는 후환을 없애기 위해 낭야낭중령 장위에게 짐새주 한 단지를 주면서 사마덕문을 독살하게 했다. 그러나 장위는 오히려 불충의 행위라 떳떳하지 않다면서 자기가 독주를 마시고 죽었다. 유유는 사마덕문을 감시하며 그에게서 사내 아이가 태어나면 사람을 보내어 죽였는데 사마덕문은 이에 불안하여 항상 황후였던 저씨[30]와 한 곳에 있으면서 침상 앞에서 직접 음식을 만들어 먹고 모든 비용은 저씨가 부담했다. 그래서 유유는 손을 쓰지 못하다가 이듬해 9월, 저씨의 오빠 저숙도와 저담지 형제를 보내 저씨를 만나게 했다. 저씨가 그들을 만나러 별실로 간 사이 유유가 보낸 병사들이 담장을 넘어 들어가 독약을 먹여 죽이려고 했다. 사마덕문은 "'''불교에서는 자살하는 사람은 윤회해도 사람의 몸으로 태어날 수 없다'''"며 마시지 않자 결국 이불을 덮어서 질식시켜 죽였다. 그래도 위험 인물이라 부득이하게 죽인 거지 죄인으로 죽이거나 한 건 아니었기 때문에 특별한 원한은 없었던 유유는 죽은 사마덕문을 황제의 예로 대하여 장례를 치르도록 지시했고, 11월, 그를 충평릉에 안장할 때 유유는 몸소 백관을 이끌고 장례 행렬을 바라봤다.

2.9. 사망과 후일담


유유는 부지런하게 내정을 살폈지만 영초 3년(422년) 3월, 병을 얻어 5월, 건강 서전에서 사망했다. 그리고 이렇게 '''선양 후 옛 황제 및 그 일족을 몰살하는 법칙이 유유 때문에 만들어졌으며 그의 자손들이 그 대가를 뼈져리게 체험하게 된다.'''[31] 유유는 죽기 전에 나라를 걱정했는데 그의 나이는 59세였으니 이른 죽음은 아니었으나 자식들의 나이가 어렸다.[32]
장남 유의부가 겨우 만 16세가 차지 않았고, 문제아였던 차남 유의진의 나이도 그와 비슷했으며, 3남인 유의륭(후에 태조 문황제)은 15세, 막내 아들이자 7남 유의계는 6세였다. 그만큼 아들들이 어렸으며 출신이 미천해서 친척도 별로 없었고, 처음부터 충성을 다했던 봉신도 없었다. 그나마 지금까지 그에게 충성을 다하던 자들은 모두 자기가 길들이거나 찾아낸 인물들이었기에 걱정이 앞섰다. 즉, 자신이 살아 있을 때는 충성을 다해도 자신이 죽으면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사실 공제 사마덕문을 굳이 죽인 것도 그가 능력이 있어서이기도 했지만 그가 살아 있을 경우 자칫 제위를 되찾겠다며[33] 봉기라도 하면 자신에게 충성하는 자들이 배반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갖고 있었던 것도 크다.
그는 건강에서 가까운 자신의 고향 경구[34]와 장강 중류의 요충지 형주를 황족 유씨 이외에는 수장으로 삼지 않게 하고 반드시 지키라는 유언을 남기며 죽었다. 이 조치는 황족들이 군권을 움켜쥐고 황제를 보위하라는 뜻에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래봤자 막내 아들 유의계를 빼고는 다 친척의 손에 비명에 갔으며, 그나마 유의계도 술을 너무 마셔서 술독으로 죽었다. 유유는 7월에 초녕릉에 안장되었으며 후사였던 유의부는 한문(寒門) 출신의 서희지(徐羲之), 부량(傳亮), 단도제(檀道濟), 사회(謝晦)에게 맡겼는데 이들은 결국 머지않아 유의부를 몰아내고 유의륭을 즉위시킨다.

3. 평가


'''"모용수는 아버지와 형(모용황과 모용각)의 명성을 등에 업고 과거의 공업을 회복했으나 유유는 미천한 가문에서 일어나 홀로 대업을 이루었으니 유유가 더 뛰어납니다."'''

- '''최호(崔浩, 북위의 대신)''', 북위의 탁발사가 유유와 모용수의 능력을 논하자 대신 최호가 내린 평가[35]

'''"유유의 공적은 조조를 넘어서나 용인에서는 조조만 못하다."'''

'''"조적, 유익, 환온, 사안의 백 년 경영도 유유의 공적에 미치지 못한다."'''

- '''왕부지(王夫之, 명나라 말기의 학자)'''

'''근 370년에 이르는 위진남북조시대 역사상 한족 출신으로 가장 큰 군공을 세운 희대의 명장'''으로, 위진남북조시대에 걸쳐 한족 출신 가운데 군사적 재능이라는 측면에서 최고로 여겨지는 인물들은 조조, 환온, 유유, 진경지 정도가 있다. 유유는 이 중에서도 백미로 평가된다.
유유는 산동과 하남, 촉, 그리고 일시적이지만 관중 일대까지 수복했다. 즉, 낙양장안, 두 옛 수도와 청주 일대까지 점령한 것이다. 동진환온소량진경지낙양까지 수복했고, 장안까지는 장악하지 못했다. 게다가 '''남조 역사상 유일하게 산동을 완전히 점령했다.''' 후대의 평에 따르면 그는 통솔력이 있고, 통찰력이 있어 앞을 멀리 내다보는 안목이 있었으며, 용감하고 과단성, 군사적 재능, 정치적인 감각까지 완벽하게 갖추고 있었다.
검소하여 옷차림이 소박했고, 유희와 연회를 거의 열지 않았으며 궁녀들을 대부분 내보내 수가 적고 축재도 하지 않았다. 또 영주에서 호박으로 만든 베개를 진상했는데 광택과 색깔이 아름다워 황금 100냥을 호가했다. 그러나 유유는 이걸 부수고 가루로 만들어 장병들의 부상을 치료하는데 쓰게 했다.
유유는 원래 몸에 열이 많았고, 예전에 손은 토벌전에서 칼에 맞은 상처가 있어 노년이 된후 늘 몸을 차게 하는 약이 있어야 했다. 그래서 누군가 석상을 진상했는데 효과가 아주 좋았지만 비용이 많이 들었다는 이유로 부수게 했다. 광주에서 진상한 정교하고 아름다운 는 되돌려주게 하고 그 담당 관원에게 다시는 이런 걸 바치지 못하게 하라고 지시했다.
유유는 자기가 경구와 단양에서 농사짓던 시절에 사용하던 쟁기같은 농기구와 등불 등을 보존하여 황궁에 작은 박물관을 만들어 후손들에게 창업의 어려움을 일깨우려고 했다.
하지만 그렇게 고민하면서 어떻게든 자신의 유지가 자손들에게 잘 전해지도록 애썼음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일찍, 무언가 확고한 기반을 마련하기도 전에 숨진 탓에 그의 안배는 유송의 앞날에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결국 유유 본인은 일생을 아주 바쁘게 살고 열심히 살았으며 많은 업적을 남겼다. 손문, 황흥과 신해혁명 3존 중 하나였던 장병린은 악비와 함께 그를 가장 숭배하고 존경하는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둘 다 남방의 병사를 이끌고 북방의 이적(오랑캐)을 격파시켰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그의 자식농사는 한 마디로 완전 시망 직전이었다. 본인이 아무리 위대해도 자식 농사의 실패가 어렵게 이룩한 창업을 하루 아침에 망친 것이다. 어찌보면 세습제의 한계를 그 누구보다 여실히 보여준 인물. 사실 이런 평가는 그의 아들 송문제 유의륭에게 더 적합한 얘기일 수도 있다. 유유는 적어도 유의륭이라는 좋은 왕재를 가진 아들을 두기라도 했지 유의륭의 아들복은 아버지보다 더 없었으니까(...)
어쨌거나 유송 왕조의 명운을 따져봤을 때 그 왕조에서 제대로 된 군주가 이들 부자들 뿐이라는 점에선 참 지지리도 운 없는 부자라고 할 수 있다. 이들 이후에는 전란의 극치인 위진남북조 시대임을 감안하더라도 '''노답 근친상간 미친놈부터 살인이 목적 그 자체인 사이코패스 살인마까지 출몰하는 등 집안이 무슨 저주를 받았나 싶을 정도의 막장들이 출몰했다(...)'''
그렇지만 유유의 공적은 확실히 유효했다. 유유는 북벌을 통해 남조북조와 맞설 힘을 갖추게 하였고[36], 지방군벌들을 정리하여 남조 내부를 안정시켰다. 비록 송 말기와 제나라가 들어서며 가끔씩 내전이 일어나기는 했지만 동진 말기처럼 혼란스러운 때는 양 말기밖에 없었는데, 이는 유유가 동진을 평정하고(417년) 133년이 지나서야 등장했다. 유유가 동진의 군벌을 정리한 덕분에 유의륭이나 소연 같은 명군들이 남조를 부강시킬 환경이 조성된 것이다.
무엇보다 유유의 군사적 재능은 탁월했다. 동진의 모든 혼란을 수습하고, 북벌을 통해 남조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군사적 성과를 얻었다. 유의진이나 서규지 같은 휘하 지휘관의 패전을 제외하면 유유군은 늘 승리했다. 유유는 적의 의도를 간파했고, 이에 알맞는 전략을 구사하여 항상 승리를 거두었다. 유유가 장안을 유의진에게 맡긴 것만을 제외하면 전략적인 실수도 없었다. 북위군을 각월진으로 격파한 것이나 손은군과의 회전을 보면 임기응변이나 전술적 능력이 매우 훌륭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서진 혜제 사마충보다 더 지적장애자였던 사마덕종을 죽인 것 때문에 후세에 혹평을 듣기도 하지만, 유유 입장에서도 살려주는 것이 더 이득임에도 부득이하게 죽일 수밖에 없던 것이 '''자기가 살아있는지조차도 몰랐던 자에게 덥석 황위를 받으면 누가 봐도 찬탈이라는 티가 확 나니까 말이다'''. 아무리 선양이 정치적 쇼라고 해도 최소한의 틀은 갖춰야 효과를 발휘하는데 황제라는 작자가 이 모양이면 어쩔 수가 없었다. 권력을 쥔 이상 놓치면 잘해봐야 개털이 되어 실각이나 하면 천행이고 못하면 본인은 물론 멸족이라 어쩔수없이 제위를 지켜야 하기 때문.
그리고 사마덕문을 세운 후 폐위하고 그 일족을 죽인 번거로운 절차를 거친 것도 형이 후사없이 죽으면 친동생이 제위를 이어받는 것은 동서고금 막론하고 지켜졌던 원칙이었기 때문에 아무리 권력자라도 이건 어쩔 수 없었고, 일족을 죽인 것도 기반이 약했던 유유 일가의 성격상 살려두었다간 큰 위협이 될 것이 뻔했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취해진 조치였다.
특이 사항으로 유유는 유비처럼 한왕실 후손으로 어릴적 가난하게 살다가 자수성가 했다는 점이 있다. 물론 유비의 후손은 아니지만 유비와 같은 한황실의 종친인건 맞다. 유비는 전한 경제의 아들인 중산정왕의 후손이었고, 유유는 한고조의 동생인 초왕 유교의 후손이었다. 굳이 얘기하자면 유비와 멀고 먼 친척인, 같은 한나라 황실의 후손이 사마씨를 쓰러뜨린 것이다. 또 유연과는 다른 것이 유연은 정사에서도 흉노족인 반면에 유유는 족보나 당시 사람들도 한황실의 종친인 것을 인정했다. 더구나 원래 아닌데 자칭할 거면, 한고조 시대에서 600년이 지났고 후손이 수도 없이 많았는데 굳이 (엄밀히 따지면 조상에 임금이 한 명도 없어서 왕손(王孫)이라고 할 수도 없는) 한고조의 동생의 후손을 자칭할 이유가 없다.
당시 중국은 현대와 달리 족보의 조작이 굉장히 어려운 시기였으며 특히 황실의 족보는 더 세심히 관리했다. 그 예로 장안의 사람들이 유유가 떠나려 하자 전한의 무덤들, 즉 '당신 조상의 묘가 여기 있는데 어디로 가시려고 합니까' 라고 말렸고, 유유 역시 '잘 압니다'하고는 이들을 달랬다. 후에 장안이 점령되자 후회를 했다. 그 역시 유비와 같이 자신의 일족에게는 후했는데 어느날 자신과 같은 유씨 장군이 유유에게 공이 밀리자 대놓고 면전에서 그를 모욕했는데도 그는 평소대로 그를 잘 대접했다. 이 때문에 그가 세운 유송촉한과 한의 계승자 대접을 받게 된다.
또한 남조를 쇄신하고 남조의 문벌귀족이 몰락하게 되는 불씨를 남겨놓은 인물이다. 남조는 황제와 귀족들의 대립이 극심했는데, 남조 최고 귀족가문인 왕(王)씨, 사(謝)씨, 원(袁)씨, 소(蕭)씨는 황제만 아닐뿐 사회적으로는 황제 이상의 권력을 지닌 가문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황권을 강화시키기 위해 유유는 실질적인 업무를 7품 이하의 관료들이 맡도록 하였고[37], 이후의 황제들도 귀족들의 특권은 인정해줄지언정 유유의 정책을 계속 이어나갔다.[38]
그리고 133년쯤 지나 양무제 말기 후경의 대란이 일어났을 때, 난을 진압해야할 고위관료들은 대응조차 제대로 하지 못해 속수무책으로 당하게 되는 결과를 맞이한다. 이 난리통을 어떻게든 진패선이 진압하고, 남조의 마지막 정권인 진을 세웠지만 이때의 피해를 남조는 다시 극복하지 못했고, 결국 수나라의 주도로 천하통일이 이루어지게 된다. 정작 그 수나라는 수문제의 아주 훌륭한 치세를, 다음 황제인 수양제가 대차게 말아먹은 덕분에 수양제의 이종사촌 형제인 이연에게 찬탈당하고, 당나라에 와서야 완전히 위진남북조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된다.

4. 둘러보기(계보)


'''유송의 역대 황제'''
동진 15대 공황제 사마덕문

'''초대 고조 무황제 유유'''

2대 소황제 유의부




[1] 자는 현종(顯宗)이었으며 효목황제로 추존된 후 능호가 흥녕릉(興寧陵)으로 정해졌다.[2] 효목황후로 추존[3] 유유는 아버지 유교가 소문수(蕭文壽)와 재혼한 뒤 이복 남동생 두 명이 생겼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면 외아들은 아니다. 이복 동생들의 이름은 유도린(劉道鄰), 유도규(劉道規)로 각각 작위는 장사경왕, 임천열무왕이었다. 유도린은 6남이 있었으며 유도규는 자손이 없었다.[4] 송서를 따른 것으로, 유교의 넷째아들 홍의후 유부의 자손이다. 위서에서는 항우의 일족으로 전한에 항복해 사성을 받은 유씨의 자손으로, 즉 본씨 유씨가 아닌 항씨로 서술한다.[5] 전한 시절 초나라의 수도였다.[6] 동진 정권이 성립되고 왕씨, 사씨 등 북방 명문들이 권력을 장악하는 시점에 그 대열에 끼지 못한 미천한 집안을 '한문(寒門)'이라고 부른다.[7] 어린데다 심각하게 바보였던 안제 사마덕종의 권위는 나락에 떨어졌고, 숙부 사마도자가 모든 권한을 가져갔으며, 각지의 군벌들은 사실상 독립하여 서로 다투고, 종교계의 우두머리 손은이 반란을 일으키니 나라 꼴이 말이 아니었다. 훗날 영웅(유비, 조조)에게 평정되어 새 왕조가 개막되는 것까지 마치 후한 말기와 비슷한 상황이었다.[8] 왕공은 손은의 난이 일어나기 전에 사망했고, 유뢰지는 사마도자 편으로 돌아섰다. 은중감은 당시 자신에게 속한 환현(桓玄)과 양전기(楊佺期)를 믿지 못하여 거병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9] 당시 사마도자와 사마원현이 통제할 수 있던 지역은 수도 건강과 그 주변이 전부였고, 경구는 유뢰지가, 형주 일대는 은중감, 양전기, 환현이 장악했다. 회계에서는 손은이 웅거하였으며, 사천 지방은 익주 자사 모거가 반독립적인 세력을 형성했다.[10] 이 때 유뢰지의 참군 유습은 유뢰지가 연주 자사 왕공, 회계왕 사마도자(동진 효무제 사마요의 친동생)를 배신하고 이번에는 환현까지 세 번이나 배신하면 누가 따를거냐고 따진 뒤 다른 막료들과 떠났다.[11] 황보부는 죽으면서 유유에게 가족을 부탁하였고, 유유는 약속을 지켜 황보부의 가족을 보호해주었다.[12] 군인들에겐 내란과 외부 전쟁이 출세의 길이었다. 일명 '출세의 사다리' 코스를 훌륭하게 거친 셈이다.[13] 이때부터 유능한 정치가 유목지가 동진의 내정을 담당하게 된다.[14] 단 일시적인 통합이었다. 후에 유의와 사마휴지는 형주에서 반란을 일으킨다.[15] 당시 후진은 관중과 하남을 영토로 가지고 있었으며 북량, 남량, 남연은 후진의 속국이었다. 즉, 황하 이남과 장강 이북은 사실상 후진의 세력권이었다.[16] 요흥은 아마 유유를 두려워한 것 같다. 환현이 건강을 장악하자 요흥은 동진에서 망명해 온 원건지(袁虔之)에게 환현의 역량을 물은 바 있었다. 원건지는 이에 환현은 무능한 위인이라고 디스했다. 그리고 곧 망해버릴 것이라는 저주는 덤. 아무튼 요흥은 동진이 혼란에 빠졌을 때조차 동진의 북벌을 경계했는데 유유가 동진의 혼란을 어느 정도 수습하니 세력이 강해진 동진을 두려워한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바보가 아닌 이상 순순히 유유의 요구를 들어 땅을 내줄 이유가 없다.[17] 유유 휘하에서 활약한 개국 공신이며 유송 시대에도 북위를 막아내고 36계를 정립한 명장[18] 유유와 함께 환현을 토벌한 공신이다.[19] 명재상 사안의 손자이자 손은에게 패사한 사염의 아들. 그리고 유유의 측근 사회의 7촌이다.[20] 유유 휘하에서 가장 큰 공적을 세운 명장이자 전진의 명재상 왕맹의 손자다.[21] 유유, 유의와 같이 환현을 토벌한 인물이다.[22] 원래 명성이 없던 주령석을 유유가 초종 토벌에 보내려고 하자 모두가 반대했다. 그러나 유유는 강행시켰고 주령석은 과연 이를 해냈다. 그만큼 인재를 보는 안목이 있었던 것이다.[23] 원래 왕공, 은중감, 환현에 적대했던 군벌로 환현에게 패한적이 있다.[24] 왕진악은 부견의 명참모였던 왕맹의 손자였다. 부견이 요장에게 참살당하자 동진으로 망명했는데 할아버지 왕맹을 알아 준 부견을 죽인 요장이 세운 후진에게 이를 갈고 있었다. 왕진악은 요장이 세운 후진을 멸하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겠다는 각오를 하고 진출했으므로 아주 성과가 좋았다. 결국 후진을 멸하고 요장의 손자 요홍의 목을 베어 원수를 갚았다.[25] 후진의 시조 요장의 손자이자 요흥의 아들.[26] 서진이 멸망할 때 유총, 유요, 석륵, 왕미 등에게 도굴 당하고 파괴되었다. 그 후에도 폐허가 되어 훼손이 심각했던 것이다.[27] 404년부터 14년을 국정을 다스렸다. 유목지는 근로하여 사마도자 부자와 환현이 망친 재정을 복구하고, 안제 사마덕종을 보좌했으나 유유가 구석을 받을려고 뜸을 떠보자 번민하고 근심하다 병사했다.[28] 이 때 부로들이 전한 시대 황릉을 언급한 이유는 유유가 일단 표면상 전한의 초원왕 유교의 자손이었기 때문이었다. 즉, 조상의 무덤이 여기 있으니 떠나지 말라는 것이었다.[29] 유유 휘하에서 가장 두각을 드러내던 명장 왕진악은 이렇게 허무하게 죽었다.[30] 이름은 저영거[31] 이것은 약 500년 후인 북송 태조 조광윤공제 시종훈에게 선양을 받았지만 신의를 지켜야 한다는 이유로 살려주는 한편 시씨 일족을 우대까지 하게 되면서 선양이란 명목하의 이 잔인한 살인극은 사라지게 된다.[32] 유유가 송나라 역대 황제 중 가장 오래 살았으며 서진과 동진, 제, 진나라의 모든 군주 중에서도 유유보다 오래 산 사람이 없다. 유유는 당시의 관점으로 봤을 때 장수한 것이다.[33] 상식적으로 누가 봐도 강제적으로 이뤄진 선양이고 미천한 가문 출신 때문에 유유의 정치적인 세력 기반은 조비나 사마염보다 훨씬 떨어졌으니, 사마덕문이 무효를 선언하고 봉기하면 동진을 지지할 사람은 많았다.[34] 삼국지에서 익숙한 광릉 맞은편으로 전장 시 일대로 장강 하류의 요충지[35] 전에 유유에게 패한 것도 있어 탁발사는 유유 생전에 유송의 땅 1평도 건드리지 않았다.[36] 당시 중국 인구 대부분이 하남과 하북일대에 살고 있었다. 학계는 위진 남북조 시기강북의 인구를 2000~3000만으로 잡는데 강남 인구는 500~1000만으로 추정하고 있다. 유유의 북벌을 계기로 남조는 일시적이나마 북조를 넘어선 국력을 갖출수 있게 됐다.[37] 남조의 귀족층들은 구품관인법을 통해 7품이 아닌 6품으로 관료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고, 이렇게 안하는 귀족을 찾기가 어려웠다.[38] 시간이 지나며 문벌귀족들의 영향력이 점차 줄어들었다. 남조에서 수십년 주기로 벌어진 내전과 지배층 교체는 이를 더욱 가속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