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악(송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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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중국 오대십국시대, 북송의 무관. 북송의 태조 조광윤의 황후인 효장황후 송씨의 부친이다.
2. 생애
2.1. 초기 생애
송악은 926년 후당 하남부 낙양현에서 송요(宋瑤)의 손자이자 송정호(宋廷浩)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초명은 송연악(宋延渥)이었다. 송정호는 후당의 장종 이존욱의 딸인 의령공주(義寧公主)와 결혼하였기에, 송악은 이존욱의 외손자가 된다.
송정호는 후당에서 석주(石州), 원주(原州), 방주(房州)의 자사를 역임하였고, 후진에서는 사수관사가 되었는데, 장종빈(張從賓)이 반란을 일으키자 장종빈의 반란을 진압하다가 전사하였다. 송악은 부친 사후 전직(殿直)으로 보임되었고, 공봉관까지 승진하였다. 당시 후진의 황제였던 석경당이 송악의 어머니였던 의령공주 집안을 우대하였기에, 송악은 서경에서 어머니를 모시며 살았다.
석경당의 측근이었던 유지원은 장남인 유승훈을 낙양으로 보내 송연악과 자신의 딸인 영녕공주의 결혼을 청한다. 유지원의 부탁으로 송연악은 영녕공주와 정식으로 결혼한다. 송연악은 후진에서 어사대부, 검교우산기상시, 은청광록대부, 북경 황성사 등의 직위를 역임하였다.
2.2. 후한 시기
후한이 건국되고 송연악은 우금오위대장군(右金吾衛大將軍), 부마도위(駙馬都尉)가 되었다. 부마도위가 된 것은 전술하였듯, 유지원의 딸인 영녕공주와 결혼하였기 때문이다. 유빈이 즉위하고, 송악은 소무군(昭武軍) 절도사로 제수되었으며 활주(滑州) 절도사로 전임되었다.
후한 말엽에 곽위가 거병하자, 송연악은 문을 열고 곽위와 접견하여, 곽위가 매우 감사해하였다. 송악은 이때부터 후주에 충성하게 된다.
2.3. 후주 시기
송연악은 곽위의 공신이 되어 후주 시기에 추성봉의익대공신(推誠奉義翊戴功臣)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광순 연간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상기를 채운 송악은 좌감문위상장군(左監門衛上將軍)으로 제수되었다.
곽위가 죽고, 시영이 세종으로 즉위한 뒤, 송연악은 남당 정벌에 참가하여 수주(壽州) 4면순검이 되어 남당 정벌을 맡았고 우신무통군(右神武統軍), 행영우상도배진사(行營右廂都排陣使), 여주(廬州) 성하부부서가 되었다. 2차 남당 정벌에서는 남당이 수군을 이끌고 출진하여 동포주(東㳍洲)에서 후주의 진군로를 차단하려고 하였다. 이에 송연악이 수군을 거느리고 모용연조가 육군을 거느려 수륙 합동으로 남당의 공격을 물리친다. 이때의 정벌에 승리한 후주는 장강을 경계로 남당과 접하게 되었고, 공적을 세운 송연악은 의성군 절도사로 임명되었다가, 무승군 절도사로 임명되었다.
959년 세종이 세상을 떠나고 공제가 즉위하자,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가 더해졌다.
2.4. 북송 시기
960년 세종의 신임을 받은 조광윤이 공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북송을 건국하고 황제로 즉위하니 이가 북송의 초대황제인 태조이다. 송연악은 태조에 의해 검교태사로 임명되고, 장강을 순무하는 임무를 계속해서 담당한다. 이때 북송과 조광윤에 불만을 품은 후주의 구신 이중진이 반란을 일으키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송연악은 해릉에 주둔하여 이중진의 움직임을 감시하였다. 그리고 과연 이중진이 반란을 일으키자 송연악은 행영배진사가 되었고, 이중진의 반란이 진압된 뒤에는 보신군 절도사가 되었으며, 967년에는 충무군 절도사로 전임되었다.
968년 태조가 3번째 황후로 송연악의 딸을 황후로 들였다. 태조의 장인이 된 송연악은 이때부터 이름을 송악으로 고쳤고, 970년에 빈주(邠州) 정난군(靜難軍) 절도사로 전임되었다.
태종이 즉위한 뒤 송악은 동평장사가 더해졌으며, 동주(同州) 정국군(定國軍) 절도사가 되었다. 979년에는 북한 정벌과 유주 정벌에 참가하였으며, 980년에는 지창주를 역임하고, 형국공으로 책봉되었다. 984년에는 다시 우위상장군이 되었고, 북벌에 참가한 뒤에 지패주(知覇州)를 지냈다. 송악은 989년에 사망하여 시중으로 추증되었고, 장혜(莊惠)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3. 기타
송악은 힘이 남달랐는데, 세종이 진영에 있을 때, 호랑이가 나타나자, 송악이 활을 쏴서 호랑이를 한번에 쏴죽인 일화가 있었다.